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끄응…….”
나빛은 아랫입술을 삐쭉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혁구랑 같이 있을걸…….”
이렇게 심심하고 오래 걸리는 일일 줄은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하늘로 날아올라서 찾아다니고 싶지만, 실습 시작 전에 상호에게 들은 말이 있어서 그러지 못했다.
‘기습을 하랬지…….’
상호라면 어디선가 몰래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빛은 주변을 쓱 둘러보고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주먹을 꼭 쥐었다.
‘멋지게 성공해야지!’
그래서 무작정 바위 뒤에 숨었다.
나빛이 기습이란 단어의 뜻을 떠올린 것은 그로부터 10여 분이 지난 후였다.
‘아! 몬스터를 먼저 찾아야 하는구나!’
나빛은 상호가 들었다면 복장이 터졌을 혼잣말을 속으로 자랑스럽게 외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때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응?’
해골 같은데 해골은 아닌 몬스터.
손이 칼처럼 생겼다. 손가락도 없이. 나빛은 그 손과 해골의 입 모양을 보며 생각했다.
‘쟤는 밥 먹기 되게 불편하겠다…….’
그때 몬스터가 고개를 돌려 나빛을 보았다.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몬스터.’
나빛은 바로 방어막을 치고 성창을 만들었다.
기습은 물 건너갔고, 이제는 전투. 살생은 내키지 않지만 공격해오는 몬스터에게까지 자비를 베풀 생각은 없었다.
성창 수십 개가 허공에 펼쳐졌다.
……카드득
몬스터의 입에서 뼈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몬스터는 짐승보다는 사람에 가까운 걸음으로 나빛에게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허리를 곧게 펴고, 팔을 앞뒤로 조금씩 흔들며.
그 모습이 이질적이었다.
‘뭔가 이상한……?’
나빛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 몬스터가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빛은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친구들보다 빨랐다.
훨씬.
‘이상한데……!’
그때 뒤쪽에서 소리가 났다.
콰창……
유리 깨지는 소리. 그리고 얼굴 옆으로 지나가는 황금빛 파편.
무심코 뒤를 돌아본 나빛의 머릿속이 일순 멍해졌다.
“……어?”
칼날이 눈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298. 숙적
“다음 생에는 강상호같은 존잘남으로 태어나길…….”
태화는 불타는 몬스터의 시체에 대고 합장을 했다.
그런 엄숙한 모습도 잠시뿐. 곧 길고 매끈한 꼬리가 피리 듣는 뱀처럼 신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으흐흐흐…….”
실습이 시작된 지 1시간도 안 되어서 성공.
이 사실을 세희에게 알리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모르긴 몰라도 엄청 짜증 낼 것이다. 아니, 딱히 신경 안 쓰더라도 짜증 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옆에 쫄래쫄래 달라붙으면서.
상호에게 칭찬을 받을 것은 덤.
칭찬을 못 받더라도 분명한 성과가 있으니, 소원권 정도는 따낼 수 있을 것이다.
“흐헤헤헹…… 응?”
태화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이미 한 번 겪어본 느낌. 그렇지만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는 알 수 없었고.
교실에서 느꼈었던 것 같다는, 희미한 기억만 어렴풋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뭐지……?’
고개를 기웃거려도 더 생각나지는 않았다. 결국 태화는 잿더미가 된 몬스터의 시체를 발끝으로 두어 번 뒤적이고 콧노래를 부르며 버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아.”
나빛은 몸을 움찔했다.
세상이 점으로 수렴하는 느낌이었다. 모든 의식이 칼끝에 집중되고, 쪼개어 늘어진 시간 속에서 무력함에 잠겨 그저 돌처럼 굳어 버린 채.
동공을 뚫고 들어온 죽음의 공포가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하지만 실제 칼날은 닿지 않았고.
“……선생님.”
칼날의 주인 또한 저 멀리 나무에 처박혀 있었다.
나빛은 자신을 끌어안은 상호를 올려다보며 힘겹게 웃었다.
“헤헤…….”
더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상호의 표정이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마치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돌처럼 굳은 얼굴로 눈을 부릅뜬 모습.
나빛은 상호의 몸이 진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선생님……?”
“……너는.”
메마른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분명…….”
상호는 타들어가는 목에 마른침을 삼키고 눈앞의 존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존재를 알았다.
개 해골. 칼날이 달린 팔.
그리고 무엇보다 몸을 세로로 가른 흉터.
“죽였는데…….”
오른쪽 눈이 미친 듯이 욱신거렸다.
죽였다. 예경이 죽였다. 그의 친구를 죽이고 눈까지 앗아간 괴물. 그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큰 공포를 선사했던 존재.
분명히 죽었는데.
있을 수 없는 기사에 상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선생님…….”
그러나 곧 이어진 나빛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검을 움켜쥐었다.
