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6화 (316/501)

* * *

‘아무도 안 받네…….’

상호는 핸드폰을 귀에 붙인 채로 화장실 앞을 서성였다. 걸음에 초조한 기색이 가득했다. 뭐 마려운 개마냥.

학생들은 실습 중이니 핸드폰을 버스에 뒀겠지만, 이상하게 민정도, 해련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은호의 정체를 들킬 것을 감수하고 미진에게까지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마찬가지.

‘남의 반에 걸기는 좀 그런데…….’

바쁘진 않을까. 상호는 설미의 번호를 눌렀다.

‘누나도 안 받네.’

그다음은 건흠.

‘주 선생님도…….’

정말로 다 안 받는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상호는 혹시나 싶어 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연결이 됐다.

[어, 상호야.]

“형.”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복도 주변을 살폈다. 혹시 듣는 학생이 있을까봐서.

다들 강당에 영화를 보러 간 덕분에 본관 전체가 한산했다.

“우리 학교가 강원도에 실습을 갔거든? 근데…… 다들 연락이 안 돼.”

[실습?]

전화 너머에서 머리 긁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만……. 강원도에 지금 대규모 습격이 들어왔다고 했거든?]

“뭐?”

상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습격? 지금?”

[어. 규모가 좀 컸어. 감시정령이 확인한 대로는 천 마리 정도? 큰 놈도 한 마리 있다고 했고.]

큰 놈이라면 거대괴수를 뜻하는 것이다. 상호는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아니 그럼 형도 뛰어야지…… 뭘 책상에 뻔질나게 앉아 있어!”

[들어 봐, 임마. 이미 현장에 있던 헌터들이 다 처리했대. 수호부대원들이 보고했어.]

“……아.”

해련이 데려간다던 수호부대원들. 그들이 갔다면 습격은 쉽게 막았을 것이다.

다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럼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몰라. 뭐 바쁜 일이 있나? 나도 한번 그쪽에 물어볼게.]

“……그래. 알았어……. 끊을게.”

상호는 한숨을 쉬고 통화를 끊었다.

습격이라니. 악마가 풀려난 후로 언젠가는 쳐들어올 거라 예상했지만, 시기도 장소도 너무나 적절했다.

필시 우연은 아닐 터인데.

‘어쩌면…….’

수상할 정도로 정확한 습격. 실습 때만 나타나는 악마.

놈이 노리는 것은 상호가 아닐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 가설대로라면 몬스터들이 그의 상태와 실습 일정을 알고 있어야 했다. 그것도 최소 하루 단위로.

그리고 그 뜻은.

‘스파이가 있다고?’

내통자가 있다는 것.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었다. 몬스터와 내통하는 인간이라니. 몬스터들이 인간에게 부귀영화를 약속할 수는 없을 텐데.

‘뭐……. 몬스터가 이기면 인간을 지배할 수 있게 해주겠다 약속한다거나, 그런 멍청한 꾐은 아니겠지. 만화도 아니고……. 그나저나 어떡하지?’

가봤자 이런 몸으로는 아무런 도움도 못 줄 텐데. 학교에 가만히 있자니 아이들이 걱정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전화뿐.

‘습격 다 처리했다며……. 제발 전화 좀 받아…….’

상호는 눈이 욱신거리는 것을 애써 무시하고, 핸드폰을 꽉 붙들며 반으로 돌아갔다.

* * *

퍼억

“켈룩!”

누런 이빨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지윤은 몬스터의 강냉이를 털어버리고 복부에 주먹을 날렸다. 지윤보다 약간 작은 몬스터는 그 주먹을 얻어맞고는 대포알같이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다.

“쿠억……!”

놈의 코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지윤은 바로 다음 상대를 찾아 몸을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미진이 단칼에 몬스터들을 썰어 넘기고 있었다.

‘내는 두 방은 때려뿔어야 하는디…….’

맨손은 죽이기가 힘들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반탄강기와 주먹을 택한 것은 후회하지 않지만, 그래도 무기로 다룬다면 어땠을까.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특히 그랬다.

‘……힘들고마.’

지윤은 주먹을 들며 몬스터들을 노려보았다.

둘이서 상대하기에는 수가 너무 많았다. 도망치기에는 또 포위망이 두텁고. 이미 수십 마리는 쓰러뜨렸는데도 그만큼이 남아 있었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늘어나는 중이었다.

슬슬 주먹이 무거웠다.

솜이 물을 먹은 것처럼.

“미진쌤예.”

“응.”

