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2화 (332/501)

* *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단비가 그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스름한 새벽녘의 회색 공기 속, 대형견처럼 손을 바닥에 대고 앉아서.

상호는 소파에 누운 채로 눈만 껌뻑거렸다.

“……단비야?”

“멍.”

“뭐해……?”

“쌤 봐요.”

일찍 일어났는데 할 게 없어 심심한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는데 소파 주변에 갈색 털뭉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상호는 그 꼴을 보고 기겁했다.

“……단비야?”

“멍?”

“아니 털이 왜 이렇게…….”

“털갈이 시즌이라 그래요. 멍.”

“대체…….”

귀랑 꼬리만 달렸으면서 털의 부피는 대형견만큼 나온다. 불가사의하다고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저녁에 또 청소해야겠구나.’

상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몸을 일으켰다.

세수를 하려고 욕실로 갔더니 수챗구멍에 시커먼 게 그득했다. 뭔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애들도 털갈이를 하나…….’

내공으로 들어 보니 색깔도 길이도 제각각. 상호는 한데 엉킨 머리카락을 잘 털어 쓰레기통으로 보냈다.

세수를 마친 후 밖에 나와보니 단비가 냉장고를 뒤적이고 있었다.

“배고파?”

“네. 어제 너무 열심히 뛰었어요.”

“좀만 기다려. 차려 줄게.”

토스트 재료가 공중에 떠올랐다.

단비는 저 혼자 켜지는 가스레인지와 그 위에 차곡차곡 쌓이는 프라이팬, 버터, 식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새삼스럽게 신기하다는 듯이.

“쌤.”

“응?”

“저희는 저런 거 언제 할 수 있어요?”

“운기조식 열심히 해.”

얼마 지나지 않아 방에서 아이들이 하나둘씩 나왔다.

세수를 하는 미래. 이불을 정리하고 나오는 하솔. 아직도 졸린 듯 소파에 누운 초란과 아리. 조리되고 있는 식빵을 슬쩍 빼먹는 이서.

상호는 허공섭물로 식빵을 들어 이서의 목구멍까지 쑥 집어넣고는.

“……케엑!”

“얘들아, 가은이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태연한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물었다.

아이들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모르겠어요.”

“안방 화장실에 있나?”

“먹고 있어.”

그는 자신을 째려보는 이서의 눈빛을 무시하며 아이들에게 토스트를 내어준 뒤, 가은을 찾아 안방으로 향했다.

‘자고 있나? 하긴 피곤할 만도 하지…….’

방에 들어가니 아니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의 침대 옆에 놓인 작은 서랍. 그 앞에 가은이 서서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주 작은 액자.

“누가 꺼낸 거니?”

상호는 답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오해로 인해 누군가에게 억울한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가은이 액자를 든 채로 대답했다.

“제가요.”

“왜?”

“뭐 숨겨야 하는 거라도 있으세요?”

앙칼진 시선이 상호를 노려보았다.

경찰놀이를 하고 싶어 할 정도로 철없는 아이는 아니고. 아마 상호의 성질을 일부러 긁어 보려는 듯했다. 만약 상호가 어렸다면, 그리고 가은이 동갑이었다면 바로 따귀부터 한 대 갈겼을 터였다.

그렇지만 둘 다 아니라서. 상호는 문을 조용히 밀었다. 닫히지 않게 살짝 틈이 남도록.

그런 후 가은을 돌아보았다.

“경찰이 되려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 가은아. 남의 물건을 함부로 건들진 말아.”

“그냥 보는 것도 안 돼요?”

“꺼내 놓진 않았잖아.”

“보면 뭐 닳기라도 해요?”

“가은아.”

상호는 가은의 손을 향해 손짓했다.

“그거 주고. 잠깐 앉아 볼래?”

가은은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액자를 서랍에 올려놓고 문을 향해 돌아섰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힘에 손목을 붙들려, 자리에 멈춰선 채로 다시 상호를 노려보았다.

“놔요.”

“못 놔.”

여기서 놓으면 다시 제자리걸음.

상호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네가 앉아서 이야기해 줄 때까지, 나도 한 발짝도 안 움직일 거야.”

“……왜요.”

가은의 눈 주변이 씰룩였다.

“왜 나한테 그러는 건데요.”

“선생이니까.”

“선생이면 이래도 돼요? 방에 학생 가둬놓고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요?”

“선생이 학생 앉혀놓고 이야기도 못 해?”

상호는 씩 웃었다.

