소설리스트

335화 (335/501)

* * *

“나디아가 한 방 먹였네요.”

세희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평소에는 한 대도 못 때렸는데…….”

“지윤이가 간격에 둔감해진 거지.”

강한 강기를 얻어서 위기감을 잃었다. 그런 상황에서 발휘되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능력까지도.

상호는 경기장에서 내려오는 지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강해질수록 강해지기 힘들어진다. 세희야. 잊지 마.”

“네.”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진할게요.”

“그래.”

상호는 세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씩 웃고는, 다시 다른 경기들에 집중했다. 한쪽 다리엔 세희를, 한쪽 다리엔 배터리가 다 되어 날 수 없게 된 미래를 앉힌 채.

* * *

시간이 흘러 1학년 8강.

아리는 맞은편에서 올라오는 가은을 바라보았다.

‘셋 남았구나.’

아리 자신, 가은, 그리고 이서. 8강에 올라온 상호의 반은 그렇게 셋.

아리는 가은과는 그리 말을 많이 해보지 않았다. 표정이 무서워서. 소심한 성격의 그녀로서는 말을 붙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기실 상호의 반 1학년 전원이 가은을 무서워했다. 딱 한 명의 예외는 담임의 말도 씹곤 하는 이서.

하여튼 그래서 아리는 가은에게 건넬 말이 많지 않았고, 손을 살짝 들어서 전투를 개시하겠다는 뜻을 전할 뿐이었다.

그런데 가은이 먼저 말을 걸었다.

“아리.”

“응?”

예상하지 못한 부름이라, 아리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왜, 왜?”

“꼬리는 맞으면 아픈가?”

“응?”

“봐줄 필요 없지?”

가은이 검을 빙글 돌렸다.

꼭 자신의 승리는 확정이라는 듯한 말투, 내용. 아리는 그 말을 듣고 살짝 욱하는 마음이 일었다.

가은의 실력이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알지만, 그래봤자 같은 1학년인데. 꼭 머리꼭대기보다도 한참 위에 올라 있는 것처럼 말하니.

아리의 손에 마나가 모여들었다.

“없어.”

“다행이네.”

가은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리는 모아놨던 마나로 급히 마법을 펼쳤다. 허리에서 시작된 푸른 번개의 고리가 수평으로 둥글게 퍼져나갔다.

오른쪽, 살짝 뒤에서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구나!’

번개가 그곳으로 날아갔다.

총알보다 빠른 번개의 마법. 조준이 정확하다면 피할 수 없다. 아리는 가은의 발소리와 번개의 소리가 겹치는 것을 듣고는 명중을 확신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돌릴 시간도 아껴가며 날린 마법.

그런데.

‘……어?’

가은의 칼이 날아들고 있었다.

‘윽……!’

간신히 순간이동으로 피할 수 있었다.

조준을 실패했던 걸까. 아리는 다시 차분하게 번개를 날렸다. 이번에는 정확히 가은의 몸통을 향해서.

그런데도 가은은 번개를 또 피해내고는, 아리를 향해 검기를 날렸다.

‘어떻게…….’

번개 마법의 전조가 있긴 하다. 솜털이 쭈뼛 솟는 느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번개를 피할 수 없을 텐데.

아리의 손이 기묘하게 구부러지며 인을 맺었다. 각각의 손가락은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지면을 향하고 있었다.

지정한 위치에 번개가 내리쳤다.

꽈르릉

가은은 귀신같이 번개를 피해냈다.

귀신같이. 번개가 어디 내리칠지 이미 알고 있는 귀신같이. 아리가 어디를 가리킬지 이미 알고 있었던 귀신같이.

귀신처럼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으로, 아리를 노려보며 달려들었다.

아리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어떻…….’

생각을 마치기도 전.

가은의 검이 아리의 몸을 때렸다.

332. 어려운 문제

“아…….”

미래가 한숨을 폭 쉬었다.

“아리가 졌네요.”

“가은이가 좀 세긴 하지.”

상호는 입맛을 다시며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경기장 한가운데에는 아리가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단검을 든 소녀.

