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1화 (311/501)

* * *

둘은 함께 교문을 나섰다.

시내까지는 거리가 꽤 있지만 굳이 걷는 쪽을 택했다. 은율도 딱히 싫지는 않은 눈치고. 그래서 상호는 은율의 곁에 다가붙어 뒷짐을 지고 걸었다.

주머니에서 자꾸 진동이 울렸지만 잠시 무시하기로 했다.

“은율이 뭐 먹고 싶어?”

“아무거나 괜찮아요.”

“그러면 진짜 아무거나 먹는다? 뭐 아무거나 생각나는 거 없어?”

“으음…….”

은율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선생님 저기 덮밥집 가보셨어요?”

“덮밥? 어딘데?”

“저기 큰 사거리 왼쪽 골목이에요.”

“그런 데가 있었구나. 몰랐네. 거기로 갈까?”

“네.”

둘은 꼭 붙어 걸어서 상가로 향했다.

학교 주변에서 제일 번화한 사거리에서, 신호등을 지나 왼쪽 골목으로 들어서니 은율이 말한 일식풍의 덮밥집이 보였다. 상호는 은율과 함께 그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오세요~.”

점원이 둘을 반겼다.

자리마다 식탁을 놓은 게 아니라 점원이 요리하는 곳 앞에 일자로 앉아 먹는 방식이었다. 상호는 의자에 앉아 은율에게 메뉴판을 넘겼다.

“너 먹고 싶은 걸로 두 개 시켜.”

“아, 네…….”

“사이드도 먹을까?”

“괜찮아요…….”

은율은 뺨을 조금 붉히며 메뉴판을 가리켰다.

“차슈덮밥이랑 연어덮밥…… 괜찮으세요?”

“응. 여기요.”

상호는 앞에 있는 점원을 불렀다.

“여기 차슈덮밥이랑 연어덮밥이랑 새우튀김이랑 닭튀김이랑…….”

“서, 선생님. 저 덮밥 하나면 배불러요…….”

“괜찮아. 남으면 내가 먹을게. 그렇게 주세요.”

주문을 받은 점원이 부산하게 요리를 시작했다.

가게 유리창 밖으로 이따금씩 학생들이 돌아다녔다. 대부분 예현여고 학생들이었다. 몇몇 아이들은 상호를 알아보고 호들갑을 떨며 묵언의 인사를 하기도 했다.

상호는 물을 홀짝이며 물었다.

“은율이는 친구들이랑 이쪽으로 자주 놀러 와?”

“네. 가끔…….”

은율은 말을 흐리고는 바깥에서 손을 흔드는 아이들을 흘끗했다.

“그런데 저희…… 이렇게 있어도 괜찮을까요?”

“뭐 어때. 반장한테 사줄 수도 있지.”

그러고 보면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은율아.”

“네.”

“반장 일 어땠어? 할만했어?”

은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았어요. 하나도 안 힘들고…….”

“그래도 3학년 때는 힘들겠지?”

“……그럴 것 같아요.”

3학년 때는 헌터 시험이 있으니까. 상호는 풀이 죽은 은율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내년엔 동생들한테 넘기자.”

“네.”

그때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상호는 은율이 먼저 덮밥을 고를 때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은율도 똑같이 그가 먼저 고르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결국 그는 쓰게 웃으며 연어가 든 덮밥을 은율의 앞에 놓았다.

“먹어, 어서 먹어. 차슈도 먹고.”

“네…….”

은율이 고개를 푹 숙이고 숟가락을 들었다.

깨작깨작 먹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아이들 중에서 제일 키가 큰데도. 어쩌면 그 때문에 대비가 되어서 귀여워 보이는지도 몰랐다. 상호는 은율이 먹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식사를 시작했다.

이렇게 단둘이서 먹으니 느낌이 생소했다.

‘애들하고도 단둘이서 먹은 적은 별로 없지…….’

그나마 태화가 자주 같이 먹었고. 세희도, 나빛도, 지윤도. 단둘이서 먹은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이유는 상기한 셋 중 두 명이 외식 이야기만 나오면 귀신같이 달려왔기 때문이지만.