“그냥 이렇게 서서 이야기하면 다리 아프니까 그런 거야. 혼내려는 거 아니야.”

“난 할 말 없어요.”

“그게 네 생각이면 어쩔 수 없지만…….”

상호의 내공이 가은의 소매를 살짝 잡아끌었다.

“내 생각도 한번 들어 줬으면 좋겠다.”

가은은 상호를 노려보았다. 여태까지 그래왔듯 표독하게.

아주 오랫동안.

상호도 가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가은아.”

묵묵부답.

“우리 1년 했다. 그치?”

“…….”

“내가 너희한테 신경을 많이 써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잘했다고 만족하는 게 하나 있어.”

“…….”

“너야.”

가은이 움찔했다.

“……뭐가요.”

“내가 널 많이 가르쳐주지 못했고, 너도 나한테서 배웠다 생각하는 건 많이 없겠지만…… 그래도 넌 내 반에 남아서 수업 방식은 다 따라 줬고, 특훈도 이렇게 왔어.”

“…….”

“그리고 1등도 했고.”

당신 덕이 아니다, 가은은 그런 뜻의 눈빛을 지었지만 상호에겐 딱히 상관이 없었다.

“난 그걸로 만족해. 비록 너는 나를 스승으로 생각 안 할지 몰라도…… 너는 어쨌든 우리 반이 됐고, 많은 걸 배워갔잖아. 대부분은 내가 아니라 미진 선생님한테 배웠을 테지만…… 어쨌든 성장했고.”

상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은 이렇게, 대화도 잘 하고 있지.”

목소리에 담긴 다정함은 가식이 아니었다.

가은은 그걸 알아채고 더욱 표정을 굳혔다. 일부러. 이 남자를 인정하기 싫어서.

“하기 싫은데 억지로 시키는 거잖아요.”

“네가 그걸 버텨줄 의향이 생겼다는 게 중요하지.”

상호는 이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게 내가 너한테 제일 고마운 부분이야.”

“…….”

가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호는 가은의 옷자락을 잡고 있던 내공을 거뒀다.

“1년 동안 고마웠다. 못난 선생을 버텨줘서. 그리고…… 되도록이면 앞으로도 고맙고 싶어.”

“…….”

“내 다음해 목표가 뭔지 알아?”

“……뭔데요.”

“널 웃기는 거야.”

가은의 눈살이 확 찌푸려졌지만, 상호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너 웃는 걸 내 두 눈으로 볼 거야. 그게 내 목표야. 내가 직접 널 웃겨서, 이 두 눈으로 너 웃는 걸 보는 거, 그게 목표라고.”

“…….”

“태클 걸고 싶지 않아?”

그는 한쪽만 남은 눈을 찡긋하며 빙글빙글 웃었다.

그러자 가은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꺼져요.”

상호의 가슴팍을 퍽 치고 방을 나섰다. 성난 듯 발을 쿵쿵 구르면서.

명치. 정중앙. 상호는 욱신거리는 환부를 문지르며 침음했다.

“아야야…….”

그래도 이제 짧은 터치는 가능한 모양이다. 먼저 손을 대는 것을 보면.

나름의 성과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 조금만 더 하면 웃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내년에는 꼭 웃겨 보이겠다. 필살의 개그를 배워서. 상호는 결의를 다지며 방을 나서려다가, 멈칫하며 액자를 돌아보았다.

액자 속에서 예경이 웃고 있었다.

‘……누나.’

마음에 불러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걱정이 되었지만, 지금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

그는 액자를 서랍에 넣고 아이들이 모여있는 주방으로 향했다.

“어때, 먹을 만해?”

“네! 가은아, 니 꺼 여기…… 어, 근데 쌤 안 드시지 않았어요?”

“어라, 남은 게…….”

“누가 두 개 먹었어?”

“멍…….”

“……됐다. 먹고 싶은 사람이 먹은 거면 됐어. 갈아입고 나가자.”

“넵!”

그들은 다시 훈련 준비를 해서 집을 나섰다.

329. 두 번째 연말평가

“준비 다 됐지?”

“네.”

교실 가운데에 모인 아이들이 한목소리로 답했다.

특훈을 무사히 마치고 온 지 사흘째가 되는 날. 덕분에 1학년 아이들의 눈에는 기합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그 형형하고 생생한 기운을 느낀 2학년들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마, 아리야.”

“멍!”

“느 와 그래 눈을 뜨노?”

“눈은 마음의 창이야! 어때! 날카롭지?!”

“그 창이 그 창이 아닐 터인디…….”

