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0화 (320/501)

* * *

“뭐?”

상호는 침대에서 일어나다 말고 눈을 끔뻑였다.

“오늘이야?”

“그래.”

효은은 이불을 몸에 둘둘 말은 채로 상호를 째려보았다. 효은의 옆에서는 혜소가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니한테 기대한 내가 잘못이다. 남이 말해 줘야 아는 인간이 제일 재미없는 건 알지?”

“깜빡할 수도 있지…….”

“다른 날도 아니고 11월 11일을? 딱 보면 떠오르는 게 없냐?”

“몰라. 요즘 정신없어…….”

실습 나가고. 세희 가르치고. 어제만 해도 학교 수업 후 다혜 건 때문에 이사장과 한판 하고, 민정을 만나러 갔다가 돌아와 세희 가르치고.

그러다 보니 빠따로 데이를 챙길 겨를이 없었다.

‘알았어도 못 샀을 판에…….’

상호는 멀뚱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나저나 준비를 하나도 안 해 놨는데. 효은의 것은 물론이고 애들 것도, 교사들 것도.

‘후딱 사오면 되나……? 애들 열넷에 교사 셋…….’

옆에 있는 둘을 합치면 열아홉. 그런데 열아홉 개를 어디서 사올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평범한 기성제품이라면 편의점에서도 팔겠지만, 그걸 주느니 안 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닌가? 그래도 주는 게 낫나?’

한 길 사람 속은 알아도 얼굴 밑 여자 속은 모르겠다. 상호는 그냥 까먹은 척을 하기로 했다. 실제로도 까먹은 게 맞기도 했고.

슬슬 출근 준비를 하려고 일어나는데 뒤에서 효은이 불러세웠다.

“야.”

“응.”

“진짜 빠따로 없냐?”

“없대도.”

상호는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멈칫했다.

“먹고 싶어? 사와?”

“흥.”

효은은 콧방귀를 뀌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쟤가 왜 저러나, 싶어서 멍청히 서 있던 상호는 1년을 거슬러 작년 이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짚이는 게 하나 있었다.

‘내가 요즘 신경을 못 써 줬나…….’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가 보다. 상호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이불을 들춰 효은을 안아 들었다.

효은이 당황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 뭐야. 왜?”

“빠따로 줄게.”

“없다매?”

“조금 다른 빠따로…….”

말을 하자마자 효은의 손이 상호의 뺨을 후렸다.

“……왜!”

“꺼져, 등신아! 아침부터 뭐하는 짓이야! 개 변태 새끼…….”

“죄송합니다…….”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 상호는 눈물을 삼키며 효은을 침대에 공손히 내려놓았다.

‘출근이나 해야지…….’

* * *

“선생니이이임!”

“응?”

멀리서 나빛이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오고 있었다. 남교사 숙소를 나서던 상호는 나빛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응, 나빛이 잘 잤…….”

“……어?”

“꺅!”

뭔가가 공중에서 나빛을 낚아채 갔다. 꼭 참새를 낚아채는 매라도 되는 듯이.

상호는 건물 뒤로 사라지는 그림자를 눈으로 좇으며 진땀을 흘렸다.

‘세희야……?’

잘못 봤나 싶었지만 분명히 세희가 맞았다. 땋은 머리하며, 가느다란 몸하며.

세희가 왜 나빛을 납치하는 걸까. 가만히 고민하고 있는데 세희가 날아온 방향에서 누군가가 또 날아와 그의 옆에 착지했다.

“선생님.”

“아, 은율이 안녕.”

“이거…….”

은율이 뭔가를 내밀었다.

“받아주세요.”

“어…….”

낱개들이 굵은 빠따로.

상호는 주변을 쓱 둘러보고 빠따로를 받았다. 아까부터 자꾸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고마워. 잘 먹을게.”

“네…….”

은율은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기브 앤 테이크.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인지상정인데. 상호는 아무것도 없는 주머니를 괜스레 만지작거렸다.

“어……, 은율아, 실은……. 선생님이 오늘 빠따로데이인 걸 깜빡해서.”

“……아.”

은율의 얼굴에 실망감이 번져갔다.

기성품이라도 사올 걸 그랬나. 상호의 등짝에 진땀이 폭포처럼 흘렀다.

“미안…….”

“괜찮아요.”

은율은 미소를 지었다.

“맛있게 드시기만 하면 돼요.”

“응. 꼭 맛있게 먹을게.”

상호도 씩 웃고 빠따로를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를 향하는 시선이 어디선가 계속 느껴졌지만, 상호는 괘념치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근데 은율아, 혹시…… 세희 봤어?”