“뭐 큰 기술 같은 거 없어예? 한 방에 날려뿌는.”

“내공 낭비야.”

앞으로 몬스터가 얼마나 더 올지 모르는데 함부로 쓸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녀의 맞선배 같은 괴물이 아니었기에.

미진은 검을 움켜잡으며 침음했다.

“안 그래도 이미 부족해…….”

“그라믄 이대로 버틸 수도 없다는 기 아입니꺼.”

“……그렇지.”

미진의 대답에 지윤은 주먹을 단단히 말아쥐었다.

“지가 한번 해 보겠심더.”

“할 수 있겠어?”

“모르지예.”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그래도 할 수밖에 없으니. 지윤은 주먹에 내공을 힘껏 불어넣었다.

그때 눈치를 살피던 몬스터들이 일시에 달려들었다. 큰 기술을 준비한다는 걸 눈치라도 챈 모양이었다.

‘한 방…….’

큰 한 방.

눈을 감고 집중하자 주먹에서 뭔가가 타오르는 게 느껴졌다. 마치 불이 붙은 듯이.

지윤은 그 감각을 느끼자마자 눈을 뜨고 주먹을 휘둘렀다.

‘한 방에……!’

한순간.

눈부신 빛이 세상을 뒤덮었다.

311. 마룡

“꼴사납구나.”

세희는 자신의 목 옆에 놓인 강검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기억 못하고…….”

강검은 다혜의 손톱을 막고 있었다.

붉은 양복을 입은 여인이 다혜의 뒤에 착지했다.

“내가 누군지는 알아보겠니?”

“……크륵.”

다혜의 충혈된 눈이 뒤를 향했다.

이전에 한 번 싸웠다가 당했던 기억을 떠올렸는지, 다혜는 세희를 무시하고 해련을 향해 돌아섰다.

세희는 그 틈을 타 뒤로 물러났다.

“더 물러나 있어.”

해련은 검을 칼집째로 허리춤에서 풀었다.

“금방 쓰러트릴 테니 같이 가자. 가는 동안 뭐가 더 있을지 모르니.”

“……네.”

세희와 아이들은 한데 모여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다혜가 꼬리를 채찍처럼 휘두르며 공기 찢는 소리를 냈다. 해련은 그 모습을 태연하게 바라보며 칼을 코등이 위쪽으로 잡았다.

“무기치고는 엉성하네.”

꼬리는 베이기 아주 쉬운 약점이었다.

가만 보니 해련이 싸웠을 때와는 모습이 좀 달랐다. 꼬리도 있고, 뿔도 좀 더 커진 느낌에 눈동자도 노란색이었는데 주황색이 됐다.

거기에 더해서, 피부를 타고 흐르는 불길한 기운까지.

해련은 그 기운을 어디서 느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악마.

“뭐가 되어가는 건진 모르겠지만…….”

뭉툭한 강검이 다혜의 뒷목에 날아갔다.

“네가 누군지는 기억해야 되지 않겠니?”

“크흐으……!”

다혜는 팔꿈치로 강검을 쳐내고는, 양손 열 손가락에 초강기를 줄기줄기 뽑아내며 해련을 향해 달려들었다.

해련은 검을 잡지 않은 손에 초강기를 두르고, 다혜가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빠르게 다혜의 양손을 쳐냈다.

그런 후, 양팔이 걷어져 생긴 몸통의 빈틈으로 칼집을 휘둘렀다.

노리는 곳은 다혜의 턱.

“큭!”

다혜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턱의 옆면으로 해련의 칼집을 미끄러뜨렸다.

하지만 뇌가 흔들리는 것을 온전히 막아내지는 못했다.

“크륵…….”

다혜의 몸이 순간 비틀거렸다.

자신이 누군지 모르니 자신의 몸도 모르는 것이다. 해련은 그 틈을 타 손날로 다혜의 뒷목을 내리쳤다.

“……아?”

보이지 않는 힘이 해련의 손날을 막았다.

이젠 허공섭물까지 쓰는구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방해를 받은 해련은 뒤로 물러나며 강검을 휘둘렀다.

강검은 다혜의 기를 가르고 뒷목에 날아들었다.

‘됐다.’

해련은 성공을 직감했지만.

콰직……

강검이 부서져 버렸다.

‘……!’

해련의 눈이 퉁방울만해졌다.

다혜의 뒷목에서 가시처럼 뻗어 나온 강기. 불꽃처럼 타오르는 붉은 강기 속에서 검은빛이 일렁였다.

