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으음.”
지윤은 슬며시 눈을 떴다. 얼굴을 땅에 처박고 있어서 앞이 컴컴했다.
머리 위에서 무언가 가벼운 것이 통통 뛰어다녔다.
“뺙.”
“……혁구 왔구마.”
나빛이 온 걸까. 지윤은 흙을 뱉어내고 고개를 들었다.
도시는 완전히 아작이 났다. 번화하지 않은 작은 도시라 높은 빌딩은 없었지만, 난쟁이 건물들이라고 해서 폭발로부터 무사하지는 못했다.
숲 쪽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도시에 조금만 가까이 있었어도 무너지는 건물과 날아가는 돌덩이에 세상 하직할 뻔했다.
‘쌤은…….’
주변을 둘러보니 미진은 바로 옆에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나빛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혁구만 왔는갑네.’
반파된 도시 너머로 전투의 소음이 들려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서둘러 도망치지 않으면 또 휩쓸릴 것 같았다.
지윤은 미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쌤예, 쌤예.”
“으으…….”
“괘안심니꺼?”
다행히 미진은 금방 눈을 떴다. 크게 다치진 않은 모양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벌떡 일어나 앉은 미진은 곧바로 지윤의 상태부터 살폈다.
“괜찮아?”
“예. 쌤은예?”
“멀쩡해.”
도시 너머에서 한 차례 폭발이 일어나자 둘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빨리 돌아가자.”
“예.”
그런데 숲에서 작은 형체들이 튀어나왔다.
녹색, 회색의 난쟁이 괴물들. 교사들이 약해서 통과시켰던 잔챙이 몬스터들이었다.
미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검을 뽑았다.
딱히 별 위협거리도 안 되는 놈들이지만.
‘왜 여기로 모여든 건지…….’
이런 잔챙이들은 폭발로부터 도망치는 게 일반적인데.
자세히 보니 몬스터들의 눈은 초점이 풀려 있었다.
‘아하…….’
미진은 전쟁에 참여해 본 적은 없지만, 헌터로서 공부를 해서 알고 있었다. 지금 저 몬스터들이 어떤 거대한 의지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전쟁 때의 몬스터들에게서 자주 보였다는 증상이었다.
‘지원을 가려는 건가.’
그렇다면 이놈들이 끝이 아닐 것이다. 숲의 모든 몬스터들이 이 방향으로 오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마주친 이상 싸워야 하겠지만, 옆에 학생이 있다. 미진은 검을 치켜들며 지윤을 흘끗했다.
“지윤이.”
“예.”
“길 뚫리면 바로 달리는 거야.”
“예.”
지윤의 주먹이 하얀 강기로 둘러싸였다.
예상대로 숲의 그늘에서 더 많은 몬스터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미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검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내 주변에 갑자기 붙지 말고.”
“예.”
“이상한 게 보이면 바로 말해.”
“예.”
“가자.”
주먹과 검.
둘은 각자의 무기를 힘껏 움켜쥐고 몬스터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아~ 뭐야~.”
미래가 깔깔거리며 상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쌤 게임 엄~청 못해!”
“……끄응.”
상호는 아리의 무릎에 앉은 채로 게임기를 내려다보았다. 화면에는 ‘GAME OVER’란 문구가 깜빡이는 중이었다.
어려지니까 동체시력도 초기화. 덕분에 버튼 하나로 장애물을 뛰어넘는 이런 간단한 게임조차도 못하는 몸이 되어 버렸다. 평소였다면 프레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숨 쉬듯이 편하게 이겼을 텐데.
‘그래도 뭐, 애들이랑 노는 건데 지면 어떠냐…….’
그래서 그냥 기분 좋게 씩 웃고 있는데, 단비가 게임기를 집으며 눈을 반짝였다.
“쌤, 쌤.”
“응?”
“저랑 소원권 걸고 해요!”
“…….”
또 시작이다. 상호의 손이 덜덜 떨렸다.
“……꼭 뭘 걸고 해야겠어?”
“에이, 게임이 그래야 재밌죠~. 멍!”
건전한 패키지 게임이 사행성 게임으로 변질되려 하고 있었다. 상호는 황급히 아리의 무릎에서 일어났다.
“서……선생님 화장실 갔다 올게.”
그러자 아리가 상호의 손을 덥석 잡았다.
“혼자 가실 수 있겠어요?”
“아니 아리야, 내가 무슨 갓난아이도 아니고…….”
“선생님 같은 아이한텐 여고는 아주 위험한 곳이에요.”
“너희보다 더하겠니……?”
손을 놓아주질 않는다. 상호는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하솔을 바라보았지만, 하솔은 헛기침을 하며 그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그는 결국 억지로 손을 뿌리치고 문가로 도주했다.
“앗! 쌤 도망간다!”
“어디 가요! 멍!”
“화장실 간…… 읍.”
간다니까, 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문을 열자마자 나타난 누군가의 품에 얼굴이 파묻혀서.
