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4화 (324/501)

* * *

“됐다!”

지윤이 주먹을 앞으로 들어 올렸다. 주먹에서는 하얀 강기가 불꽃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얀 강기가 저녁의 운동장을 은은히 밝혔다.

“쌤예!”

“좋아. 이제 유지하는 데에는 별문제 없는 것 같네.”

상호는 씩 웃고 소매를 걷었다.

“그러면 체감을 해봐야겠지?”

“엑, 쌤이랑 뜨라구예?”

“왜? 겁나?”

“세희처럼 패는 거 아입니꺼?”

“네 각오에 달려 있겠지.”

그 말에 지윤은 말없이 주먹을 들었다.

각오가 됐나 보다. 상호도 더 묻지 않고 주먹에 강기를 둘렀다.

콰앙

주먹과 주먹이 부딪힌 곳에서 충격파가 터졌다.

강기는 이미 학생 수준을 벗어났다. 초강기를 만들 줄 아는 이는 프로 헌터들 중에서도 몇 없으니.

하지만 전투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두 가지.

강도, 그리고 간격.

상호는 지윤의 손목을 잡았다.

“……윽!”

지윤이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상호는 지윤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잡으며 절대로 지윤의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지윤의 발길질이 상호의 볼을 스쳤다.

“이익……!”

“아직 멀었구나.”

상호가 입맛을 다시며 유술을 걸려는 순간, 지윤이 상호를 향해 맨주먹을 휘둘렀다.

주먹은 상호에게 닿지 않았다.

죽었다 깨어나도 닿지 못할 거리였으나.

콰아아앙

충격파를 날리기에는 충분했다.

반탄강기로 증폭된 충격파가 상호의 몸통에 직격했다.

“……끄응.”

다른 헌터였다면 구역질 정도는 할 정도의 충격이었으나, 상호는 잠깐의 고통을 삼키고 이어서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윽.”

복부에 주먹이 박힘과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지윤은 잠시 참아보려 했지만.

“……큭!”

결국은 주저앉고 말았다.

상호는 손을 툭툭 털고 소매를 내렸다.

“내공으로 급소를 살짝 건드렸어.”

“아프네예…….”

“초강기를 몸에도 두를 수 있어야 해. 아직은 손밖에 집중이 잘 안 되지?”

“예…….”

“잘 연습해 봐.”

지윤은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누군가가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둘을 향해 걸어오는 게 느껴졌다. 상호는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다가오는 이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 오도록 말을 안 붙인다는 건, 이 상황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고.

그런 사람은 한 명밖에 없으니.

“세희 왔어?”

“네.”

세희는 태연하게 답하며 날아드는 칼날을 쳐냈다.

대련을 일상처럼 하다 보니 만나자마자 칼을 날리는 게 인사가 되어 버렸다. 상호의 검이 다시 세희의 다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가볍게 피할 수 있는 위치인데.

“……윽.”

세희가 움찔하며 반응을 한 박자 늦게 했다.

상호는 그 즉시 검을 멈췄다.

“어디 아파?”

“……조금요.”

세희는 살짝 웃었다.

“다리에…… 상처가 아직 다 안 나았나 봐요.”

“다리? 저번에 다친 거?”

“네.”

“치료받은 거 아니었어?”

“받긴 했는데…… 잘 모르겠어요. 가끔 욱신거려요.”

욱신거린다, 그 말이 상호에겐 특히 신경이 쓰였다.

악마에게 당한 자신의 눈.

그리고 같은 악마에게 당한 세희의 다리.

‘독 같은 거라도 있는 건가……?’

겨우 욱신거리기만 하는 독이라니 참 영문 모를 상냥한 독이다. 상호는 고개를 기웃하고는 세희의 다리를 흘끗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지도 몰랐다.

‘형수한테 물어봐야 하나…….’

그때 주머니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상호는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참으로 짓궂다는 생각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

“뭐예요.”

[안녕하셨어요, 도련님…….]

전화 너머에서 리주가 어색하게 웃었다.

[잘 지내셨어요? 별일 없으시죠오…….]

“뭐냐니까요.”

[아, 그게……. 여기 악마 봉인이 있잖아요, 혈석……. 그 혈석을 안정화시키는 데에 고농도의 악마 혈액이 조금 필요해서…….]

“그걸 왜 나한테 찾아요.”

[그……. 제자 분한테서…… 쪼끔만 뽑으면…… 안 될까요오……?]

“…….”

피가 필요하다니. 상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거 계속 뽑아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편하죠…….]

“한 번 썼으니까 계속 써야 된다거나 하면 많이 빡칠 것 같은데.”

