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8화 (298/501)

* * *

“완성!”

태화가 칠판을 탕 쳤다. 칠판에는 응원가의 가사가 적혀 있었다.

“강상호~ 강상호~ 강하고 멋진 강상호~. 시작!”

“강상호~ 강상호~.”

아이들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자기 이름을 노래로 부르는 것은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었다. 상호는 빠르게 문가로 걸어갔다.

“선생님 잠깐 나갔다 올게.”

촤아앙

성창이 교실 문을 막았다.

“…….”

“같이 불러요~.”

나빛이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늘 그렇듯 방긋방긋 웃으면서.

“강상호~ 강상호~. 따라해 보세요. 헤헤…….”

“강…….”

죽어도 못하겠다.

‘이걸 어떻게 하라고…….’

상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나빛의 손을 부여잡았다.

“나빛아, 제발…….”

“네?”

“개사가 필요할 것 같아…….”

나빛은 빙긋 웃고는 상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천천히 따라해 보세요~.”

“제발…….”

“강상호~ 강상호~ 강하고 멋진 강상호~.”

“제발……!”

“상호반~ 상호반~ 상냥한 호걸 상호반~.”

상호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너희 자꾸 이러면 선생님 학교 그만둔다!”

나빛이 멍하니 상호를 바라보았다.

“……네?”

회색 머리가 실시간으로 하얘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상호는 뜨악하며 나빛을 덥석 끌어안았다.

“뻥이지! 뻥이야, 당연히…….”

“헤헤, 다행이다. 깜짝 놀랐어요…….”

“장난친 거야, 장난……. 왜 진지하게 듣고 그래. 선생님이 너흴 왜 버려…….”

“그럼 같이 불러 주실 거예요?”

“응, 응. 같이 부를게…….”

“헤헤.”

나빛이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언제 승천할 뻔했냐는 듯 행복한 표정으로.

상호는 눈물을 삼키며 응원가를 불렀다.

“강상호…… 강상호…… 강하고…… 강상호…….”

“강하고 멋진!”

“강…… X바……. 멋진 강성호…….”

“은근슬쩍 바꾸지 마세요!”

“강상호…….”

“그래요! 다 같이! 강상호~ 강상호~.”

“상호반~ 상호반~.”

아이들의 목소리가 문을 뚫고 바깥까지 울려 퍼졌다.

* * *

그렇게 응원가는 정해졌고.

“다음은…….”

상호는 칠판을 쓱 훑었다.

“오전에 뭐 할지 정해야겠는데. 누구 좋은 생각 있어?”

“있지.”

제일 먼저 나선 것은 이번에도 태화였다. 상호의 이맛살이 확 찌푸려졌다.

“넌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해.”

“생각 끝.”

“……뭔데.”

“쌤을 파는 거야!”

“작년에도 그 말 했잖아, 임마.”

그는 한숨을 쉬며 지탄을 날렸다.

“샥! 피해따!”

“아무리 할 게 마땅찮아도 담임을 파냐. 절대 안 되니까 다른 아이디어나 내 봐.”

“담임이 아니면 되잖아.”

“응?”

상호가 눈을 끔뻑이자 태화가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담임이 아닌 쌤을 팔면 되는 거 아냐?”

“……도은호는 안 돼.”

“아 왜! 그거 팔면 진짜 전교생 지갑 다 털 수 있다니까!”

태화는 벌떡 일어나서 양팔을 펼쳤다.

“상상해 봐! 도은호 사진! 도은호 인형! 도은호 책갈피! 도은호 열쇠고리! 아마 쌤들도 살걸!”

“그런 걸 사는 사람은 너희밖에 없어…….”

“강한 국가는 내수가 강하대. 그러니까 우리 반도 강해지려면 내수를 강화해야 하는 거지!”

“……그러니까 너희가 쓰고 싶어서 만든다는 거지?”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쩜 저렇게 뻔뻔하게 할 수 있을까.

“세희야, 은율아. 너희는 저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

“되죠.”

“돼요.”

“…….”

할 말을 잃은 상호에게 세희와 은율이 차례대로 말했다.

“충분히 경쟁력이 있어요.”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도 아니구요.”

“내 의사는 중요치 않은 거니……?”

“선생님은 은호가 아니잖아요.”

“그건 저희가 은호한테 따로 물어볼게요.”

“은호일 때는 너희 맘대로 할 거잖아……!”

“우리 은호 똑똑하네.”

세희는 씩 웃고 말을 이었다.

“걱정 마세요, 선생님. 진짜 선생님 얼굴을 파는 건 아니잖아요. 가격도 비싸지 않을 거고. 가볍게 해 보는 것뿐이에요.”

“그래도 좀 그래……. 도은호 하나로 날로 먹는 것 같잖아…….”

“그러면 다른 걸 좀 곁들여 팔아 보죠. 비즈 팔찌 같은 거라든가.”

장신구 말인가. 여학생들이니 관심이 있을 것이다.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아서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럼 다음은…… 공연이네.”