그런 비슷한 것들을, 해련은 자주 보아 왔다.

‘설마.’

불꽃 속의 불꽃은 상호와 닮았고. 그 검은색은 악마와 닮았다.

반신반의하던 해련의 눈에 다혜의 시커먼 입가, 그리고 쓰러진 악마의 시체가 들어왔다.

‘……섞였구나.’

저건 대체 왜 먹은 걸까. 당황한 해련의 눈앞에 다혜의 손톱이 날아들었다.

붉은 초강기 속 검은빛이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고 있었다.

* * *

“습격이요……?”

아이들의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상호는 조그마한 손을 들어 아이들의 손을 토닥였다.

“응. 몬스터들이 많이 쳐들어왔었대.”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갑자기 안 좋은 소식이 오면 훨씬 큰 충격을 받을 것 같아서, 미리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래도 헌터들이 처리했다나 봐. 그러니까 너희는 너무 걱정하지 마.”

“……네.”

아이들은 초조해진 표정으로 게임기를 내려놓았다.

그때 상호가 꼭 쥐고 있던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상호는 그 즉시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도현이었다.

“잠깐만 전화 받고 올게.”

그는 아이들에게 말한 후 복도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어, 형. 뭐 알아낸 거 있어?”

[상호야.]

도현의 목소리는 아까와 달리 불안에 젖어 있었다.

[내가 거기 헌터들한테 물어봤는데…….]

“봤는데?”

말을 시원하게 못 한다. 상호는 애가 타서 다그쳤다.

“봤는데 뭐? 말을 해 봐.”

[습격 때문에 애들을 모아서 먼저 보냈는데, 여덟 명이 안 모였댄다.]

“여덟 명?”

[그중 일곱 명이 너희 반이래.]

“뭐?”

상호의 눈이 툭 불거졌다.

“일곱 명이면 그냥 전부야!”

[다라고? 큰일 났네……. 어쨌든 나도 가고 있으니까, 가서 전화할게.]

“잠깐만, 잠깐만.”

일곱 명이 전부 실종이라니.

그 소식을 들어 버린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몸이 이렇더라도 직접 가서 상황을 살펴야 했다. 안 그러면 답답해 죽을 것 같아서.

상호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말했다.

“와서 나 좀 데려가.”

* * *

“……머고.”

지윤은 눈을 끔뻑였다.

내지른 주먹 앞에서부터 땅이 V자로 파여 있었다. 대포를 땅에 대고 터트리기라도 한 것처럼.

파인 구덩이 속에는 몬스터들이 쓰러져 있었다.

‘성공…….’

했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힘을 너무 끌어다 쓴 모양이었다.

비틀거리던 지윤을 미진이 붙잡았다.

“지윤아! 지금 쓰러지면 안 돼!”

“으…….”

“일어나!”

해냈다는 성취감도 잠시뿐. 지윤이 날려버리지 않은 곳에는 아직도 몬스터들이 한 무더기 남아 있었다.

날려버리자마자 그 방향으로 달렸어야 했는데. 지윤은 어지러운 시야를 다잡으려 애쓰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크르륵……?

그때 갑자기 몬스터들이 움찔했다.

초점을 잃었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오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최면에서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미진은 몬스터들을 통솔하던 무언가가 쓰러졌다는 것을 깨닫고 기대를 품었다. 혹시 이대로 돌아가 주지 않을까, 하는.

하지만 상황은 호락호락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크르르……

정신을 차린 몬스터들은 군침을 흘리며 둘에게 다가왔다. 지윤은 억지로 주먹을 들며 흐릿한 머릿속을 열심히 굴렸다.

‘생각해.’

담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공은 바닥, 체력도 바닥. 도저히 답을 찾을 수가 없는 상황. 하지만 담임은 이런 상황을 수도 없이 겪었을 터였다.

‘우째야…….’

그 순간 지윤의 눈에 파인 땅과 쓰러진 몬스터들이 들어왔다.

“……쌤예.”

“응?”

“셋 세믄 저짝으로 뛰는 깁니더.”

지윤은 자신을 돌아보는 미진에게 눈동자로 파헤쳐진 땅을 가리켰다.

미진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 붙으이소.”

지윤은 천천히 구덩이 반대편으로 돌아섰고, 미진은 그런 지윤의 등 뒤에 붙어 구덩이 방향을 마주했다.

몬스터들이 서서히 다가왔다.

“하나…….”

지윤의 주먹이 몸 쪽으로 당겨졌다.

“둘…….”

