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래서! 내가 그때 가슴을 빡 찔러가지고!”
“아야! 아파! 멍…….”
“시련이 헌터를 키우는 법이야.”
“그럼 나도 언니 명치 찌를래!”
“어어, 어딜 은근슬쩍 하극상을 하려 들어!”
“끼잉…….”
“어어어디 하늘같은 선배한테, 쯧……. 악! 야, 도은율!”
“동생들 때리지 마.”
또 웬 소란인가. 상호는 복도에서 조용히 듣고 있다가 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섰다.
명치를 부여잡은 태화가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쌤! 도은율이 나 때려!”
“더 때려.”
“네.”
“아아아악!”
약간의 소동이 일은 후, 아이들은 자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달랑 하루 다녀왔을 뿐인데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나빛과 지윤의 살벌한 눈빛하며, 1학년 아이들의 서운한 눈빛하며.
상호는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으흠, 얘들아. 오늘은…….”
“쌤예 으데 갔다왔습니꺼.”
“저희는 왜 안 데려갔어요?”
지윤과 나빛의 눈에 한기가 깃들었다.
“왜 세희랑 태화만 데려갔어요?”
“삐이이…….”
책상 위에 앉아있던 혁구가 폴짝 뛰어내려서 가방에 들어갔다.
어떻게 답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상호는 차분하게 답을 고민했다. 더 이상 사람 맘 모르는 돌대가리가 아니니까.
“세희랑 태화랑 꼭 해야 할 일이 있었어. 악마 때문에.”
“같이 잤어요?”
“……하루만.”
“하루 다녀오셨잖아요…….”
나빛이 서운한 표정을 짓자 태화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야, 뭐 그런 걸 따지냐? 난 쌤이랑 하도 많이 자서 이제 별 느낌이 안 들던데. 응? 지겹다, 지겨워. 어휴~.”
나빛의 안색이 점차 어두워졌다.
“선생님.”
“으응…….”
“저도 지겨울 정도로 선생님이랑 다녀보고 싶어요.”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양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수업하자, 수업…….”
“도망치지 마세요.”
“연말평가 얼마 안 남았잖아. 수업해야지…….”
“그럼 특훈하는 거예요?”
“특훈? 응, 해야지…….”
“작년처럼요?”
“……응?”
“작년처럼 다섯이서만요?”
그제서야 작년의 일이 기억이 났다. 아이들 넷을 데리고 상호의 집과 뒷산에 갔었던.
상호는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때처럼은 못하지……. 지금은 사람도 많고…….”
“약속했잖아요…….”
나빛의 입술이 화난 병아리처럼 삐쭉삐쭉거렸다. 울먹이는 것 같기도 했다.
“다섯이서 다시 가자고, 약속했었잖아요…….”
상호의 눈이 흔들렸다.
그런 약속을 했던 것도 같은데. 지금에 와서는 지키기가 힘들어졌으니. 약속을 생각 없이 덥석덥석 받아주니 이런 사달이 나는 것이다.
‘안 지키면 나빛이도 나도 죽겠지…….’
그래서 그러자고 말하려는데, 나빛이 말을 덧붙였다.
“부담스러우시면 태화랑 세희는 빼요…….”
“응?”
“뭐?”
세희와 태화가 움찔했다.
“왜? 왜 니 멋대로?”
“너희는 선생님이랑 어제 놀다 왔잖아!”
“뭘 놀아, 새꺄! 죽을 뻔했구만!”
이때다 싶었는지 지윤이 맞장구를 쳤다.
“그럼 우덜도 쎄빠지게 특훈하고 오께. 느그덜은 학교에 있으라.”
“닌 또 뭐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쌤, 걍 얘들 빼고 나랑 둘이서…….”
태화가 눈에 불을 켜고 소리치는데, 갑자기 단비가 책상을 후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콰아앙
“더는 안 돼!”
“히끅…….”
쫄아서 확 움츠러든 태화를 무시하고, 단비는 주먹을 높이 들어 올렸다.
“혁명이야!”
갑작스런 선언에 아이들이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하는 눈빛으로.
상호도 당황해서 떠듬거렸다.
“단비야……?”
“우리도 선생님이랑 특훈할 거야! 우리도 이제 언니들한테 안 져!”
“맞아!”
미래도 주먹을 들었다. 옆에 앉은 아리를 흘끗하면서.
상호는 그게 무엇 때문인지는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자신이 1학년들을 너무 방치했었나 보다, 하고 반성할 뿐이었다.
하지만 2학년들이 져줄 리가 없었고.
작년에 특훈을 못 한 2학년들도 있었다.
