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6화 (326/501)

* * *

“별일 없었지?”

“네.”

세희는 문을 닫으며 대답했다.

“그냥 피 조금 뽑고 피부 약간 뜯었어요. 샘플이 더 필요했대요.”

“그래.”

상호는 벽에서 등을 떼고 세희의 어깨를 감쌌다.

“가서 쉬자.”

“저희 여기서 자고 가는 거죠?”

“응.”

“같이 자는 거예요?”

“……아마도?”

확답이 아니었다. 여지를 남겨두는 대답.

그 말을 들은 세희의 눈과 입이 부드럽게 구부러졌다.

“같이 자요?”

“그럴 수도 있고…….”

“같이 자요.”

“그렇게 약속을 할 정도로 확실하진 않고…….”

“같이.”

“사람들 눈도 있으니까…….”

“자요.”

“…….”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세희의 등을 밀었다.

“그래, 그래 가서 자자…….”

* * *

‘겨우 재웠네.’

상호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양옆에는 세희와 태화가 팔을 하나씩 벤 채로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크아…….”

“쿠울…….”

이따금씩 태평한 코골이 소리를 내면서.

셋이 있는 곳은 좁아터진 민정의 방. 방주인인 민정은 침대에서, 셋은 바닥에 깐 이불에서 자고 있었다. 이불도 넓지가 못해서 태화는 반쯤 바닥에 몸을 걸친 채였다.

상호는 내공을 뻗어 태화와 세희의 머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누가 업어가도 모르겠네…….’

헌터로서 야영을 하게 되면 작은 기척에도 일어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래가지고는 몬스터에게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지금은 아이들이 곤히 자서 다행이었다.

‘조심해서…….’

상호는 팔을 빼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 후 바닥에 걸쳐져 있는 태화를 똑바로, 세희와 나란히 눕게 한 뒤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러자 태화가 몸을 두어 번 뒤척이더니.

“우웅…….”

세희를 꽉 끌어안고 뺨에 뺨을 비볐다.

“쌔애앰…….”

“선생님…….”

세희도 태화에게 마주 뺨을 비볐다.

상호는 두 아이가 서로를 자신으로 착각하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고민에 빠졌다. 핸드폰을 꺼낼지 말지.

‘찍어서 보여주면 환장할 텐데…….’

그래도 이런 못된 장난을 치면 업보가 돌아올 게 뻔해서, 핸드폰을 꺼내려는 욕구를 꾹 참고, 마음속에 저장하기로 했다.

상호는 돌아서서 민정이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누나.”

그가 부르자마자 민정의 눈이 슬쩍 뜨였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응.”

“안 자고 있었구나.”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상호는 쓰게 웃고 민정의 손을 잡았다.

“산책 좀 할까?”

“좋지.”

민정은 그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둘은 외투를 챙겨 입고 살금살금 방을 나왔다. 눈이 마주칠 땐 어색하면서도 장난스럽게 웃고, 좁은 곳에서 어쩌다 몸이 닿았을 땐 일부러 더 밀어붙이면서.

육각형의 모서리 쪽 복도가 꺾이는 부분, 은은한 불빛 아래에서 이따금씩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경비가 있는 거야?”

“응. 혈석도 감시하고. 누가 침입하진 않는지도 보고.”

민정의 대답에 상호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우리가 같이 돌아다니는 걸 보면…… 사람들이 오해하겠지?”

“오해인가?”

“우린 그냥 단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잖아.”

“그치. 이 야밤에 굳이.”

민정은 상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빈방이 있을 거야.”

둘은 살금살금 복도를 걸었다.

민정이 비록 무예가는 아니었지만, 기척을 숨기는 데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야전에서 몬스터들을 피해 숨곤 했기 때문에. 당연히 상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아무도, 모퉁이에서 모퉁이로 달리는 둘을 발견하지 못했다.

“옛날 생각나네.”

상호는 정수기 옆에 몸을 숨긴 채로 민정의 귀에 속삭였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 거야?”

“연구실. 거기는 비어 있을 거야.”

연구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살짝 문을 열어보니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둘은 눈이 마주치자 씩 웃고는,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민정이 외투를 벗는 게 느껴졌다.

“상호야.”

“응.”

그가 대답하자 민정은 더운 숨을 호 불었다.

시동이 걸렸나 보다. 상호는 살짝 웃고는 민정의 허리를 감싸며 바지춤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때.

“끅.”

방 안쪽에서 딸꾹질 소리가 들렸다.

