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실습이요?”
“응.”
상호는 핸들을 돌리며 대답했다.
뒷자리에는 세희와 은율이 타고 있었다. 진검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이츠키와 나디아는 자신들의 나라에서 자기 검을 갖고 왔기에 이 둘만 사주면 되었다.
은율은 차에 타는 순간부터 계속 난색을 짓고 있었다.
“은율이 왜 그래?”
“저어……, 저는 안 사주셔도…….”
“가검으로도 벨 수는 있겠지만 쓸데없는 힘이 들고……, 너한텐 칼날을 의식하면서 휘두르는 연습이 필요해. 세희도 마찬가지고.”
“그래도, 저희 집 돈으로 살게요…….”
“에이, 괜찮아. 정 부담스러우면 지금 돌아가…….”
장난으로 말했는데 은율이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리려 했다. 상호는 깜짝 놀라 내공으로 문을 잡았다.
“아니 은율아, 차 달리고 있잖아……!”
“저는 빚지고 못 살아요.”
“좀 지고 살아도 돼…….”
애가 세희랑 어울려 다니더니 세희를 닮아간다. 그의 시선이 거울 속 세희를 향했다.
“세희는 이번에도 손에 맞는 게 없으면 적당히 고르고 나중에 또 보자. 알겠지?”
“네.”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미진과 셋이서 검을 사러 갔을 때도 끝내 검을 고르지 못한 세희였다. 오늘은 손에 맞는 물건을 찾을 수 있을까. 상호는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차를 몰았다.
* * *
“선생님…….”
검을 끌어안은 은율의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촉촉하게 반짝였다.
“졸업하면 꼭 갚을게요…….”
“아냐, 아냐. 갚지마. 내가 억지로 사준 거니까…….”
상호는 왔을 때와는 반대로 핸들을 돌리며 세희를 흘끗했다.
세희는 검을 하나 품에 안고 있었다.
“세희야.”
“아, 네.”
“쓸만할 것 같아?”
“네.”
세희가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이 정도면 제법 비슷한 것 같아요.”
“비슷해?”
“네, 선생님 검이랑.”
그게 중요한 포인트인가. 상호는 눈을 끔뻑이다가 쓰게 웃었다.
“그래, 뭐가 어쨌든…… 샀으니까 잘 써봐.”
“네. ……저, 근데 선생님.”
“응.”
“갑자기 실습은 왜 가는 거예요?”
“나라에서 시켰대.”
“어떻게 하는 거예요?”
“구역을 정해서 강한 몬스터들은 교사가 치우고, 약한 몬스터는 너희가 잡는대.”
세희는 은율과 눈을 마주쳤다가 재차 물었다.
“진짜 몬스터를 죽이는 거예요?”
목소리에 걱정이 조금 묻어 있었다.
상호는 세희가 혼자 강원도로 갔다가 몬스터를 죽이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응.”
그 이상은 설명하지 않았다. 실습하면서 스스로 깨닫게 될 테니.
“자세한 건 내일 다같이 모였을 때 설명해 줄게.”
“저희만 가는 거예요? 2학년만?”
“응. 일단은. 이사장님 말로는 1학년도 곧 시키려는 것 같은데…… 어쨌든 월요일엔 너희만 갈 거야. 그렇게 알고 있으면 돼.”
“네.”
차는 도로를 달려 학교로 돌아갔다.
* * *
“2학년도 실습을…….”
설미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괜찮을까?”
“저도 필요하다고 생각은 해요.”
상호는 커피를 홀짝이고 입맛을 다셨다.
주말의 교무실에는 상호와 설미, 그리고 미진과 민정이 모여 있었다.
“2학년이라고 해서 몬스터를 못 잡을 실력은 아니니까.”
“그치만…… 3학년에서도 다치는 아이가 나오는걸.”
“그건 몬스터의 수준을 낮추면 돼요.”
그는 혁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설미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설미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미진은 그렇지 않았다.