[그,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태화 양이 악마 인자가 강하니까…… 제일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어서 쓰려는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돼요…….]

“얼마나 필요한데요.”

[100미리 정도면…….]

그리 많은 양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피의 주인은 상호가 아니었다.

“태화한테 말해볼게요.”

[감사합니다, 도련님…….]

“대신 본인이 싫다고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럼요, 그럼요…….]

“그리고 물어볼 게 있는데…….”

상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혹시 악마한테 베이거나 하면 상처에 뭐가 남아요?”

[상처요?]

리주는 당황하더니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요? 그런 경우를 본 적이 없어서…….]

“그럼 보면 알아낼 수 있어요?”

[일단 봐야 알 것 같은데요…….]

“그럼 갈게요.”

[네?]

“내일 갈 거니까 한번 알아내 보자고요.”

[네에……. 태화 양도 오나요?]

“태화는 알아서 할 거니까 일단은 신경 끄고 있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아…….]

통화는 그렇게 끊겼다.

리주도 모르나 보다. 보여주면 알아낼 수 있을까. 상호는 가만히 고민하다가 지윤과 세희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 미안. 통화 좀 하느라…….”

“형수가 누굽니꺼?”

“그 아저씨 결혼했어요?”

“으응, 그런 게 있어. 대련하자, 대련.”

“네.”

셋은 다시 대련에 집중했다.

* * *

다음 날.

수업이 있는 평일이었지만, 상호는 학교에 있지 않았다.

“쌤~. 엉따 틀어죠~.”

조수석에 앉은 태화가 발을 동동 굴렀다.

뒷좌석에는 세희가 창턱에 팔을 걸쳐 턱을 괴고 있었다. 상호는 창문을 닫고 히터를 켰다. 열선이 앞좌석에만 있어서.

그러자 태화가 열선을 켜는 버튼을 찾기 시작했다.

“엉따 틀어달라니까! 엉따 몰라? 쌤 너무 늙은 거 아냐?”

“알아, 임마. 히터 틀었으면 됐잖아.”

“엉덩이가 뜨끈하면 얼마나 좋은데!”

“너 그럼 뒤로 가. 뒤에서 세희랑 놀아. 앞에 타게 해주니까 한도 끝도 없네…….”

“뿌에에엑~.”

태화는 혀를 한껏 내밀고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픽 돌렸다.

교문을 나와 쌩쌩 달리던 차는 신호에 걸려 정지선에 멈췄다. 상호는 핸들을 검지로 톡톡 두들기며 기다리다가 태화를 흘끔 돌아보았다.

“맘 바뀌면 안 한다고 해도 돼.”

태화의 어깨가 한 번 들썩였다.

“딱히 상관없는데. 조금이라매.”

“그래도 하기 싫으면 하지 마.”

“쌤은 어떤데?”

“응?”

“쌤은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빨간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쌤이 정해.”

“……글쎄.”

1년이 되어가는 일이니, 조금 뽑는 정도는 몸에 문제없겠지만.

하도 사고가 많아서 꺼림칙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왜 정해. 네가 선택해야지. 네 몸인데…….”

상호가 그렇게 말을 흐리자 태화가 양팔을 쫙 벌렸다.

“난 쌤꺼야!”

“……그래. 니 맘대로 해.”

“쌤꺼라니까! 쌤 맘대로 해! 어서!”

“그럼 뒤로 가.”

“우씨……. 줘도 싫대.”

파란불이 되자 차가 다시 앞으로 달려나갔다.

* * *

“뭐야.”

민정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상호야?”

“응.”

“왜 왔어?”

상호는 차 문을 닫으며 멀뚱히 민정을 바라보았다.

“형수한테 못 들었어?”

“뭐를?”

“악마 피가 필요해서, 태화한테서 뽑고 싶다던데?”

“쌤~.”

차에서 내린 태화가 민정에게 손을 흔들었다.

민정의 눈빛이 일순 매서워졌다.

“또 뭘 꾸미고 있는 거 아냐? 왜 필요하다고 했는지는 들었니?”

“혈석을 안정화하는 데 필요하대.”

“그래? 왜 나한텐 말 안 했지?”

“글쎄…….”

상호는 어깨를 들썩였다.

“만나서 이야기해보지 뭐. 형수는? 형은?”

“오빠는 협회로 출근했고……. 공리주는…… 안에.”

“슬슬 받아들여, 누나. 싫어도 올케라고.”

“나한텐 아직 이른 것 같아.”

민정은 한숨을 쉬고 건물을 향해 돌아섰다.

