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4화 (334/501)

* * *

“실력을 한번 볼까?”

상호가 소매를 걷었다.

“아리도 선생님이랑 싸워본 지 꽤 됐지. 그치? 2학기 들어서는 민정 누나가 가르쳤고, 나는 계속 대련만 시켰으니까…….”

“네.”

아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X급 헌터. 세상에서 제일 강한 헌터. 그런 말들을 실감할 실력은 되지 않았지만, 중압감은 분명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런 부담보다도 담임과 수업할 수 있다는 기쁨이 더 커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들어와.”

상호가 손을 까딱였다.

아리는 그 즉시 마법을 형성했다. 양손에, 뿔에, 전기의 마나를 끌어모아서.

삼각형의 중심에서 굵은 번개가 쏘아져 나갔다.

꽈르릉

“흐음.”

상호는 몸을 살짝 틀어 번개를 피했다.

“빨라서 좋다. 준비동작이 길긴 한데……. 그래도 태화 것보다는 빠르네.”

그리고 손날을 휘둘러 작은 검기를 날렸다.

아리는 검기를 순간이동으로 피하고 손을 하늘로 뻗었다.

쿠릉……

하늘에서 짙은 먹구름이 다가왔다.

산 정상에 몰려든 먹구름은 허공에 번개를 튀기며 일대를 둥그렇게 돌기 시작했다. 아리는 손을 올린 자세 그대로 정신을 집중했다.

그때 갑자기 상호가 아리의 코앞에 나타났다.

“이렇게 준비가 길면 어떡해.”

너무 가까웠다.

하지만 이게 바로 아리의 노림수였다. 빈틈을 보여 가까이 다가오게 만드는 것. 일대를 돌아다니던 먹구름이 일제히 번개를 머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상호가 아리의 볼을 둥글게 쓰다듬었다.

“다 당해버리잖아.”

“……으.”

아리의 뺨이 확 달아올랐다.

몰려든 먹구름이 저 혼자서 펑펑 터져나갔다. 그 안에 들어있던 뇌정의 마나도 허공에 흩날려 사라졌다.

“……으, 으아.”

노란 눈동자가 핑핑 돌아갔다.

상호는 다혜가 되어 버린 아리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머쓱해서 머리를 긁적이며 아리의 어깨를 토닥였다.

“공격이 그렇게 느리면 안 돼. 그런 공격은 아무도 안 당해줘.”

“하, 함정, 함정이었…….”

“함정? 그래도. 네가 완전히 무방비해졌었잖아. 무턱대고 위험을 감수하면 안 되지. 몬스터를 상대할 때도 이랬다가는 크게 다쳐.”

“네에…….”

아리는 붉어진 뺨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리를 상호는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리야.”

“네?”

“이번 연말평가. 목표로 하는 등수가 있어?”

“어…….”

노란 눈동자가 갈팡질팡 흔들렸다.

“1등……? 이요…….”

“그러면 선생님한테 뭐 바라는 거 있어?”

“네?”

아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1등을 하면 바라는 걸 들어주겠다는 걸까.

아리의 눈이 점차 반짝이기 시작했다.

“소원권으로 안 되는 것도 돼요?”

“……응?”

그 말을 들은 상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헛기침을 했다.

“아, 아니……. 그건 아니고.”

그 말에 아리의 꼬리가 갑자기 축 늘어졌다. 전원 꺼진 로봇처럼, 실 끊어진 인형처럼. 생활의 동력원을 잃어버린 것처럼.

상호는 황급히 말을 지어냈다.

“아니! 아니……, 소원권보다 좋은 건 없겠지만. 그래도 1등씩이나 했는데 소원권 하나로 퉁치고 싶지는 않아서……. 뭐 받고 싶은 거 없어? 하고 싶은 거나.”

“그러면…….”

아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같이…… 밥 먹어 주세요. 둘이서요. 언니들처럼…….”

“외식? 그래, 뭐. 그러자. 1등 하면 같이 밥 먹으러 가자. 소원권도 하나 주고…….”