“일곱 명 다 간다고요?”
“네.”
“이츠키랑 나디아도요?”
수련이 부족한 아이들. 다른 다섯보다 몸이 느리고, 이츠키의 부적은 아직 몬스터에게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열외시킬 수는 없었다.
“당연히 같이 가죠. 우리 때는 애들보다 약한 사람들도 몬스터를 상대했었어요.”
“제가 전투 쪽으로 선배보다 잘난 건 없지만…….”
미진은 그게 마음에 안 든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한 번의 실수로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곳에…… 아직 부족한 아이들을 보내기는 무리가 아닌가 싶은데요.”
“그걸 알아보려고 실습을 보내는 거죠.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에서 실수를 하는가 안 하는가.”
위험하다고 미루면 평생 미뤄야 한다. 나아가기 위해서는 뛰어넘어야 하는 벽.
소중한 아이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모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외면할 수도 없었다.
“애들이 싫다고 하지 않는 이상 데려갈 거예요.”
“……알았어요.”
그 확고한 목소리에 미진도 두 손을 들었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책상에 놓인 종이를 가리켰다.
“내가 셋, 민정 누나가 셋. 미진 씨가 한 명만 맡아요.”
“네.”
“태화는 다치면 곤란하고, 나빛이는 도망치는 게 느리니까. 세희, 나빛이, 이츠키를 내가 맡고, 은율이, 태화, 나디아를 누나가 맡아줘. 미진 씨는 지윤이만 전담하고.”
“응.”
“네.”
민정과 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원 배정은 끝났고. 또 뭐 챙겨야 할 게 있는가. 상호는 설미를 돌아보았다.
“누나는 해봤어요?”
“아니. 나도 작년엔 2학년까지밖에 없었으니까…….”
“……으음. 그래도 다른 선생님들한테 뭐 들은 거 없어요?”
“예상 못한 일이 자주 생긴다는데…… 그래도 협회에서 지원을 해주니까. 큰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그랬어.”
듣자하니 그동안 큰 사고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뭐 준비물 같은 건 더 필요 없대요?”
“으응, 산에 쓰레기 버리지 않게 간식 같은 건 걷어야 돼.”
“아하……. 그럼 저녁까지 아무것도 못 먹어요? 해질녘까지 하는 거죠?”
“응.”
지윤에겐 특히 힘들겠다. 상호는 쓴웃음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난 이제 애들한테 말해주러 갈게요.”
* * *
다음 날 아침.
“멍…….”
한데 모인 2학년을 향해 단비가 손을 흔들었다.
“언니들 잘 다녀와.”
“으이.”
지윤도 마주 손을 흔들었다.
본관 앞에는 예현여고의 2학년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그 어떤 행사보다도 위험한 일이니만큼 주의사항을 단단히 일러주기 위해 선생들이 기강을 다지는 중이었다.
현관 중앙에 선 해련이 내공을 이용해 목소리를 높였다.
“무기는 다 준비했지요?”
학생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혹시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빠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부담 갖지 말고 언제든지 담임이나 저한테 말하도록 해요. 알았죠?”
“네.”
“뭐 가는지 모르는 사람 없지요? 담임들한테 다 들었죠?”
“네.”
“가서 한 번 더 말해줄게요. 출발합시다.”
해련이 손짓하자 교사들이 학생들을 버스에 태우기 시작했다. 상호도 버스 옆에 서서 아이들을 향해 손짓했다.
“가자, 얘들아.”
“네.”
아이들이 그를 향해 걸어왔다.
누구는 씩씩하게, 누구는 촐랑대며. 또 누구는 그를 바라보며 웃었고, 누구는 결연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기도 했다.
상호는 모두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잘 하고 돌아오자.”
“예.”
“네!”
곧 그도 아이들을 따라 버스에 올랐다.
297. 흉터의 기억
“산~이~다~!”
태화가 버스 창밖에 대고 소리쳤다.