그 행동에 몬스터들이 멈칫했다.

몬스터들의 눈동자에 파헤쳐진 땅과 몬스터의 시체들, 그리고 공포가 스쳐지나갔다.

지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주먹을 휘둘렀다.

“셋!”

“크르륵!”

“캬아악!”

몬스터들은 혼비백산하며 옆으로 펄쩍 뛰었다. 곧 내쏘아질 강기의 궤도에서 피하기 위해.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크륵?”

고개를 들어 보니 미진과 지윤은 이미 저 멀리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파헤쳐진 구덩이, 몬스터들의 시체를 넘어서.

“크라아악!”

속임수에 당한 몬스터들은 괴성을 지르며 둘을 뒤쫓기 시작했다.

* * *

“……이야.”

감탄일까, 침음일까. 해련은 알 수 없는 소리를 흘리고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네 줄의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올해는 다치는 날이 많네.”

상호에게 당하고, 악마에게 당하고, 이제는 한참 어린 학생에게까지.

“이 나이 먹고 이러고 싶진 않지만…….”

해련은 검의 손잡이를 잡아서.

“학생이라고 봐줄 수가 없구나.”

검을 뽑아 다혜에게 겨눴다.

다혜는 이제 살아 움직이는 불꽃 같았다. 몸의 윤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맹렬하게 타오르는 강기 때문에.

거기에 튀어나온 검은 뿔과 꼬리.

악마보다 더 악마 같은 형상이 해련에게 다가왔다.

“부탁하마.”

해련의 눈이 가늘어졌다.

“죽이지만 않게 해주렴.”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둘의 모습이 사라졌다.

꽈아앙

허공에서 발생한 충격파가 세희와 아이들을 덮쳤다. 나빛은 움찔하며 방어막을 펼쳐 자신과 아이들을 감쌌다.

격돌의 여파만으로도 신체에 타격이 올 정도의 위력이었다.

“으…….”

나빛의 이마에 진땀이 흘러내렸다.

“어떡해? 보이질 않아서 도와드릴 수가 없어…….”

“보였어도 못 돕겠는데.”

세희는 그렇게 대꾸하며 은율을 돌아보았다. 은율의 품에는 아직도 의식을 잃은 이츠키가 안겨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나디아.

태화는 아까 하늘로 날아갔다.

‘민정 선생님 불러오고 있는 거겠지……?’

그냥 도망치는 줄 알았던 건 아닐까. 문득 그런 걱정이 들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세희는 은율과 나디아, 나빛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너희는 먼저 가.”

“왜?”

은율이 흔들림 없는 눈으로 세희를 바라보았다.

‘뭐?’도 아니고 ‘왜?’라니. 대뜸 날아온 질문에 세희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내가 그나마 저 언니랑 싸울 수 있으니까.”

“우린 안 돼?”

“안 돼.”

“왜?”

“……그건.”

지금은 거짓으로 답할 수 없다. 세희의 목소리가 점차 기어들었다.

“너희는, 약해서…….”

은율의 눈이 가만히 세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위험……하니까.”

세희는 그렇게 얼버무렸다. 하지만 은율이 싫어할 대답이란 건 알았고. 그래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은율의 대답에는 시간이 걸렸다.

“……알았어.”

은율은 그렇게 답하고 살짝 웃었다.

시선을 돌리고 있던 세희는 그 기색을 알아채고 눈을 살짝 들었다.

하지만 더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먼저 갈게.”

은율은 그 말을 남기고 나디아와 함께 방어막 반대편으로 뛰었다. 방어막을 유지하던 나빛이 우물쭈물하며 세희를 돌아보았다.

“세희야.”

“응.”

“조심해.”

세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빛도 은율을 따라 도망치자 방어막이 허공에 녹아 사라졌다. 해련과 다혜가 만드는 충격파가 세희를 덮쳤다.

사람과 사람이 만드는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한쪽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윽…….”

세희는 몸으로 버티며 생각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다혜를 쓰러뜨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와중에 충격파가 한 번 거하게 터졌다.

“……크흡!”

그 충격파에 밀려, 땅에 나동그라졌다.

충격의 중심에서 두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밀려난 다혜와 해련은 각자의 무기를 든 채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해련의 눈이 잠시 세희를 향했다.

“왜 안 도망쳤니?”

“도와드리려구요.”

“말은 고맙지만…….”

네가 어떻게 다혜를 상대하겠다는 거냐, 그런 눈빛으로 해련이 말을 흐렸다.