“그 특훈이란 게 뭡니까? 나만 모르는 겁니까?”
“나도 몰라.”
이츠키와 은율이 세희를 바라보았다.
세희는 은율의 눈빛을 받고는 당황해서 우물쭈물했다. 지난번 악마와 싸웠던 실습 이후로 둘의 사이는 많이 소원해져 있었다. 약하니까 도망치라고 말했던 것 때문에.
그래서,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훈련하는 거야. 선생님 집에 가서…….”
“야이씨, 그걸 말하면 어떡해!”
“세희 바보야…….”
“하이고……. 난리났구마.”
지윤이 교실을 쓱 둘러보았다.
이제 은율의 눈에서도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츠키 또한 티는 내지 않아도 은근히 참여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리고 이상하게 열성적인 미래와 단비까지.
미래가 1학년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 지고만 있을 거야? 우리도 이제 맞서 싸워야 해!”
“그치만…….”
아리가 상호의 눈치를 살폈다.
“선생님 바쁘시고…… 집에 우리가 가면 부담스러우실 거고…….”
“니가 그럼 어떡해! 우리도 선생님 반이라고.”
“또 언니들 시험이 더 중요하고…….”
“우리 시험도 중요해! 이제 안 돼, 도망치지 마! 맞서 싸워!”
“어어어디 하늘같은 선배한테……!”
태화가 짐짓 엄한 척 도끼눈을 떴다.
하지만 미래와 단비는 전혀 기죽지 않고 오히려 태화를 향해 전투적으로 다가갔다.
“멍! 우리도 선생님이랑 특훈할 거야!”
“언니들은 많이 했잖아!”
“요……요것들이…… 그래서 한 판 떠?! 해보자고?!”
“떠!”
“해봐!”
“……쌔애앰!”
금세 꼬리를 말고 도움을 청하는 태화였다.
상호는 아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으로 교탁을 똑똑 두드렸다.
“얘들아, 그만하고 수업 준비…….”
“뭘로 붙을 낀데?”
“……응?”
애먼 데 불똥이 튀고 있었다.
“정해뿔자 임마. 쌤이 누구 낀지. 뭘로 정할 끼고?”
“그…….”
단비는 지윤의 기세에 바로 꼬리를 내렸다. 동생이 많은 만큼 놀기도 잘 놀았지만 군기도 잘 잡는 지윤이었다.
이러다 싸우겠다. 상호는 더 불이 커지기 전에 진화 작업을 하려고 교탁을 강하게 두드릴 준비를 했다.
그때.
미래가 당당하게 검지를 치켜세웠다.
“소원권 배틀이야!”
아이들의 얼굴이 순간 멍해졌다.
“……응?”
“뭐……?”
상호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교탁을 향해 내려가던 그의 손은 어느새 뒷짐을 지으러 등으로 향하고 있었다. 소리 없이 조용히, 얌전히. 아이들의 시선을 끌지 않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면서.
왠지 땡잡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325. 땡잡았네
“이게…….”
태화가 눈을 끔뻑였다.
교실 중앙에 모인 책상. 아이들은 학년별로 갈라서 양옆에, 상호는 가운데 앞자리에 서 있었다.
“소원권…… 배틀이라고?”
“응!”
미래가 주머니에서 소원권 한 움큼을 꺼내더니 책상에 호기롭게 내려쳤다.
“소원권을 더 많이 낸 사람이 이기는 거야!”
“더 많이 낸 사람……?”
태화와 지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느덜이 우릴 우째 이기노? 우린 작년부터 모았는디…….”
“룰이 있어.”
미래는 1학년과 2학년을 빙 둘러 가리켰다.
“우선 각자 열 개씩 꺼내.”
“열 개씩?”
“응. 그러면 우리가 70개, 언니들 70개가 되겠지?”
“응.”
“그거를 잘 배분해서 나눠 가지고 우리랑 언니 팀에서 한 명씩 나와서 붙는 거야.”
“한 명씩…….”
태화가 가소롭다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열 개씩 다 쓰면 우리가 다 이기는 거 아냐?”
“우리가 둘한테 18장, 둘한테 17장 주면 네 번 이기고 세 번 지겠지.”
“……어라.”
태화의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른 2학년들의 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곱 명이 각각 열 개씩 쓰는 게 아니라, 70개를 일곱 명이 나눠 쓰는 거야. 어때. 이거면 공평하지?”
“네가 유리하잖아!”
“언니 바보야?”
“내가 왜 바보야?!”
“그치? 언니 똑똑하지? 그럼 이길 수 있겠네.”
“……끄응.”
태화는 꿍얼대다가 2학년들과 머리를 맞댔고, 미래도 1학년들과 모여서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상호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기회야…….’