둘 사이에 살갗이 거친 새끼손가락이 세워졌다.

“대신 특훈 열심히 하는 거야.”

“네.”

그 새끼손가락에 작고 가느다란 새끼손가락이 엮였다.

아리는 새끼손가락을 잠시 흔들다가 뒤로 물러나 손에 마나를 끌어모았다.

“다시 갈게요.”

“응.”

푸른 스파크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 * *

파지지직……

푸른 스파크가 몸 주변에 튀었다.

하솔은 마비된 팔을 부여잡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함정이었구나.”

“응.”

아리는 씩 웃었다.

아리의 손에서는 차가운 공기가 김과 함께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내가 번개 마법만 쓰는 건 아니거든.”

“그건 알지.”

하솔은 땅과 함께 얼어붙은 발을 내려다보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치만…… 이렇게 속을 줄은…… 몰랐네.”

“어때. 쓸만해?”

아리는 작은 불덩이를 던져 얼음을 녹이며 물었다.

“애들도 당할까? 가은이랑, 이서랑.”

“글쎄. 이서는 좀 단순하니까 당해주려나. 근데 가은이는…….”

하솔은 말을 흐리며 쓰게 웃었다.

그 뒤에 올 말을 아리도 알고 있었다.

“가은이는 의심이 많으니까.”

“……응.”

의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 그게 박가은.

“다음 경기 잘해.”

“응.”

아리는 하솔의 응원에 답하고 계단으로 걸어갔다. 마나가 남아 있는 손을 힘차게 꽉 쥐어 보이며.

푸른 스파크가 허공에 튀었다.

331. 귀신

“에이.”

부적 붙은 검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안 합니다.”

“응……?”

나빛은 당황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아 꼼지락거렸다.

“이츠키……?”

“드러워서 안 합니다. 싸움이 되어야 경기를 하든가 하지.”

이츠키가 심통이 난 듯 입술을 실룩였다.

“하양은 좋겠습니다.”

“어……, 이츠키……. 화났어?”

“방어도 되고. 공격도 되고. 이동까지 되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해도 되니까.”

말이야 다 맞는 말이었다.

성창으로 때릴 때 너무 세게 때렸나. 나빛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조그마한 성창을 만들어 자신의 가슴에 겨눴다.

“미안해……. 이렇게라도 속죄할게…….”

“농담입니다.”

이츠키는 혀를 쏙 빼물고 검을 주워들었다.

“그래도 하양이 부러운 건 사실입니다. 전투도 되고 치료도 되고 예쁘기까지 한 능력이니까.”

“역시 속죄할게……!”

“농담인 겁니다.”

경기장 주변에서 결계가 내려갔다.

다른 경기장에서도 32강전이 끝나가는 중이었다. 이츠키를 제외한 상호의 반 아이들은 전부 멀쩡한 모습으로 경기장에 서 있었다.

이츠키는 그 모습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못내 아쉬운 듯 한숨을 쉬었다.

“결국은 1년 내내 상위권에 못 들어갔습니다.”

“미안해…….”

“부모님이 뼈 빠지게 고생해서 번 돈으로 유학까지 왔는데…….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미안…….”

“내년엔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미안해……!”

“농담입니다.”

그토록 고약한 농담을 남기고, 이츠키는 경기장을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1등을 하든 말든 이양은 꼭 이기는 겁니다. 1등했다고 뻐기는 거 보고 싶지 않으니까.”

“응~.”

나빛도 손을 흔들며 대답하고 반대편 계단으로 향했다.

* * *

“선생님~.”

“응?”

공중에 떠 있던 상호는 목소리를 듣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프로펠러 모자를 쓴 미래가 손을 흔들며 올라오고 있었다.

“같이 봐요~. 앗, 의자왕.”

“……응?”

의자왕이 뭔 소리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하던 상호는, 미래의 시선이 그의 무릎에 앉은 세희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당황했다.