저녁 즈음에 강당에 모여서 보는 공연. 반마다 한 명 이상은 나가야 했다.

단비가 꼬리를 흔들며 물었다.

“작년엔 뭐 했어요?”

“작년엔 연극 했지.”

“연극이요? 어떤 연극이요?”

“그냥 좀 평범한…… 식상한…….”

공연 이야기가 나오자 원년 4인방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선생님.”

“쌤.”

“응?”

“이번에는 도망치지 마요.”

세희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다리 다 나았다고 도망치면 은호가 다쳐요.”

“……아직 뭐 할지 정하지도 않았잖아.”

상호가 진땀을 흘리며 대답하자 지윤과 태화가 실쭉 웃었다.

“뭣을 하든 쌤은 여장시킬 겁니더.”

“당연하지.”

“얘들아, X급 헌터가 여장을 하면 사회에 큰 파장이…….”

“우리는 학교에 큰 파장을 일으킬 거야!”

말이 씨알도 안 먹힌다. 상호는 다급히 양 손바닥을 들어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얘들아, 얘들아. 잘 생각해 봐. 작년에 연극 했으니까 올해는 뭔가 다른 걸 해보자. 응?”

“다른 거? 다른 거 뭐.”

“노래나 합창이나, 뭐 그런 거 있잖아. 차라리 그런 걸 하면 선생님이 열심히 할게, 응? 진짜로. 약속.”

그 말에 단비가 귀를 쫑긋했다.

“멍. 쌤 걸그룹 노래 시키자.”

“……단비야?”

대체 너까지 왜 그러냐. 상호는 이제 눈을 부라리며 무언가를 밀치듯이 허공에 손바닥을 펼쳐댔다.

하지만 등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쌤도 참는 데 한계가 있어. 자꾸 이상한 거 시키면 맛있는 거 안 사줄 거야. 막 서먹해져. 그러고 싶어?”

“어어? 협박이야?”

태화가 책상을 발로 걷어차고 일어났다.

“이제와서 쌤이 우릴 버릴 수 있을 것 같애?”

“너희가 날 버리고 있어…….”

“그건 쌤 잘못이야! 쌤 업보야!”

“그런가 보다…….”

눈물을 하도 삼켜서 콧물이 나올 것 같았다. 상호는 무릎이라도 꿇을 것처럼 두 손을 모았다.

“제발 여장만 시키지 마라……, 응?”

“그건 쌤이 여고에 온 순간부터 정해졌어.”

“지들이 공연을 해봤자 을마나 재밌겠습니꺼. 쌤이 그런 기라도 해 줘야 축제가 재미가 있지예.”

“제발…….”

“안돼예~.”

악마보다 더 악마 같은 아이들이었다.

* * *

“그러니까……. 오전에는 교실에서 도은호 굿……, 에휴, 굿즈랑 장신구 팔고, 저녁에는 연극……인 거네.”

“네.”

“이대로 올릴게.”

상호는 출석부에 간단히 메모를 하고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축제 준비를 하는 건 좋지만…… 금방 연말 온다. 축제 준비한다고 수련에 소홀해지지 말고. 너희끼리 억지로 시키지 마. 틈틈이 확인할 거야. 만약 누가 독박을 쓰거나 해서 수련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면 시킨 사람이 누구든 간에…… 큰일난다. 알아들었지?”

“네!”

“수업하자.”

“아~ 하루만 더 놀자~.”

“주말은 삶아먹었냐?”

“딱 하루만~! 응? 응?”

“혁구야, 쪼아.”

“뺙?”

“왜 내 말은 안 듣니…….”

그는 아이들이 전투복을 꺼내는 것을 확인하고 터덜터덜 교실 문을 나섰다. 평소처럼 수업을 하기 위해서.

축제까지 2주가 남은 날이었다.

289. 연애운

“쪼아!”

나빛이 고개를 앞으로 까딱이며 손을 뒤로 파닥였다.

“쪼아~ 쪼아~.”

“야, 그거 안 쓸 거라니까?”

태화의 핀잔에 나빛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어? 왜……?”

“그걸 어따 써먹어. 반티는 군복인데. 교실에서 추게? 응원할 때 추게? 무대에서 추게? 앙?!”

“세상 모든 것은 어딘가엔 쓸모가 있댔어…….”

“일단 우리 학교에선 없어, 그 춤은. 야, 천세희. 너도 뭐라 해 봐. 얘 혼자 쓸데없는 거 연습하고 있잖아!”

태화는 꿰던 비즈를 내던지며 역정을 냈다.

교실 바닥에는 아이들이 둥글게 둘러앉아 축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쪽은 장신구 만들기, 한쪽은 연극 대본 쓰기.

세희는 계속 비즈를 꿰며 태화를 째려보았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꾸꾸땐쓰를 쓸 수도 있잖아.”

“니는 내가 하면 땡땡이고 쟤가 하면 연습이냐?”

“뭐든 열심히 하면 상관없어. 닌 노는 것마저도 열심히 안 하잖아.”

“개같은년.”

“멍?”

“너 말고.”

