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5화 (325/501)

* * *

“어떻게 됐어?”

민정이 커피를 내리며 물었다.

상호는 떨어지는 커피 방울을 벽에 기대어 선 채로 지켜보았다.

“시간이 좀 걸린다대. 결과가 나오려면.”

“얼마나?”

“그건 못 들었어.”

봉인소에 있는 민정의 방. 좁고 작은 방에는 최소한의 가구만이 놓여 있었다. 수증기를 따라 퍼지는 그윽한 커피 향이 금세 방을 가득 채웠다.

조금은 아늑한 듯도 하지만, 그래도.

“심심하겠다.”

상호가 방을 둘러보며 말하자 민정이 살짝 웃었다.

“학회에서도 비슷했는데 뭐.”

“그래도 거기는 외출이라도 하잖아. 여기는 뭐 할 것도 없어 보이는데.”

학회에서도 툭하면 외롭다고 말했던 그녀였다. 상호는 민정의 뒤로 다가가서 허리를 슬쩍 끌어안았다.

“둘이서 뭐라도 할까?”

그 말에 민정의 귀가 붉어졌다.

상호에게는 민정의 앞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애들은?”

“시설 구경하고 있어.”

“그러면 살짝…… 후다닥 해 볼까?”

민정이 뒤로 돌고, 상호가 입을 맞추려는 순간.

누군가가 방문을 부술 듯이 쾅쾅 두드렸다.

“쌤! 쌤!”

“……켁!”

상호는 식겁하며 민정에게서 후다닥 떨어졌다.

“왜, 왜? 무슨 일이야?”

“볼 게 X도 없어!”

“……어디 앉아서 핸드폰이라도 하고 있어. 쌤 누나랑 이야기 좀 하게.”

“안돼! 쌤이랑 쌤을 같이 두면 쌤이 쌤을 잡아먹을 거야!”

태화는 세희와 함께 기어코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민정과 오붓하게 단둘의 시간을 가지려 했는데.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민정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눈가에 한 줄기 아쉬움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밤에 달래줘야 하나…….’

상호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태연하게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어떡해. 놀아달라고?”

“응.”

“저희 언제 돌아가요?”

“글쎄. 하루 자고 갈까 하는데…….”

“밥은 언제 먹어?”

“밥? 그치, 밥 먹어야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시계를 흘끗하고 세희를 보았다.

“여기 온 김에 운기조식하자. 밥 먹고 나서.”

“선생님도요?”

세희가 상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속마음까지 꿰뚫는 듯한 눈빛으로.

설마 들킨 걸까. 상호는 이마에 조금씩 배어나는 진땀을 닦았다.

“나? 나는…… 꼭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도 하면 좋잖아요.”

“아니, 선생님은 따로 할 일이 있어서…….”

“아니에요. 선생님은 사실 저랑 운기조식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아주 단정을 짓는다. 암시라도 거는 것처럼.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았다.

‘꼴을 보니 밤에도 못 하겠네. 같이 자려고 하겠지…….’

그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

“그래, 그래. 밥 먹고 같이 하자.”

“네.”

“우씨, 그럼 난 뭐하라고!”

“너는 온 김에 누나한테 수업 받아.”

“뿌에에엑.”

넷은 함께 방을 나섰다.

* * *

밥은 썩 맛이 좋지는 않았지만, 상호에게는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냥 별생각 없이 뱃속에 집어넣을 뿐.

맛좋은 반찬을 태화의 앞에 덜어주는데, 맞은편 자리에 리주가 와서 앉았다.

“결과가 나왔어요.”

“처음으로 반가운 소식을 듣네. 형수한테서.”

상호는 눈썹을 치켰다.

“어떻게 나왔는데요?”

“두 분 다, 상처 난 부위의 조직에 악마의 인자가 파고들어 있어요. 그게 통증의 원인인 것 같아요.”

그럴 것 같다고 예상은 했다.

“없애려면요?”

“어…….”

상호의 말에 리주는 당황한 표정으로 상호와 아이들, 그리고 민정의 눈치를 살폈다.

“악마 인자는 그렇게 쉽게 없애고 옮기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정말 없애려고 한다면…… 도련님이 전에 했던 것처럼 해당 부위를 통째로 잘라내면 되겠지만…….”

실그러진 눈매 속 눈동자가 상호의 눈과 세희의 관자놀이를 흘끗했다.

“두 분 다 머리에 상처가 있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요.”

“짓궂은 운명이네.”

놈들과 관련한 일들은 다 그렇다. 상호는 혀를 찼다.

“그럼 그냥 이대로 살아야 된다고요?”

“도련님이 시키시면…… 연구를 한번…… 해 볼게요. 외과적 방법 말고 다른 해결책이 있는지…….”

리주는 우물쭈물하며 다시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대신 그동안은…… 여기에 계셔야 할 거예요.”

“며칠 주면 할 수 있는데요.”

“그, 그거는 하느님도 모르는…….”

“하루 줄 테니까 최대한 찾아봐요.”