음은 ‘바다다~!’ 할 때와 똑같았지만, 실상은 전혀 신나지 않은 목소리. 그저 묵직한 분위기를 날려버리기 위해 억지로 신난 척하는 것뿐이었다.
제일 앞쪽에 앉은 상호는 태화를 돌아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놀러 가는 거 아니잖아. 조용히 해.”
“산을 보고 산이라 한 것뿐이야!”
“산 아냐.”
“뭣이라?!”
태화가 눈을 부릅뜨고 그의 옆자리로 순간이동을 했다.
“진짜야?! 저거 산 아냐? 산이 아닌 뭔가가 산인 척 하고 있는 거야?!”
“응. 보지 마. 끌려간다.”
“우오오옷!”
“소리는 지르지 말라고.”
놀아주니 좋나 보다. 가볍게 딱밤을 날리자 태화가 불꽃을 내뿜으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왜 때려! 소리지르는 연습하는 건데!”
“그걸 왜 연습해?”
“내가 위험에 빠져서 꺄아악~ 하면! 새들이 나무 위로 푸드덕 날아가고! 미진쌤이랑 희롱희롱하고 있던 쌤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뽜악! 돌리면서!”
빠악
“……크아아악!”
“무슨 희롱이야, 임마! 말 가려서 해.”
“그치만! 미진쌤 교복 입은 거 보는 쌤 눈빛이 너무 끈적했는걸!”
그 말에 반대편에서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미진이 상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잘못한 게 없었고.
‘……이건 믿는 인간이 잘못한 거야!’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마주 눈을 부라렸다.
“뭐요. 왜 그런 눈으로 봐요? 나 그런 적 없거든요?”
“없긴 뭐가 없어요. 나도 봤거든요? 이상한 눈으로 보는 거?”
“그거는 미진 씨 눈이 이상한 거예요. 아니, 내가 그럴 맘이 있었으면 진작에 고백을 하든 뭔 말을 하든 했지 눈으로만 보고 있었겠어요?”
“뭐요?”
미진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남친 있는 거 뻔히 알면서, 고백을 했을 거라고요?”
“아니, 고백을 했을 거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럴 맘이 없다는 게 중요…… 에휴, 됐어요.”
말이 안 통한다. 상호는 짜증을 내며 손을 휘휘 내젓고 차창에 이마를 박았다.
차가운 유리로 열 뻗친 머리를 식히는데 혁구가 날아와 정수리에 앉았다.
“뺙.”
문득 실습에 생각이 미쳤다.
“나빛아. 혁구 어떡할래. 선생님이 데리고 있을까?”
“네? 혁구는 왜요? 데리고 다니면 안 돼요?”
“네 위치가 들키잖아. 혁구 안 울게 데리고 다닐 수 있어?”
“으음…….”
나빛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다가, 이내 방긋 웃었다.
“그럼 선생님이 돌봐 주세요.”
“그래. 그러자.”
그는 머리에 손을 올려 혁구를 앉히고 아래로 가져왔다.
혁구를 쓰다듬고, 또 까불대는 태화의 머리에 혁구를 들이대고. 그렇게 장난을 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상호는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산봉우리를 흘끗하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준비해라, 얘들아.”
“네.”
수다를 떨던 아이들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난생처음, 기껏해야 두 번째로 겪게 될 몬스터와의 전투. 아이들의 눈빛에 긴장이 한껏 배어들었다.
태화만 빼고.
“쌤, 쌤. 일찍 잡으면 일찍 끝나는 거야?”
“괜히 빨리 잡는다고 사고치지 마. 잡는 거 자체에만 집중해.”
“빨리 끝내고 초코바 먹어야징~.”
“먹을 거 갖고 오지 말랬잖아, 임마. 내놔. 압수야.”
“뿌에에엑!”
* * *
“첫 실습이죠.”