태화는 내팽개친 비즈를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싫증을 내며 지윤의 옆으로 다가갔다. 지윤은 초란, 이츠키와 함께 대본을 쓰고 있었다.

“잘 돼 가냐?”

“완벽하게 준비하고 있제.”

지윤의 입술에 물린 펜이 위아래로 까딱거렸다.

“강상호 버전 하나. 도은호 버전 하나. 모든 상황에 대비하고 있디.”

“이번엔 무슨 이야긴데?”

“절름발이 애꾸 검사가 악마를 무찌르는 얘기.”

“쌤은 뭔데?”

“악마의 몸을 봉인해서 영원한 잠에 빠짔다가 검사헌티 구해지는 소녀.”

“굉장히 익숙한 내용인데…….”

태화는 대본을 쓱 훑었다.

“작년이랑 똑같은 거 아냐?”

“그럼 어카노. 쌤을 일단 눕히야 될 거 아이가.”

“난 모르겠다. 알아서 해. 근데 그럼 난 뭐야?”

“니는 악마디.”

“야이씨, 그럼 키스 못 하잖아!”

“우짜라고. 니가 악마디 누가 악마고.”

지윤은 태화의 꼬리를 검지로 탁 튕겼다.

“끄힉! ……그럼 검사는 누군데.”

“내가 제일 유력하제.”

“아직 안 정했어? 그럼 나로 해. 악마라고 악마를 시키는 게 어딨어, 이 1차원적인 년들아!”

“투표로 정해야제. 칼부림 나기 싫으믄. 근디 니는 글렀을기다.”

“아아아악!”

태화가 뿔로 지윤을 들이받았지만 지윤은 반탄강기로 가볍게 막았다. 세희는 그런 둘을 지켜보다가 은율을 돌아보았다.

“언제 올까?”

“글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지?”

“추석 때.”

“그럼 슬슬 올 때 된 거 같은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가에서 기어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얘들아아…….”

어린 소년 목소리.

세희와 은율의 눈에 불꽃이 타올랐다.

“은호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

아이들은 하던 작업을 내버려두고 문가로 달려갔다.

“은호다아아!”

“은호야! 화보 찍어야 돼! 이리와!”

“얘들아, 얘들아 잠깐만, 출석만 확인하자, 응? 은율아, 출석부 좀 가져와 줄…… 옷 벗기지 마!”

“이거, 이거 입어봐! 꺄아악!”

“벗기지 말라고!”

* * *

“훌쩍…….”

이불 속에서 코 먹는 소리가 들렸다.

혜소는 사과를 오물거리며 침대 옆에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아저씨 울어요?”

“크응, 아니…….”

“그럼 사과 드세요.”

“너 먹어…….”

“그래서 왜 우는 거예요?”

“……애들이 괴롭혔어.”

몸을 웅크린 상호에게서 이불이 걷어졌다. 혜소는 상호의 입에 사과를 들이밀다가 상호의 손목에 있는 작은 팔찌를 발견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구슬 같았다.

“이게 뭐예요?”

“팔찌. 비즈.”

“염주예요?”

“아니, 그냥 악세서리야. 꾸미는 거. 축제 때 이걸 팔기로 해 가지고…… 애들이 하나 줬어.”

“이걸 팔아요?”

팔찌를 만지작거리는 혜소의 눈에는 신기해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얼마에 팔아요?”

“천원인가. 이천원인가…….”

“저도 축제에서 장사해도 돼요?”

“응?”

애가 장사를 하겠다니. 어안이 벙벙해하던 상호는 혜소가 돈을 벌고 싶다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돈 벌고 싶어서 그래?”

“네.”

“뭐…… 안 될 건 없는 것 같기도…….”

그 말에 혜소의 눈이 반짝였다.

“아저씨.”

“응?”

“저 염주 재료 사주세요.”

상호는 코를 훌쩍이다가도 그 말이 웃겨서 피식 웃었다.

“그러면 용돈 주는 거랑 똑같은 거 아냐?”

“티비에 나오는 아저씨가 따서 갚으면 된댔어요.”

“……뭐하는 프로그램이야? 신고를 해야 쓰겠는데.”

“수익에서 80퍼센트 드릴게요.”

“그것 참 끌리는 제안이네…….”

상호에겐 푼돈일 뿐이었지만, 그래도 혜소가 어떻게 돈을 벌지, 얼마나 벌지. 또 그 돈으로 뭘 할지 궁금하긴 했다.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터넷으로 주문해. 핸드폰 줄까?”

“네.”

혜소는 상호가 내민 핸드폰을 받아 서툴게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갔다. 상호는 꼼지락거리는 혜소의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애들한테 다 맡겨도 되는 걸까…….’

다 맡겨 버렸으니 어떤 결과가 나오든 승복해야 할 텐데, 그는 그럴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인간이 아니었다.

아이들의 상냥함을 믿는 수밖에.

‘모르겠다. 나한테는 세희 수업이 제일 중요해…….’

그는 혜소의 맨들맨들한 머리를 문지르며 한숨을 폭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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