‘둘이서 먹는 비중을 좀 늘려 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밥을 먹는데, 이번엔 전화가 왔다.

밥을 우물거리던 은율이 그를 돌아보았다.

“선생님. 전화 오는 것 같아요.”

“으응.”

상호는 쓰게 웃었다.

“일부러 안 받는 거야.”

“누구신데요?”

“……애인.”

“수녀님이요?”

“응.”

“싸우셨어요?”

“아니, 싸운 건 아닌데.”

싸우기 싫어서 안 받는 것이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 새우튀김으로 은율의 입을 막았다.

주머니에서는 벨소리가 계속 울리고 있었다. 이대로 쭉 씹었다가는 더 큰 화를 불러올 터였다.

‘받아야겠지…….’

무시도 적당히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결국 그는 핸드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야.]

“네.”

[어디야?]

“은율이랑 밥 먹고 있어.”

[밥?]

효은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묻어났다.

[그래서. 언제 오는데.]

“조금…… 조금 늦어. 밤늦게 들어갈 것 같아. 먼저 자고 있어.”

[뭘 하는데? 애랑 늦게까지 뭘 하길래?]

“그냥 이것저것…….”

[야.]

말투가 매섭다. 상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진땀을 흘렸다.

“……응.”

[10시까지 들어와. 뒤지기 싫으면.]

“에이, 늦는다니까…….”

[애들 통금이 10신데 뭔 소리야? 시간 맞춰 들어와. 줄 거 있으니까.]

역시 착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상호는 옷장 속 무기들을 떠올리며 다급히 핑계를 지어냈다.

“으, 은율이 오늘 생일이래. 그래서…… 같이 놀아 주기로 했어.”

[X랄하네. 애들한테 물어본다?]

“진짜야. 내가 그런 걸로 거짓말할 것 같냐?”

제발 물어보지 마라. 상호는 도박수를 던지고 가슴을 졸였다.

[흐음……. 그래?]

다행히 그냥 넘어가는 눈치였다.

[알았어. 먼저 잔다.]

“응, 응. 먼저 자. 사랑해~.”

[갑자기 웬 사랑해야? 참나……. 잘 놀다 들어오셔.]

“응~.”

상호는 최대한 살가운 목소리로 살랑살랑 통화를 마쳤다. 그 모습을 본 은율이 새우 꼬리를 입에 문 채로 말했다.

“정말로 싸운 건 아니셨나 봐요.”

“응…….”

“근데 왜 안 들어가시려는 거예요?”

“……어른의 사정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대답이었지만, 은율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순진하게 눈을 깜작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그러면 저희 밥 먹고 놀아요?”

“응?”

상호는 숟가락을 입에 가져가다가 멈칫했다.

은율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늦게까지 노는 거예요?”

“……으응. 그래야지.”

“통금은 어떻게 해요?”

“사감선생님한테 말해 줄게.”

“그럼 뭐 하고 놀까요?”

반짝반짝반짝.

상호는 부담스러운 눈빛을 피해 덮밥으로 시선을 돌렸다.

“글쎄……. 돌아다니면서 한번 보자. 밥 먹고 나서…….”

“네.”

“천천히, 천천히 먹어. 체할라.”

“네.”

하지만 은율의 숟가락은 벌써 그릇의 바닥을 긁어대고 있었다.

한 그릇 먹으면 배부르다더니, 이제는 곁반찬까지 싹 해치우려 한다. 상호는 게 눈 감추듯 튀김들을 멸종시키는 은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긴, 괜히 키가 큰 게 아니겠지…….’

어찌나 빨리 먹었는지, 입가에 밥풀이 붙은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상호는 무심코 손을 들어 밥풀을 떼려다가.

‘쪽팔리려나…….’

몰래 떼어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해, 손 대신 내공을 뻗었다.

은율의 입가에 묻은 밥풀이 톡 하고 떨어져 나왔다.

“……아.”

은율이 움찔하며 그 밥풀을 내려다보았다. 내공이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은율의 뺨이 발갛게 물들어갔다.