작은 바위 위에서 해련이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오랫동안 버려진 도로. 산의 옆구리 쪽 비스듬한 경사면. 길이 굽이지고 이곳저곳이 무너져서 더 이상 버스가 들어갈 수 없는 구역이었다.
2백여 명의 아이들이 교장을 올려다보았다.
“칼을 부딪치고 사는 여러분이니, 이미 전투라는 게 뭔지는 충분히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상호도 주변을 서성이며 해련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학우를 상대로 싸우는 것과 몬스터를 토벌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만약 겁이 난다거나,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다면…… 지금 그만둬도 되고, 시작한 다음에 그만둬도 상관없어요.”
반응을 보이는 아이들은 없었다.
몬스터를 잡지 못하는 헌터는 반편이만도 못한 헌터. 실습을 하지 않으면 헌터가 되는 데 애로사항이 꽃핀다.
다들 꽃길을 걸을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하게 될 실습이라면 미리 익숙해지는 게 낫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빠질 사람은 없나 보네요.”
아이들의 기세를 본 해련이 흡족한 듯 웃었다.
“담임들. 준비해서 출발시키세요.”
“예.”
각 반의 담임들이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상호도 자신의 반 아이들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곧 아이들이 그의 앞에 섰다.
세희, 태화, 나빛, 지윤, 은율, 이츠키, 나디아.
“수업할 때 가르쳐 줬지?”
상호는 아이들을 쓱 둘러보다가 태화를 가리켰다.
“몬스터 상대할 때 뭐부터 해야 돼?”
“숨어!”
“그래. 기습당하지 않고 기습할 수 있게. 그러려면 뭐가 필요하다고?”
“몰랑.”
“발각됐는지 아닌지 구별할 수 있는 능력, 임마.”
귀에 피딱지가 앉도록 말했는데 소용이 없다. 상호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한숨을 쉬었다.
“기습 못 할 것 같으면 당하지나 말아. 바보처럼 굴지 말고……. 혹시 몸 안 좋거나 안 하고 싶은 사람?”
“없습니더.”
아이들이 그를 향해 눈을 반짝였다.
이제 학생들은 하나둘씩 산속으로, 우거진 숲속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내밀었다. 손등이 하늘로 가도록.
“그래. 조심하고. 잘 하고 와. 파이팅하자.”
“네.”
세희가 재빠르게 손을 얹었다.
그 뒤를 이어 은율도, 나빛도. 모두 한곳에 손을 포개고 빙긋 웃었다.
“헤헤헤…….”
상호도 마주 웃어 보이고 손을 들었다.
“자, 파이팅.”
“빠이팅!”
“파이팅~.”
제각각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 * *
[상호야, 서쪽에서 온다.]
“응.”
그는 간단히 대꾸하고 서쪽으로 검을 날렸다. 다시 돌아온 검에는 몬스터들의 피가 흥건히 묻어 있었다.
귀에 꽂은 이어셋에서 민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됐다. 없어진 거 확인했어.]
“애들은 별일 없어?”
[응. 아직 아무도 안 만났어.]
“그런가…….”
상호는 입맛을 다셨다.
실습이 시작된 지 20분째. 그와 민정은 동분서주하며 강한 몬스터들을 빠르게 처치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실습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실처럼 뻗은 내공에 무언가 다른 것이 느껴졌다. 몬스터는 아니고, 아마도 사람. 교사거나 헌터 협회에서 지원을 나온 헌터들인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대충 다 치운 거 같은데. 난 애들한테 붙을게.”
[응. 나도 애들 볼게.]
민정의 마나가 상호를 스치고 지나갔다.
상호도 일대에 뻗은 마나를 갈무리하고 세 명의 주변에만 남겨두었다. 세희, 나빛, 이츠키.
셋은 정처 없이, 따로따로 숲속을 헤메는 중이었다.
‘몬스터가 너무 적은 것 같기도…….’
상호는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내며 생각했다.
