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러니까 그놈이 신이고.”
“네.”
“너는 인간이었는데 죽기 싫어서 악마 편에 붙었고.”
“네.”
“그 신이란 놈은 스스로의 특징 여섯 개를 복사해서 여섯 악마한테 나눠줬는데…….”
“네.”
“그중 하나가 너고.”
“네.”
“너하고 여기 둘 말고 셋이 더 있다고?”
“네.”
“근데 왜 그렇게 약해?”
“…….”
베르멜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희 여섯이 그놈 다음가는 악마라는 거 아냐? 그렇다기엔 신기할 정도로 약한데. 너 아무 말이나 막 지어내는 건 아니지?”
“아니에요…….”
“그럼?”
“저희는 그분의…….”
“그분……?”
상호는 고개를 갸웃하며 베르멜로의 뒷목을 잡았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베르멜로가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다급히 소리쳤다.
“그 새끼! 그 X발새끼!”
“계속해 봐.”
“……그놈의 능력을 따라가게 되어 있어서…… 그놈이 약해지면 저희도 약해지고, 그놈이 강해지면 저희도 강해지고…….”
“지금은 그놈이 약해서 너희도 약하다?”
“네…….”
“그럼 뭔 깡으로 쳐들어온 거야?”
“이렇게 빨리 당할 줄 몰라서……. 그리고 저희는 거의 안 죽으니까……. 제가 저 하급 악마를 구하는 걸 실패해도, 다른 둘이면 충분히 목표를 달성할 줄 알고…….”
목표라 함은 세희를 말하는 것이다. 상호의 눈에 살기가 깃들었다.
“너희.”
“네…….”
“내 제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안 거냐?”
베르멜로는 상호의 표정을 흘끗했다가 살기에 흠칫하고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하며 떠듬떠듬 대답했다.
“그…… 알고 계신 줄 알았는데…….”
“쓸데없는 말.”
“죄송합니다……. 저기, 먼저 봉인시켜두신 저 하급 악마 있잖아요…….”
“어.”
“저놈한테 다치신 적이 있지요.”
“어.”
“그래서 주인님의 몸과 영혼에 저놈의 흔적이 남아서…… 주인님의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된 거예요.”
상호의 눈살이 확 찌푸려지자 베르멜로가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상호는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
확신은 하고 있었지만, 악마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느낌이 달랐다. 더욱 생생하고 서늘한 것이.
‘들을수록 그놈을 죽여놓고 싶어지는데…….’
여기 뒤섞인 두 놈은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방생해도 되지만, 저 개 해골 악마만은 그러면 안 되었다. 반드시 죽여 놔야 했다.
상호는 한 번 더 묻기로 했다.
“벨.”
“네…….”
“날 믿냐?”
“네, 네…….”
전혀 그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러면 너흴 죽이는 방법 알려줘.”
“주인님…….”
“믿는다며.”
“제발…….”
베르멜로가 고개를 푹 숙였다.
갈아버리면 다른 질문들에 대한 답도 못 듣게 된다. 상호는 혀를 차고 손을 내저었다.
“됐다. 그래. 그건 이제 안 물을게. 여하튼…… 저놈이 내 생각을 읽는 건 알겠어. 그럼 저놈은 너희한테 어떻게 알려준 거야? 저렇게 봉인되어 있는데도 연락할 수단이 있나?”
“하위 악마는 상위 악마에게 종속되어 있어요. 상위 악마는 하위악마의 생각을 읽을 수 있고요. 종속 관계에 있는 악마끼리는 거리가 멀어도 소통할 수 있어요.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좋지만…….”
베르멜로는 상호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몬스터들이 신의 뜻을 따르는 것과 비슷한 원리……죠.”
“아하……. 그럼 저놈은 누구한테 종속되어 있는데?”
“지배의 악마예요. 하급 악마는 대부분 그놈에게 종속되어 있어요. 일종의 총사령관…… 같은 거죠.”
