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1화 (301/501)

* * *

“에이, 쪽박이네.”

작은 천막 속. 두건을 뒤집어쓴 여학생은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책상에는 동그란 싸구려 램프가 푸르스름한 빛을 내고 있었다.

“왜 아무도 안 오지…….”

학교 축제에서의 장사라는 건 대부분 신입생을 상대로 한탕을 치는 것이긴 하지만. 올해는 유난히도 사람이 오지 않았다. 돌팔이란 소문이라도 난 건지.

무거운 한숨이 푹푹 쏟아져 나왔다.

“작년엔 강쌤도 와서 좋았는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상호가 천막으로 들어왔다.

“그랬니?”

“우와아아악!”

여학생은 기겁하며 뒤로 나자빠졌다.

“가, 가, 강쌤?! 어, 근데…….”

“아, 이거.”

상호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내리고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말을 안 듣는 학생……이 있어가지고. 대판 싸웠어.”

“학생이…… 강한가 보네요.”

“음……. 뭐, 우리 학교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긴 하지.”

자꾸 달라붙어서는 떨어지라고 해도 말을 안 들어서, 넥타이로 손목발목을 묶어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해치우기는커녕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겠지만, 추적에는 시간이 걸릴 터.

상호는 허전해진 목을 매만지며 헛기침을 했다.

“올해도 똑같은 거 하는구나.”

“기왕 있는 물건들 계속 써먹는 거죠, 뭐. 텐트랑, 램프랑……. 헤헤.”

“다행이다.”

“네?”

“너한테 점을 좀 보고 싶었거든.”

여학생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한테요?”

“응. 신통방통하더라.”

상호는 그렇게 답하고 여학생의 앞에 앉았다.

여학생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웃하다가, 곧 씩 웃으며 손을 샥샥 비볐다.

“그러면 해볼까요. 방법은 기억나세요?”

“응. 세 장인가?”

“맞아요. 그러면…… 어떤 걸 알고 싶으세요?”

상호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때 본 운명은 끝났으니까…… 이번엔 미래를 한번 보자.”

“그러면 한 장으로 알아볼까요?”

“응.”

“뽑아 주세요.”

책상에 카드 한 장이 놓였다.

“뒤집어 보시겠어요?”

상호는 여학생의 말대로 카드를 뒤집었다.

태양.

여학생의 안색이 환해졌다.

“좋은 게 나왔어요.”

“그래?”

“네. 태양 정위치. 밝은 미래라는 뜻이에요. 행복이기도 하고요.”

“그런가.”

상호의 웃음은 흐릿했다.

“친구, 무예가랬던가?”

“네, 맞아요.”

“주술에 재능이 있네.”

“그건 좀 많이 늦었을지도……. 3학년이라서. 헤헤.”

여학생이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었다. 상호는 씩 웃어 보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맙다. 오늘 하루 재밌게 놀아.”

“아, 네! 안녕히 가세요!”

여학생은 밖으로 나가는 상호를 향해 손을 붕붕 흔들었다. 상호는 손을 흔들어 주고 천막을 닫았다.

그리고 창밖의 먼 곳을 돌아보았다.

‘밝은 미래……라고 했나.’

혜소의 말과는 다른데.

아마 작년엔 영주의 주술이 작용했던 모양이다. 그는 그렇게 여겼다. 그래서 믿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는.

‘……태양이라.’

하늘색에 어울리는 운명이다. 상호는 쓰게 웃으며 복도를 걸어갔다.

실내 축제도 이제 끝물. 아이들은 이제 운동회를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292. 운동회와 연극

“강상호! 강상호!”

나빛이 손을 파닥거렸다.

“강하고 멋진 강상호!”

“나빛아…….”

“강상호! 강상호!”

“난 여기 앉아만 있는데 왜 자꾸 내 이름을 부르는 거야…….”

“강하고 멋진 강상호!”

“……끄응.”

상호는 이마를 짚었다.

오후의 운동회. 상호의 반은 작년과는 달리 10명이 늘었고, 덕분에 올해는 모든 종목에 참가를 할 수 있었다. 여전히 다른 반보다 훨씬 사람이 적긴 했지만.