기묘할 정도로 사람의 심리를 잘 읽는 아이였다.

‘저건 공부한다고 느는 게 아닌데…….’

천부적인 재능. 사람을 사냥하는 직업이 있다면 거기에 꼭 어울릴, 더 나은 사람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의 재능.

상호는 묵묵히 가은을 내려다보다가 이서 쪽을 흘끗했다. 이서도 상대를 쓰러트리고 경기장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네가 열심히 할 거란 기대는 않는다만…….’

그래도 상호는 이서에게 기대를 걸었다. 열심히만 한다면 이서도 충분히 가은을 이길 실력이 있으니까.

만약 이서가 가은을 이기지 못한다면.

상호는 하나의 기회를 잃게 될 터였다.

‘잘 좀 해봐라, 이서야…….’

그는 그런 바람을 품어 간절한 눈빛으로, 동시에 경기장에서 내려와 서로를 흘끗하는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 * *

“얍!”

나빛의 양옆으로 황금빛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덤벼랏! 이 악마!”

“아아──.”

태화는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드높은 천상의 불멸자인가……. 기나긴 전쟁도 오늘로 끝이다.”

“그게 뭐야?”

“너 만화 같은 거 하나도 안 봤냐?”

“그런 거 보면 아빠가 혼냈어…….”

나빛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성창을 만들었다.

태화에게는 아주 익숙한 광경이었다. 저 창에 수백 번을 찔리고 두들겨 맞았다. 이제는 저 황금빛만 봐도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태화의 꼬리가 바닥에 불을 내뿜었다.

화르륵……

불길은 조금씩 세를 불리며 나빛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미 여러 번 당해본 익숙한 상황. 나빛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라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수많은 성창이 태화를 향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윽……!’

태화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피할 곳이 없다. 경기장의 결계 속 구석구석까지 성창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순간이동으로 갈 수 있는 곳은 오직 한 곳, 나빛의 주변뿐.

하지만 나빛의 주변에는 이미 수십 개의 성창이 대기 중이었다.

“……쳇!”

둥그렇게 펼쳐진 방어막이 성창을 막았다.

그리 자신 있는 마법이 아니었다. 성창이 몇 번 부딪히자마자 방어막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몇 초도 못 버티고 성창을 얻어맞게 될 터였다.

태화의 머릿속이 핑핑 돌아갔다.

‘……그래!’

태화는 계산을 마치고 몸을 숙여 양손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땅 곳곳에서 검은 결정이 치솟기 시작했다. 마치 동굴의 석순처럼. 결정 석순의 창끝은 공중에 떠 있는 나빛을 향하고 있었다.

기울어진 석순의 아래에 안전지대가 생겼다.

‘오케이…….’

태화는 그 아래로 순간이동해 몸을 숨겼다.

결정 석순은 방어뿐만이 아니라 공격도 겸할 수 있었다. 나빛은 결계를 가득 채운 채로 올라오는 석순을 내려다보며 당황했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익……!”

전세가 역전되었다. 정확히 반대로.

나빛은 방어막을 치고 버티려 했지만, 석순은 결계의 천장까지 나빛의 방어막을 밀어붙여 짓누르기 시작했다.

우드득……

그쯤 되니 아무리 나빛의 방어막이 단단하더라도 버틸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빛은 순간이동도 할 수 없으니.

나빛의 회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안 돼.”

“응?”

태화는 그 목소리를 듣고 움찔했지만, 곧 눈을 부라리고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뭐가 안 돼?! 너 내가 1등 하는 게 꼬와서 그러는 거지?!”

“나도 선생님이랑 매일 밥 먹을 거야……!”

나빛의 몸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다. 마치 태양이 땅으로 내려온 것처럼 뜨겁기도 했다. 태화는 기겁하며 결정 석순의 그늘 아래로 몸을 숨겼다.

“와 씨, 저건 또 뭐야…….”

빛이 결정을 녹이기 시작했다.

마나로 이뤄진 결정이 검은 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그저 빛에 닿은 것만으로도 마법의 구조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태화에겐 듣도 보도 못한 기사였다.