상호와 민정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히끅…….”

리주의 목소리.

하지만 아직 깬 것은 아닌지, 아무런 움직임 없이 딸꾹질만 하고 있었다. 잠꼬대인 모양이었다.

늦게까지 연구하다가 잠에 든 걸까.

‘젠장…….’

상호는 어둠 속을 바라보며 살며시 바지춤을 잡았다.

“나가야겠는데.”

“으, 응…….”

민정도 당황하며 옷을 다시 입으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정말로 난데없이.

웨에에에엥──

사이렌이 울리며, 적색등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흐끅?!”

그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리주는 침이 흐르는 얼굴로 퍼뜩 고개를 들었다가, 문가에서 합체를 준비하던 모습으로 굳어있는 상호와 민정을 발견하고는 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회탈처럼 가늘던 눈이 튀어나올 듯이 불거져 있었다.

“저, 저기, 이게 뭔……?”

“…….”

상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바지춤을 올렸다.

“내가 확인할게. 누난 애들이랑 내 칼 좀 챙겨서 안전한 곳으로 가.”

“칼? 너는?”

“빌려 쓰지 뭐.”

민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순간이동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리주가 황급히 컴퓨터를 켜려 했다. 상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해요? 빨리 나와요.”

“아, 아직 데이터 백업을 못 했어요. 깜빡 자버려서…….”

“별일 아니면 다시 오면 되고 별일이면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겠죠. 나가자고요. 빨리.”

“자, 잠깐만…….”

리주는 허둥대며 키보드에 손을 올리려 했지만, 보이지 않는 힘에 잡혀 상호의 곁으로 질질 끌려가고 말았다.

복도로 나와 보니 자고 있던 헌터들이 달려나오고 있었다. 상호는 헌터 한 명을 대충 골라잡아 검을 뺏었다.

“칼 좀 빌립시다.”

그리고 리주를 헌터에게 밀어붙인 후, 중앙 마당 방향의 창문으로 달려갔다.

복도를 온통 울리는 사이렌 속에 목소리가 섞여 나왔다.

[미상의 존재 접근 중. 1분 전 결계 파괴. 도착 예상 시간 1분 미만. 전투 준비하십시오.]

그 순간, 공간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마나의 압력. 상호는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건물 가까이에 다가왔음을 깨닫고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뭐야.’

그의 몸이 일순 굳었다.

붉은색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아주 얇은 실의 형태로. 방사형으로 뻗어 나간 실의 중심에 웬 여인이 둥둥 뜬 게 보였다. 거미줄에 거미가 매달린 것처럼.

‘……사람? 몬스터?’

일단 적인 건 분명한 것 같다. 상호는 검부터 뽑고 여인을 주시했다.

눈처럼 흰 피부에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 얼굴은 붉고 반투명한 면사포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가느다란 몸은 붉고 반투명한 드레스에 채 가려지지 못해 실루엣이 훤히 드러났다.

하늘을 뒤덮은 붉은 실은 여인의 옷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뭘 하려는 거지?’

그런 의문을 품은 순간, 혈석이 둥실 떠올라 여인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여인이 개 해골 악마의 봉인을 풀러 왔다는 걸 깨달았다.

‘……젠장!’

그는 내공을 뻗어 혈석을 붙잡고, 검에 초혼강기를 둘러 여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여인은 하늘을 뒤덮은 붉은 실 뒤로 유령처럼 스르르 물러났다.

촤아악

실에다가 힘껏 검을 휘둘렀지만, 실은 베이지 않고 검에 진득하게 들러붙더니 붉은 액체가 되어 칼날을 타고 움직였다.

“쳇…….”

상호는 검을 흔들어 그 꺼림칙한 액체를 털어내며 뒤로 물러났다.

그때 여인의 면사포 아래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른눈을 가린 자…….”

나직하고 고상한 목소리였다. 귀족을 연상케 하는.

“그대가 그분께서 말씀하신 대적이로군요.”

“너도 악마냐?”

상호의 검이 여인을 겨눴다.

“우리말은 또 언제 배운 거야? 너희 혹시 학원이라도 있는 거냐?”

“인간의 말 따윈 배우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뽄새가 똑같네. 확실히 그놈이랑 같은 족속이구만.”

“잘 아시는군요.”

여인이 요염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허공에 붉은 기운이 모여들어 창을 하나 만들었다. 그 모습이 꼭 나빛과 효은의 성창과 닮아 있었다.

상호는 검에 내공을 한껏 불어넣어 초혼강기를 길게 뽑았다.

