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가은이랑…… 세희가 1등이네.”
상호는 초췌한 몰골로 웃었다.
“둘 다 잘했다. 고생한 보람이 있네.”
“감사합니다.”
“…….”
한 명에겐 당연했고, 한 명에겐 당연하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을 제일 안 받은 아이라서.
가은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소원권은…… 오늘 줄게. 이따가 뽑아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고…….”
“아싸~.”
나빛이 헤헤 웃었다.
“꾸꾸야~ 우리 이제 부자야~.”
“뺙?”
“오늘부터 슬슬 하나씩 써볼까~?”
“뺙.”
상호는 눈물을 삼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는 원래 부자야…….’
또 대형사고가 터져서 정신이 없는데. 애들 소원권까지 발급해 줘야 한다니. 마음 같아서는 파산을 하고 싶었지만 마음은 파산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어제 시험 끝났으니까, 오늘은 쉬자. 세희는 잠깐 나오고.”
“네.”
세희는 상호의 뒤를 따라 복도로 걸어 나왔다.
지각을 한데다가 조례시간이라 시간이 별로 없었다. 상호는 세희의 손을 잡고 내공을 불어넣었다.
“이따가 둘이서만 조용히 수업하자. 괜찮지?”
“그럼요.”
세희는 뭘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듯 상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근데 선생님.”
“응?”
“술 드셨어요?”
“으응. 조금.”
그러자 마음속에서 세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술 마시지 마요…….’
상호는 그 목소리를 듣고 움찔했다.
내공이 이어져 있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그냥 마음이 간절했던 걸까. 꼭 딸이 아버지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상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세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선생님은 술 좀 마신다고 간 안 망가져.”
“그래도 마시지 마요…….”
세희의 눈에 기묘한 빛이 깃들었다.
“마실 거면 여자랑 마시지 말고 혼자 마셔요.”
“…….”
상호는 조용히 세희의 눈길을 피했다. 외도를 들킨 아버지의 심정이 이럴까.
“……될 수 있으면 안 마시도록 노력할게.”
“제가 성인 될 때까지 기다리세요.”
“노력……할게.”
“기다리세요.”
“……크흠.”
헛기침과 함께 내공의 전달이 끝났다. 그는 세희의 손을 놓고 등을 토닥였다.
“들어가 있어. 노트북 갖고 올게.”
* * *
“에휴…….”
상호는 소원권을 가위로 오리며 한숨을 쉬었다.
처음엔 함부로 쓰지 않게, 조금만 발행해서 귀한 상으로 쓰려고 했는데. 이제는 뭐만 하면 소원권이었다.
‘얘들은 어따 쓰려고 이걸 모으고만 있는 거지……?’
뭔가 아주 불안한 느낌이 들지만, 확인할 방도는 없었다.
상호는 오려낸 소원권을 챙겨서 교무실을 나서려다가, 어제 해련이 한 장 달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어른이 무슨 소원권이야.’
학생도 아니고 유치하게.
잠깐 교장실에 들를까 고민했던 상호는, 곧 혀를 차며 교실로 걸음을 옮겼다.
* * *
“천세희 또 쌤이랑 둘만 있네.”
태화는 들췄던 커튼을 돌려놓고 돌아섰다. 교실은 영화를 보느라 불을 다 꺼놓은 상태였다.
노트북과 제일 가까운 곳에는 지윤과 나빛이 앉아 있었다. 다리를 꼬고 앉은 지윤이 태화를 향해 물었다.
“둘이 뭐 하노?”
“수업하던데. 쌤도 어지간하네. 저렇게 때리기도 지칠 것 같은데.”
“세희가 더 대단하제.”
어른도 못 버틸 혹독한 훈련을 그 가느다란 몸으로 받아내고 있으니. 체력보다는 정신력의 문제겠지만, 어쨌든 체력이 부족하면 그만큼 정신력이 더 필요해질 터였다.
그 말을 들은 은율이 슬며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태화는 그런 은율을 향해 핀잔을 날렸다.
