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저녁……?]
전화기 너머에서 설미의 안절부절못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미진이랑 같이 먹기로 했는데…… 괜찮겠어?]
“……괜찮겠죠. 뭐.”
미진이 무섭긴 하지만 밥도 같이 못 먹을 사이는 아니다. 상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여교사 숙소를 올려다보았다.
“약속이 언젠데요?”
[곧……. 상호 너 지금 나올 수 있어?]
“밖이에요.”
[밖?]
“여교사 숙소 앞에.”
그 말에 3층 창문이 열리더니 설미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 여깄구나. 기다려. 금방 내려갈게.”
“네.”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잠시 후 설미가 입구에서 달려 나왔다. 못 씻어서 꾀죄죄했던 아침의 모습과는 달리 멀끔하게 차려입은 모양새였다.
“안녕~.”
“미진 씨는요?”
“금방 올 거야.”
“차는요?”
“미진이 차 타기로 했어.”
그 말대로 곧 미진이 걸어 나왔다.
상호를 발견한 미진의 얼굴이 확 찌그러졌다.
“……뭐예요. 언니. 강 선배도 가요?”
“응.”
“미리 말하는데, 술 죽어도 안 마셔요.”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안 먹여요. 안 먹여……. 죽어도 안 먹일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
“흥.”
퍽이나 그러시겠다는 투로, 미진은 콧방귀를 뀌고 돌아섰다.
“가죠. 밥만 먹고 얼른 들어오…….”
그때 미진의 핸드백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미진은 고개를 기웃하며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더니, 이내 크게 당황한 표정으로 상호와 설미를 흘끔거리며 슬금슬금 거리를 두었다.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퍽 간드러지게 변해 있었다.
“으응, 자기야.”
상호와 설미의 눈이 마주쳤다.
‘……자기?’
남자친구인 모양이었다.
미진은 둘에게서 더욱 떨어진 곳으로 달려가더니 무어라 통화를 했다. 하지만 상호의 귀에는 다 들렸다.
쾌활하고 호탕한 기색의 남자 목소리였다.
[잘 있지? 밥 같이 먹을까 해서.]
“응……. 어? 갑자기?”
[애들 시험도 끝났다며. 바빠? 아직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친한 교사 언니랑 같이 먹기로 해 가지구…….”
[아 그래? 그래도 밥 정도는 같이 먹을 수 있지 않아? 그분한테 한번 물어봐봐.]
“어어…….”
미진의 시선이 다시 한번 상호를 향했다.
“그냥 내일 보면 안 될까? 내일 주말이잖아…….”
[아, 나 내일 동해 쪽 가야 돼. 의뢰가 들어와서……. 주말 내내 못 볼 거야.]
“그래……?”
미진은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핸드폰을 두 손으로 잡고 상호와 설미에게 달려왔다.
“저기, 언니.”
“응?”
“남자친구가 같이 밥 먹자는데…… 괜찮아요?”
“응, 난 상관없어.”
설미에 이어 상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죠, 뭐.”
그러자 미진이 상호를 째려보았다. 너한텐 안 물어봤다는 듯이.
미진은 다시 핸드폰을 귀에 붙였다.
“응, 그러자. 이쪽으로 와?”
[응~.]
통화가 끊겼다.
상호는 차를 향해 걸어가는 미진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미진 씨 남자친구예요?”
“예.”
“무슨 일 한댔죠? 헌터랬나?”
“헌터인데…….”
미진은 차 문을 열다 말고 상호를 노려보았다.
“이상한 말 하지 마요.”
“네? 뭐가요?”
“X급 같은 거…… 말하지 마요.”
“아, 그렇죠. 그래야죠.”
남자친구 기죽이기 싫은가 보다. 상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먼저 묻지 않는다면 당연히 꺼낼 일이 없는 이야기였다.
셋은 차에 올라 교문을 나섰다.
* * *
“미진아!”
쾌활한 목소리가 가게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 성량에 삼겹살을 먹던 상호조차도 깜짝 놀랐다.
뒤를 돌아보니 신수 훤한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건장한 체격에 선이 굵은 얼굴, 당당한 행동거지.
그야말로 쾌남.
“잘 지냈어? 아이고, 안녕하세요. 미진이 남자친구입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상호는 사내가 다짜고짜 건넨 악수를 받았다.
“같이 일하는 강상호라고 합니다.”
“차담욱입니다.”
담욱이 설미를 돌아보자 설미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임설미예요.”
“안녕하세요. 아, 식사하세요, 신경쓰지 말고……. 미진아!”