운동장에서는 세희와 이츠키가 2인3각을 하고 있었다.

“세희! 이츠키! 달려! 달려!”

“언니이이!”

캐노피 천막 아래서 나빛과 단비가 방방 뛰며 응원을 했다. 그런 둘의 뒤에서는 방금 단체줄넘기를 부수고 온 아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돗자리에 대자로 뻗은 지윤이 태화를 흘끗했다.

“마, 태화야.”

“엉?”

“내가 니 궁합을 봤는디.”

“뭐?”

태화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부라렸다.

“내 궁합을 왜 니가 보는데?!”

“세희가 니랑 이츠키랑 은율이 중에. 누구랑 제일 잘 어울리는지. 솔직히 니도 궁금하다 아이가.”

“뭐? 천세희랑? 쌤도 아니고?!”

“안 궁금하나? 어케 나왔는지?”

“궁금하겠냐? X랄하네, 돼지년…….”

“그래? 그라믄 안 알려준데이.”

“그러든가.”

태화는 몸을 홱 돌려 지윤을 등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고개만 슬쩍 들어 곁눈질로 지윤을 흘끗했다.

“그래서 어떻게 나왔는데?”

“거 바라 임마. 니가 제일 궁금해할기 뻔~한디 무얼 빼고 자빠졌노.”

“누가 궁금하대? 니가 말을 꺼내서 그렇잖아!”

“이 가스나 진짜 바보 된 거 아이가?”

지윤은 태화의 뒤통수에 딱밤을 날리고 말을 이었다.

“돌대가리가 따로 읎네. 우쨌든 느그 셋이랑 세희랑 궁합을 봤는디…… 세희랑 은율이는 투명한 우정이라 카데.”

“우정은 투명한 게 당연한 거 아냐? 뭐 눈에 보이는 게 따로 있대냐?”

“다른 뭐시기가 끼어들 꺼리가 읎다 카대. 그만큼 순수하단 얘기제.”

“참나……. 그래서, 천세희랑 이츠키는?”

“임마 보채는 거 봐라. 니도 궁금하제?”

“말이나 해.”

“세희랑 이츠키는 바닷길이라드라.”

“일본년이라 쓰나미가 몰려오냐?”

“한쪽은 바다고 한쪽은 땅이지만 계속 파도가 치듯 섞이게 된다 이거제. 크아~. 느낌 있지 않나?”

“X랄……. 그래서 나는 뭔데?”

“니랑 세희는 성냥이랜다.”

“성냥?”

“비비면 불난다꼬.”

“미친년아!”

지윤에게 태화의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뭔 쓸데없는 궁합을 보고 X랄이야! 나랑 쌤이나 볼 것이지…….”

“아, 쌤 궁합도 봤디.”

“어떻게 나왔는데?”

“내랑 제일 좋댄다. 쌤이랑 내랑. 겉도 속도 최~고로 좋다데~.”

“니가 지어낸 거잖아, 돼지새꺄!”

그때 세희와 이츠키가 결승선에 1등으로 들어섰다. 태화와 지윤의 이야기에 집중하던 상호는 둘이 우승한 모습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야, 얘들아. 쓸데없는 소리 말고 저거나 봐라. 이야~.”

“이기면 뭐 해요.”

미래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수학적으로 우승이 불가능한데.”

“에이, 열심히 하면 될 수도 있잖아.”

“당장 다음이 줄다리기인데요.”

상호의 반은 14명. 개중에 네 명은 무예가가 아니고, 나머지 열 명도 지윤을 제외하면 힘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다른 반은 대부분 30명. 게다가 전원이 무예가인 반들도 많다. 그런 반을 상대로 이기는 것은 이론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했다.

“지윤이 언니가 아무리 쎄도 20인분은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겠지.”

밥은 20인분을 먹어도 힘까지 20인분은 아닐 것이다. 운동회라 내공을 쓸 수도 없으니.

상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같이 해달라고 해볼까?”

“그렇게 해줄까요? 그리고…… 선생님이 아무리 세계관 최강자라 해도 20여고생력을 이길 수 있을까요? 내공 없이?”

“으음…….”

그 말이 맞았다. 내공 없이 3대 600을 치는 인간전차라도 20여고생력은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라.

