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쪽 맞아?”
태화는 돌부리를 걷어차며 짜증을 부렸다.
“이상한 데로 가고 있는 거 아냐? 누구 찾는지는 알 수 있어?”
“셋 중 하납니다.”
이츠키는 허공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나무 사이를 걸어갔다.
“일단은 가까운 사람부터 찾는 겁니다.”
“그니까 그게 누군진 아냐고!”
“모릅니다.”
“아오……, 그냥 날아가면 안 돼?!”
“그럼 몬스터들한테 보이잖습니까.”
“답답해 죽겠네…….”
태화는 투덜거리며 둥실 떠올라 아이들 옆을 날아다녔다. 그런 태화의 꼬리를 은율이 덥석 잡았다.
“가만히 있어. 몬스터들이 어디서 나올지 모르잖아.”
“걔들은 달리고 있을 텐데 이런 식으로 언제 쫓아! 굼벵이가 문워크를 해도 이것보단 빠르겠다!”
“태화 말이 맞아…….”
나빛이 초조한 표정으로 손을 꼼지락거렸다.
“너무 느려. 이대로 가다간 세희도, 지윤이도 위험해질 거야…….”
“너 때문에 못 뛰고 있는 거잖아!”
나무 사이를 날기에는 날개가 걸리적거리는데다가 황금색으로 휘황찬란하게 빛나기까지 한다. 태화는 그나마 순간이동으로라도 이츠키를 쫓아갈 수 있었지만, 나빛은 그러지 못했다. 게다가 달리기는 또 꼴등.
그렇다고 또 안 데려갈 수는 없었다. 아이들 중의 유일한 신앙인이라서.
“너는 진짜 아까부터 발목만 잡냐! 이 치사하고 무능한 년아!”
“으이잉…….”
“뭘 잘했다고 울어!”
분통을 터트리는 태화의 입을 나디아가 막았다.
“쉬…….”
“우붑! 넌 또 뭐웁…….”
“몬스터. 몬스터.”
몬스터가 꼬이니까 조용히 하라는 뜻인 것 같았다.
나디아는 숲에서는 눈빛이 달랐다. 하늘색 눈동자는 쉴 새 없이 주변을 살피며 몬스터의 기척을 찾아다녔다.
은율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츠키를 돌아보았다.
“거리도 알 수 있어? 혹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거야?”
“하나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뭇잎을 헤치고 누군가가 착지했다.
“어?”
아이들과 미진은 서로를 확인하고 당황해했다.
“얘들아? 너희…… 왜 여기 있어?”
“저희, 지윤이랑 세희 찾으러…….”
“선생님들이 찾고 있는데 너희가 왜 와!”
여기가 어디라고 왔는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데. 미진은 눈을 부라리며 아이들이 왔던 방향을 가리켰다.
“돌아가. 지금 몬스터들이 몰려오고 있단 말이야. 거기서 선생님들이 가만히 있으라고 안 했어?!”
“저희가 몰래 왔어요…….”
나빛은 떠듬떠듬 항변했다.
“그래도…… 이츠키가 사람 잘 찾아요. 저번에 세희 찾으러 갔을 때도 이츠키가 찾았어요…….”
“그건 선생님들이 알아서 할 일이야! 너희가 신경 쓸 일이…….”
혈압이 오르자 편두통이 몰려왔다. 미진은 이마를 짚으며 손을 내저었다.
“됐어. 빨리 돌아가. 애들은 선생님이 찾을게.”
“그런데 지금까지 못 찾았잖습니까.”
이츠키의 말아 날카롭게 정곡을 찔렀다.
“제가 같이 찾으면 방향은 확실하게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안 돼. 위험해서 안 돼. 너희가 얼마나 잘 찾을 수 있는지하고는 상관이 없어!”
“찾는 게 늦어질수록 오양과 세희가 위험해집니다.”
“……으음.”
미진은 침음하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럼 방향만 알려주고 돌아가.”
“둘이 찾는 게 빠를 겁니다.”
이츠키는 검지를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선생님은 저쪽으로 가는 겁니다. 저흰 이쪽으로 가보겠습니다.”
“어느 쪽이 누군지 알 수 있어?”
“그건 모릅니다.”
“……그래.”
정말이지 누구처럼 고집불통인 아이들이다. 미진은 다시 한숨을 푹 쉬고는 귀에서 이어셋을 뺐다.