“너희 대빵도 날 무서워해서 도망쳤는데…… 너는 뭘 믿고 온 거냐? 그것도 혼자서. 무슨 목적으로.”

“그대는 몰라도 됩니다.”

창은 혈석을 향해 날아갔다.

그를 노리고 만든 게 아니었던 것이다. 상호는 급히 검을 휘둘러 창을 베었다. 창은 마치 물풍선처럼 터져 나가며 액체를 사방에 흩뿌렸다.

여인이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그대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앗?!”

여인의 목소리에 당황이 묻어났다.

하늘빛이 한 번 반짝이더니 붉은 실이 찢어지고, 여인의 팔까지 날아갔기 때문에.

여인은 잘린 팔을 부여잡았다.

“윽……!”

“웃기지 않냐?”

상호는 다시 검을 휘둘러 붉은 실의 그물을 완전히 걷어버렸다.

“너희 대빵을 내가 이겼는데. 따까리가 무슨 수로 날 이기겠다는 건지. 그럴 거면 따까리가 아니라 네가 대빵을 했어야지.”

“큭……!”

여인의 몸에서 붉은 실이 뿜어져 나왔다.

실이 상호를 향해 가닥가닥 뻗어 나갔지만, 맹렬하게 피어오른 초혼강기에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실력이 별론데. 저기 돌 속에 놈이랑 다를 게 없어.”

상호는 피식 웃고 재차 검을 휘둘렀다.

여인에게는 그 공격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여인이 몸을 뒤로 빼기도 전에 얼굴을 가린 면사포가 잘려서 떨어져 내렸다.

“……윽.”

피처럼 붉은 입술.

겉눈썹도 붉고, 속눈썹도 붉고. 눈동자는 동공이 없이 온통 붉기만 했다. 꼭 피로 칠한 천사 같았다.

상호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검을 들었다.

“다시 묻자. 뭘 노리고 온 거냐? 너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

여인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싸우려고 하지도 않고, 도망치려 하지도 않는다. 그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끼던 상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시간벌이.

“……다른 놈이 있군.”

“아하…….”

여인이 빙긋 웃었다.

“흥미로운 상상이네요.”

자백에 준하는 발언이었다.

여인의 잘린 팔의 단면에서 붉은 액체가 울컥 쏟아지더니, 매끈하고 붉은 팔의 형태를 취했다.

“그래서 도망칠 건가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적을 찾아서?”

“…….”

“날 밑에 있는 자들에게 맡길 셈이라면…… 이거 하나만 알아두세요. 그대를 제외한 모든 인간은, 그대가 이르는 소위 우리 족속들에겐, 아무리 강하더라도 한 치 벌레와 다름없다는 걸.”

“……쯧.”

이놈들이 두려워하는 건 초혼강기뿐이다.

밑에 있는 헌터들에게 맡기자니 필히 희생이 생길 테고, 다른 놈을 찾자니 어디서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최선의 방도는 하나.

‘최대한 빨리 쓰러트린다.’

상호는 더는 대꾸하지 않고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322. 연쇄살마

“무슨 일이에요?”

태화는 이불을 걷으며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도망쳐야 한다구요?”

“응.”

“쌤은요? 쌤이랑 으쌰으쌰하러 간 거 아니었어요?”

“일이 생겨서.”

민정은 상호의 검을 찾아 세희에게 건네고 방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일단 너희부터 안전한 데…….”

그때 한 줄기 마나가 방에 스며들었다.

그 마나는 스스로 의지를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민정이 그리는 마법진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꼭 감시를 하려는 듯이.

평범한 헌터는 느끼지 못했겠지만 민정은 알아차렸고, 그 즉시 마법진의 작성을 멈췄다.

“쌤?”

태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순간 건물 바깥쪽의 벽이 우르르 부서지면서 무언가가 달려들었다.

“윽……!”

푸른 방어막이 민정과 아이들을 감쌌다.

민정이 방어막을 펼치자마자 세희는 상호의 검을 뽑았고, 태화는 마나를 운용해 방어막 바깥에 검은 불덩이를 만들었다.

‘실습을 시킨 보람이 있구나…….’

하지만 이런 곳에 쳐들어올 놈들은 저딴 공격에는 눈 한 번 꿈쩍하지 않을 것이다. 민정은 태화의 검은 불꽃 뒤에 마나를 그러모았다.

무너진 벽 너머에서 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걸 알아챘나.”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태화의 불덩이가,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민정이 만든 푸른 구체가 날아갔다.