“알려고 하지 마세요.”

“……봤단 얘기지?”

“다쳐요.”

“그래…….”

둘은 나란히 걸어 본관으로 향했다.

* * *

상호는 은율을 교실로 보내고 교무실로 들어갔다.

교사들끼리는 딱히 빠따로 데이라고 해서 뭔가를 돌리지는 않았다. 나이 든 선생이 심심해서 가볍게 돌리거나, 가까운 사람들끼리만 간단히 주고받을 뿐.

그래서 그는 미진에게 빠따로를 받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문제는 설미 누난데…….’

이런 날을 열심히 챙기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기본적으로 남을 열심히 챙기는 사람이라서.

‘큰 걸 받으면 되게 곤란해지는데…….’

그래서 그는 자리를 한 번 살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설미는 자리에 없었다. 미진이 그가 온 것을 알아채고 흘끔할 뿐.

상호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자리로 걸어갔다.

“좋은 아침이요.”

“네에.”

미진은 시큰둥하게 답하고 일을 계속했다.

하지만 상호가 옆자리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자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흘겨보았다.

“왜요.”

“미진 씨는 빠따로 가져왔어요?”

“제가 왜 선배한테 줘야 되는데요?”

“아니 가져왔냐고…….”

“없어요.”

상호는 그 말을 듣고 쓰게 웃었다.

“나도 안 가져왔어요.”

그 말에 미진이 그를 쓰레기 보듯 꼬나보았다.

“선배는 가져와야죠.”

“아니 미진 씨도…….”

“저는 애인이 있어서 줄 사람이 없으니까 안 가져온 거고.”

“나도 애인은 있거든요?”

“그런데도 빠따로를 받으실 거란 사실이 참 개탄스럽죠. 작년에는 그나마 부서진 거라도 주더니, 올해는 받기만 할 생각인가 보네요.”

“……깜빡해서 그래요. 알았으면 샀겠죠.”

상호는 한숨을 쉬고 의자에 늘어졌다.

그런데 교무실 문이 발칵 열리더니 연회색 머리 소녀가 뛰어들어 왔다.

“엥?”

“선생니임…….”

나빛이 울먹이며 상호의 자리로 달려왔다.

깜짝 놀란 상호는 옆에서 미진이 보고 있단 사실도 까먹고 나빛을 덥석 끌어안았다.

“뭐야, 왜. 왜 그래?”

“세희가아…….”

나빛의 회색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제가 만든 빠따로…… 가져가서 안 돌려줘요…….”

“세희가?”

“네…….”

“태화가 아니라?”

“네…….”

나빛이 그의 품에 얼굴을 폭 묻었다.

세희가 그런 일을 하다니. 안 그러던 애가 왜 이럴까. 상호는 어안이 벙벙해서 나빛의 머리만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헤헤.”

금방이라도 울 것 같던 나빛은 그 손길에 금세 방긋 웃었다.

상호는 나빛의 등을 가만히 토닥이다가 고개를 기웃했다.

“왜 그러지? 세희가 그럴 애가 아닌데……. 나빛이 넌 뭐 짚이는 거 없어?”

“아마…….”

나빛의 눈빛에 확신이 깃들었다.

“제가 만든 게 더 맛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더 맛있어서?”

“네. 세희도 같이 만들었거든요. 어젯밤에.”

“……아.”

어쩐지 평소보다 일찍 들어가더라니. 상호는 세희가 수련에 지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기쁨의 눈물을 삼켰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근데 나빛아.”

“네!”

“네가 만든 게 더 맛있었다고?”

“네!”

“왜?”

그 질문에 나빛이 눈을 깜작였다.

“왜라니요……?”

“아, 미안……. 질문을 잘못했어. 으음……. 네가 만든 게 더 맛있다고 생각하는 근거가 뭐야?”

“제가 만들었으니까요…….”

“…….”

“저는 요리 천재예요…….”

“……네가?”

“네.”

나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으로 상호를 바라보았다.

“엄마한테 받은 수첩이 저를 요리 천재로 만들었어요.”

“…….”

“세희는 맛없다고 했지만…… 표정을 보면 알아요. 맛있어하는 표정은 숨길 수 없어요. 분명히 제 빠따로를 질투해서 견제하는 거예요…….”

“…….”

상호는 스스로에 대한 맹신과 광기가 엿보이는 회색 눈동자를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그렇구나……. 그러면 선생님이 잘 타일러 볼게.”

“네…….”

“교실 가자.”

“네.”