그렇다 하더라도 세희와 이츠키가 저렇게 열심히 했는데, 또 나빛과 단비가 열렬히 응원하고 있는데. 다른 아이들도 단체줄넘기 끝까지 뛰고 왔는데.

해보지도 않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한번 해보지 뭐. 말씀드리고 올게.”

상호는 대회 진행석을 향해 걸어갔다.

* * *

‘쉽군.’

상호는 밧줄을 움켜잡았다.

예상대로 해련은 하솔의 반이 우승하기를 바라고 있었고, 상호는 그 점을 공략해 해련의 앞에서 진행교사들에게 제안을 했다. 사람이 적으니까 자기도 참여하겠다고.

결과는 성공.

‘근데 이길 수는 있으려나…….’

그는 입맛을 다시며 앞을 바라보았다.

그의 반 학생 14명. 그 앞에 밧줄 중앙에 묶인 손수건. 그리고 너머에는 상대 반 학생 30명. 다행히도 무예가 반은 아니었다.

얼추 15명분의 힘을 내면 될 터.

‘가능할까……?’

걷어붙인 소매 아래 팔뚝에 힘줄이 돋아났다.

그렇게 잔뜩 힘을 주어 긴장하고 있는 차에, 진행교사가 호루라기를 불었다.

삐이익──

“흡!”

상호는 힘껏 밧줄을 당겼다.

가장 힘이 강한 그와 지윤이 맨 뒤. 그다음으로는 그나마 강한 은율, 가은, 이서, 하솔, 세희, 나디아. 그 앞으로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아리, 이츠키, 초란, 단비, 태화, 미래, 나빛.

나디아까지는 그래도 운동을 해서 힘을 쓰는 방법을 알았지만, 그 앞의 아이들은 밧줄을 잡고 버티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멍, 힘 좀 써봐…….”

“이 약골들아~, 그러게 운동 좀 하라니까~!”

“제일 안 하는 년이 뭐라 씨부리노. 끄응…….”

손수건이 점점 경계 너머로 끌려갔다.

조금만 더 가면 진다. 상호는 이를 악물고 발바닥으로 열심히 땅을 밀었다.

‘안 돼……!’

여기서 져버리면 아이들이 열심히 뛴 의미가 없어진다. 그의 팔뚝에, 목에, 이마에 혈관이 불룩 솟았다.

“흐읍!”

한층 힘을 주자 밧줄이 서서히 끌려왔다.

그런데 어째 너무 쉽다. 그의 힘뿐만이 아닌 것처럼. 상호는 눈을 끔뻑이며 앞을 둘러보았다.

‘뭐지? ……어라?’

아리의 신발에서 뭔가가 삐져나와 있었다.

“크르…….”

도톰한 입술 사이에서 푸른 번개가 번쩍였다.

“그으으……!”

“앗! 따거! 뭐야!”

“아야야, 정전기 뭐야!”

“줄이나 당겨, 멍청이들아!”

밧줄은 쭉쭉 상호의 반으로 당겨졌다. 상호, 지윤, 그리고 땅에 발톱을 박은 아리의 힘으로.

힘이 다했을까, 상대 반은 더 버티지 못하고 밧줄을 놓쳤다.

“앗! 이겼다!”

“와아~.”

나빛이 이서를 얼싸안고 방방 뛰었다.

간신히 이겼다. 상호는 이마에 흐르는 진땀을 닦으며 지윤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잘했다, 얘들아. 다음 판도 할만 하겠는데?”

“네!”

“가서 쉬고 다음 판 준비하자.”

흐뭇한 표정으로 아이들과 함께 천막으로 돌아오는데, 의자에 앉아 있던 효은과 민정을 맞닥뜨렸다.

효은이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좋냐?”

“…….”

“애들 이겨놓고 되게 좋아한다, 너. 근데 조금 추한 건 알지?”

“……응.”

고개를 푹 숙인 상호의 어깨를 민정이 토닥였다.

“에이, 아이들이랑 같이 놀 수도 있지.”

“아니야, 이 새끼 진짜 힘 빡 주고 했어. 팔뚝에 힘줄 돋는 거 못 봤어? 저봐, 아직도 있잖아.”