“아까 말한 여섯 놈 중에 하나야?”
“네.”
상호는 턱을 괴고 베르멜로의 말을 되짚었다.
베르멜로가 욕망, 여기 섞여 있는 놈들이 각각 야성과 신비. 방금 말한 놈이 지배. 그리고 남은 것이 두 놈.
“너하고 얘네 둘하고. 그 지배란 놈하고……. 다른 두 놈이 뭐랬지?”
“하나는 불사.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저도 몰라요.”
“모른다고?”
“네.”
상호가 베르멜로의 턱을 잡자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지, 진짜! 진짜 모른다구요! 제발 사람 말을 좀 믿어 주세요!”
“너 악마잖아.”
“한때는 사람이었다구요! 저도 주인님이랑 똑같이 감정이 있다니까요!”
“그거야 뭐 말할 줄 아는 새끼면 다 그렇겠지. 나한테 중요한 건 니가 감정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냐.”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아이들에게 위험한지, 위험하지 않은지.
“어쨌든 그러니까, 저놈이 지금 내 생각을 읽어서 지배의 악마라는 놈한테 전해주고 있는 건가? 실시간으로? 네가 이렇게 까발리고 있다는 것도 알려지고 있는 거야?”
“제가 알기로는…… 저렇게 갇힌 후로는 아주 가끔만 연락이 된 걸로 알고 있어요. 게다가 거리도 너무 멀고, 다른 잡스런 악마들의 의식이 섞여 있어서…… 알아듣기 힘들다, 라고 했었어요.”
혈석 때문이리라. 상호의 머릿속에 리주가 혈석의 균열을 수복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런가……. 알겠어.”
그는 대야 앞에서 일어나 고무장갑을 벗었다. 욕조보다 큰 대야는 가장자리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난 이거 치우고 좀 자야겠다. 시간이 몇 시야, X발. 너도 좀 자라. 근데 너희 자긴 자냐?”
“저……저는 자요. 안 자는 애들도 있긴 하지만…….”
“잘됐네. 자고 있어.”
상호는 대야를 들고 문가로 걸어가다가 살벌한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허튼짓하면…… 몇 번이고 갈아버린다. 이놈들처럼 섞지도 않을 거야. 부활하면 갈고, 또 부활하면 또 간다. 알아들었지?”
“네에…….”
“잘 자라.”
“안녕히 주무세요…….”
베르멜로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바닥에 머리를 뉘었다.
324. 반란
“그래서.”
수복이 끝난 건물 내부의 중앙 마당.
민정은 혈석 옆에 놓인 통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두면 된다구?”
“응.”
금속으로 만든 큰 통.
높이는 사람 명치 정도, 너비는 양팔을 쫙 벌린 정도의 원통형 기계.
안에서는 주걱이 자동으로 붉고 진득한 곤죽을 뒤섞고 있었다.
“보관은 이렇게 하면 되고…… 이제 위치는 좀 고민을 해봐야지. 혈석이랑 떨어뜨려 놓을지, 같이 보관할지……. 근데 난 알면 안 돼.”
상호의 말에 민정이 눈을 끔뻑였다.
“알면 안 된다니?”
“혈석에 들어있는 놈이 내 생각을 읽어서 전해준대. 그러니까 나는 알면 안 되겠더라고.”
상호는 옆을 흘끗했다. 그곳에는 휠체어에 앉은 베르멜로가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녀석도 어디 처박아 놔야겠는데…… 누나랑 형이 정해. 나는 모르는 게 나을 것 같아. 정말 중요한 게 아니면…… 나한테는 말하면 안 돼, 이제.”
“……그래.”
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랑 말해볼게. 너는 이제 학교 갈 거야?”
“그래야지. 더 볼 것도 없으니…….”
리주는 악마 인자를 없애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베르멜로를 취조해도 헛수고.
상호가 직접 알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나 갈게. 나중에 봐.”
“응…….”
상호가 건물을 향해 걸어가자 민정이 느리게 손을 흔들었다.