“네, 네에…….”

고개를 푹 숙이는 리주를 바라보며 상호는 생각에 잠겼다.

눈이 유난히 아팠던 날. 그날에는 꼭 상호나 세희가 악마를 마주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팠던 날 이후, 즉 악마를 죽이고 혈석을 만든 이후로는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어제는 세희가 다리에 통증을 느꼈고.

바로 그때 리주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태화의 피가 필요하단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그는 의문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형수.”

“네, 네!”

“아까 그랬죠. 혈석에 균열이 있다고.”

리주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그, 그거는 제가 관리를 못한 게 아니라! 원리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아니, 따지는 게 아니고. 그 균열이 있다는 거는 천천히 부활하고 있다는 거죠?”

“그으……렇게…… 볼 수도 있고…….”

“이 악마 인자라는 거. 악마가 조종할 수 있는 거예요?”

상호의 물음에 리주는 눈을 빠르게 여러 번 깜빡였다.

“어……. 충분히 가능해요. 악마 인자는 악마의 영혼을 현실로 연결하는 매개체……라고 추정되니까, 그게 사실이라면…… 악마 인자는 타인의 몸에 있어도…… 해당 악마의, 영혼의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겠죠.”

“혹시 생각도 읽을 수 있을까요?”

“생각이요?”

“상처가 있는 사람의 생각을 악마가 읽을 수 있을까요?”

“그거는 제가 알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하긴 다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일단 이걸 치료하는 방법을 좀 생각해보죠.”

* * *

그렇게 하루 묵고 가기로 했다.

어차피 민정 때문에라도 좀 더 묵다 가려고 했으니 딱히 상관없었다. 상호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방문을 열었다.

아무도 쓰지 않는 빈방이었다.

“여기면 되겠다.”

그의 뒤로 세희가 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상호는 챙겨 둔 방석 두 개를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앉았다.

“둘이서는 오랜만이네. 그치?”

“네.”

세희는 살짝 웃었다.

보아하니 더 말할 것도 없이 바로 시작하면 될 것 같았다. 왜 그와의 운기조식을 좋아하는지는 잘 몰랐지만.

그도 싫지는 않았다.

“시작하자.”

“네.”

상호는 세희가 방석에 앉아 눈을 감는 것을 확인하고 따라서 눈을 감았다.

운기가 시작되자 서로의 내공이 공명하는 게 느껴졌다.

‘집중해서…….’

심상 속으로.

깊은 물에 침강하듯이, 고요한 압박감이 전신을 감쌌다가, 집중을 계속 이어가자 모든 감각이 한 번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전자기기를 끄고 켜듯이.

상호는 마음 속에서 눈을 떴다.

‘……뭐야.’

아무것도 없이 검은 공간.

늘 느껴졌던 예경의 영혼이 느껴지지 않았다.

“누나?”

불러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상호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다가 멈칫했다.

‘……여긴.’

이미 한 번 와본 곳이었다.

예경을 급히 만나려다가 입마에 빠졌을 때.

지금은 딱히 심마도 충격도 없는데, 왜 이곳에 오게 된 건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대체…….’

그때 어둠 속에서 그 소리가 들렸다.

달그락……

상호의 눈 밑이 꿈틀했다.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소리. 하지만 이곳에서 듣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화르륵……

그의 손에 검푸른 불꽃이 모여 검의 형태를 이뤘다.

상호는 눈을 감고 귀에 집중했다. 악마가 웃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달그락……

소리가 들리는 순간, 생각의 속도대로 검이 휘둘러졌다.

하지만 어둠 속으로 날아간 불꽃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다.

기분 나쁜 비웃음소리도 그대로.

‘이 새끼…….’

상호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악마는 그냥 무시한다 치더라도, 예경이 어디로 사라졌는지가 문제였다. 분명 지난번 주화입마 때는 예경이 나타나 도와줬었는데.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예경은 찾아야 했다.

“누나?”

이번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세희는 어떨까. 세희도 똑같은 상황에 처해있는 건 아닐까. 상호는 지난번에 세희가 자신의 심상에 찾아왔던 것처럼 자신도 세희의 심상에 찾아가보려 했지만, 방법을 몰랐다. 그때마다 예경의 도움을 받았었기 때문에.

그래서 무작정 달려보기로 했다.

달그락……

악마의 웃음소리는 똑같은 음량으로, 똑같은 거리에서 들렸다.

앞에서도 들리고, 뒤에서도 들리고. 분명 그는 달리고 있는데, 마치 보이지 않는 막대의 끝에 서로가 고정된 것처럼.

혹은 제자리를 달리는 것처럼,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망할…….’

심상인데도 달리기가 힘이 들었다.

상호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헐떡이다가.

‘이 새끼……, 대체 어디까지 쳐들어오는…….’

앞으로 고꾸라지며, 까무러치고 말았다.

* * *

“선생님, 선생님.”

불안에 떨리는 목소리.

슬며시 눈을 뜨자 시야 가득히 세희의 얼굴이 보였다.