상호는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손뼉을 짝 쳤다.

“자, 집중, 집중. 오늘 연말평가…….”

“쌤, 세희 얜 어디 갔어?”

“……세희는 시험 따로 본다고 했잖아.”

“그럼 학교도 안 와? 우리 시험치는 것도 안 보고?”

“쉬라고 했어. 보고 싶으면 오겠지.”

“쳇, 안 오기만 해봐라…….”

태화가 팔짱을 낀 채로 꿍얼거렸다.

세희 앞에서 자랑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은근히 세희가 찾아와주기를 바라는 건지. 상호는 태화의 볼을 검지로 폭 찌르며 말을 마저 이었다.

“오늘 연말평가지?”

“네.”

“웅.”

“1년 동안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가 판가름나는 거야. 물론 성적이 다는 아니고, 운도 많이 따르겠지만…… 딱 하나 확실한 건, 1등 할 실력을 쌓았다면 억울할 일이 없다는 거지.”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이미 아는 내용일 것이다. 상호는 더 말하지 않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잘 하고 와. 다 보고 있을 테니까.”

“네!”

손들이 한데 모였다가 위로 솟아올랐다.

* * *

“아르릉…….”

단비는 눈을 부릅뜨고 눈앞의 적을 노려보았다.

경기장 위에 올라선 검사. 순진하고 소심한 얼굴의 소녀.

“그르르릉…….”

“아리야……?”

초란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리야, 내 말 들려?”

“으르르르…….”

단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눈앞의 상대는 적. 쓰러트리고 올라가야 할 적. 한솥밥을 먹은 친구라고는 생각하면 안 되었다.

단비는 그저께 상호와 했던 특훈을 떠올렸다.

‘단비야.’

‘멍.’

‘단비 너는 감각도 좋고 반응속도도 빠르니까…… 조급하게 반응하지 말고, 차분하게 대처해. 차분하게. 알았지?’

‘네!’

‘잊지 마. 차분하게.’

차분하게.

담임이 했던 조언을 머릿속에서 계속 굴리며, 단비는 초란을 향해 짓쳐들었다.

그 순간, 초란도 상호의 조언을 떠올리고 있었다.

‘초란이 넌 손이 좀 느려. 그러니까 머리를 더 써야 해. 네가 검을 휘두르는 그 순간까지도 스스로 네 빈틈을 찾아서 메꿀 생각을 해야 해.’

‘그건 손이 빨라야 하지 않아요……?’

‘상대의 속도까지 생각해 놔야지. 살아남으려면. 그때그때 일일이 반응하는 것보다는 쉬울 거야. 너한테는.’

초란은 단비의 검을 막았다.

다음 공격. 다음 수비. 다음 수를 찾아 헤매는데 단비가 기습적으로 발차기를 날렸다.

‘앗…….’

검에만 집중해서 미처 계산하지 못했다.

초란은 몸을 돌려 등으로 발차기를 받아냈다. 검을 휘두르기 힘든 자세였다. 그 빈틈을 발견한 단비는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초란의 등을 향해서.

촤악

발이 땅을 긁어 흙먼지가 일었다.

보법으로 검을 피해낸 초란은 다시 자세를 가다듬어 단비를 마주했다. 검을 세로로 단단하게 잡은 채.

단비가 빠르게 검을 찔러 들어왔다.

채앵……

검이 검을 쳐냈다.

소리가 길게 늘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검의 떨림, 금속이 물결치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마음으로는 이미 단비를 향해 공격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초란의 손은 마음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생각해야 돼.’

손이 느리니까. 머리로라도.

초란은 방금 쳐낸 단비의 검을 보며 생각했다. 찌르던 검을 옆으로 쳐냈으니, 단비의 몸에는 초란의 검이 더 가깝게 된다.

그러면 단비는 검을 당기며 초란의 검을 막으려 할 터. 초란의 검이 수직이니 그를 막을 수 있는 수평으로. 혹은 수평에 가까운 사선으로 검을 누일 것이고.

그렇다면 그런 단비에게 가장 적합한 공격은.

손잡이 방향으로의 사선 올려치기.

‘이게 정답…….’

초란은 확신을 가지고 검을 휘둘렀다. 단비의 칼날에서 멀리 떨어진 곳. 단비의 손잡이 방향으로.

예상대로 단비의 검이 초란의 검을 막으러 이동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크릉……!”

단비는 당황해서 몸을 뒤로 빼려 했고.

차분함을 잃은 순간, 승패가 갈렸다.

퍼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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