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4화 (304/501)

* * *

상호는 눈을 부라렸다.

“이태화.”

“웅.”

“솔직히 말해.”

그가 양손으로 태화의 볼을 누를 때마다 태화의 입술이 붕어처럼 튀어나왔다.

“우무뭄무.”

“이츠키랑 무슨 일 있었어?”

“부우 움뭄무 부부뭄뭄무.”

“또박또박 말해 봐.”

“그게…….”

태화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선글라스…… 갖고 놀다가 깨뜨렸어.”

그럴 줄 알았다.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태화의 정수리에 꿀밤을 놓았다.

“아야!”

“잘하는 짓이다, 임마. 사과는 했어?”

“했는데…….”

시무룩한 표정이 더 시무룩해졌다. 눈은 내리깔고, 입술은 삐죽 내밀고.

“안 받아줬어.”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선글라스 사서…… 다시 사과할 거야.”

“얼만진 알아?”

“몰라. 쌤은 알아?”

“글쎄. 모르긴 몰라도 비싸 보이던데.”

그 말에 태화가 쭈뼛거리며 상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쌤.”

“뭐.”

“나 용돈 조.”

“……뭐?”

상호는 어이가 없었다.

“벌어 놓은 건 다 어디 갔는데?”

분명 66부에 피 주고 받은 돈이 있을 텐데. 설마 1년 만에 그걸 다 써버린 건가.

태화가 우물쭈물하며 손을 모아 꼼지락거렸다.

“주식에 넣었어.”

더 어이가 없었다.

“네가 뭘 알고 주식을 해?”

“무조건 벌리는…… 주식이 있대서…….”

“야, 잘 알지도 못하는 거에 투자했다고? 다른 곳에 돈을 못 쓸 정도로? 뒷일은 생각 안 해?”

“밥은 쌤이 사주자나…….”

정말 언제 철이 들는지. 상호는 뒷목을 잡고 잠시 혈압을 다스렸다.

“그래서……, 어디 넣었는데.”

“태궐전자…….”

잡주는 아니고 우량주에 넣은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네. 얼마 넣었는데?”

“천…….”

“천만?”

“웅.”

전재산을 들이박다니 짐승이나 야수가 따로 없다. 상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잠시 고민하다가.

꿀밤을 한 대 더 때렸다.

“아얏!”

“언제 넣어서 얼마 벌었는데?”

“얼마 안 됐어……. 지금은 손해야.”

“……떨어졌냐?”

봉진이 마음고생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총수쯤 되면 그 정도에 일희일비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상호는 이마를 꾹꾹 누르다가 말했다.

“용돈은 못 줘.”

“쪼끔만, 응? 쪼끔만…….”

“돈을 다 쓴 건 네 선택이야. 네가 책임을 져야지. 어쨌든 용돈은 못 줘.”

“그래두……, 그럼 빌려주면 안 돼? 일단 이츠키한테 사과부터 하고 갚을게…….”

상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못 빌려줘.”

“우웅…….”

“대신에 빌려줄 사람을 소개해 줄게.”

“응?”

태화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빌려줄 사람?”

* * *

상호의 방.

침대에 앉은 혜소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걸 부쉈다구요?”

방바닥에는 태화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응…….”

“어쩌다가요?”

“내가…… 가지고 놀다가……. 뒤에서 누가 쳐가지고…….”

“어쨌든 원인은 언니잖아요.”

“으응…….”

혜소의 불타는 눈이 상호를 향했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상호는 그 시선을 맞고 몸을 움찔했다.

“왜……, 왜 그래?”

“아저씨가 제일 나빠요.”

“갑자기……?”

“자식 잘못은 부모 잘못이랬어요. 선생님으로서 잘 돌봤어야죠.”

“……그런 거야?”

“네. 여기 앉아 보세요.”

“……응.”

상호는 결국 태화 옆에 함께 무릎을 꿇었다. 나란히 앉은 둘에게 혜소의 훈계가 쏟아졌다.