‘괴물이 다 됐네, 저걸 어떻게 이겨…….’

하지만 물러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이미 상호에게 큰소리쳐놓은 게 있어서.

이번 평가에는 다혜도 없고 세희도 없다. 이때가 아니면 다시는 1등을 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1등을 해야만 세희를 놀릴 수 있었다. 세희가 너무 강해서 평가를 보지 않게 된 지금, 세희를 놀릴 방법은 1이라는 숫자를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촤아악……

결계 천장에서 성창 수백 개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태화는 고민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나빛을 쓰러트릴 수 있는지.

결론은 여태까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폭.

‘해보자!’

태화의 눈이 결의로 불타올랐다. 손에서도 검은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불꽃은 점차 그 모습을 작게, 단단하게 굳히며 동그란 구슬이 되어갔다. 태화는 그 구슬을 손에 꼭 쥐고 순간이동을 했다.

나빛의 등 뒤로.

“아뜨뜨뜨뜨!”

그런데 이렇게 뜨거울 줄은 몰랐다.

나빛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너무 뜨거웠다. 식겁한 태화는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거기에는 성창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빠악

“켁!”

성창에 머리를 얻어맞은 태화는 손안에 있는 마법의 제어를 잊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손에서 넘실거린 검은 불꽃이 일시에 팽창했고.

콰아아아앙

“으갸아아아악!”

흑연 속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쟤는 자기 기술에 당하는 게 특긴가봐요.”

“그러게.”

상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쟤는 진짜…… 성격만 고쳐도 금방 1등 하겠다.”

“그래도 나빛이는 이기기 힘들지 않았을까요?”

“적어도 저렇게 지지는 않았을걸.”

둘은 도란도란거리며 다른 경기를 살폈다.

* * *

이서는 가은을 바라보았다.

4강. 준결승전. 운이 없게도 서로 마주쳐 버리고 말았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이라면 둘 다 등수에 미친 듯이 연연하는 아이들은 아니라는 것.

그런 아이들이 제일 높게 올라왔다는 게, 이서에게는 별스럽게 느껴졌다.

스릉……

가은이 먼저 검을 뽑았다.

이서도 마주 검을 뽑아 앞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검은 자신이 더 기니까, 이론상 간격의 주도권은 이서 본인에게 있었다.

하지만 지난번 평가에선 가은에게 졌다.

그러나 이서는 그런 걸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었다.

‘되면 되는 거고. 안 되면 안 되는 거고.’

솔직히 져도 상관없으니까.

다 귀찮다. 검을 던지고 대충 끝내버리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소문이 담임과 언니들에게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또 지옥 같은, 훈련을 빙자한 구타가 재개될 것이고.

맘 같아서는 경찰에 학교폭력으로 신고하고 싶었지만, 여긴 헌터 학교고 상대는 X급 헌터. 필요한 만큼만 때렸다고 하면 검경 따위가 따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서도 그 정도는 알았다.

‘X발, 왜 이런 델 와 가지고…….’

고통의 1년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이서야, 왜 눈을 그렇게 떠?’

‘하기 싫다 하면 학교 생활 끝나?’

‘헌터가 장난이야? 언니들이 X으로 보여?’

‘헤헤헤……. 이서는 불만이 많네. 헤헤…….’

이서는 나빛의 웃음소리에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그 모습을 본 가은이 눈을 끔뻑였지만, 곧 다시 전투 태세를 갖추고 이서에게 달려들 준비를 했다.

이서도 정신을 차리고 검을 움켜쥐었다.

‘대충 하면 죽겠지…….’

발이 땅을 박찼다.

검이 날아들자 가은은 짧은 검을 들어 막았다. 그러고는 전완으로 칼등을 쳐서 이서의 검을 튕겨내고는, 몸을 반 바퀴 돌려 이서의 옆구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서의 검이 있는 곳과 반대 방향으로.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설계.

이서가 어떻게 나올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했다.

‘X발…….’