나빛이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괜찮으세요?”
“응.”
상호는 짧게 답하고 나빛을 품에서 내렸다.
“물러나 있어.”
그런 후 안주머니에서 혁구를 꺼내 나빛에게 날려보내고, 다시 개 해골 괴물을 살폈다.
어릴 적의 기억이라 분명하진 않다. 하지만 뭔가 모습이 바뀐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가시가 많아졌고, 조금 더 자세가 곧았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도 훨씬 신경 쓰이는 것은.
‘왜 안 죽었지……?’
머리부터 반으로 갈라졌었다. 쓰러져서 움직이지 않았던 것을 확인했다. 그런데도 부활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니.
그렇지만 그때의 그는 애송이였고.
지금의 그에게는 힘이 있었다.
화르륵……
상호의 검에서 검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러자 개 해골 괴물의 입에서 어떤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껄끄럽고, 거슬리는 달그락거림.
상호는 그 비웃음을 듣다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너 이 새끼…….”
외눈에 어두운 빛이 깃들었다.
“악마였구만.”
카르르드득……
개 머리 악마가 대답하듯이 소리를 냈다.
그때의 예경이 초혼강기를 쓸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 평범한 마나로도 타격을 입는 하급의 악마일 터. 적어도 당시에는 그랬던 것이 분명했다.
지금은 어떨지 알 수 없었다.
“나빛아.”
그의 부름에 나빛이 흠칫했다.
“아, 네…….”
“선생님들 있는 곳으로 가.”
이 악마란 족속들 앞에서는 방심할 수 없다. 상호는 말을 끝맺자마자 악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쿠드득……
상호의 손이 악마의 목을 붙잡았다.
악마는 기이할 정도로 고요하게 상호의 배를 향해 칼날을 찔러넣었다. 마치 상호의 공격은 자신에게 해가 될 수 없다는 것처럼.
상호는 그 칼날을 다른 손으로 붙잡고.
악마의 목을 붙잡은 손에 내공을 모아 터트렸다.
콰아앙
대포처럼 뿜어진 폭발이 숲의 나무들을 박살 냈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실습 중인 학생들에게 생각이 미쳤다.
‘멀리 데려가야 한다.’
그때 이어셋에서 잡음이 들렸다. 상호는 그 잡음이 혼선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소리쳤다.
“한 명씩 말해요!”
[무슨 일이야?]
민정의 목소리였다.
[지금 뭐랑 싸우고 있는 거야?]
“악마 같아.”
상호는 목을 물어뜯으려 드는 악마를 주먹으로 후려치고 말을 이었다.
“일단 멀리 데려갈게. 내가 맡던 애들 좀 누나가 봐줘.”
[응.]
민정과 무전이 섞였던 누군가는 다시 무전을 하지 않았다. 상호의 대답을 같이 들은 모양이었다.
비정상적인 마나의 폭발이 일어나자 주변에서 교사들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사람이 늘어나면 거추장스러운데.’
상호는 악마의 복부를 무릎으로 가격했다.
콰앙
단순한 발차기로도 공기가 뒤흔들렸다.
평범한 몬스터라면 내장은 물론이고 등까지 터져 죽었겠지만, 악마는 그저 공중으로 튕겨 오를 뿐이었다. 상호는 하늘 높이 뜬 악마를 따라잡아 이번엔 옆으로 걷어찼다.
꽈아앙
악마가 저 멀리 산을 향해 날아갔다. 실 끊어진 연처럼 팔다리를 흐늘거리며.
실습 지역을 벗어났다. 이제 맘 놓고 싸워도 된다. 상호는 내공을 한껏 끌어올려 검에 초혼강기를 둘렀다.
그리고 악마를 향해 휘둘렀다.
콰아아아……
날아간 검강이 악마를 갈랐다.
‘……어?’
너무도 쉽게.
상호는 반으로 갈라져 떨어지는 악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야?’
그때보다 더 강해진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 베이느냐 않느냐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그는 악마가 떨어진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두 동강이 난 악마의 시체가 수풀에 누워 있었다.
미동도 없이.
“…….”
상호는 발끝으로 악마의 머리를 툭 쳤다.
툭.
툭, 툭.
“야.”
악마는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다.
상호는 악마의 목뼈를 밟아 부러뜨리며 중얼거렸다.
“안 죽은 거 알아, 이 새끼야.”
우두둑……
뼈 부서지는 소리 사이로 악마의 웃음이 들렸다.
카카칵……
그 웃음소리를 듣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놈은 더 이상 위해를 끼칠 수 없는 상태인데도.
검푸른 초혼강기가 악마의 몸을 뒤덮었다. 상호는 그렇게 내공을 쏟아 악마의 시체를 불태웠다.
불꽃 속에서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이어졌다.
‘……쳇.’