소원권을 뭉텅이로 회수할 기회.
판이 커질수록 회수할 수 있는 양도 많아진다. 그는 바람을 한번 넣어 보기로 했다.
“얘들아, 열 개씩은 너무 적지 않아? 두당 20개씩은 돼야…….”
“아니에요.”
“일부러 적게 쓰려고 대결하는 건데요.”
“열 개면 충분해요.”
“……그래.”
금세 쪼그라들어버린 상호를 뒤로하고, 아이들은 각자의 진영에서 작전을 계속 세워나갔다.
2학년 아이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이거 그러니까 네 번을 이기려고 해야 하는 거지?”
태화의 말에 나빛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18 둘, 17 둘, 0 셋으로 해야 돼?”
“아니 멍청아. 그러면 쟤들이 우리 0에 1만 맞춰도 3승을 날로 먹잖아.”
“쟤들이 누가 0개 가졌는지 어떻게 알아? 그리구 3승이면 지는 거잖아…….”
“쟤네가 1로 꽉 채우고 하나만 몰빵하면 4승이잖아, 빠가야!”
“그럼 우리도 1씩 채워놓으면…….”
“쟤들이 1을 쓸지 2를 쓸지 어떻게 알아!”
“머리 아퍼…….”
지윤이 해롱대는 나빛을 제치고 눈을 번득였다.
“미래 쟈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께 이럴 기라. 필승법이 있는 거 아이가?”
“필승법?”
그 말에 아이들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빠졌다. 셈을 하듯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하지만 침묵은 길지 않았다.
“……모르겠어!”
“머리 아퍼……. 으이잉…….”
“그런 게 있긴 해……?”
“있을 겁니다.”
“응?”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이츠키가 손바닥을 쫙 펼쳐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에서 까만 눈이 반짝였다.
“제한된 자원과 정해진 룰. 필승법은 없더라도 가장 가까운 길은 존재합니다.”
그 말에 나빛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정말? 그럼 가위바위보도 그런 거 있어?”
“통계적으로 가위가 제일 승률이 높다고 합니다.”
“우와!”
“그걸 믿냐, 등신아!”
“우잉…….”
그때 미래가 2학년들에게 말했다.
“다 됐어? 정했지?”
“아니, 아니! 타임!”
“더 필요해? 그래.”
“끄응…….”
태화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다른 아이들을 째려보았다.
“야, 너희는 뭐 좋은 생각 없어?”
“네!”
“넌 있어도 설명 못 하잖아. 천세희, 도은율. 머리 좀 굴려 봐.”
“글쎄.”
은율이 턱을 괸 채로 중얼거렸다.
“요는 이거잖아. 네 번만 이기면 되고, 거기에 집중해서 투자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다른 셋을 내주기에는 너무 위험하다.”
“그치.”
“그러면…….”
은율은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꺼내 계산기를 두드렸다.
“2 셋, 11 둘, 21 둘로 하자.”
“왜? 왜 2랑 11이야?”
“0은 무조건 지고, 1은 잘해도 비기기밖에 못 하잖아. 거기서 딱 1만 투자하면 승리할 확률이 생기는 거니까.”
“그럼 11은?”
“평균이 10이잖아. 그것보다 하나는 더 넣어야 해볼 만하지.”
“오……. 너 초등학교 때 수학 몇 등이었냐?”
“수포자였어.”
“…….”
범생이인 줄 알았더니 칼에만 그런 모양이었다. 태화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21은 뭔데?”
“그냥 최대한 넣은 거야. 무조건 이기는 패 두 개. 그리고 나머지 2랑 11에서 2승을 노리는 거지.”
“……으음.”
그 방법대로라면 ‘10 일곱’에게는 무조건 이기고, 아까 말한 ‘18 둘 17 둘 0 셋’에게도 할 만해 보였다.
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뭐 좋을 것 같네. 소원권 모아 봐.”
“나! 내가 21개 가질래!”
“뭔 상관이야, 바보야!”
“우잉…….”
소원권을 나눠 가진 2학년들은 책상 너머의 1학년들을 향해 돌아섰다.
1학년들은 이미 준비를 마친 듯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준비됐냐? 누가 일빠야?”
“근데 이거 누가 나오는지가 상관이 있어?”
“몰라…….”
1학년 첫 타자는 미래.
2학년 측에서는 은율이 나와 미래를 마주하고 섰다.
“하나둘셋 하면 까는 거야.”
“어차피 상관없지 않아……?”
“하나! 둘! 셋!”
책상이 소원권이 내리쳐졌다.
미래가 5.
은율은 11.