이서는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가은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은율과 세희에게 훈련당한 탓에 검을 피하는 데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가은의 검은 뱀처럼 대가리를 흔들며 집요하게 이서를 좇았다. 절제된 동작. 그러면서도 순수하게 속도가 빨라 현란해지는 검로. 이서는 피하는 데에 급급해서 반격을 할 틈을 찾지 못했다.

‘니가 1등 해라. 그래…….’

어차피 얘가 1등을 하는 게 맞는데. 뭐하러 반항을 하고 있는 건지.

하지만 뒈지기 싫으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채앵

가은의 검이 튕겨져 나갔다.

검을 쳐낸 이서는 그 즉시 가은의 배를 향해 찌르기를 날렸다.

슉……

그 속도가 결코 느리지 않았으나, 가은은 검을 내려 아슬아슬하게 이서의 검을 옆으로 빗겨냈다.

일반적인 검은 있을 수 없는 위치. 할 수 없는 동작. 저 검이 조금만 길었어도 스스로의 팔이나 몸통에 걸렸을 터였다.

‘그래 니 짱 먹어라.’

그 광경을 보고 이서는 혀를 내둘렀다.

가은은 분명히 1학년의 수준이 아니었다. 담임의 수업을 받지 않았는데도. 가은의 사정을 잘 모르는 이서에게는 가은이 그냥 말도 안 되는 천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가은이 이서를 향해 파고들며 배에 찌르기를 날렸다. 이서가 방금 날린 공격과 똑같은 수법으로.

네 검은 긴데. 어떻게 대응할 거냐, 라고 묻는 듯했다.

‘X랄…….’

이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 * *

“윽…….”

이서는 다시 흙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서는 은율이 전투복 지퍼를 내리며 땀을 식히고 있었다. 그토록 열심히 이서를 두들긴 것이었다.

“일어나야지.”

“잠깐만, 잠깐만 쉬자고…….”

“힘들어야 느는 거야. 지금의 1분이 지난 두 시간보다 중요해. 두 시간을 보낸 이유기도 하고.”

은율은 조곤조곤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로 검을 휘둘렀다.

이서는 그 검을 피해 땅을 구르다가, 결국은 화딱지가 나 버럭 소리쳤다.

“아니! 조금만 쉬자고! 언니는 내가 무슨 로봇인 줄…….”

그 목소리는 금세 잦아들었다. 뒈지게 처맞을 걸 알아서.

하지만 은율은 빙그레 웃었다.

“쉴까?”

“……아니.”

“아, 화난 거 아니야. 그냥 묻는 거야. 이서 쉬고 싶어?”

“……응.”

“그러면 맞춰 봐.”

“뭘?”

“내가 왜 평가를 열심히 보는지.”

은율이 검을 빙글 돌렸다.

“내가 반장인 것, 널 가르치는 것, 이건 그냥 내가 조금 성실한 것뿐이지만, 평가, 그리고 애들이랑 대련하는 걸 열심히 하는 이유는 달라. 맞춰 봐. 왜 열심일까?”

“…….”

맞추면 쉰다. 이서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당연했다.

자신과 은율은 인종이 다르니까.

‘모르겠는데…….’

하지만 쉬고는 싶고.

결국은 아무 개소리나 일단 내뱉어 보았다.

“이기는 게…… 좋아서?”

“정답이야.”

“……응?”

눈을 휘둥그렇게 뜬 이서에게 은율이 웃어 보였다.

“그게 정답이야. 이기는 게 좋아서.”

“……왜 좋은데?”

“넌 정말로 이해를 못 하는가 보구나.”

은율은 검을 살짝 흔들었다.

“초등학교 때 있지 않았어? 그런 애들 있잖아.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내면 기분이 좋다는 애들.”

“난 그런 애들한텐 관심이 없었어서…… 잘 모르겠는데.”

범생이들에겐 말 한 마디 붙여본 적 없었다. 이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애들이 진짜 있다고?”

“있지. 꽤 있어. 나도 그런 부류야. 어려운 문제를 풀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

은율이 씩 웃었다.