“이거 가져가.”
“네?”
나빛은 당황하며 자신에게 들이밀어진 이어셋을 내려다보았다. 회색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이게 뭐예요?”
“무전기 같은 거야. 이거 누르고 말하면 돼. 교장선생님이랑 설미 선생님이 듣고 있을 거야.”
“선생님은요……?”
“어쩔 수 없지.”
미진은 혀를 차고 돌아섰다. 이츠키가 가리킨 방향으로.
“너희는 그 한 명 찾으면 바로 돌아가. 절대 또 찾으러 오지 마.”
“네…….”
“몬스터 조심하고. 싸우다가 시간 끌리지 말고. 유인당하지도 마. 너희는 애들 찾아서 도망치는 것만 생각하는 거야. 알았어?”
“네. 조심할게요.”
은율의 눈동자에 미진의 뒷모습이 비쳤다.
“선생님도 조심하세요.”
“그래.”
짧은 대답을 끝으로, 미진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남겨진 아이들은 서로를 한 번 돌아보고는, 먼저 달리기 시작한 이츠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이, 이츠키. 같이 가…….”
“뛰어! 멍청아. 이 정도도 못 따라가냐! 에이씨…… 업혀!”
“앗, 고마워…….”
“아오, 드럽게 무겁네……. 대체 뭘 처먹은 거야? 너 또 임신했냐?”
“으잉…….”
“뭘 잘했다고 울어, 돼지새꺄!”
“으이이잉…….”
다섯은 날고 달리는 속도를 한층 더했다.
308. 악마의 속임수
“뭔가 이상한디…….”
지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버려진 도시. 아무도 없는 게 당연하고, 조용한 것도 당연했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실습 구역이 아닌가삐네…….’
너무 멀리 온 걸까.
그렇지만 실습 구역의 경계에는 선생들이 배치되어 있을 텐데. 무슨 일이 생겨서 떠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지윤은 살짝 초조해져서 손바닥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별일 아니어야 할 터인디…….’
선생들이 실습까지 내팽개칠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필시 보통 일은 아닐 터. 돌아서서 실습 구역으로 향하려는데, 건물 위로 뭔가가 쑥 하고 올라왔다.
거대한 그림자였다.
“……어?”
지윤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다리는 떨리는데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못을 박은 것처럼. 땅에 찰싹 붙어버린 발바닥을 통해 둔중한 진동이 느껴졌다.
빌딩보다 더 큰 괴물.
‘뭐꼬, 저게…….’
저런 놈과는 싸울 수가 없다. 지윤은 후들거리는 발을 간신히 떼어 숲을 향해 뛰었다.
거리가 멀어서 아직은 괜찮았다. 빨리 뛰면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득 또 다른 공포감이 마음을 엄습했다.
자신을 떼어놓고 다들 먼저 가버린 건 아닌지.
‘……미치겄구마.’
이럴 줄 알았으면 열심히 뛰지를 말걸.
그때 눈앞의 숲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지윤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손에 강기를 둘렀다.
하지만 몬스터가 아니었다.
“지윤아!”
미진이었다.
지윤은 상대가 미진인 것을 확인하고는 주먹을 내렸다.
“……쌤예.”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미진은 땀이 줄줄 흐르는 얼굴로 지윤의 뒤를 흘끗했다. 도시 너머로 거대 괴수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일단 도망치자! 뛰어!”
“예…….”
지윤은 미진의 뒤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주변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아니, 세상이 어두워졌다. 모든 것이 그림자로 뒤덮여서. 마치 태양이 땅에 내려온 것처럼.
지윤도, 미진도 뒤를 돌아보았다.
“헉…….”
거대한 불덩이가 괴물을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괴물보다도 더 큰 불덩이. 그 안에 담긴 마나가 가늠이 되질 않았다. 평범한 헌터의 인지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라서.
지윤은 멍하니 불덩이를 올려다보았다.
저게 저 위치에서 터지면.
‘여기까지 휩쓸릴 것 같은디…….’
멍청히 서 있는 지윤의 팔을 미진이 확 잡아끄는 순간.
“엎드려!”
빛이 세상을 휩쓸었다.
* * *
사내가 해련을 돌아보았다.
“휩쓸린 헌터가 있지 않을까요?”