“아, 아니 이거는, 세희는 공중에 뜰 만큼 내공이 많지 않으니까…….”

“의자왕!”

“아니라니까!”

“킥킥…….”

미래는 키득키득 웃고는 2학년들이 경기중인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나빛이 언니는 안 끝났어요? 언니가 끝나야 다 같이 보는데.”

“응. 이츠키랑 붙었는데 이겼네.”

상호는 패자전 경기장으로 향하는 이츠키를 바라보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마음만큼 많이 가르쳐주지는 못한 것 같아서.

‘내년엔 더 많이 가르쳐 줘야지…….’

그렇게 내려다보고 있는데 미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츠키 언니만 떨어진 거예요? 나디아 언니는요?”

“나디아?”

그러고 보면 나디아의 결과를 살피지 않았다. 상호는 빠르게 2학년을 훑었다. 밝은 금발이라 찾기 어렵지 않았다.

나디아는 패자전 경기장과는 거리를 꽤 둔 곳에 서 있었다.

“16강 기다리네. 올라갔나 보다.”

“오옹…….”

미래가 주섬주섬 망원경을 꺼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나디아 언니 요즘 좀 쎄진 것 같던데.”

“그래?”

“네. 뭔가 쌩쌩해졌더라고요. 날이 추워져서 그런가?”

“응? 날은 왜?”

“곧 겨울이잖아요. 러시아 사람한텐 지금이 딱 좋은 날씨일지도.”

“그런……가?”

그렇든 자시든 그가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상호는 머쓱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미래가 그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선생님, 선생님.”

“응.”

“저도 무릎에 앉아봐도 돼요?”

“……뭐?”

무릎엔 세희가 앉아 있는데.

사람 다리가 길어 봤자 사람 한 명 앉을 자리밖에 나지 않았다. 상호는 당황해서 미래를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아니…… 널 앉히면 세희가 앉을 데가 없잖아.”

“둘이 같이 앉으면 되죠.”

“자리가 없는데?”

“다리는 두 개잖아요.”

미래가 웃으며 말했다.

“벌리세요.”

“그러니까…… 다리를 벌려서 한쪽에 한 명씩 앉히라고?”

“네!”

“이야…….”

상호의 눈동자가 덜덜 떨렸다.

“그거 정말…… 의자왕 같겠네.”

“그렇죠!”

“절대 안 돼.”

“엥.”

“너희까지 언니들처럼 그러지 말아줘……. 시합이나 보자. 시합이나…….”

셋은 다시 경기장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 * *

“오호…….”

지윤은 경기장으로 올라서는 상대를 바라보며 눈썹을 꿈틀했다.

“의외구마잉.”

“네?”

나디아가 고개를 기웃했다.

나디아는 사투리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 정확히는 지윤의 어투를 알아듣기 힘들어했다. 그래서 지윤이 아이들과 수다를 떨 때면 나디아는 나빛에게 통역 아닌 통역을 요청하곤 했다.

지윤은 쓴웃음을 지으며 서울 말씨를 썼다.

“나디아 너랑 싸울 줄은 몰랐어. 너 16강 처음 아니던가?”

“네!”

“실력이 늘었나 보네.”

지윤이 주먹을 들자 나디아도 검을 들었다.

“함 보자.”

“네!”

둘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쪽은 주먹, 한쪽은 양손검. 날이 제법 날카롭게 서 있었지만, 지금은 한낱 둔기에 불과했다.

지윤은 주먹에 강기를 불어넣고.

“흐읍!”

앞으로 내질렀다.

노리는 곳은 나디아의 옆구리. 정통으로 때리면 간에 타격을 줘서 한 방에 쓰러트릴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런데 나디아의 검을 잡은 자세가 평소와 달랐다.

‘뭐지?’

지윤의 몸이 아주 잠깐 느려졌다.

하지만 무기의 강도로는 지윤이 몇 수 위. 힘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 두 가지 조건만 있다면 반탄강기는 무적.

지윤은 뇌의 위험신호를 무시하고 공격을 속행했다.