하지만 기대했던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드득……

촉수가 둘의 마법을 움켜쥐었다.

“심심한 수법이군.”

검고 번들거리는 촉수는 둘의 마법을 꿰뚫더니, 여러 갈래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태화가 촉수를 보고 움찔했다.

“뭐야, X바. 징그러!”

“징그러운 게 아니라 신비한 거지.”

촉수가 말을 했다.

정확히는 촉수와 이어진 본체. 굵은 촉수들은 금실로 수를 놓은 백색 로브 아래에서 나오고 있었다.

후드 속 그림자에서 방금 들었던 탁한 목소리가 났다.

“보아하니 동족인 것 같은데…… 동족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상당히 상처가 되는군.”

“나?”

태화는 눈을 끔뻑였다. 등 뒤에서는 검고 매끈한 꼬리가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내가 너랑 동족이라고? 구라치지 마! 문어같이 생긴 게!”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게 인간과 판박이군.”

“우씨, 누구한테 들었던 말 같은데…….”

민정은 고민에 빠진 태화를 뒤로하고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동반 공간이동은 흔적이 남는다. 아이들과 안전한 곳으로 도망쳐도 이놈이 쫓아올 터. 그렇다면 차라리 상호와 합류하는 것이 나았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떻게 아이들이 있는 곳을…….’

무슨 방법으로 알아내서, 바로 여기로 왔는지.

그래도 목표가 아이들이란 것은 분명해졌다. 그것도 십중팔구는 세희. 민정은 얼마 전 몬스터들이 단체로 습격해 왔던 때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너.”

대답다운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목적이 뭐야?”

백의의 그림자 밑에서 촉수가 수십 개 더 튀어나왔다.

촉수 하나하나의 끝에 마법진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본 민정은 방어막을 강화시키다가, 발밑에서 수상한 진동이 올라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세희도 느낀 모양이었다.

“피해!”

세희가 태화를 껴안고 바닥으로 몸을 날리자마자 둘이 서 있던 바닥이 폭발하듯 부서졌다.

콰앙

상황을 살필 틈도 없이 촉수의 마법진에서 검은 광선이 쏟아졌다. 민정은 광선을 막기 위해 방어막의 강도를 높이다가 흠칫하며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비산하는 돌조각 사이로, 무언가가 아이들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윽……!”

대응하기에는 늦었다. 탄식이 민정의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왔다.

그때 회색 흙먼지가 일순 찬란한 하늘색으로 번득이더니.

촤아악

검붉은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크르……!”

바닥을 뚫고 올라왔던 그 무언가는 짐승과 같이 신음하며 백의의 그림자 곁으로 도망쳤다.

백의의 그림자가 실소했다.

‘겨우 팔 하나 잘렸다고 이렇게 호들갑을 떱니까?’

‘닥쳐라.’

주홍색 눈동자가 흉악하게 번득였다.

사자와 인간을 섞은 듯한 모습이었다. 피부는 검고, 풍성한 갈기는 타오르는 듯이 누르고 붉었다. 강철처럼 빛나는 이빨 사이에서 인간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르렁거림이 흘러나왔다.

‘방금은 위험했다고. 평범한 마나가 아니었어.’

‘어련하시겠습니까.’

‘이 새끼가…….’

‘저한테 화낼 여유가 있으면 빨리 다음 공격이나 하시지요. 제가 맞춰 드리겠습니다.’

백의의 그림자는 혈석이 있는 방향을 흘끗했다.

마신을 맞상대했던 자다. 비록 마신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더라도. 혈마녀의 보잘것없는 실력으로는 그리 오래 잡아두지 못할 터.

빠르게 죽이고 물러나야 했다.

‘혈마녀야 어떻게 되든 딱히 상관없습니다만…… 그자가 오면 우리도 위험합니다. 어서 죽이고 가지요. 재수 없으면 우리가 죽을 수도 있으니.’

‘놈들은 우릴 못 죽여.’

‘눈 먼 칼에 처맞고 뒈질 수도 있다니까요.’

사자 악마는 더 대꾸하지 못하고 이를 갈다가, 땅을 박차고 목표를 향해 달려들었다.

검을 든 소녀.

세희는 침착하게 검을 들어 올렸다.

콰아앙

사자 악마의 코앞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민정은 쉬지 않고 마나를 운용했다. 아무리 세희가 놈에게 예상치 못한 일격을 가했더라도, 아이들이 악마를 상대하도록 둘 수가 없어서.