“그러지 않기를 바래야지.”
실습 구역에 더 다가가기 전에 멈춰 세워야 했다. 폭발의 여파가 예상외로 좀 멀리까지 퍼져나간 것 같긴 하지만, 사람이 크게 다칠 정도로 위력이 크지는 않았다. 직격당한 지역을 빼고는.
해련은 사내와 함께 땅에 내려섰다.
산도 숲도 완전히 뒤집어졌다. 거인이 흙장난을 해놓은 것처럼. 아름드리 고목도 아기가 숨듯이 고개를 땅에 파묻었고, 산조차 도망치고파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런 폭발에도 괴수는 죽지 않았다.
키에엑……
몸부림치는 거대 괴수와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몬스터들. 폭발을 직격당한 위치였는데도 살아남은 놈들의 수가 상당했다.
해련은 놈들을 바라보며 강검을 만들었다.
“증원이 필요하겠는데.”
“대원들 불러올까요?”
“응.”
사내가 이어셋을 누르고 무어라 말하기 시작했다. 해련 또한 이어셋을 누르며 강검을 몬스터들에게 날렸다.
“민정 양?”
[네.]
“이제 우리가 맡을 테니까, 민정 양은 아이들 찾아요.”
[아직도 못 찾았대요? 그 여덟 명?]
“응. 민정 양이 가서 도와줘요. 난 이제 싸워야겠어.”
해련은 강검을 튕겨내는 몬스터를 노려보며 무전을 끊었다.
“잔챙이만 있는 건 아닌가 보네.”
“그런 것 같네요.”
사내도 맞장구를 치며 검에 불타는 듯한 강기를 둘렀다.
“저놈은 제가 맡겠습니다.”
“내가 할게. 도종이 너는 대원들이랑 저 큰 놈 좀 맡아라.”
“예.”
둘은 몬스터들에게 검을 겨누며 다가가기 시작했다.
* * *
‘왜 이러지……?’
세희는 숨을 몰아쉬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빨랐다. 뜀박질을 한 사람처럼. 하지만 실습을 하는 동안엔 한 번도 뛴 적이 없었다. 의욕이 나지 않아 그냥 걷기만 했는데.
오늘은 몸이 이상했다.
아니면 마음이 이상해서 몸까지 이상해진 것일지도 몰랐다.
‘왜…….’
혼자 있어서 그런 걸까.
공황일까. 우울증은 부자만 걸린다는데. 좀 먹고 살만해졌다고, 친구도 있고 선생님도 있다고, 지난날의 일까지 끄집어내어 기어코 가련한 척을 하려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혼자 있는 건, 너무나도 싫었다.
‘애도 아닌데.’
세희는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어째 숲이 이상하게 고요했지만, 세희의 귀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마음속의 아우성만 요란스레 울릴 뿐.
그때.
달그락……
아까 들었던 소리.
세희는 벌떡 일어나 차가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와.”
달그락……
하지만 아까처럼 소리만 들릴 뿐.
몬스터인가. 따라온 걸까. 아니면 누군가의 장난일까. 오만 가지 의심이 마음을 에워싸자 실제로 포위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오라고.”
세희는 날 선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런 다음 아까처럼 주변의 나무들을 베어 넘기려는데.
슈욱
서늘하고 날카로운 감각이 뒷목을 찔렀다.
‘……!’
세희는 그 즉시 고개를 숙이고 발로 뒤를 걷어찼다.
슉……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발차기를 피하고 사라졌다.
엄청나게 빠르다. 학생들보다는 물론이고, 어지간한 교사들보다도 훨씬 더. 다행히 세희의 동체시력은 상호를 기준으로 맞춰져 있었다.
검에서 하늘색 강기가 날아갔다.
퍼억
나무가 잘려나가고 그 뒤의 하얀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개 해골을 닮은 머리.
손 대신 칼날이 달린 팔.
세희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조님?’
‘맞아.’
예경이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놈이야.’
담임이 말했던 악마. 담임의 눈을 찌른 놈.
대답을 확인한 세희는 온몸에 호신강기를 둘렀다.
‘보통 놈이 아냐…….’
상호에게 내공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초강기를 오래 유지하긴 힘들다. 단칼에 끝내는 것이 좋았다.
세희는 악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악마도 세희를 향해 달려들었다.