“설마 그랬겠니. 상호야, 진심으로 한 건 아니지? 그치? 거봐, 그냥 어울려 준 거라니까~.”

“…….”

상호는 다음 판에는 나가지 못했다.

* * *

그렇게 줄다리기에서 처참하게 패배하고, 인원의 부족으로 대부분의 종목에서 멸망. 그나마 계주에 지윤, 세희, 은율, 하솔이 나가 2등을 했다.

나름 분전했지만, 결국 전체 10등.

“수고했다, 얘들아.”

상호는 내공으로 천막과 의자, 돗자리를 정리하며 아이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멀리에서 해련의 날 선 눈빛이 느껴졌지만, 구태여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다들 씻고, 저녁에 연극 준비하고…… 근데 대본은 대체 언제 보여줄 거야?”

“다~ 이유가 있습니더.”

지윤은 실쭉 웃고 상호의 옆구리를 가볍게 툭 쳤다.

“기대하이소~.”

“여장은 아니지……?”

“하고 싶으십니꺼?”

“아니, 아니! 됐어, 미안해…….”

괜히 말을 꺼냈다. 상호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뒷걸음질쳤다.

“알아서 준비해. 믿고 있을게…….”

“예~.”

지윤과 아이들은 키득거리며 본관으로 달려갔다.

* * *

그래서 저녁.

상호는 눈앞에 놓인 관을 내려다보며 눈을 끔뻑였다.

“얘들아?”

“네.”

강당의 무대 옆 준비실.

한데 모인 아이들이 그를 향해 눈을 반짝였다.

“들어가 계시면 돼요.”

“……뭔지 설명은 안 해줘?”

“필요 없어요.”

아이들이 우악스럽게 그를 관으로 밀어붙였다. 밝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가세요~.”

“아니, 아니……. 내 역할이 뭐야? 그것만 알려줘!”

“잠자는 관 속의 왕자님이예~.”

상호는 발버둥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아이들이 준비한 공연을 망칠 수가 없었다. 지난번처럼 대타를 구할 수도 없고.

아이들이 관 뚜껑을 닫으며 손을 흔들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관이 닫혔다.

대체 무슨 역할일까. 뭔데 대사 한마디 없이 누워 있기만 하면 되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불안한 게 더했다.

관 밖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우리다.”

“가자.”

관이 번쩍 들렸다.

상호는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지금이라도 뚜껑을 박차고 도망쳐야 하는 게 아닐까.

‘에이, 죽지는 않겠지 뭐…….’

사회적으로 죽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나쁜 짓을 하지는 않을 테다.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 와중에 초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옛날 옛날, 어느 한 마을에…….”

변사 역할인 모양이었다.

“나쁜 악마를 봉인당한 청년이 살았습니다.”

누구를 말하는지는 뻔했다.

“하지만 살았다 뿐이요, 봉인을 견디지 못한 청년은 시름시름 앓다가 깨어나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그런 설정인가. 상호는 잠자코 들었다.

“이 소문을 들은 이웃 마을 처녀들이 그를 가엾게 여겨──.”

“……응?”

불안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봉인을 풀기 위한 입맞춤을 차례차례 시도하게 되는데…….”

‘……!’ 상호는 뚜껑을 박차고 일어날 뻔했다. 아니 실제로 박차고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뭐야!’

‘미안해, 상호야. 세희가 부탁해서…….’

‘네? 뭐요? 누나가 잡고 있는 거라고요?!’

‘미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인가. 상호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서서히 관 뚜껑이 열리기 시작했다.

‘으악……!’

상호는 떨리는 눈동자로 관의 틈을 올려다보았다. 무대 위의 밝은 조명이 그를 내리쬐었다.

그 빛 사이로 그림자가 하나 쏙 끼어들었다.

“멍.”

단비가 그를 내려다보며 귀를 한 번 쫑긋했다. 맑은 눈동자가 천진난만한 빛을 품고 있었다.

“벌써 눈 뜨면 안 돼요. 멍.”

“단비야……?”

상호는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봉인을 푸는 키스예요.”

“……진짜 하겠다고?”

“네?”