상호는 그게 아쉬움 때문인 줄 알고 쓰게 웃으며, 내공을 뻗어 민정의 볼을 간질였다.
“잘 있어.”
그 말을 남기고, 그는 중앙 마당을 나와 건물로 들어갔다.
하지만 민정이 망설였던 이유는 아쉬움 때문이 아니었다. 지난밤에 목격한 것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악마를 당황시킨 태화의 공격.
‘같은 악마라서인가…….’
그러나 그걸 상호에게 말해줬다간 악마들에게 그 정보가 흘러가고, 태화가, 나아가 모든 악마 융합체가 위험에 빠지게 될 터였다.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나중에 문자로 말해야겠다.’
태화 좀 신경 써서 가르쳐 달라고.
민정은 한숨을 폭 쉬고는 도현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
* * *
“그래서 얘가 팔 짜르고! 내가 가슴에 뽝 꽂아버리고!”
“그랬어?”
“걔들 겁나 쎈 놈들이지? 우리 사실 졸라 쎈 거 아냐?!”
“아니야.”
상호가 무심하게 반응하자 조수석에서 태화가 불꽃을 뿜었다.
“제자가 발전을 했는데! 칭찬을 왜 안하는데!”
“그러게.”
“우씨……, 해보자는 거지?!”
“그런가?”
“아아아아악!”
상호는 달려드는 태화에게 딱밤을 날리고 운전대를 돌렸다.
사실 속으로는 놀랐다. 아이들이 악마를 상대로 싸웠다는 말을 듣고. 그 혈석 속의 악마보다는 훨씬 강한 놈들인데. 곁에 민정이 있긴 했지만.
하지만 성력도 안 듣는 애가 악마를 잡겠다고 설치다가 다치면 감당하지 못할 일이 생길 것 같아서, 칭찬은 하지 않았다.
“태화 넌 연말평가나 준비해. 얼마 안 남았다.”
“얘는? 얘는 안 준비해?”
태화가 뒷자리에 앉은 세희를 가리켰다.
“얘는 당연히 1등이다 이거야?”
“세희는 시험 안 봐.”
“왜?”
“내가 가르쳤으니까.”
다른 때와는 달리 연말평가에는 장학금이 걸려 있으니까. 상호는 아이들의 정당한 노력을 허사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세희는 내가 따로 시험 볼 거야. 다혜도 선생님들이 따로 시험 볼 거고. 그러면 태화 너 1등 할 수 있지?”
“응?”
태화의 눈에 당황이 스쳐 지나갔다.
“1등? 왜?”
“너 맨날 그랬잖아. 다혜만 없으면 된다, 다혜만 없으면 다 바른다. 이번엔 세희까지 빠지니까 무조건 할 수 있겠네. 안 그래?”
“다, 당연하지.”
전혀 당연하지 않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상호는 태화 모르게 슬쩍 웃으며 백미러를 흘끗했다. 세희도 쌤통이라는 듯이 빙긋 웃고 있었다.
“그래? 그럼 꼭 1등 해야 된다?”
“한다니까!”
“못하면 어떡할래?”
“못하면…… 음…… 쌤이랑 결혼해 줄게.”
“올해 끝날 때까지 외식 금지야.”
“왜애애애! 그럼, 그럼 하면! 1등하면!”
“올해 끝날 때까지 매일 외식시켜 줄게.”
“진짜지!”
태화의 눈에 불꽃이 타올랐다.
“딱 대! 1등하면 쌤이랑 아침점심저녁 다 외식하고 외박도 할 거야!”
“매일이라고 했지 삼시세끼랬냐? 저녁만 사줄 거야.”
“어쨌든! 매일 밥 사주는 거야!”
“그래, 그래.”
상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태화가 1등을 할 일은 없을 테니까.
차가 학교를 향해 달려갔다.
* * *
“뭐하다 온 거예요?”
미진이 그를 흘겨보았다.