죽였는데 죽인 기분이 들지 않았다.
시체까지 싹 태웠는데도 뭔가 꺼림칙했다. 상호는 이게 끝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며 검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느낌이 안 좋은데…….’
아직도 이어지는 눈의 욱신거림은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 *
해가 지고, 실습이 끝이 났다.
악마에게 습격받은 나빛은 계속 안정을 취하게 했고, 제일 먼저 몬스터를 잡은 것이 태화. 그 다음이 나디아, 은율, 이츠키.
지윤과 세희는 몬스터를 잡지 못했다.
“응~, 벌레~.”
태화가 세희의 뒤에서 배를 간지럽혔다.
“몬스터 못 잡았쬬? 쓸모업쬬? 헌터 실격이죠?”
“……시끄러.”
“어쩔간지럼~, 어쩔찌르기~, 어쩔꼬집기~.”
“꺼져!”
세희는 눈에 불을 켜고 태화의 등짝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매를 버는 데엔 도가 텄다. 상호도 은근슬쩍 끼어들어 태화의 등짝을 찰싹찰싹 쳤다.
“악! 누구야! 누가 때리는 거야! 천세희 아니지!”
“글쎄다.”
“우씨, 쌤은 나 때리면 안 되지! 내가 제일 잘했잖아!”
태화가 상호의 멱살을 잡고 자기 몸을 흔들었다.
“칭찬을 해야 할 거 아냐! 1등으로 잡았는데!”
“잘했네.”
“그렇게 싱겁게 말고오오!”
상호는 달려드는 태화를 밀어내며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지윤은 세희와 마찬가지로 몬스터를 잡지 못해 꽁해 있었고, 나빛은 아까 놀랐던 것 때문인지 계속 의기소침해 있었다. 은율은 생각에 잠긴 눈빛으로 땅을 내려다보았고, 이츠키 또한 복잡한 표정으로 먼 산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나디아는 비교적 멀쩡했다.
“나디아.”
“네?”
나디아가 푸른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호는 그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디아는 몬스터 잡는 게 익숙해 보이네.”
그 말에 나디아는 말없이 웃었다.
날이 어두워서 불의 정령과 마법이 도로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상호는 시무룩해 있는 지윤의 머리를 쓰다듬고 버스를 턱짓했다.
“먼저 타. 지윤이랑 세희만 이야기 좀 하자.”
“허접~. 수준 미달~. 등급 위험해~.”
“들어가라고!”
태화는 상호에게 등허리를 몇 대 얻어맞고 나서야 버스로 뛰어 들어갔다. 일부러 매를 버는 것 같기도 했다.
상호는 버스로 들어가는 은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지윤과 세희를 마주했다.
“세희, 지윤이.”
둘은 손을 몸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네.”
“예.”
“왜 못 잡았어?”
“찾지를 못했습니더.”
기어들어갈지언정 흔들림은 없었다. 상호는 지윤을 가만히 보다가 어깨를 토닥였다.
“실습이야 또 있을 테니까. 다음에 잡아보자.”
“예.”
“들어가 있어.”
지윤이 버스로 터덜터덜 들어갔다.
이제 세희와 단둘이 남았다. 상호는 살짝 몸을 숙여 세희의 눈을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세희야.”
그가 부르자 맑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
“왜 못 잡았어?”
“찾지를…… 못했어요.”
지윤과 같은 대답.
지나치게 똑같은 대답에 상호는 꿰뚫을 듯한 눈빛으로 세희를 바라보았다.
“열심히 뛰어다녔으면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열심히…….”
세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찾아봤어요.”
“그래?”
상호의 손이 세희의 뺨을 쓸었다.
“죽이기 싫어서 일부러 안 찾은 건 아니고?”
“……아니에요.”
대답이 늦다.
부모는 알면서도 속아준다더라. 상호는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는 세희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씩 웃었다.
“다음에 잘하면 되지. 그치?”
“네.”
“의무엔 다음이 없어.”
세희의 몸이 흠칫했다.
“만약 이번 실습이 실제 임무였다면, 네가 몬스터를 못 잡음으로 인해서 누군가가 해를 입었을 거야.”
“……죄송해요.”
“맡은 몬스터를 토벌하는 게 헌터의 의무야.”
누군가의 목숨을 손에 쥐고 있는 것과 진배없다.
그렇기에 다음은 없다.
“다음 실습 때는 의무를 다해 줬으면 좋겠다.”
“네…….”
“몇 시간을 그냥 버린 셈이 됐잖아.”
상호는 풀이 죽은 세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럴 거면 나한테 와서 같이 놀기라도 하지 그랬어.”
그 말에 세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호를 올려다보다가, 곧 부드럽게 배시시 웃었다.
상호도 씩 웃고 세희의 등을 두드렸다.
“가자.”