“응…….”
미진이 얼굴을 붉히며 담욱과 살짝 포옹을 했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다가 풉 하고 물을 내뿜을 뻔했다.
차갑고 똑 부러지는 얼음장 같은 여자인데, 봄날 벚꽃처럼 물든 뺨이 퍽 생소했다.
‘저런 면이 있었나…….’
심지어는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직장에서도 저러면 오죽 좋으랴. 입맛을 다시며 상추를 집는데 미진의 살기가 한 차례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보지 말라는 건가? X바, 코앞에 있는데 어떡하라고…….’
상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쌈을 쌌다.
담욱은 미진의 옆에 앉아 상호의 앞에 있는 집게를 잡았다.
“몇 인분 시켰어요?”
“5인분이요.”
“부족하겠는데. 제가 끼어들었으니까 제가 살게요. 더 드세요, 더. 그런데 두 분 나이가?”
“스물넷이요.”
“저는 스물다섯…….”
상호와 설미가 차례대로 대답하자 담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스물여섯이요. 두 분 다 예현여고 선생님이죠?”
“예.”
담욱의 시선이 상호의 오른쪽 눈을 향했다.
“예현여고에 안대를 쓴 헌터가 있다고 들었는데…….”
헌터라면 모를 수가 없는 사건. 그중에서도 가장 큰 집중을 받은 두 사람. 예현여고에 다니는 악마 융합체 학생과, 마찬가지로 예현여고에 다니는 안대를 쓴 선생.
눈의 상처를 보면 누구라도 의심을 할 터였다.
“이건 그냥 흉터예요. 눈은 멀쩡해요.”
“눈동자가 탁한데요?”
“겉보기는 그런데 다 보입니다.”
상호는 능청스럽게 말하고 쌈을 우적우적 씹었다.
그래도 담욱의 시선은 상호에게 지그시 머물러 있었지만, 곧 미진이 쌈을 싸서 입에 넣어주자 미진을 향해 꿀 떨어지는 눈빛을 보냈다.
“우리 자기 잘 지냈어?”
“응…….”
“자기도 쌈 하나 싸 줄까? 자기가 좋아하는 깻잎으로~. 마늘 하나~ 쌈장은 조금~.”
상호는 잠시 귀를 닫기로 했다.
깨를 볶는 시간이 지나간 후, 담욱의 관심은 다시 상호와 설미에게 향했다.
“두 분이 미진이 선배신 거죠?”
“예. 제가 정담임. 맡은 반이 같아요.”
“아, 자기가 부담임이랬지? 으음. 상호 씨는 딱 봐도 무예가인데. 설미…… 씨는?”
“주술사예요. 정령 쪽.”
“아하. 두 분 다 현역으로 일하시다가 들어가신 거예요?”
“예.”
“저는 그렇게 현장 경험이 많지는 않아요.”
설미가 작게 대답했다. 그 말에 상호도 문득 궁금해져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몇 년 했는데요?”
“합치면 2년 정도…….”
담욱이 고개를 기웃했다.
“할 만큼 했는데요?”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짧죠.”
바로 옆에 10년을 채워가는 사람이 있다. 설미는 상호를 흘끗하고 헛기침을 했다.
“저희 학교 선생님들만 해도…… 저보다 몇 년은 더 뛰신 분들이니까요. 근데 담욱 씨는…… 현역 헌터세요?”
“예. 현장에서 뛰기도 하고, 작전 컨설턴트 일도 하고 있어요.”
“우와…….”
작게 감탄사를 터트리는 설미와 달리, 상호는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끔뻑였다. 그래서 담욱이 미진을 돌아보는 틈을 타 설미에게 속삭였다.
“작전 컨설턴트가 뭐예요?”
“몬스터 토벌 작전 있잖아. 그런 거 회사한테 상담이나 지도해주는 사람……. 근데 상호 너 몰라?”
“전 그런 거 받을 일이 없어서……. 근데 좋은 직업인가 봐요?”
“일반적인 헌터가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일 거야. 아마도. 그런데 스물여섯이면 엄청 일찍 성공한 거지.”
“아하.”
토벌 작전을 짜는 헌터라면 당연히 베테랑 중의 베테랑일 것이고, 그렇다면 높은 확률로 참전 경력이 있을 터였다. 상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능력이 있구만. 미진 씨 애인답게…….’
미진도 꽤나 일찍 성공한 편이니. 예현여고 교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때 담욱이 불판 위의 고기를 뒤집으며 물었다.
“그런데 두 분 혹시……?”