‘베기만 하면……!’
세희의 검에서 불꽃이 확 타올랐다.
검은 악마의 목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악마는 세희의 검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부활하는 놈이니까 당연하다. 세희는 당황하지 않고 검로를 정연하게 갖췄다. 흔들림 없이 일직선으로.
목적은 이놈을 정말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잠시 전투불능으로 만들고 도망치는 것.
검이 악마의 목에 닿았다.
‘베었……!’
그때 시야 아래쪽으로 하얀 무언가가 들이닥쳤다.
악마의 칼날. 세희는 심장을 노리고 들어오는 그 칼날을 막기 위해 몸의 호신강기를 한층 끌어올렸다.
그런데 칼날이 호신강기를 뚫고 들어왔다.
‘……!’
황급히 몸을 틀었지만, 칼날은 쇄골을 스치고 지나가 어깨를 한 번 푹 찌르고는 살점을 한 덩이 훑어갔다.
궤적을 따라 피가 흩뿌려졌다.
“……큭!”
세희는 어깨를 부여잡고 뒤로 물러났다.
심장을 지킨 것은 좋지만, 초강기가 뚫렸다. 비록 담임처럼 완벽한 천색창염은 아니지만, 그래도 초강기고 단단함만으로는 X급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데.
‘대체…….’
역시 악마는 뭔가 다른가. 악마의 칼날을 살피던 세희의 눈에 뭔가가 띄었다.
칼끝에 검은 불꽃이 아주 작게 붙어 있었다.
‘초혼강기야.’
예경이 중얼거렸다.
‘조심해.’
‘초강기로는 못 막아요?’
‘같은 강도라면 뚫리지. 상호보다는 약해 보이지만…… 이 악마란 놈들이 얼마나 힘을 숨기고 있는질 모르겠네.’
세희는 악마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조금씩 물러났다.
‘사조님도 이놈이랑 싸워보셨죠?’
‘응. 거의 10년 전에. 그땐 이렇게 강하지 않았는데…….’
‘악마들도 그동안 수련을 한 걸까요?’
‘그건 아닐 것 같은데.’
예경의 마음이 무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얼마 전에도 저렇게 강하진 않았어. 여태껏 숨기다가 지금 본색을 드러냈다는 건…… 저놈의 목표가 세희, 너라는 뜻이야.’
‘그런가요.’
남은 의문은 하나. 세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피가 흐르는 팔로 검을 치켜들었다.
‘제가 선생님의 보험이라는 걸 알고 온 걸까요? 천색창염을 배우고 있다는 걸…….’
‘그럴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겠지.’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건 모르겠어.’
그렇다면 이제는 생존을 염려해야 할 때.
세희가 검을 겨누자 악마는 턱을 달그락거렸다. 가소롭다는 듯이. 그 웃음을 본 세희의 이마에 혈관이 솟았다.
예경이 속삭였다.
‘침착해.’
‘네.’
그때 악마가 먼저 달려들었다.
세희는 눈을 찔러오는 악마의 칼날을 피하고 악마의 턱을 향해 검을 올려쳤다. 하지만 악마가 다시 휘두른 두 번째 칼날을 피하느라 공격을 헛치고 말았다.
팔은 두 개. 칼날도 두 개. 심지어 상대는 세희의 공격을 막을 필요가 없지만 세희는 무조건 피해야만 했다.
그냥 베어버리려 했다가는 동귀어진에 당하고 만다.
‘돌겠네…….’
속도도 빨라서 도망치는 것도 여의치 않다.
그렇지만 시간을 더 끌었다가는 초강기까지 꺼져버릴 터. 최악의 상황만은 피해야 했다. 세희의 눈이 하늘을 향했다.
‘도망치면서 도움을 요청해야…….’
교장과 민정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세희가 그렇게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려는 순간.
악마의 칼날이 세희의 허벅지를 베었다.
“윽……!”
너무 깊이 베였다. 세희는 잠시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힘줄이나 신경이 잘렸는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런 씨…….’
죽음의 공포가 성큼 다가왔다.
세희는 진땀이 배어나는 손으로 검을 움켜잡고 악마의 칼날을 향해 휘둘렀다. 칼 자체를 베어 보려는 요량으로.