세희는 입술을 깨물며 다혜를 노려보았다.

“찾아봐야죠.”

그때 아까 보았던 광경이 떠올랐다.

“교장선생님.”

뺨을 얻어맞자 잠시 돌아왔던 동그란 동공.

“제가 빈틈을 만들면 바로 기절시켜 주세요.”

“뭐?”

해련이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네가 싸우겠다고?”

“네.”

세희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해련은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고민했다. 학생을 괴물과 싸우게 만들어도 될까. 저 괴물은 진짜 괴물인데. 살 확률보단 죽을 확률이 훨씬 높은 도박이었다.

하지만 뭔가 확신이 있는 듯한 목소리라서.

“……그래.”

고심하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자. 그치만…… 강 선생한테 원망받을 일 없게 해줘.”

“그럼요.”

세희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불시에 다혜에게 달려들었다.

“……크륵?”

해련과의 격투 때문에 잠시 숨을 고르던 다혜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세희를 보고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네까짓 게 감히, 라는 투로.

‘이게…….’

세희의 이마에 혈관이 솟았다.

너한테도 장난이냐. 사람도, 용도. 자신과 싸우는 것을 장난으로 생각한다.

세희는 그게 싫었다. 위에서 깔보는 것이.

그리고 자신도 싫었다. 그 싫은 짓을 은율에게 했기에.

‘절대…….’

용서 못 한다.

세희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손을 들어 내공을 쥐어짰다. 손에서 이전까지와는 다른 감각이 드는 강기가 맹렬하게 타올랐다.

“정신…….”

“크르……!”

의외의 속도에 놀랐는지, 혹은 숨을 덜 골랐는지. 다혜는 움찔하며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세희가 더 빨랐다.

세희는 손을 뒤로 당겼다가.

힘껏 휘두르며 외쳤다.

“……차리라고, 이 X발년아!”

하늘색 불꽃을 두른 손바닥이 뺨을 향해 날아갔다.

312. 사후처리

쫘아악

통렬한 소리와 함께 불꽃이 터져나갔다.

휘두른 손을 따라 흩날리는 불꽃. 꽃잎처럼 부서지는 하늘색들이 다혜의 동그란 주홍빛 눈동자에 비쳤다.

“……아으.”

다혜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뺨은 불에 덴 듯 화끈거리고, 몸은 이상하게 쑤시고 아프고. 분명 동물 해골바가지처럼 생긴 놈하고 싸우고 있었는데.

눈을 감았다 떠 보니 세희가 자신의 따귀를 갈기고 있었다.

“……라고, X발년아!”

“……므아?”

다혜는 잠시 얼이 빠졌다.

세희에게 쌍욕을 듣다니. 그것도 따귀를 맞으면서. 자신이 뭘 잘못했기에 이런 욕을 듣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얻어맞은 뺨이 얼얼해서 눈물이 쏙 나왔다.

“므으…….”

서러워서 울먹이려고 하는데, 뒷목에 바람 한 줄기가 닿았다.

퍼억

“……우웅.”

다혜의 눈동자가 위로 휙 돌아갔다.

세희는 앞으로 쓰러지는 다혜를 품에 받아내었다. 검은 뿔과 꼬리가 새까맣게 탄 숯처럼 결을 따라 바스러지고 있었다.

“성공이네.”

해련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실패했으면 세희는 확실히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고, 자신과 다혜 둘 중 한 명이 끝장날 때까지 싸우게 되었을 터였다. 이쯤에서 끝난 게 참으로 천만다행이었다.

“요즘 별일 없길래 괜찮을 줄 알고 데려왔더니……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학교에 두면 더 위험한 거잖아요.”

웬만한 선생들은 다 실습에 투입됐고, 학교에는 아리가 있다. 세희는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저희 다, 언니가 와서 살았어요.”

“그래?”

해련의 눈이 악마의 시체를 향했다. 반으로 찢어진 몸에서는 아직도 검은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강검을 만들어 하늘로 올려보냈다.

강검이 번쩍이며 일정하게 호를 그리더니, 얼마 후 한 여인이 날아와 해련의 옆에 착지했다.

“부르셨어요?”

“애들 좀 데려가줘.”

해련은 세희와 다혜를 눈짓하고 다시 악마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이걸 어떻게 처리할지 협회랑 이야기해봐야겠어.”

“네.”

여인은 세희에게서 다혜를 받아 업었다.

“가자, 학생. 걸을 수 있겠어?”

“네.”

사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걸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세희는 여인을 따라 버스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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