“아…….”

그가 일어난 것을 확인한 세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따뜻한 숨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상호는 자신이 세희의 무릎을 베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살짝 들었다.

“……나 쓰러졌어?”

“네, 숨을 엄청 가쁘게 쉬시면서…….”

세희의 눈빛에는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정말로 주화입마가 왔던 걸까. 그 악마놈 때문에. 상호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이마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얼마나 오래?”

“모르겠어요. 저도 방금 일어나서…….”

핸드폰을 꺼내 보니 오후 5시. 운기조식을 시작한 지 4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진짜 잠깐 뛰었던 것 같은데…….’

운기를 하면 시간이 훌쩍 사라지곤 하지만, 그가 한평생 운기조식을 하면서 겪어본 감각을 기준으로 해도 심히 빠르게 지나갔다. 상호는 멍하니 눈을 끔뻑이다가 퍼뜩 고개를 들어 세희를 바라보았다.

겉보기로는 아주 멀쩡했다.

“세희야?”

“네.”

“운기조식 하면서…… 뭐 이상한 거 없었어?”

세희는 고개를 살짝 기웃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사조님을 못 뵈었어요.”

“너도?”

상호의 마음속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악마가 예경의 영혼에 해코지라도 한 걸까 싶어서.

“혹시…… 이상한 소리 같은 건 안 들렸어? 막 딱딱한 뭔가가 달그락거리는 소리…….”

“소리……는 안 들렸어요. 다 평소대로였어요. 사조님이 안 계셨던 것만 빼고…….”

“……으음.”

그 악마 인자라는 게 영혼과 내공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건가. 상호는 침음하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봉인이 약해져서 그런 건지, 거리가 가까워서 그런 건지…….’

이곳에 오래 머무는 게 좋아 보이진 않지만, 도망만 치면 이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으니.

상호는 착잡한 표정으로 세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세희는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네.’

세희만 무사하면 언제든 희망이 있는 것이다. 상호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태화 또 심심하다고 누나한테 장난치고 있을라.”

“네.”

둘은 함께 방을 나섰다.

* * *

‘이 방향이 맞아?’

언어가 아닌 그르렁거림이 뜻을 품고 허공을 울렸다.

‘헛고생만 하고 돌아오는 거 아냐?’

‘조용히 해.’

붉은 면사포를 쓴 여인이 핀잔을 날렸다.

‘매사에 믿음이 없으니 그분의 신임도 못 받는 거야. 힘이 있으면 뭐해. 툭하면 새끼 들짐승처럼 짜증…….’

빠악

솥뚜껑만한 손이 여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가녀린 여인은 그 힘을 이기지 못해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히고 말았다.

‘누구 앞에서 아가리를 놀리는 거냐?’

뾰족한 이빨 사이에서 분노에 찬 그르렁거림이 흘러나왔다.

‘분수를 알아라. 제일 약한 쓰레기 주제에…….’

‘혈마녀, 당신이 조용히 하는 게 맞습니다.’

금실로 자수를 놓은 백의의 후드 속, 어두운 그림자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쨌든 당신이 제일 약하니까.’

면사포를 쓴 여인은 찍소리도 못하고 조용히 일어났다.

짐승의 형상을 한 악마는 툴툴거리며 걷는 듯하더니, 난데없이 여인을 힘껏 걷어찼다.

‘끅……!’

‘니가 강했으면 내가 나서는 일이 없었을 것 아니야, 이 버러지 새끼야. 개 한 마리 구하는 데 나까지 나서야 돼?’

‘…….’

혈마녀라 불린 여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 묵묵히 걸었다.

산의 정상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이 살아온 땅의 산맥과 비교하면 이 정도는 동산이나 다름없었다. 짐승과 여인, 백의 속의 그림자는 정상에 솟은 바위 끝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나무가 털처럼 보일 정도로 먼 곳.

육각형의 건물 중앙에서 붉은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321. 초대받지 않은 밤손님

“됐어요.”

리주가 장갑을 낀 손으로 혈석을 두드렸다.

“균열을 다 메꿨으니까 이제 안정화될 거예요.”

“그래요?”

상호는 혈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대 속의 눈에서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봉인이 성공적으로 수복된 모양이었다. 확실한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수고했어요.”

그의 말에 리주가 살짝 움찔하더니 곧 주변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민정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듯했다.

민정이 주변에 없다는 것을 확인한 리주는 상호를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저, 혹시 괜찮으시면…….”

“뭐요.”

“우리 서방님한테, 형수가 일 열심히 하고 있더라고…… 헤헤.”

“……하는 거 봐서요.”

상호는 혀를 차며 돌아섰다.

“아직 일이 남아 있을 텐데요. 빨리 가서 치료할 방법이나 찾아봐요.”

“아, 네, 네…….”

리주는 허둥지둥 마당을 가로질러 건물로 들어갔다.

대체 뭔 짓을 해야 저렇게 사람을 꽉 잡을 수 있을까. 상호는 리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혈석을 흘끗하고 건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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