일대에 남긴 약한 몬스터들은 기껏해야 수십 마리. 2백 명이 되는 학생들이 한 번씩 잡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수가 적으니 만나기도 힘들고…… 저녁까지 못 잡을 수도 있겠는데.’
실습은 실습. 몬스터를 잡는다고 해서 무언가 보상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그저 다치지 않고 생존에 성공했다는 것만으로 성취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헌터였고, 생존만으로 만족하면 안 되었다.
‘……뭐, 어쩔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만.’
몬스터를 더 몰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런 고민들을 하고 있는데 안주머니에서 혁구가 삐약거렸다.
“그래, 그래.”
상호는 해바라기 씨앗 몇 개를 꺼내 혁구에게 주었다.
그렇게 혁구를 돌보며 셋에게 집중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폭발음이 들렸다.
‘누가 시작했나.’
별달리 무전이 없으면 별일 아닌 것이다. 그는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그런데 갑자기.
“……윽.”
안대 아래 눈이 욱신거렸다.
그가 움찔하자 혁구가 외투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뺙.”
“아냐, 괜찮아. 괜찮아.”
상호는 쓰게 웃으며 혁구의 머리를 검지로 토닥였다.
가끔 이럴 때가 있다. 없어진 자리를 고통으로 채우는 듯이. 환상통처럼 아릿한 아픔이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예경과 자유롭게 이야기하게 된 후로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예감이 안 좋네.’
그는 갈무리했던 내공을 다시금 넓혀갔다.
* * *
“아이고…….”
지윤은 주린 배를 움켜쥐며 한숨을 쉬었다. 어제부터 밥을 적게 먹은 탓이었다. 배고픈 게 힘들긴 하지만 산에서 볼일을 보게 되는 것보다는 나으니.
‘빨리 잡고 쌤헌티 가야겠고마…….’
그래서 몸을 낮춰 땅에 귀를 댔다.
‘……안 들리네.’
영화에서 본 대로 따라 해 봤는데 별 효과는 없었다. 귀에 내공을 집중하니 뭐가 들리기는 하는데 뭐가 사람이고 뭐가 몬스터인지는 구별할 수가 없었다.
‘쌤은 될랑가 모르겄네.’
일단은 빠르게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나무를 피하고 바위를 뛰어넘고. 그러면서도 몬스터의 기습을 주의하며 발소리를 죽였다.
그러기를 10여 분.
드디어 몬스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찾았다!’
지윤은 쾌재를 부르며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개 해골처럼 생긴 머리에, 팔에는 손 대신 칼날이 달린 인간형의 몬스터.
‘고놈 참 희한하게도 생겼네…….’
원래는 적당히 간을 보다가 기습하려고 했다.
하지만 상당히 이질적인 생김새 때문에 함부로 달려들기가 꺼림칙했다. 지윤은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몬스터를 관찰하기로 했다.
뼈처럼 하얀 외골격.
머리부터 가랑이까지 세로로 난, 흉터 같은 흔적.
‘이미 누가 싸웠던 긴가……?’
아무리 봐도 뭔가 이상했다. 저게 흉터라면 이미 오래전에 누군가와 싸웠다가 살아남았다는 뜻인데.
만약 그게 프로 헌터였다면.
‘내 실력으로 상대할 수 읎는 거 아이가?’
지윤은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더 숨겼다. 이제는 기습이 아닌 은폐를 위해서.
천만다행히도 몬스터는 지윤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어딘가로 어슬렁어슬렁 떠나갔다.
“……휴우.”
몬스터가 충분히 멀리 걸어갔을 때, 지윤은 꾹 참았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저 몬스터는 별것 아닌 녀석일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몬스터를 대면해서 쓸데없는 긴장을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상상력이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겁을 먹은 걸까. 너무 신중했던 걸까. 지윤은 다시 한숨을 쉬고 나무에서 몸을 뗐다.
‘다음 놈은 꼭 잡아야제…….’
그리고 다시금 걸음을 떼어 몬스터를 찾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