“죄, 죄송…….”

“에이, 뭐가 죄송해.”

상호는 피식 웃고는 그릇이 다 빈 것을 확인하고 물을 쭉 들이켰다.

“계산하고 나가자.”

* * *

“선생님…….”

은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희 이래도 되는 거예요……?”

“에이, 괜찮아.”

상호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아무도 모를 거야.”

“그치만……. 잘못된 일이잖아요…….”

“괜찮아, 괜찮아. 아, 나온다.”

“선생님……!”

배출구에서 호박 머리 인형이 튀어나왔다.

은율의 품에는 이미 해골 인형, 마녀 인형 등등이 가득 안겨 있었다. 은율은 호박 머리 인형을 주워들며 난색을 지었다.

“이렇게 많이 뽑아가도 될까요……?”

“천 원씩 꼬박꼬박 내니까 괜찮아. 두 개씩 가져가는 건 아니잖아.”

상호는 다시 지폐를 기계에 넣었다.

버튼을 누르자 기계손이 인형을 향해 내려갔다. 이런 기계가 다 그렇듯 집는 힘이 형편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상호가 잡은 이 기계는 기계손에 끈끈이라도 붙은 것처럼 인형을 철썩 붙들었다.

물론 상호의 허공섭물이었다.

“아, 또 나온다.”

“너무 많아요, 선생님…….”

은율이 한숨을 폭 쉬었다.

“저는 하나만 있으면 돼요…….”

“그래? 그럼 다른 거 하러 가자.”

상호는 마지막으로 뽑은 늑대 인형을 은율의 품에 안겨주고 자리를 떴다.

저 멀리에 네모난 부스가 하나 보였다.

“저건 뭐야?”

“사진 찍는 곳 같아요. 즉석 사진기.”

둘은 눈을 마주쳤다.

“해볼까?”

“네.”

은율은 흔쾌히 답하고 상호와 함께 사진기 부스로 들어갔다.

커튼을 걷고 안에 들어와 보니 뒤쪽으로 공간이 더 있었다. 상호는 문을 열고 그 공간을 들여다보았다.

요상한 옷이 몇 개 걸려 있었다.

‘탈의실……인가?’

옷 갈아입고 찍으라는 건가. 참 별게 다 있다.

하지만 은율에게 저런 걸 입힐 것도 아니고. 딱히 관심을 가질 필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문을 도로 닫으려 했다.

그런데 은율이 안을 쓱 들여다보더니 눈을 반짝였다.

“선생님.”

“응?”

“이거 입고 찍어 볼까요?”

은율이 가리킨 것은 하얀 고양이 옷이었다.

짧고 털 달린 튜브탑 원피스에 고양이 머리띠, 고양이 손. 상호는 그 옷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입어보고 싶어? 이걸?”

“네. 입고 찍고 싶어요. 선생님이랑…….”

“혹시…… 애들한테 자랑하려는…… 건 아니지?”

“안 할게요…….”

은율이 간절한 표정으로 상호의 손을 잡았다. 꼭 해보고 싶다는 것처럼.

이게 뭔데 그렇게 애타는 눈빛을 짓는가.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도 상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찍자.”

그 대답에 은율이 소리 내어 웃었다.

“헤헤…….”

잘 들려주지 않는 밝은 웃음소리로. 은율은 환하게 웃으며 탈의실로 쏙 들어갔다.

* * *

‘귀엽긴 하네…….’

상호는 사진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하얀 고양이 옷을 입은 은율. 키는 제일 크지만 발그레한 볼과 맹한 표정이 참 귀여웠다. 자꾸 보고 싶을 만큼.

그렇지만 이제는 주머니에 집어넣어야 했다.

‘자고 있겠지……?’

그러기를 바라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방은 어두웠다. 그리고 조용했다. 낮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침대 쪽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자는구나!’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었다.

씻으면 깰 수도 있다. 그냥 피곤한 척 바로 자는 것이 좋다. 그는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 침대에 살며시 걸터앉았다.

외투를 벗는데 효은이 뒤척였다.