하지만 악마의 팔은 구렁이처럼 능란하게 움직여 세희의 검을 빗겨내고는, 오히려 틈을 타 공격해 들어왔다.
칼날이 세희의 눈을 향해 날아들었다.
‘아…….’
세희는 끝을 직감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싶었지만, 지금까지의 수업으로 인해 몸에 버릇이 들어서, 끝까지 눈을 감지 못하고 칼끝의 검은 불꽃을 마주하며.
마지막으로 고개를 틀어 칼을 피하려 했다.
핏……
속눈썹에 칼끝이 닿았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으리라. 세희는 체념하고 곧 다가올 고통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선생님…….’
그때 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퍼억
쏜살같이 날아온 성창이 악마를 쳤다.
성창은 악마의 몸에 박히지는 않았지만, 옆으로 밀어내기에는 충분했다. 악마의 칼날이 세희의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큭.”
피가 철철 흐르자 머리가 띵했지만, 세희는 빠르게 몸을 굴려 악마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뒤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희야!”
“천세희! 등신아, 정신을 어따 팔고 다니는 거야? 정령들이 말하는 거 못 들었냐?!”
뒤를 돌아보니 나빛과 태화, 그리고 은율과 이츠키와 나디아가 달려오고 있었다.
달려오는 아이들을 세희가 손바닥을 들어 막았다.
“오지 마!”
“뭐? 왜?”
“오지 말고 도망쳐!”
덕분에 살긴 했지만, 초강기를 못 쓰는 아이들이 와 봤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틈이 생긴 지금이 제일 도망치기 좋은 때였다.
세희는 아이들을 향해 절뚝이며 달려갔다.
“나빛! 내 뒤에 방어막으로 막아! 태화 넌 위로 올라가서 아무 선생님이나 불러!”
“세희야, 피, 피…….”
“빨리!”
나빛이 세희의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치료받을 시간 없다. 세희는 은율에게 부축해 달라고 말하려다가 나빛의 귀에 꽂힌 이어셋을 발견했다.
생각조차 할 틈이 없다. 세희의 손이 반사적으로 이어셋을 향해 올라갔다.
그렇게 나빛의 이어셋을 빼서 버튼을 누르고 말하려는데.
세상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어?”
모두가 당황하는 그때, 다시 세상이 밝아지더니.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지축이 뒤흔들리며, 충격파가 숲을 휩쓸었다.
“꺄악!”
“크윽……!”
강렬한 폭풍이 나무 사이로 몰아쳤다.
아이들은 풍압을 이기지 못하고 나무에 부딪히거나 땅을 굴렀다. 다리를 다친 세희는 균형도 잡지 못한 채로 비틀거리다가 나무에 몸을 부딪혔다.
그 바람에 이어셋도, 칼도 놓치고 말았다.
‘앗……!’
세희는 당황하며 이어셋을 찾아 땅을 더듬었다. 하지만 폭풍에 비산한 흙에 파묻혀 보이지가 않았다.
시야의 옆 끄트머리에서 희끗한 무언가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X발……!’
X됐다.
칼이 멀리 떨어져 있다. 세희는 충격으로 짜부라진 폐부에 억지로 숨을 밀어 넣으며 검을 향해 기어갔다.
하지만 악마가 걸어오는 속도보다는 느릴 수밖에 없었다.
‘이 X발……!’
이대로 가면 몰살인데.
주변에 친구들이 쓰러져 있었다. 저놈의 목표가 자신이라 해도 친구들을 살려둘 이유는 없었다. 세희는 검을 포기하고 흙을 헤집어 돌멩이를 집었다.
달그락……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악마가 턱을 달그락거렸다. 세희는 그 모습을 보고 눈에 불을 켰다.
“뭘 쪼개, 이 개새끼야!”
달그락……
악마는 세희의 앞까지 다가와 칼날 달린 팔을 들어 올렸다.
돌을 지금 던져야 할까. 칼을 막고 던져야 할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전투가 성립이 되지 않았다.
악에 받친 세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대로 죽을 순 없는데.
친구들을 살려야 하는데.
‘어떻게…….’
답을 구할 수가 없다.
세희는 이를 악물고 돌을 힘껏 움켜쥐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제발……!’
모든 내공을, 모든 마음을 끌어모아 돌에 담았다.
돌이 하늘색으로 타오르고, 악마의 칼끝이 검은색으로 타오르는 그때.