“언니 몇 살이에요. 내일모레 성인이잖아요. 나이만 찼다고 어른이 아니라 어른다운 행동을 해야 어른이 되는 거예요. 언니는 계속 아이로 남을 거예요?”

“아니요…….”

“아저씨도 그래요. 어른이면 아이를 잘 이끌어야죠. 그게 선생님이 할 일 아니에요?”

“……맞습니다.”

“누구는 남의 밥상을 뒤엎고, 누구는 남의 선물을 부수고……. 설마 아저씨가 가르친 거예요? 저 진짜 실망하려고 그래요.”

“죄송합니다…….”

상호와 태화는 동시에 고개를 조아렸다.

혜소의 눈 밑이 씰룩이더니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제가 제 돈으로 처음 사서 준 선물인데…….”

부모가 없는, 그리고 영주를 잃은 혜소에게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하나하나가 더욱 큰 의미를 가질 터였다. 그걸 깨달은 상호는 혜소의 양손을 모아 잡고 토닥였다.

“미안해. 미안해…….”

“나빠요.”

“맞다, 내가 나빠. 내가…….”

계속 다독이니 혜소의 표정도 점차 누그러들었다. 그때를 노리고 태화가 손을 싹싹 비볐다.

“저기…… 싸장님.”

“네?”

“제가 지금 돈이 없는데요…….”

“네.”

“쪼끔만 빌려주세요, 올해 안에 갚을게요…….”

혜소가 상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믿어도 돼요?”

“음……, 글쎄. 안 갚으면 아저씨가 혼내줄게.”

“아저씨를 믿어도 돼요?”

“……글쎄.”

상호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혜소는 그런 상호와 태화를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폭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빌려줄 테니까 같이 사러 가요.”

* * *

다음 날 아침.

이츠키는 어제처럼 복도에 불려 나와 있었다.

“뭡니까.”

“저기…….”

이번에는 혜소가 아니라 태화. 하지만 손에 들린 물건의 모양은 같았다.

“다시…… 사 왔어.”

“그렇습니까.”

“미안해…….”

등 뒤의 꼬리가 힘없이 흔들렸다. 꼭 주인에게 혼난 후 예전의 친근함을 갈구하는 강아지처럼.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츠키의 코에서 갑자기 코피가 흘러내렸다.

“앗, 이츠키! 너 코피!”

“아 죄송합니다. 귀여운 걸 보면 코피가 터져서.”

“뭐?”

“못 들은 걸로 하는 겁니다.”

이츠키는 태연한 표정으로 태화의 손에서 선글라스가 담긴 안경집을 받아들었다.

“똑같은 걸로 사 왔습니까?”

“응. 빡빡이랑 가서…… 같이 샀어.”

“또 그럴 겁니까?”

“아니…….”

“반성한 거 맞습니까?”

“응…….”

“그러면 성의를 더 보여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성……의?”

태화는 당황하다가 고민에 빠졌다. 대체 무슨 성의를 보여야 이츠키의 화를 가라앉힐 수 있는지.

“어……. 네가 시키는 거 뭐든 할게.”

“정말입니까?”

“응…….”

“흐음…….”

이츠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럼 꼬리 자유이용권이라도 괜찮습니까?”

“……꼬리?”

“안 됩니까?”

“아, 아니. 안 되는 건 아닌데…….”

당황한 태화에게 이츠키가 한 걸음 다가섰다.

“됩니까, 안 됩니까?”

“꼬리는…… 막 만지면 아파…….”

“살살 만지겠습니다.”

이츠키의 손이 태화의 꼬리를 덥석 잡았다.

“오늘부터 1일입니다.”

“어? 응? 뭐……?”

“이용권 1일입니다. 싫습니까?”

“아니…….”

“나한테 미안하다는 거 아니었습니까?”

“으응…….”

태화가 뺨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알았어. 맘대루 해…….”

“그겁니다.”

이츠키는 잘 보여주지 않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목적을 달성해 흐뭇해하는 웃음을.