“으음…….”

설마 깼을까. 상호는 외투를 끌어안고 가슴을 졸였다.

다행히 효은은 더 움직이지 않았고, 덮은 이불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살았다…….’

상호는 안심하고 이불 속에 들어갔다.

그런데 별안간 몸 위에 무언가가 턱 하고 놓였다.

“왔냐?”

“…….”

돌처럼 굳어버린 상호의 귀에 뜨거운 숨결이 와 닿았다.

“씻고 와. 개새꺄.”

“……나 피곤해.”

“난 열두 시간 동안 너 기다렸는데?”

효은의 손에는 털이 복슬복슬한 고양이 손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그 끝에 달린 조악한 플라스틱 발톱이 상호의 뺨을 천천히 긁었다.

“태화가 말해줬어, 븅신아. 너 이거 X나 좋아한다매.”

“……착각이야.”

“가게에서 이것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던데?”

“그니까 그게 착각이라고…….”

“짐승 좋아하는 거 보니까 니는 짐승이 맞나 보다.”

등 뒤로 부드러운 살결이 자꾸만 달라붙었다.

“하긴 짐승이 씻긴 뭘 씻겠냐. 벗어 새끼야. 확 긁어 버리기 전에.”

“나 잘래…….”

상호는 몸을 움츠리며 이불을 몸에 둘둘 말았다. 그러자 효은이 장갑을 벗어 던지고 그의 머리채를 잡았다.

“아니 개새끼야! 왜 안 하는데!”

“저번에 말했잖아, 너랑 하면 잠을 못 잔다니까! 나 내일도 출근이라고!”

“X까. 난 할 거야. 똑바로 누워. 어쭈, 숨겨? 숨겨? 돌아누워. 안 돌아누워? 발로 찬다?!”

“잘 거야, 잘 거라고…… 미친년아! 어딜 차는 거야!”

“필요도 없는 거 으깨버릴라고 X새꺄. 또 찬다? 또 찬다? 돌아 누우라고, 야!”

“아오……!”

상호는 결국 고양이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

305. 물가에 아이를

“어, 고양이다.”

“쿨럭!”

상호의 입에서 기침과 딸꾹질이 섞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옆에서 걷던 나빛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생님? 왜 그러세요?”

“으흠, 그냥…… 침을 잘못 삼켜서 사레가 들렸어.”

상호는 헛기침을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침의 출근길, 나빛이 가리킨 곳에서는 회색 얼룩 고양이가 그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이 가까워도 도망치지 않는 것을 보니 학생들에게 길이 든 모양이었다.

어제 방에서 만난 검은 고양이가 생각이 났다.

‘죽을 뻔했지…….’

붙잡고 놔주지를 않는 통에 새벽 3시가 되어서야 잠에 들었다. 덕분에 상호의 눈 밑에는 거뭇한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나빛이 회색 고양이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선생님.”

“응?”

“고양이들은 안 추울까요?”

“글쎄. 저렇게 살 수 있게 태어났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아니에요. 추울 것 같아요.”

“…….”

답이 정해져 있는 건가. 상호는 눈을 끔뻑이며 나빛의 속뜻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기숙사 보일러실에 고양이용 구멍을…….”

“우리 반으로 데려가요.”

“……그쪽이니?”

하지만 저걸 학교에 데려갈 수는 없다. 누가 24시간 돌봐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 고양이도 실내 생활에 익숙하지 않을 거고.

그래서 상호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쟤도 지금이 좋을 거야.”

“그런 거예요?”

나빛은 고양이를 흘끗하고 상호의 곁에 꼭 붙어 걸었다. 머리 위에서는 혁구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선생님.”

“응?”

“은호는 언제 와요?”

“나도 몰라…….”

“내일 왔으면 좋겠어요.”

“내일은 실습이잖아…….”

“은호 보면 다들 열심히 실습할 거예요.”

“은호가 실습을 못 하잖아……. 강상호도 못 하고…….”

“그럼 주말에 불러 주세요.”

“……노력해 볼게.”

둘은 나란히 걸어 본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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