쿠르르……

그들의 발치에 굴러다니던 돌들이 한데 모여 사람의 형상을 갖췄다.

키가 2미터 정도 되는 바위 인간이 사자 악마를 향해 달려가고, 백의의 그림자가 쏟아붓는 마법이 민정의 결계를 마구 두들겼다.

“인간치곤 상당하군.”

꽤 선방하고는 있었지만, 어느새 민정의 결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버틸 수가 없다. 어떻게든 공격해서 주의를 분산시켜야 했다. 민정이 용을 쓰며 마나를 그러모으자 백의의 그림자 악마가 웃었다.

“하지만 그런 평범한 마나 따위로는……?”

퍼억

악마의 몸이 흔들렸다.

악마도, 민정도. 백색 로브의 흉부에 튀어나온 검은 결정창을 보고 당황했다.

“컥…….”

“어?”

민정이 태화를 돌아보자 태화가 손목을 찰싹 치며 가운뎃손가락을 세웠다.

“뒤져!”

악마가 재차 비틀거렸다.

죽을 상처는 아닌 듯했지만, 그렇다고 가벼운 상처도 아닌 듯싶었다. 민정은 놈의 허둥대는 촉수에서 고통과 당황을 읽을 수 있었다.

‘이놈들, 안 죽는 거 아니었나……?’

그녀의 시선이 태화의 뿔과 꼬리를 향했다.

‘설마…….’

의문을 풀 새도 없었다. 사자 악마가 골렘을 산산조각내고 세희에게 달려들고 있었기에.

민정이 보았던 그 어떤 몬스터보다도 빨랐다. 혈석에 봉인된 악마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상호만큼, 그리고 악마의 왕만큼.

세희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가 아닌데, 세희는 검을 치켜든 채로 사자 악마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피해!”

“야, 천세희!”

민정과 태화는 다급히 외치며 마나를 움직였다.

하지만 마나가 마법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그 마법이 사자 악마에게 닿기까지도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사자 악마는 세희에게 달려들었고.

세희도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피보라가 일었다.

“……어?”

세희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분명 검을 휘둘렀는데.

사선으로 휘둘렀는데.

“크…….”

사자 악마의 몸이 세로로 갈라지고 있었다.

정확히 반반. 정수리부터 가랑이까지. 검붉은 피가 잘린 단면을 따라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크아아악!”

그 사이로 검푸른 강기로 이뤄진 검이 보였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백의의 악마는 가슴에 박힌 결정을 촉수로 뽑아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악마의 앞에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머리.

붉은 눈과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의 머리였다.

‘……젠장.’

땀구멍이 있었다면 진땀을 흘렸으리라. 백의의 악마는 참수당한 혈마녀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뒷걸음질을 쳤다.

뒤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약한 놈을 보낸 거 아냐?”

뒤를 돌아보니 안대를 쓴 남자가 검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백의의 악마는 상호를 보자마자 순간이동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낌새를 눈치챈 민정이 좌표를 정하지 못하게 마법으로 방해하고 있었다.

‘이런…….’

공간이동은 글렀다. 빈틈을 만들고 날아서라도 도망치는 수밖에.

백의의 악마는 촉수들의 끝에 마법진을 띄웠다.

“어차피 우리는 죽지 않는다.”

“걔가 말해 주던데?”

“……뭐?”

“어떻게 하면 죽는지 다 말해 주더라고.”

상호는 검을 휘둘러 피를 털었다.

“멍청하지. 그걸 말하면 자길 살려 줄 거라고 생각했나 봐. 아주 술술 불더구만.”

“……!”

백의의 악마는 혈마녀의 머리를 노려보았다. 제일 약한 것도 모자라서 제일 멍청하기까지 하다니.

‘한심한……!’

분노로 온몸이 떨렸다.

하지만 그 분노는 곧 공포로 바뀌어 온몸을 굳게 만들었다. 어느새 성큼 다가선 상호가 검을 겨누고 있었기에.

검푸른 마나가 검의 주변에 넘실거렸다.

“당장 죽이진 않을 거야.”

“……고마워해야 하나?”

“아니, 반대지. 너흴 이용해먹을 방법을 찾을 때까지…… 죽어도 죽은 게 아니도록 만들어줄 테니까.”

“…….”

백의의 악마는 최후를 직감했다.

그렇지만 이대로 당할 수는 없으니.

“그럼 어디 해 보……!”

그가 기습적으로 촉수를 휘두르는 순간, 검푸른 암흑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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