상호는 말의 속뜻을 깨닫고 진땀을 흘렸다. 애인이라고 하는 게 맞는지, 아니라고 하는 게 맞는지.
‘……해야겠지.’
책임을 지는 게 맞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귀는 사이입니다.”
그 말에 설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폭탄을 터트린 것처럼. 상호의 얼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으흠.”
그는 타는 목을 찬물로 달랬다.
설미도 그도 자꾸 물을 마시자 담욱이 눈을 끔뻑였다.
“물을 왜 이렇게…… 아, 그런데 두 분 술은 안 드세요?”
“예.”
“교사라서, 술은 조금…….”
바로 전날에 퍼마셨다가 그 사고를 쳤는데 또 마실 수는 없었다. 교사라는 이유는 그냥 허울 좋은 핑계일 뿐이었다.
둘이 고개를 젓자 담욱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요. 으음. 하긴 저도 내일 일이 있으니……. 그럼 다음에 한잔 하죠.”
“자, 잠깐만.”
미진이 당황하며 담욱의 팔뚝을 톡 쳤다.
“우리끼리 먹으면 되잖아…….”
“응? 미진이 너랑 친한 분들이잖아. 같이 마시면 좋은 거 아냐?”
“……그게.”
미진은 한 명이 인간쓰레기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말해, 다음에……. 자기 많이 먹어. 내일 힘내야 하니까…….”
“응. 자기 한입~, 나 한입~.”
둘은 또 깨를 볶았다. 딱히 밉상도 아닌데 느글느글해서 속이 뒤집어질 정도로.
상호는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쌈을 하나 싸서 설미의 앞에 들이밀었다.
“응?”
설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상호가 무심한 표정으로 쌈을 들이밀자 그녀의 뺨이 붉어졌다.
“나, 난 괜찮…….”
“자기야.”
“……응?”
“아 해요.”
“으, 으응?”
상호는 어안이 벙벙해하는 설미의 입에 쌈을 투척했다.
“어때요?”
“우움…….”
“맛있어요?”
“……움.”
설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로. 키가 작은 그녀라서 더욱 다람쥐처럼 보였다.
상호는 흐뭇해하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아직도 깨를 볶고 있는 미진과 담욱을 돌아보았다.
‘이야, 애인 앞에선 애교도 부리네……. 직장에서도 저리 살가우면 얼마나 좋을까. 쯧…….’
그는 혀를 차고 물을 홀짝였다.
뜨겁게 달궈진 불판에서, 고기가 잘도 익어가고 있었다.
287. 약속
담욱과는 다음에 술자리 한번 갖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커플 간의 알콩달콩한 작별 인사를 관람한 것은 덤.
상호는 핸들을 돌리며 조수석을 흘끗했다.
“미진 씨.”
“뭐요.”
“남친이 되게…… 뭐랄까, 쾌남이네요, 쾌남.”
“갑자기 뭔 소리예요?”
“아니 사람 좋아 보인다고…….”
“흥.”
미진은 창턱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괴었다.
“운전이나 똑바로 하세요.”
“남친 만나서 기분 좋은 거 아니었어요?”
“무능한 상사 보니까 팍 상하네요.”
“……끄응.”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오늘은 사고 안 쳤다. 그 사실만으로도 상호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사건들 때문에 너무 힘들었는데.
오늘은 무사히 넘겼다.
‘내일도 부디 무사태평하기를…….’
그럴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상호는 하늘에 간절히 빌며 학교로 차를 몰았다.
* * *
다음 날 아침.
“우웅~.”
우스꽝스러운 목소리가 상호의 귀를 파고들었다.
눈을 떠 보니 분홍색 살점 두 개가 상호의 눈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야, 임마!”
“우웅~ 모닝 랍스타 키스~.”
그의 앞에 누운 태화가 입술을 붕어처럼 내밀었다.
“랍스타 입술~ 랍스타 혀~.”
“저리 안 가! 방에 막 들어오지 말랬지! 자는 사람들은 어쩌고…….”
상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가 뒤쪽에 누워 있는 효은, 그리고 혜소와 눈이 마주쳤다.
침대가 넓긴 해도 본디 1인용이라, 좁디좁은 곳에 끼인 듯 누워 있었다.
“이거 봐, 다 자고 있는데 너 때문에 깨 가지고…….”
“어른이면 일찍 일어나야지 왜 늦잠 자? 랍스타나 먹으러 가자, 응? 응? 오늘 사주기로 했잖아~! 빨리 일어나! 일어나! 안 일어나면 지윤이도 부른다!”