그 말에 단비가 시선을 피하며 입을 우물거렸다.

“선생님만 괜찮으시다면……, 괜찮긴 한데…….”

“……아니, 아냐. 농담이야. 그보다……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연극이야? 한 명씩 키스를 하는 거야?”

“네.”

“……지금 일어나도 돼?”

“그러면 연극 망해요, 멍.”

“안 일어나면 내 인생이 망할 것 같아…….”

진땀을 흘리는 상호에게 단비가 씩 웃었다.

“선생님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 차례에 일어나시면 돼요.”

“그냥 지금 일어나면 안 돼?”

“멍? 선생님 저 좋아하세요?”

“싫진 않아…….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언니들이 선생님 죽일 거예요, 멍.”

“그래. 그게 문제야…….”

누구를 선택하든 죽는다면 당장 일어나서 도망치는 게 좋을 것이다. 상호는 관의 틈새로 바깥을 살폈다.

“단비야.”

“네.”

“지금 관객들 다 보고 있니?”

“네.”

사람들이 본다고 해서 도망을 못 치는 것은 아니다. 전속력으로 도망치면 극소수 헌터들을 제외하고는 코빼기도 보지 못할 터였다. 문제는 연극이 망하고 아이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는 것.

차라리 인생이 망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일단 알겠다. 그럼 다음 사람…… 아, 잠깐만. 다음 사람은 누구야?”

“좀 강해요.”

“강해……?”

“네.”

단비는 알쏭달쏭한 말을 남기고 관에서 물러났다.

강하다면 누구일까. 세희, 은율. 혹은 태화인가.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음 타자를 기다렸다.

그때 관의 틈새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째 그림자치고는 밝은 색채.

상호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

“헤헤헤…….”

끝판왕이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293. 가을의 밤바람

“헤헤헤헤.”

나빛이 바보처럼 웃었다.

상호는 관에 누운 채로 나빛을 올려다보다가, 그 환한 미소를 더는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나빛아……?”

“뽀뽀할 거예요!”

“여기서는 좀 그래…….”

“입술!”

나빛이 상호의 얼굴을 덥석 잡았다.

이대로 가다간 당한다. 그냥 당하는 게 아니라 전교생 앞에서 라이브로. 상호는 다급히 나빛을 밀어냈다.

“나빛아……, 나빛아.”

“네?”

“선생님은 시간이 필요해…….”

“저는 선생님 입술이 필요해요!”

상호는 다시 다급하게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나빛아. 잘 생각해 봐. 남들 다 보는데 무드없게 하고 싶어?”

“네!”

“……아니, 아니야. 단둘이 더 좋을 거야.”

“으음…….”

나빛은 회색 눈동자를 데그럭데그럭 굴리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거예요?”

“그런 거지. 그러니까 키스는 나중에…….”

“나중에 꼭 해주시는 거예요?”

“응, 응. 나중에…….”

“음……. 알겠어요.”

어떻게든 넘어갔다. 상호는 관에서 물러나는 나빛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주 오랜 나중이 될 거라는 말은 속으로 삼킨 채.

그러고 보니 묻는 걸 깜빡했다. 다음 타자는 누구인가.

‘날 좀 덜 좋아하는 아이였으면 좋겠는데…….’

세희나 태화, 지윤을 상대로는 진땀을 빼게 될 터였다. 기왕이면 달라붙지 않는 아이가 좋겠다. 그는 그런 바람을 품고 기다렸다.

그랬더니 정말 그 바람대로.

“…….”

가은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

“……가은아?”

“…….”

가은은 그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그를 향해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상호는 가까워지는 가은의 입술을 바라보며 당황했다.

“가은……아?”

그렇게 불러도 가은은 고개를 숙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곧 둘의 입술이 서로의 숨결을 나눌 만큼 가까워졌다.

그 거리에서, 가은은 도톰한 입술을 열어서.

나직하게 한 마디를 속삭였다.

“죽어요.”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서 홱 돌아 가버렸다.

그럼 그렇지. 가은이 입을 맞출 리 없는데. 상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책망했다.

아주 잠깐, 기대했던 것 같아서.

‘죽어야 할 놈이 맞을지도…….’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눈물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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