차에서 내린 태화와 세희는 상호의 양옆에 서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 악마가 여기 봉인된 거예요?”

“응.”

“뭐가? 그 악마가 뭔데?”

“너도 봤잖아. 그 개 해골 머리 한 놈.”

“아, 그놈이 악마였어?”

“……어른이 말하면 좀 들어.”

셋은 민정을 따라 건물로 들어갔다.

육각형 모양의 건물, 마당을 중심으로 복도가 빙 둘러진 모양이었기에 복도의 끝도, 가장 깊숙한 곳이란 개념도 없었다. 민정은 똑같은 모양의 문들 중 하나에 다가갔다.

“손님을 불렀으면 지가 나올 것이지…….”

투덜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 안쪽에는 가지각색의 실험 장비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세탁기마냥 덜덜덜 돌아가는 원통 모양 기계도 있고, 빨갛고 검은 액체들이 담긴 시험관도 있고.

문을 마주하는 책상에는 한 여인이 엎드려 침을 흘리고 있었다.

“음냐……. 안 돼요, 여보…….”

“…….”

상호는 당황하며 민정의 눈치를 살폈다. 민정은 아주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기 생긴다니까……. 어머, 어머…….”

“…….”

“나 죽어, 흠냐…….”

더 들어줄 수가 없었는지, 민정이 서류철을 하나 집어서 리주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사람을 불러놓고 뭘 퍼질러 자고 있어!”

“케흑!”

리주는 고개를 퍼뜩 들어 놀란 토끼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방에 민정과 상호가 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기겁하며 의자째로 뒤로 물러났다.

“히이익! 도, 도련님 오셨어요…….”

“예.”

“태……태……태화 양도…… 오랜만…….”

태화는 점점 움츠러드는 리주를 바라보며 맹한 눈을 끔뻑였다.

“아줌마 왜 그래요?”

“아……아줌마가아……, 태화 양한테…… 미안한 일을…… 너무 많이 했으니까아…….”

리주가 진땀을 흘리며 손을 싹싹 비비자 태화가 눈을 부릅떴다.

“쌤! 나 이거 인터넷에서 봤어!”

“……뭐가?”

“이건 인격배설이야!”

“그게 뭔데…….”

“인격을 배설시키고 다른 인격을 집어넣은 거야! 나온 구멍으로!”

다른 구멍으로 다른 게 들어가긴 했을 것이다. 대충 비슷한 원리로 인격이 개조된 건 맞는 듯했다.

……라기에는 너무 말도 안 되는 개소리. 상호는 태화의 이마에 딱밤을 날리고 리주를 돌아보았다.

“후딱 준비해요. 나도 애들도 내일 학교 가야 하니까.”

“네, 네에……. 주사기, 주사기가…….”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방을 나가는 리주의 등 뒤로, 민정의 날카로운 눈빛과 상호의 착잡한 눈빛, 그리고 태화의 어리둥절한 눈빛이 달라붙고 있었다.

320. 입마

“아야.”

태화가 몸을 움찔했다.

그 작은 움직임에 상호에게서 흘러나오는 무언의 압박이 확 강렬해졌다. 리주는 진땀을 흘리며 피스톤을 조심스럽게 당겼다.

“아플 수도 있어요오…….”

“엥, 저번엔 그런 말 못 들었는데.”

“그, 그랬던가……?”

작은 주사기에 피가 가득 찼다.

상호는 태화의 하얀 팔뚝에서 뽑혀나가는 주사기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거 어떻게 쓸 건데요.”

“혀, 혈석 내부의 균열에 투입해서…… 면역 반응으로 소모되는 악마 인자를 보충하는 거예요.”

“또 뽑아가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내가 잘못 들었나?”

“꼬……꼬오옥 그런 건 아니에요. 그으럴 수……도? 있지만…….”

리주가 두 손을 모아 꼼지락거리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딱 한 번 아주 조금이면 된다더니. 목적을 위해서라면 거짓말 정도는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 목적이 아무리 공익을 위한 일이라 하더라도.

‘미워하지 않기로 했지만…… 인종이 안 맞는 건 어쩔 수 없군.’

상호는 혀를 차며 안대를 벗었다.

그의 옆에는 옷을 하얀 가운으로 갈아입은 세희가 앉아 있었다. 눈만 다친 그와 달리 세희는 검사할 부위가 넓었다. 어깨, 허벅지, 그리고 관자놀이까지.

태화의 피를 챙긴 리주가 둘에게 다가왔다.

“검사…… 준비되셨어요? 도련님?”

“예.”

“그러면 여기 이 기계로…….”

상호와 세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리주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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