“나한텐 전투가 그거야. 어려운 문제.”

“전투가……?”

“응. 지금 검을 휘두르는 게 정답일지, 오답일지. 이 과정이 답으로 향하는 길이 맞는지. 끊임없이 묻고 시험하면서 문제를 풀다가, 맞추는 데 성공하면…… 이기는 거지.”

은율의 눈에 열기가 엿보였다.

“내가 본 사람들 중에 제일 어려운 문제는 세희였어. 아, 선생님은 대학교 문제니까 패스.”

“……그러면.”

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풀어내면…… 뭐가 남는데?”

“성취감? 그냥 기분이 좋지.”

“기분은 남는 게 아니잖아.”

“그럼 이서 너는 맛있는 거 왜 먹어? 배만 채우면 되지.”

“…….”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그러나 이서에게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겨우 성취감 하나 때문에 그런 고된 일들을 해나가는 것은.

그래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난 역시 모르겠어.”

“그럴 수 있지.”

은율은 쓰게 웃으며 검을 들었다.

“그치만 너도 분명…… 언젠가 알게 될 거야. 날 이기는 날이 온다면.”

“그건 안 올 것 같은데. ……잠깐만, 맞추면 쉬기로 했잖아!”

“1분만 더 하자. 응? 지금 1분 하면 두 시간 운동한 거야.”

“아오……!”

* * *

터억

손이 칼등을 잡았다.

“……어?”

힘이 강해서 검을 밀어붙일 수가 없었다.

가은은 눈을 부릅뜨고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금껏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웬만하면 져 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비릿한 웃음.

“널 이기는 건…… 꽤나 재밌을 것 같더라고.”

이서의 검이 날아들었다.

가은은 검을 쳐내고 다시 반 바퀴 돌아 반대 방향으로 이서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서의 검이 이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채앵

“내가 널 이기면…….”

이서는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며 검에 힘을 주어 가은을 확 밀어냈다.

뒤로 밀려나던 가은은 발에 힘을 주어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윽……!”

“엄청 웃길 거야.”

긴 검의 칼끝이 가은을 겨눴다.

“그렇지?”

“…….”

가은은 말없이 이서를 노려보았다.

333. 싸우는 이유

“검세가 바뀐 것 같은데…….”

밑을 내려다보던 세희가 상호를 흘끗했다.

“저는 눈을 안 보면 잘 모르겠어요.”

“바뀐 게 맞아.”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가은을 이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적극적이지도 않고 매가리도 없는 것이. 그런데 중간부터 어느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적극적으로 가은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너희가 수업한 보람이 있나 보다.”

“그러게요.”

같이 구타했던 장본인이라 그런지, 세희는 기특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이서를 내려다보았다.

상호의 왼쪽 허벅지에 앉은 미래가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들이 수업했어? 이서를?”

“응. 은율이랑 나랑.”

“무슨 수업?”

“사람을 상대하는 수업.”

“엥……. 어라, 누구 온다.”

밑에서 누군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푸른 머리칼에 푸른 뿔, 푸른 꼬리.

“선생님, 미래야…… 어?”

아리가 상호의 허벅지에 앉은 미래를 발견하고 공중에서 멈칫했다. 그 모습을 본 미래가 당황하며 상호의 허벅지에서 내려왔다.

“아, 아리 왔네. 앉아! 앉아! 여기 앉아.”

“저기, 미래야, 아까 배터리 떨어졌다고……?”

“네? 제가 언제요?”

“분명…….”

상호는 미래의 머리에서 돌아가는 프로펠러를 바라보며 진땀을 흘렸다. 분명 아까는 그랬는데.

그때 아리가 날아오더니 상호의 허벅지에 태연하게 쓱 앉았다.

‘…….’

날지 못하는 애들을 앉혀야 하는데, 날 수 있는 애들이 와서 앉고 있으니. 꼭 참새가 앉는 전깃줄이 된 느낌이었다.

그는 양옆에서 느껴지는 아리와 세희의 머리 냄새를 맡으며, 다시금 가은과 이서의 전투에 집중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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