나빛이 생긋 웃으며 상호의 손을 잡았다.

상호는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볼지, 나빛의 눈치를 볼지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하고 나빛의 손을 꼭 잡았다.

“갈게요. 1교시에 봐요.”

“예.”

미진이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늘 그렇듯 쌀쌀맞은 목소리로.

상호는 곧 출석부를 챙겨 나빛과 함께 교무실을 나섰다.

316. 삼키시라고

“오다 주웠다.”

태화가 교탁에 빠따로를 툭 던졌다.

상호는 빠따로를 들어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역시 낱개들이의 큰 빠따로.

주는 건 고맙긴 한데.

“그냥 선물이라고 하면서 주면 안 돼?”

“아니, 진짜로 오다 주웠는뎅.”

“뭐?”

“내꺼는 이거양.”

태화의 품에서 빠따로가 하나 더 나왔다. 거의 여고생 팔뚝만큼 굵은 빠따로. 태화는 그 빠따로를 상호의 입에 들이밀었다.

“머겅.”

“……너무 크지 않냐?”

“쌤을 참고해서 만든 거야.”

“뭘 참고해……?”

잘 모르겠지만 식욕이 확 떨어졌다. 상호는 태화의 빠따로를 챙기고 교탁에 놓인 빠따로를 집어 들었다.

태화가 오다가 주웠다는 빠따로.

주인을 찾아줘야 할 듯한데.

“어디서 주웠어?”

“우리 기숙사 복도에서.”

“복도?”

그때 교실 문이 열리고 시무룩한 표정의 지윤이 들어왔다.

“존아침임더.”

“응, 지윤이 안녕…… 근데 무슨 일 있어?”

“어제 산 빠따로가 읎어져가……?”

지윤은 말하다가 상호의 손에 들린 빠따로를 발견하고 쌍심지를 켰다.

“쌤예!”

“……아니야.”

“빠따로는 가지가믄서 와 지는 안 가지갑니꺼!”

“아니라고…….”

상호는 지윤에게 빠따로를 돌려주려다가 어차피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걸 깨닫고 주머니에 넣었다.

“근데 얘들아, 세희 못 봤어?”

“또 세희 찾네.”

“또 세희만 찾지예.”

“그런 게 아니고……. 나빛이 빠따로를 세희가 가져갔대서.”

“빠따로를?”

지윤과 태화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빛을 돌아보았다. 나빛은 자리에 앉아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태화는 고개를 기웃하다가 곧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때. 알빠야?”

“나빛이가 직접 만든 거래. 친구가 슬퍼하고 있는데 좀 도와줘라.”

“몰래 묵고 있는 기 아일까예?”

“걔가 너냐? 돼지야. 그리고 하나빛이 만든 걸 왜 먹어? 그걸 먹느니 차라리 사먹겠…….”

핀잔을 날리던 태화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쌤.”

“응?”

“큰일났어.”

“……응?”

“얘 자살하려나 봐……!”

“……!”

상호와 지윤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그 모습을 본 나빛이 울먹이며 허공에서 황금색 각목을 꺼냈다.

“그거 먹는다고 죽을 리 없잖아요……!”

“아, 미안……. 잠깐 설득당해서.”

그래도 여전히 가능성 있다고 생각하는 상호였다. 일단 빨리 찾아봐야 할 듯했다.

“얘들아. 선생님 세희 찾고 올…….”

그때 문이 열리고 세희가 걸어 들어왔다. 두 발로 멀쩡하게.

세희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이들과 상호를 발견하고는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안녕하세요.”

“응, 세희야…….”

상호는 나빛을 흘끗하며 말을 이었다.

“나빛이가 그러는데…… 세희 네가 나빛이 빠따로 가져갔어?”

“네.”

“그럼 어떡해……. 돌려줘야지. 어딨어?”

“여기요.”

세희가 자신의 배를 한 번 툭 쳤다.

그 말에 나빛의 몸이 실시간으로 사르르 표백되기 시작했다. 머리도, 눈동자도, 피부도.

상호는 하얀 머리 뒤에 후광이 비치는 것을 보고 기겁하며 나빛을 붙잡았다.

“나빛아, 정신차려!”

“고마웠어요…….”

“아니야, 아니야. 다 꿈이야 꿈. 잊어버려. 옳지…….”

상호가 나빛을 안아 들고 둥가둥가를 몇 번 해주자 후광이 사라졌다. 해탈한 듯 은은한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급한 불은 일단 껐다. 상호는 한숨을 쉬고 세희를 돌아보았다.

“밖에서 얘기 좀 하자, 세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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