“이겼다!”
“어어어디 하늘같은 선배한테 깝쳐!”
나빛과 태화가 방방 뛰었지만, 미래는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다음 타자는 단비. 그리고 지윤.
“살살해라잉.”
“멍?”
단비가 눈을 끔뻑이며 책상에 소원권을 냈다.
단비가 5. 지윤은 2.
“아니 그걸 지냐!”
“머 우야라고. 닌 지면 뒤진데이.”
“에베베베~.”
다음으로는 이서와 나빛.
이서가 상대라는 것을 확인한 나빛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헤헤헤…….”
“…….”
“헤헤헤헤…….”
져라.
이서는 웃음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진땀을 흘렸다. 그렇지만 정해진 숫자를 제멋대로 뺄 수는 없고.
“하나아~ 둘~.”
나빛의 구령에 맞춰 소원권을 꺼낼 뿐이었다.
“셋! 어라?”
나빛이 2. 이서가 5.
소원권을 확인한 나빛의 안색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이서야.”
“……언니.”
“이서야……?”
“미안…….”
“빨랑 비켜! 다음!”
태화는 나빛을 밀어내고 나디아를 세웠다.
나디아의 상대는 초란.
“하나, 둘…… 셋.”
나디아가 11. 초란은 5.
계속 5다. 태화는 당황하며 머릿속으로 계산을 시작했다. 일단 전적은 승패패승.
남은 소원권은 이쪽이 2, 21, 21. 저쪽의 남은 소원권은 총 50. 2는 지는 거라 생각하면, 남은 21로 두 번 다 이겨야 했다.
승리 시나리오는 단 하나.
2학년의 2에 1학년이 크게 투자하는 것. 못해도 9 이상. 되도록이면 세 판에 균등히 나눠서.
‘제발……!’
이제는 왜 이렇게 열중하고 있는지도 잊어버린 채, 태화는 눈을 부릅뜨고 1학년의 다음 타자를 노려보았다.
나온 것은 하솔.
2학년에서는 이츠키가 나섰다.
“하나, 둘…….”
다른 아이들은 계산을 아직 안 했는지 긴장감이 없었지만, 이번 판이 분수령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태화는 조마조마한 눈으로 하솔의 손을 쳐다보았다.
미래도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셋.”
하솔과 이츠키가 동시에 소원권을 냈다.
5개.
하솔의 손에서 나온 소원권은, 5개.
‘……졌다!’
태화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미래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패배가 확정되었다는 걸 모르는 아이들은 대결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번에는 가은과 세희.
가은은 또 5, 세희가 21.
“이겼다!”
“지금 3승씩이제?”
“한 번만 더 이기면 돼?”
나빛은 뛸 듯이 기뻐했지만 태화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계산을 해 봐, 멍청아…….’
그 바람이 닿았을까. 멍하니 서 있던 세희가 움찔했다.
“……어라?”
“응? 세희 왜?”
“우리…….”
그때 책상에 소원권이 우르르 쏟아졌다.
대충 봐도 30개 이상.
“……41개, 야.”
아리가 볼을 붉히며 떠듬거렸다.
마지막 타자는 태화였지만, 굳이 소원권을 꺼낼 필요도 없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결과를 알게 되었기에.
태화는 떨리는 눈으로 미래를 돌아보았다.
“너…….”
“훗.”
“어떻게…….”
“언니들 생각이야 뻔하지.”
미래가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렸다.
완벽한 패배. 태화는 머리를 싸쥐며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선배의…… 권위가……!”
“됐어. 끝, 끝. 1학년 승.”
어쨌든 승부는 결정됐고. 상호는 씩 웃으며 책상에 흐트러진 소원권을 내공으로 긁어모았다.
“그럼 1학년들이 선생님이랑 특훈하는 걸로 하자. 됐지?”
“잠깐만.”
미래가 손바닥을 펼쳐 상호를 제지했다.
“소원권은 왜 가져가세요?”
“응? 내가…… 가져가는 거 아냐?”
“네?”
아이들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그걸 선생님이 왜 가져가요?”
“응? 그치만…… 이거 소원…….”
“이건 그냥 게임이잖아요.”
단비가 벙벙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그렇게 되는 거냐. 상호의 등에 진땀이 흘렀다. 영락없이 140개를 회수할 줄 알고 기뻐하는 중이었는데.
“그치만…… 그런 식이면…… 여기 중에 한 명이 소원권을 진짜로 쓰면 땡이잖아. 그러니까 승부로……. 누가 더 많이 쓴 셈 쳐서…….”
나빛이 맑고 동그란 눈을 깜작였다.