꽤나 날 선 말투였지만, 이 정도는 디폴트. 기본값. 상호는 미진이 지금 순수하게 궁금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냥. 악마 일 때문에 출장 갔다 왔어요.”
“애들은 왜 데려갔어요?”
“필요해서.”
“나빛이가 하루종일 표정이 안 좋던데요.”
“…….”
굳어 버린 상호에게 미진이 후속타를 날렸다.
“지윤이도요.”
“…….”
“애정을 줄 거면 편애는 하지 마세요.”
“……그래야죠.”
“참고로 제가 말하는 애정은 껴안고 손대고 하는 그런 애정이 아니에요.”
“…….”
상호는 애써 무시하고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점심시간.
“점심은 먹었어요?”
“네.”
“애들 평가 준비는 시작했어요?”
그 말에 미진이 눈을 부라렸다.
“말 잘 하셨네요.”
상호는 그 눈빛에 움찔하며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시선을 피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누가 상급자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1학년 애들은 나몰라라 할 거예요?”
“아니…….”
“세상을 구해야 돼요? 세희가 먼저예요? 고등학교 첫해를 다니는 애들이 담임이랑 수업하고 싶어하는데, 그것도 못 해주면서 무슨 세상을 지켜요?”
“그게…….”
“애정을 줄 거면 편애를 하지 말라고요.”
“…….”
말이야 바른 말이다. 상호는 이마에 흐르는 진땀을 닦으며 고민했다.
목표의 최소치는 이미 달성했다. 세희가 초혼강기를 한 번이라도 쓰는 것. 그가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세희와 해련의 목격담과 여러 정황증거들로 확신할 수 있었다.
제일 좋은 것은 당연히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되는 것이지만, 첫술에 배부를 순 없는 노릇이고.
‘그래도 아직은…….’
보험은 확실할수록 좋은 법이니. 세희는 계속 가르쳐야 했다.
“어쩔 수 없어요. 우선순위는 있는 법이니까.”
상호의 말에 미진이 표독한 눈빛을 보냈다.
“그래도 애들한테 신경 좀 쓰세요.”
“그래야죠…….”
1학년 아이들이 많이 서운해하나 보다. 상호는 그렇게 여기며 방금 미진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애정을 줄 거면 편애를 하지 말라.
그는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하…….’
아이들도 그의 반. 미진도 그의 반.
그러니까, 자신에게도 아이들처럼 애정과 관심을 달라, 라는 말을 돌려 말한 것이다.
‘나도 이제 사람 맘 모르는 돌대가리가 아니라고…… 훗.’
상호가 뺀질거리는 웃음을 짓자 미진의 표정이 점차 썩어들었다.
“뭐가 웃겨요?”
“아뇨. 후훗…….”
“대체 왜 그렇게 사이코같이 웃는 거예요?”
“…….”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상호는 미진을 달래주기로 결심한 참이었다.
“미진 씨.”
“네.”
“요즘 뭐 힘든 일 있어요?”
“딱히 짜증 난 거 아니거든요?”
“아니 사람 말을 앞서서 곡해하지 말고……. 그냥 안부차 물어보는 거예요.”
“없어요.”
“없어요?”
미진의 어깨에 상호의 손이 턱 놓였다.
그 순간 미진이 몸을 움찔하더니 상호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턱
“…….”
상호는 미진의 손을 잡은 채로 굳었다.
‘이건…….’
진짜 공격.
그의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할 정도로 진심이 담긴 공격이었다.
“……미진 씨?”
“…….”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것 같았다.
상호는 황급히 미진에게서 물러나 슬금슬금 문가로 걸어갔다.
“오, 오후 수업은 내가 할게요…….”
“…….”
“미진 씨는 쉬고 있어요. 제가 1학년 애들까지 수업할 테니까…….”
“…….”
“이따 봐요!”
교무실 밖으로 도망치는 상호의 등 뒤를, 미진의 가시 같은 시선이 따끔하게 찔러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