그때 나디아가 검을 눕혔다. 칼끝이 지윤을 향하도록, 몸에 가깝게 붙여서.

콰악

칼끝이 주먹에 박혔다.

정확히는 부딪힌 것뿐. 역시 나디아의 성력은 강기를 뚫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지윤의 표정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큭!”

지윤은 주먹을 거두고 물러났다.

힘에서 밀렸다. 나디아에게. 아무리 지윤이 힘이 세도 칼끝에 집중되는 나디아의 힘을 온전히 받아낼 수는 없었다.

반탄강기가 되돌려주는 것은 최초의 충격뿐. 이후에 밀고 들어오는 것은 어찌하지 못한다. 그렇게 지윤의 자세가 흐트러지면 나디아의 검이 몸통을 향해 들어온다.

‘하지만…….’

나디아의 검은 지윤에게 타격을 주지 못한다.

방금은 예상치 못한 상황인데다가 나디아의 수를 읽지 못해 반사적으로 물러났지만, 다시 잘 생각해 보면 나디아는 지윤을 공격할 방법이 없었다. 지윤은 계산을 마치고 다시 나디아에게 달려들었다.

나디아도 다시 검을 들었다. 칼끝을 지윤에게 향해서, 몸에 바짝 붙인 채로.

그 모습이 꼭 십자가 같았다.

탓……

나디아의 발이 땅을 박찼다.

어차피 공격은 찌르기뿐. 반탄강기에 검을 휘두르면 자세가 무너진다는 사실은 나디아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지윤은 칼끝에만 집중했다.

예상대로 그 칼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몸통…….’

혹은 얼굴. 칼끝이 향할 곳은 둘 중 하나.

주먹에 칼끝을 맞댄 건 반탄강기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반응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주먹을 노릴 이유가 없다. 분명 급소를 노리려 할 터.

그런데 나디아가 지윤의 주먹에 검을 내질렀다.

‘응?’

지윤은 속으로 살짝 당황했다. 기다란 무기가 있으면서 굳이 주먹에 공격을 할 이유가 없는데.

그래도 당황하지 않고 주먹을 풀었다. 검을 잡기 위해서.

잡기만 하면 무조건 이긴다.

‘……어?’

나디아의 검이 아래로 쑥 내려왔다.

지윤은 급히 손을 뻗어 검을 잡았다.

‘……어어?’

나디아의 검에 둘러진 성력이 검과 따로 놀고 있었다. 오징어 튀김의 오징어와 튀김옷처럼.

지윤이 잡은 성력은 제자리에 멈췄고, 검만 지윤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엇……!’

퍼억

겨드랑이 아래에 울리는 둔탁한 소리.

“…….”

지윤은 아무 말 없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둘러놓은 반탄강기가 나디아의 검을 착실하게 막아주고 있었다.

“네.”

나디아가 빙긋 웃었다. 이걸로 만족했다는 듯이.

지윤은 그 표정을 보고 알아차렸다.

애초부터 이길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그렇구마이.’

어차피 진다면 끝을 시험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지윤에게 닿았다. 비록 강도로는 택도 없었지만, 간격만은 나디아의 승리.

만약 서로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지윤이 죽었을 것이다.

“잘했다.”

하지만 승자는 지윤 자신.

지윤은 나디아의 손목을 잡아끌어 바닥에 쓰러뜨렸다.

“윽!”

털푸덕 쓰러진 나디아가 지윤을 올려다보며 헤헤 웃었다.

승부는 났다. 결계도 내려갔다. 하지만 지윤은 한참 동안을 가만히 서 있다가, 경기장 주변의 구경꾼들이 의아해할 때쯤에야 정신을 차리고 나디아를 일으켜 세웠다.

“잘했다, 잘했어. 언제 이래 쎄졌어.”

“네!”

“내려가라이. 패자전 잊지 말고.”

“네!”

나디아는 가벼워진 걸음으로 경기장에서 내려갔다.

지윤은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약간 걸음이 무거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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