“아침부터 뭔 랍스타야, 임마…….”
상호는 한숨을 쉬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자 태화가 그의 얼굴을 강제로 돌려서 진지한 눈빛을 보내왔다.
“쌤. 쌤.”
“왜.”
“아침에 먹는 사과가 약이래.”
“그래서.”
“저녁에 먹는 사과는 독이래.”
“그래서.”
“랍스타가 사과보다 비싸지?”
“그치.”
“그럼 랍스타를 아침에 먹으면 사과보다 훨씬 몸에 좋겠지?”
“……왜 그렇게 되는 건데?”
말도 안 되는 논법을 펼치는구나. 상호는 몸을 일으키며 태화의 다리를 쫙 소리 나게 쳤다.
“저녁에 사줄게. 그리고 막 들어오지 마. 또 들어오면 혼난다.”
“저녁에 먹으면 독이 된다니까!”
“어쨌든 아침엔 못 먹어. 아침에 여는 레스토랑이 어딨어 임마. 자꾸 그러면 수산시장에서 대충 사와가지고 여기서 쪄 먹는다. 그럴래?”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너 그거 이제 끝까지 부를 수 있냐?”
“몰랑.”
태화는 그 말을 남기고는 퐁 하고 사라졌다.
그리하여 오늘 저녁은 가재. 아침을 준비하려고 주방으로 걸어가는데 침대에서 효은이 물었다.
“어제 설미랑은 저녁 잘 먹었냐?”
“어? 아, 어. 미진 씨도 껴서. 아, 맞다. 나 어제 미진 씨 남친 봤어.”
“그래? 너보다 잘났겠네?”
“……그냥, 꽤 좋은 직업이라나 봐. 헌터인데 작전 컨설턴트? 그런 일을 한대.”
“그게 뭐야?”
“나도 잘 몰라.”
상호는 냉장고를 뒤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미진 씨 되게 귀엽더라. 남친한테 막 애교도 부리고 그러던데.”
“이제 남의 여자까지 손을 대시겠다? 으음, 그럴 수 있지. 내가 말릴 자격이 없지. 그치?”
“……그냥 그런 모습 보니까 신기하더라고.”
“설미랑 먹으라고 보냈더니 이제 설미는 눈에 안 들어오고 미진이만 눈에 들어오지?”
무슨 말을 못하겠다. 그는 계란을 꺼내며 한숨을 쉬었다.
옆으로 아장아장 다가온 혜소가 그의 다리를 찰싹 쳤다.
“금수.”
“……그런 예스런 말들은 어디서 배우는 거니?”
“멍덕꿀.”
“대체 어디서…….”
상호는 눈물을 삼키고 아침 준비를 했다.
* * *
아침을 먹은 후에는 세희와 대련을 했다. 그런 후에 점심을 먹고 한가롭게 쉬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또 도현이었다.
‘약속이 잡혔나.’
높으신 분들과의 약속. 이야기를 했나 보다. 상호는 그렇게 여기고 전화를 받았다.
“어, 형.”
[야, 상호야. 오늘 저녁에 시간 되냐?]
상호의 눈가가 씰룩였다.
많고 많은 날 중에.
“왜 하필 오늘이야?”
[평일에 시간이 안 되더라. 당장 나부터가……. 아니면 다른 날 잡을까? 근데 그러면 내가 못 갈 수도 있어.]
그건 더 싫다. 혼자서 높으신 분들을 상대하기는.
하지만 오늘 저녁은 태화와 지윤과 외식하기로 한 시간이었다. 상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꼭 만나야 되나? 뭐 사람 통해서 이야기하면 안 돼?”
[널 한번 만나보고 싶어하셔서. 최대한 빨리……. 강제로 만날 필요는 없다만, 그래도 한 번쯤은 네가 만나야 할 사람들이라고 봐.]
“……으음.”
그는 결국 결정을 내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알았어. 저녁에 갈게.”
[그래. 자세한 건 좀 있다가 문자로 보낼게.]
통화가 끊겼다.
또 약속을 못 지키게 생겼다. 이제는 양심의 가책보단 두려움이 훨씬 컸다. 또 무슨 짓을 당하게 될지 몰라서.
안 그래도 예현제가 코앞으로 다가온 상태. 최대한 몸을 사려야 할 시기였다. 잘못하면 1학년들 앞에서 여장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
‘가서 빌어야지, 뭐 어쩌겠나…….’
그는 한숨을 쉬고 문가로 걸어갔다. 태화와 지윤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열리는 현관문이 꼭 굶주린 짐승의 아가리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