나무들 사이에서 얼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느아으으.”
309. 악마와 용
“어?”
세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악마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혹은 들었으면서도 세희를 죽이는 것만이 목적인지, 조금도 반응하지 않은 채로 세희를 향해 팔을 내리찍었다.
하지만 칼날은 세희에게 닿지 않았다.
콰앙
무언가가 날아와서 악마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다혜의 드롭킥. 전신의 무게와 온 힘을 실은 날아차기에 악마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다.
퍼억
“아으!”
다혜는 가볍게 바닥에 착지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학교와 멀리 떨어진 곳이라서 수갑과 입마개를 푼 모습이었다.
하지만 악마는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듯 멀쩡하게 일어났다.
다혜의 눈이 의아함으로 가득 찼다.
“느아?”
“악마예요.”
세희는 검을 주워들며 말했다.
“평범한 공격으론 못 죽여요.”
“므아으응…….”
“도망치면서 선생님들한테 도와달라고 해야…….”
피를 너무 흘려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관자놀이, 어깨, 허벅지. 아무래도 더 이상 싸울 상태가 못 되는 것 같았다.
세희는 서 있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으…….”
“끄응…….”
그때 나빛과 태화가 신음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야야……. 뭐야? 뭐가 터진 거야?”
“꾸꾸야, 어딨어? 꾸꾸야…….”
“……으.”
뒤이어 은율과 나디아도.
하지만 이츠키는 정신을 잃었는지 땅에 얼굴을 박은 채로 일어나지 못했다.
‘이츠키…….’
세희가 이츠키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다가가려는데, 악마가 다혜를 향해 달려들었다.
위턱과 아래턱을 시끄럽게 부딪치면서.
달그락……
“아으.”
다혜는 검을 한 바퀴 빙글 돌렸다. 단순히 손을 풀기 위한 동작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여유를 부리는 행동이기도 했다.
검에서 붉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카앙
강기가 둘러진 검을 악마는 가볍게 막아냈다. 한쪽 팔로. 나머지 팔은 이미 다혜의 목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다혜의 몸에서 호신강기가 피어올랐다. 피하지 않고 강기로 때우려는 모양이었다. 세희는 그걸 알아채고 다급히 소리쳤다.
“피해!”
“므앙?!”
다혜는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악마의 칼끝이 다혜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베이지는 않았다. 약간 긁혀서 혈선이 남았을 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죽음의 공포는 충분히 느껴졌다.
“……아으.”
다혜는 뒤로 물러나 검을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눈빛이 이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세희는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나빛을 돌아보았다.
“나빛.”
“꾸꾸야, 꾸꾸야…….”
“나빛!”
“으, 응?!”
“나 치료해 줘.”
이츠키가 쓰러져서 도망칠 수 없는 지금, 자신이라도 치료를 받아서 싸워야 했다. 이 자리에서 초강기를 쓸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었기에.
“시간 없어, 빨리!”
“으, 응…….”
하지만 나빛은 세희를 향해 기어오면서도 땅을 더듬었다.
“꾸꾸야? 꾸꾸 어딨어…….”
“꾸꾸는 나중에 찾아!”
“으, 으응…….”
세희는 그제서야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손이 상처들을 쓸었다. 나빛의 성력이 워낙 강했기에 상처들은 금방 아물었다. 관자놀이도, 어깨도, 허벅지도.
나빛은 세희의 허벅지에서 손을 떼며 물었다.
“괜찮아? 더 다친 데 없어……?”
“응.”
이제 다시 싸울 수 있다. 세희는 몸을 일으키며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나빛. 넌 혁구 찾고. 너희는 이어셋 좀 찾아줘.”
“세희 넌……?”
“싸워야지.”
“뭐?”
그 말에 태화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만 헌터야? 야, 우리도 싸울 줄 알아!”
“너흰 안 돼. 너흰 모르잖아! 저놈이 왜 위험한지…….”
“니는 알면 뭘 안다고 그러는데? 알면 말을 해봐!”
“그럴 시간이 어딨어!”
악마는 다시 다혜와 격돌하고 있었다. 칼끝에서 검은 불꽃을 휘날리면서. 세희는 발끈하며 태화에게 소리쳤다.
“빨리 이어셋이나 찾아! 어차피 누군가는 찾아야 된다고!”