상호는 눈을 들어 그 누군가를 확인했다.
“…….”
“…….”
이서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이서야?”
“네.”
“영화는……?”
“재미없어서.”
이서는 그를 툭 밀어내고 교실로 들어갔다.
“게임기 줘봐.”
“앗, 일진들 단골 대사.”
“멍, 나빛이 언니 없다고 바로 깡패 됐어…….”
“……좀 해보자고!”
“단골 대사 2네~.”
“그다음엔 야 나 이거 빌려줘, 하고서 집에 가져가고? 다음날 사라지는? 그런 전개. 멍.”
“익숙하네~.”
“……됐어, 꺼져. 안해.”
무심한 척하지만 심통이 난 표정이었다. 상호는 다리를 꼬고 앉은 이서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같이 놀고 싶었나 보네.’
그리고 문을 닫았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눈이 욱신거렸다. 많이 아픈 건 아니지만, 자꾸 신경이 쓰일 정도로. 그는 안대 아래로 손을 넣어 눈을 살살 문질렀다.
‘눈이 왜 이러지…….’
문득 불안한 예감이 피부를 타고 흘렀다. 그놈과 관련된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다들 무사한지 걱정이 되었다.
‘전화라도 해봐야겠다.’
상호는 화장실로 걸어가며 핸드폰을 꺼냈다.
310. 마흔(魔痕)
얼굴에 뜨거운 게 흘러내렸다.
입술이 쓰디쓰다. 내장과 체액이 뒤섞인 액체 때문에. 실수로 먹기라도 했다간 크게 고생할 맛.
“퉤…….”
해련은 침을 뱉고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하얀 양복이 피로 푹 젖었다. 마치 처음부터 붉은 양복이었던 것처럼. 세탁은 꿈도 못 꾸고 버려야 할 듯했다.
해련의 옆에 선 여자 검사가 물었다.
“왜 양복을 입고 오신 거예요?”
“요즘 전투복은 남사스럽잖아.”
“남사스러우면 어때요. 몸매도 좋으시면서.”
“보여줄 사람이 오늘 안 왔네. 하필이면.”
옷은 또 사면 된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해련은 걷어붙였던 소매를 내리며 피식 웃었다.
그녀의 옆에는 몬스터들의 시체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지축을 뒤흔들며 날뛰던 거대 괴수도 이제는 반으로 갈라진 채였다.
준 X급들에게 이 정도 습격을 처리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도망친 놈들은?”
“쫓고 있어요.”
“그만 쫓고 애들부터 찾자.”
“아직도 못 찾았대요?”
“응.”
“그럼 그렇게 전할게요.”
여인은 이어셋에 대고 해련의 말을 전했다.
몬스터들의 시체 중에서 한 놈이 꿈틀거렸지만, 그 즉시 해련의 강검이 날아가 놈의 몸을 관통했다.
‘나도 찾으러 가야겠지.’
해련은 피 묻은 검을 바지에 쓱쓱 문지르고 칼집에 집어넣었다.
“나도 찾으러 갈게. 소정이 넌 여기서 감시해. 놈들이 더 오진 않는지.”
“네.”
여인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마자 해련의 발이 땅을 박찼다.
* * *
입술이 검었다.
먹물을 묻힌 듯 검었다. 그 검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그르렁거림도,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도.
“크르…….”
“언니.”
세희는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기댈 곳이 없어 다혜를 불렀다. 더 이상 초강기에 맞설 내공이 없어서.
하지만 알아들을 리 만무했고.
다혜는 악마의 피가 묻은 이빨을 드러내며, 그녀들에게 다가왔다.
“키힛…….”
간편한 식사거리를 앞둔 듯 웃는다.
그리고 지금 그녀들은 간편한 식사거리가 맞았다. 다혜를 막을 방법이 없었기에. 세희는 검을 겨누며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다혜는 세희가 한 걸음 물러날 때마다 두 걸음씩 다가갔다.
‘어떻게 해야…….’
세희의 뺨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때 갑자기 나디아가 무언가를 들고 다혜에게 달려들었다.
“나디……?!”
세희는 나디아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칼날에 부적이 덕지덕지 붙은 검. 이츠키의 검.
나빛도 그 의도를 알아챘는지, 다혜를 향해 황금빛 사슬을 던졌다.
“크륵?”
다혜는 가소롭다는 듯 웃고는 사슬을 후려쳐 부쉈다.
하지만 금방 날아든 수십 개의 사슬들을 보고는 흠칫하며 몸을 뒤로 뺐다.
퍽
“크……?!”
거기에는 나빛의 방어막이 세워져 있었다.
자세가 흐트러진 틈을 타 사슬들이 다혜의 몸을 묶었다. 머리만 남기고 빈틈없이.
나디아는 검을 눕혀 잡았다.
“흐읍!”
검의 옆면이 다혜의 뺨을 후려쳤다.