둘은 버스에 올랐다.
아이들은 피곤했는지 이미 곤히 자고 있었고, 앞자리에 앉은 미진도 많이 졸린 기색이었다. 그 졸린 표정으로도 상호를 흘겨보는 것이 퍽 독살스러웠다.
상호는 아이들을 확인하고 핸드폰을 꺼내 출발 준비가 다 되었음을 알렸다. 곧 기사가 시동을 걸었고, 곧 다른 버스들을 따라 출발하기 시작했다.
그때 옆자리에 누군가가 뿅 하고 나타났다.
“뭐였어?”
민정이었다.
뭘 묻는지는 뻔했다. 상호는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어두운 차창을 돌아보았다.
“만났던 놈이었어.”
“만났었다고?”
“응.”
의문스러웠을 것이다. 그들을 만난 몬스터는 전부 죽었으니까.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못 죽였던 건지, 되살아나기라도 한 건지. 잘 모르겠어.”
“언제 만났는데?”
“누나 만나기 전에.”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내 눈을 찌른 놈이야.”
민정에게도 기이하게 느껴졌을까. 돌아오는 목소리엔 혼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놈이 왜 여기 있지? 왜 하필 오늘……. 게다가 우리가 걸러내지도 못했다고?”
“……악마라서 그럴지도.”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선생들한테 말해 놔야겠어. 다음 실습 때도 보이면 우릴 부르라고…….”
“못 해치웠어?”
“시체까지 싹 불태우긴 했는데, 그게 끝일지는…….”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래도 어쩌면…… 그냥 단순히 재생력이 높은 몬스터였을지도 모르고. 이번에 죽이는 데 성공했을지도 모르지. 만약 다음번에 또 보이면…… 그때는 방법을…… 찾아봐야지.”
“피곤해?”
“조금.”
오늘, 오랜만에 두려운 기억을 떠올렸다.
이제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몸의 기억은 남아서.
“조금…… 놀라서 그런가 봐.”
“자.”
민정이 상호의 눈꺼풀을 쓸었다.
“내가 지키고 있을게.”
“……응.”
상호는 안심하고 등받이를 눕혔다. 간신히 잦아든 눈의 욱신거림을 잊으려 노력하며.
곧 고요한 잠이 찾아왔다.
299. 적수
“선생님.”
“응?”
옆을 돌아보니 나빛이 동그란 눈을 깜작이고 있었다. 상호는 창턱에 기대었던 팔을 떼고 나빛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냥, 밖에 좀 보고 있었어.”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나빛의 회색 눈동자에 걱정하는 빛이 비쳤다.
“이렇게 그윽하게 계시면 다른 반 언니들이 잡아가요…….”
“……그거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네.”
상호는 헛기침을 하고 나빛의 머리 위 혁구를 쓰다듬었다.
“조심할게.”
“그건 제가 아니라 꾸꾸예요……. 제 머리 쓰다듬어 주세요…….”
“으응…….”
그가 머리를 쓰다듬자 나빛이 헤헤 웃었다.
실습에서 악마를 만난 지 이틀째. 나빛은 의기소침한 기색 없이 씩씩하게 지냈다. 풀이 죽은 것은 오히려 세희 쪽.
다만 상호가 고민에 빠진 것은 아이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일 때문에.”
“일이요?”
“응. 헌터 일.”
죽지 않는 괴물이 있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곧 또다시 실습일이 다가온다. 그때 또 그놈을 보게 된다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좀 어려워서……이것저것 생각하는 중이야.”
그는 그렇게 얼버무리며 나빛의 볼을 문질렀다.
나빛은 볼을 빵빵하게 부풀려 상호의 손바닥에 가득 차게 했다.
“뭔지는 말씀 안 해주시는 거네요.”
“으응…….”
“그러고 또 세희한테는 말해주실 거죠?”
“……아니.”
상호의 등에 진땀이 흘렀다.
“세희가 너희한테 뭐 자랑이라도 했니?”
“아니요.”
“그럼 내가 세희한테만 말해주는지는 어떻게…….”
“세희는 선생님한테 궁금한 게 없어요.”
나빛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희는 선생님 이야기하면 항상 질문으로 끝나요. 왜 이러실까, 왜 그러실까……. 그런데 세희는 그런 게 없어요.”
“똑똑하네, 나빛이.”
하지만 지금 말해 주기에는 너무 길다. 곧 수업 시간이고.
상호는 나빛의 머리를 쓰다듬고 슬쩍 몸을 돌렸다.
“교실 가자.”
“은근슬쩍 넘어가지 마세요!”
“가자~. 가자~.”
“앗. 헤헤헤…….”
그는 나빛의 팔 아래 손을 넣어 들어 올리고 교실로 향했다.?
이젠 아이들을 제법 다룰 줄 알게 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