* * *

“꺄~.”

나빛이 책상에 앉은 혁구를 쓰다듬다가 뺨을 감싸고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 혁구 너~무 귀여워~.”

“뺙?”

“반에서 최~고로 귀여워~.”

“그건 아이제.”

지윤이 오징어 다리를 질겅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혁구보단 단비가 더 귀엽디.”

“멍?”

“봐라, 얼마나 멍하고 귀엽노.”

단비가 눈을 끔뻑이며 꼬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나빛이 이번엔 이서의 뺨을 잡았다.

“아니야! 사람 중엔 이서가 제일 귀여워!”

“……그건 아닌 것 같아, 언니.”

“아니야! 이서는 귀여워! 이서야, 따라해. 나는 귀엽다!”

“쓰읍…….”

“어서!”

“나는 귀엽다…….”

“그렇지!”

나빛은 손뼉을 치며 웃었고, 이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태화가 갑자기 툭 끼어들었다.

어제보다 훨씬 밝아진 표정이었다.

“흥, 제일 귀여운 건 나 아니냐? 솔직히?”

“X랄빠네.”

지윤을 필두로 세희와 이츠키가 3연타를 날렸다.

“니가 귀여우면 교장쌤은 애기다.”

“니 입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와?”

“양심이 없나 봅니다.”

“……우씨.”

태화는 잔뜩 쪼그라들어서는 작게 꿍얼거렸다.

“그래 뭐, 난 섹시한 거지 귀여운 건 아니긴 하지. 치…….”

“뭐? 니가 섹시해?”

“개가 웃겠다, 마. 멍하하하~, 멍! 하하하~.”

“멍!”

“우이씨……. 니들이 그렇지 뭐.”

더욱더 작게 쪼그라든 태화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츠키는 그 모습을 세희와 함께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자기 진짜 취급이 어떤지는 꿈에도 모를 겁니다.”

“그렇겠지.”

“세희한테는 몇 번째입니까?”

“제일.”

둘의 눈에는 묘하게 흐뭇해하는 빛이 깃들어 있었다.

296. 실습

그렇게 이츠키는 다시 선글라스를 받았고. 태화는 혜소에게 빚을 졌고.

상호는 다시 세희의 수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콰아앙

운동장에 자욱하게 피어오른 흙먼지 속에서 상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전에 말했지?”

그가 검을 늘어뜨리자 검푸른 불꽃이 사그라졌다.

“강기를 발출할 땐 뒤쪽으로 강기를 분사시키라고.”

“네.”

세희는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 말대로 했는데…… 잘 안됐나 봐요.”

“아니. 잘했어. 잘했으니까 그다음을 가르쳐 주려는 거야.”

상호의 머리 위에서 검푸른 불꽃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뱀. 혹은 용.

길쭉하게 꿈틀거리는 그 불꽃이 세희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이건 어떻게 쓸까?”

“……글쎄요.”

이제야 겨우 강기발출을 제대로 하기 시작했는데. 완전히 다른 경지의 기술이라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세희는 난색을 지었다.

“잘 모르겠어요.”

“날리는 것까진 비슷해. 꼬리 쪽에서 기를 뿜는 거야. 하지만 이 기술은 앞쪽이 베는 형태가 아니지? 그럼 어떻게 해야겠어?”

“터트려요?”

“그래, 앞쪽으로 폭발시키는 거야. 대포처럼.”

코앞까지 날려보내고 영거리에서 포격하는 기술. 상호는 용을 움직여 땅으로 돌진시켰다.

콰아아앙

푸른 폭발이 일어나고 또 짙은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흙먼지가 잦아들자 구멍이 난 운동장이 보였다. 반구형의 분화구가 아닌, 거인이 막대로 뚫어 놓은 듯 원통형으로 파인 구멍.

세희는 그 구멍을 바라보다가 검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해볼게요.”

“응. 작아도 괜찮으니까 해봐.”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들었다.