“……크륵!”
다혜는 초점 풀린 눈으로 당황성을 뱉었다. 눈이 안 보이는 저주에 당첨된 모양이었다.
기회다. 두 번 다시 안 올 기회. 세희는 나디아를 향해 소리쳤다.
“나디아! 도망쳐!”
“네!”
나디아는 대답하며 돌아섰다.
그 순간, 보이지 않는 힘이 나디아를 움켜잡았다.
“윽……?!”
허공섭물.
나디아도 세희도 당황해서 눈을 부릅떴다.
“크르…….”
다혜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나디아를 향했다.
소리로 알아낸 것이다. 말을 걸어 버려서. 세희는 자신의 실책을 알아채고 눈을 부릅떴다.
‘내가……!’
이츠키는 저주를 걸고 나면 절대로 말을 하지 않았는데. 남의 능력을 빌리니 이렇게 엉성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내가 해결해야 해.’
나디아가 죽으면 다 자신의 탓이다. 세희는 검을 치켜들었다. 이제 다혜는 초점을 되찾고 나빛의 사슬을 뚝뚝 끊어버리는 중이었다.
마지막 남은 강기가 칼날 끝에 아주 좁게 타올랐다.
이걸로 벨 것이다.
사람을, 벨 것이다.
“흐읍……!”
세희는 검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다혜의 팔을 향해 내리쳤다.
정말 잘라버릴 요량으로.
하지만 다혜는 나빛의 사슬을 완전히 풀어버리더니.
퍼억
세희의 배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커흑!”
세희의 몸이 멀리 나가떨어졌다.
배가 뚫릴 것 같았다. 구멍이 난 것처럼 아팠다. 떡 벌어진 입에서 침이 뚝뚝 흘러내렸다.
“으……흑…….”
다행히 나디아는 다혜의 허공섭물에서 벗어나 뒤로 물러난 채였다. 세희는 그 모습을 확인하고 일어서려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
“선생님!”
뒤를 돌아보니 은율이 엎드린 채로 무언가를 입가에 가져가고 있었다.
이어셋.
“선생님? 교장선생님! 민정 선생님!”
치지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해련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율을 따라 다급한 목소리였다.
[누구니? 아니, 어디야? 하늘에 뭐든 던져 봐!]
그 말에 나빛이 하늘로 성창을 쏘아 올렸다.
다급한 목소리가 짐승의 본능을 자극했는지, 다혜는 가장 가까이 있는 나디아를 무시하고 은율에게 달려들었다.
세희는 무작정 다혜에게 달려들었다.
강기도 없이.
콰직……
검이 다혜의 등으로 날아들었지만, 아무런 상처도 주지 못하고 저 혼자 부서져 버렸다.
심지어는 돌아보게 만들지도 못했다.
“크륵……!”
다혜의 손에 붉은 불꽃이 타올랐다. 손톱 모양으로.
막아야 했다.
칼은 부서졌고, 남은 것은 두 손뿐.
세희는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다혜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크륵?!”
“정신…….”
그리고 고개를 젖힌 채 뒤를 돌아보는 다혜의 뺨을.
“차리라고!”
주먹으로 힘껏 갈겼다.
뻐억
바위를 땅에 던지듯, 둔탁한 소리가 골을 울렸다.
“……!”
다혜의 고개가 옆으로 확 돌아갔다.
그 순간, 세희는 다혜의 노란 눈동자 속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동그란 모양으로 돌아온 것을 보았다.
정신을 차린 걸까.
세희는 희망을 갖고 다혜를 바라보았지만.
“……아.”
다시 세희를 돌아보는 다혜의 눈 속에는 찢어진 동공이 자리하고 있었다.
눈동자에 붉은 기운이 휘몰아쳤다.
“크르…….”
다혜의 등 쪽에서 무언가가 불룩 튀어나왔다.
쫘아악
질긴 전투복을 찢고 나타난 것은 꼬리였다. 채찍처럼 길고 가느다란 파충류의 꼬리. 태화의 것보다 훨씬 길었고, 아리의 것보단 얇았다. 하지만 딱 봐도 단단한, 갑옷 같은 갑각이 꼬리의 위쪽을 감싸고 있었다.
색은 온통 검은색이었다.
“크르륵…….”
이제는 사람인지, 용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조차 알 수 없는 그 생물이 세희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뱀처럼.
세희의 바로 코앞에서.
“세희야!”
나빛이 성창을 날렸고, 은율이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 정도 거리에서는 모든 것이 의미가 없었다. 오로지 세희와 다혜, 둘만이 의미를 갖을 뿐.
세희는 다혜와 눈을 마주쳤다.
“언니.”
다혜의 눈동자가 한 차례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붉은 강기로 만든 손톱이 세희를 향해 날아들었다.
세희는 시야 옆으로 다가오는 붉은 기운을 느끼며.
“정신 차려요.”
나직하게 중얼거리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