“이건 저희끼리 정한 거지 선생님이 선택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거야?”
“날로 먹으려고 하지 마세요…….”
“…….”
상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소원권을 회수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절절하게 깨달은 채.
“그래……. 그럼…… 1학년, 주말에 날 잡아서…… 특훈하자.”
“안돼요.”
“……응?”
끝난 거 아니었냐. 상호는 고개를 들었다가 은율이 내공을 끌어올리는 것을 보고 움찔했다.
“……은율아?”
“저흰 내년 이맘때면 졸업 직전이잖아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퍼런 눈빛.
보이지 않는 힘이 아이들과 상호를 짓누르고 있었다.
“저희는 올해 아니면 놀 시간이 없어요.”
“노는 게 아니라 특훈…….”
“내년 이맘때면 헌터 시험이잖아요. 놀 시간도 없고, 애초에 매일매일이 특훈일 때예요.”
“……그렇긴 하겠지만.”
“그러니까 저희는 올해 가야 해요.”
은율의 눈동자에 광기가 엿보였다.
“저는 작년에 못 갔으니까.”
“저도입니다. 저는 그때쯤이면 이미 귀국해 있을지도.”
“네!”
이츠키와 나디아가 동시에 손을 들었다.
그치만 이미 승부는 났다. 특훈하러 가는 것은 1학년들로 결정됐는데. 이 아이들을 더 데려갈 수는 없고. 열 명은 너무 많기도 하고.
데려갔다가는 4인방에게 다짐육처럼 갈려 나갈 것이다.
“…… 그럼 이렇게 하자.”
상호는 은율과 이츠키, 나디아를 돌아보았다.
“너희는 어쨌든 놀고 싶은 거지?”
“들켰습니다.”
“네!”
“그러면 나중에 겨울방학에…….”
스키장이라도 같이 갈까, 라고 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구체적으로 말해버리면 4인방이 머리끄댕이 잡고 따라올까봐.
그래서 대충 얼버무렸다.
“따로 가자. 작년에 안 간 2학년들만…….”
“네!”
“좋습니다.”
“……네.”
은율도 그럭저럭 납득한 모양이었다.
또다시 어쨌거나 저쨌거나, 결국에는. 특훈은 1학년만 받는 것으로 결정. 확정.
상호는 박수를 한 번 짝 쳤다.
“그래, 어쨌든, 오늘도 수업이 있고…… 오늘부터는 다시 1학년도 봐줄 테니까, 슬슬 나가서 수업하자.”
“네~.”
아이들은 책상을 원래대로 놓기 시작했다.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교실을 시끄럽게 채웠다.
책상을 들고 움직이는 아리의 곁에 미래와 단비가 슬쩍 다가섰다.
“잘됐지?”
“아리 땡잡았네, 멍.”
“조, 조용히 해…….”
아리는 고개를 푹 숙여 푸른 머리카락 사이로 얼굴을 숨겼다. 미래가, 단비가, 그리고 상호가 보지 못하게.
비늘이 드문드문 난 볼이 발갛게 물들고 있었다.
326. 특훈
금요일,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간.
“우와~.”
뒷자리에서 미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납치당한다~.”
“팔려간다~.”
운을 맞추는 것은 단비의 목소리.
“보신탕집에 팔려간다아~.”
“쌤이 몸보신하러 잡아먹는다아~.”
“꺄아아~.”
“…….”
상호는 입맛을 다시며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분명 태화는 차에 타지 않았는데. 눈 감고 들으면 태화라고 착각할 정도의 내용들.
‘태화도 대충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신문 1면이네 여고생 단체 실종사건이네 그랬던 것 같다. 상호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차창에 비친 아이들을 흘끗했다.
‘얘들도 이제 2학년이구나…….’
점점 더 강력해질 것이다. 무공뿐만이 아니라 사람을 지지고 볶는 능력까지. 2학년들은 지금보다 더 강해질 것이고.
그때가 되면 감당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나는…….’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제 2학년들의 공세를 막아낸 탓에 몸이 아주 피곤했다. 나만 몰래 데려가라느니, 차를 부숴 버리겠다느니, 특훈을 받지 못해 10등 안에 들지 못하고 학비를 못 내어 퇴학당해 버릴 거라느니.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결국은 이렇게 약속을 지켰다.
‘그나저나 다 올 줄은 몰랐네.’
차에 탄 아이는 일곱 명. 1학년 전원.
다른 아이들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가은까지 올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여태까지처럼 자신만의 훈련을 고수할 줄 알았는데.
집까지 따라올 줄은 더더욱 예상 못 했고.
‘행동거지를 조심해야겠구만…….’
상호는 가은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며 차를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