“그럼 니가 찾아! 우리가 싸우게. 니는 방금 전에도 죽을 뻔했잖아!”
“나니까 이 정도로 끝난 거거든?!”
“지랄하네.”
태화는 콧방귀를 뀌고는 교복 소매를 걷어붙였다.
“꺼져! 난 싸울 거야.”
“이 등신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세희는 이를 갈며 태화의 앞을 가로막았다.
“네가 싸우면 죽을 뻔하는 게 아니라 죽는다고!”
“뭐? 야, 너 날 얼마나 X밥으로 보는 건데?”
“너 죽을까봐 이러는 거 아냐, 병신아!”
그때 뒤에서 무언가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세희와 태화는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나무에 처박힌 다혜가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끄으…….”
입술 사이로 피가 흘렀다.
잘 버티나 싶더니 결국은 당해 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한계.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세희는 다혜의 앞에 선 악마를 향해 검을 휘둘러 들어갔다.
‘……이런.’
칼에 두른 초강기가 가냘프게 흔들렸다. 바람 앞에 놓인 등불처럼.
내공이 거의 거덜났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공격. 세희는 악마가 다혜에게 정신이 팔린 틈을 타 등 뒤로 기습을 했다.
검이 악마의 뒤통수를 향해 내리쳐졌다.
달그락
불길한 비웃음이 어김없이 들려왔다.
세희는 이 악마가 자신의 기습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망할…….’
예상대로.
악마는 돌아서자마자 세희의 가슴팍을 향해 칼을 내질렀다.
‘함정……!’
이판사판이다. 세희는 이를 악물고 검로를 꺾어 악마의 검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온 마음을 담아서.
‘제발.’
초혼강기. 강기에 영혼을 담는다 했다.
뒤에서 세희를 돕기 위해 불덩이와 성창이 날아오고 있었지만, 세희는 알지 못했다. 모든 신경이, 모든 감각이 검에만 집중되어 있었기에.
깨우치면 살 것이고.
깨우치지 못하면 죽을 것이다.
그런 각오로 검을 휘두르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악마의 팔을 붙들었다.
터억
“크륵.”
짐승의 그르렁거림.
세희는 악마의 팔을 붙든 손을, 그 주인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
“크르르르…….”
다혜의 입에서 피 섞인 침이 뚝뚝 떨어졌다.
우드득, 우드득, 뼈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솟아나는 뿔. 동공이 세로로 길쭉하게 찢어지는 노란 눈동자.
악마만큼 답 없는 존재가 깨어나고 있었다.
“언니?”
“크르르…….”
다혜는 세희의 부름에 반응하지 않았다. 이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다혜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초강기…….’
온몸에서 마구잡이로 넘쳐흐르는 강기.
학교에서 상대했을 때도 이랬다. 아니, 그때보다 더욱 강해 보이기까지 했다. 해련과 자신이 상대했을 때는 저토록 뚜렷하지 않았는데.
그때 다혜가 양손으로 악마의 팔을 잡더니.
우지직
힘으로 뜯어버렸다.
지저분한 단면에서 검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악마마저도 다혜의 힘에 놀랐는지 움찔하며 옆으로 물러났다.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세희는 그 틈을 타 뒤로 물러나서 아이들을 향해 달렸다.
이제는 닥치고 도망쳐야 했다.
“도망가! 빨리!”
“꾸꾸 어딨어? 꾸꾸야……!”
“도망치라고!”
세희는 나빛의 뒷덜미를 잡아채고 은율에게 소리쳤다.
“은율! 이츠키 좀 들어줘! 태화, 넌 빨리 올라가서 뭐라도 찾아봐!”
“우씨…….”
태화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순간 뒤에서 기묘한 소리가 났다.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통째로 찢는 듯한, 그리고 나뭇가지 천 개를 묶어 단번에 꺾는 듯한.
세희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쫘아악……
다혜가 악마를 반으로 찢고 있었다.
우두두둑……
맨손으로. 그 어떤 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오로지 손과 팔의 힘으로.
갈라지는 단면에서 검은 피가 꿀럭꿀럭 쏟아져 나왔다.
“크아……크흐.”
다혜는 그 단면에 고개를 처박고 피를 꼴깍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서.
노란 눈동자로 세희를 마주했다.
“……아.”
세희는 끝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