* * *

“이제 많이 춥네.”

“네.”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기숙사를 향해 걷고 있었다. 한 몸처럼 꼭 붙어서. 상호는 몸에 딱 달라붙는 세희의 전투복을 흘끗했다.

“그거 안 추워?”

“네.”

“땀에 젖으면 춥지 않아?”

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세희는 살짝 웃었다.

“조금 추워요.”

상호는 그 말을 듣고 세희의 어깨를 감싸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좀 더 따뜻한 걸로 사줄까?”

“그러면 반 애들 다 사주셔야 하잖아요.”

“그러면 그러는 거지 뭐. 다른 반 눈치야 좀 보이겠지만…….”

둘은 충분히 느리게 걸었고, 한참 후에야 기숙사에 도착했다. 불이 다 꺼진 기숙사 앞에 다다르자 세희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안녕히 주무세요.”

“응. 잘 자.”

상호는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가, 조금 걷다가 다시 뒤로 돌아 세희가 이화관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남교사 숙소로 발을 옮겼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일이 토요일…… 아니, 오늘인가.’

핸드폰을 꺼내 보니 12시가 넘어 있었다.

내일 아침은 뭘 먹을까. 점심에는 간만에 1학년만 모아서 외식하러 갈까. 가은은 같이 가 줄까.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가.

‘……뭐야.’

남교사 숙소 앞에서 혁을 맞닥뜨렸다.

이 늦은 시간에 여기서 무슨 일인가. 상호는 멍청히 눈을 끔뻑였다.

“뭐예요?”

“맞춰 봐. 일하러 왔을지, 놀러 왔을지.”

“일하러 왔겠죠.”

“알면서 왜 물어?”

혁은 뭐가 못마땅한지 혀를 차고는 뒷짐을 진 채로 상호에게 다가왔다.

“정부에서 지침이 내려왔어.”

“지침이요?”

“실습 비중을 늘리라더군.”

오늘따라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늘 그렇긴 했지만.

“이제 2학년도 실습 대상이야. 만약 가능한 실력의 학생이 있다면 1학년까지.”

“실습…….”

상호는 중얼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이야 경험이 아주 많지만, 아이들에게 시켜본 적은 한 번도 없다. 헌터 고등학생의 실습계획은 3학년에만 배정되어 있으므로.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요?”

“몰라?”

“네.”

“강원도에 가서 몬스터를 잡는 거야. 구역을 정해서 약한 몬스터는 들여보내고, 강한 몬스터는 막는 거지. 정령사 선생이 상황을 통제하고.”

“아하…….”

“영 내키지 않는 모양인데.”

그걸 알아봤나. 상호는 교정을 쓱 둘러보았다. 한밤중이라 교사 숙소의 창문 몇 개를 제외하고는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거 꼭 해야 하는 겁니까?”

“못할 이유 있나?”

혁의 눈썹이 한 번 까딱였다.

“아이들이 걱정되나? 그럼 통과시키는 몬스터의 수준을 낮추면 돼.”

“……그건 알겠는데.”

상호는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실습을 하는 것은 좋다. 그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무른 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이들에게 실습을 시키기가 싫었다.

“굳이 일찍 할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키울 아이는 집중해서 키우고, 부족한 아이는 일찍 내보내는 거지. 실습이야말로 헌터가 될 아이와 되지 못할 아이를 가르는 가장 큰 시험이니까.”

“쳐낸다는 말입니까.”

이해되지 않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근데 왜 그걸 오밤중에 저한테만……?”

그가 묻자 혁이 혀를 차고 돌아섰다.

“구경 좀 했지.”

세희와의 수업을 훔쳐본 모양이었다.

어째 시선이 느껴지더라니. 상호는 저 멀리 걸어가는 혁의 뒷모습을 째려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실습…… 인가.’

하는 게 맞다. 하는 게 옳은 일인데.

영 내키지가 않았다.

‘실습…….’

내일은 바쁘겠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남교사 숙소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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