“왜, 니 남친 맞는다니까 걱정되냐?”
그러자 은율이 어이없다는 듯이 눈을 끔뻑였다.
“맨 먼저 확인한 건 너잖아.”
“……뭐.”
“너도 세희가 걱정돼서 본 거 아냐?”
태화는 은율의 시선을 피하며 발뺌을 했다.
“……아닌데.”
그 말을 들은 이츠키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중얼거렸다.
“세희 남친 찾은 것 같습니다.”
“아이다. 세희가 왕자고 이 가스나가 공주제.”
“누가 공주야! X랄하네…….”
“귀여운 꼬마 공주님인가 봅니다.”
“아니라고! 내가 쟬 왜 걱정해?! 쌤이랑 이상한 짓 안 하나 감시한 거야!”
“이렇게 멀티플레이 각을 보는 겁니까?”
“니는 왕자가 둘이라 좋겠구마.”
“아니라니까! 이 개년들아아!”
“끼잉, 소리 안 들려. 멍…….”
“꾸꾸야! 쪼아!”
“이 씨X년들아아아악!”
* * *
“어디서 이상한 소리 들리지 않았어요?”
“응? 무슨 소리?”
“……아니에요. 잘못 들은 것 같아요.”
미진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커피를 홀짝였다.
여교사 휴게실. 유난히 피곤해 보이는 설미를 위해 커피를 타 준 참이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자기라도 했는지 눈밑이 거뭇해서.
꼭 밤새 무언가를 한 것 같았다.
“언니.”
“응?”
“강 선배랑 뭐 했어요?”
휴게실엔 둘뿐이었지만, 설미는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으응, 술 조금…….”
“밤새 마셨어요?”
“아니, 그건 아니야.”
“근데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요.”
“잠…… 잠을 좀 설쳤어. 잠자리가 익숙하질 않아서…….”
“어디서 잤는데요?”
“모텔. 술 때문에…….”
미진이 눈을 부릅떴다.
“그 쓰레……아니, 강 선배랑 같은 방 썼어요?”
“아, 아니? 당, 당연히 다른 방 썼지…….”
“아, 다행이다. 근데 왜 대리 안 부르고 굳이 거기서 잤어요?”
“그……그냥, 거기서 2, 2차 하느라…….”
“……흐음.”
의심을 완전히 거둔 건 아닌 듯했지만, 어쨌든 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그 인간 조심해야 돼요.”
“알지, 알지……. 그래도 나한텐 이상한 짓 한 적 없어서…….”
“그게 다 언니 꼬시려고 그러는 거라니까요? 언니가 예쁘니까 어떻게 한번 해보려고 그러는 거라구요. 그니까 조심해요. 전 자다가 당했어요.”
“……응? 뭐?”
설미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다가? 진짜?”
“그렇다니까요. 저번에 계곡 놀러 갔을 때요.”
“……아아.”
그거라면 그녀도 알고 있다.
“아니야, 그거. 미진이 네가 오해한 거야.”
“아니, 그 인간이 제가 잘 때…….”
“오해야, 오해. 으음, 아무래도 상호랑 같이 풀어야 할 것 같네.”
설미는 쓰게 웃으며 문가를 가리켰다.
“가자. 상호한테.”
* * *
“자, 봐봐. 내공을 끌어친다는 생각으로…….”
“끌어쳐요?”
“응. 이렇게. 확! 후려치는? 그런 느낌으로. 다시 해볼게, 봐봐…….”
상호는 검을 치켜들었다. 그때 어디선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상호 씨~.”
본관 쪽을 돌아보니 설미와 미진이 걸어오고 있었다. 설미는 지난밤의 일을 숨길 생각인지 일부러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상호도 태연한 표정으로 그녀들을 맞았다.
“상호 씨. 바빠? 바쁘면 나중에 오구.”
“아니요.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저번에 계곡 갔을 때 있잖아.”
“네.”
“미진이가 아직도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상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오해였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니, 그가 곤란해할 이유가 없었다.
“네.”
“그래서 그걸 좀 풀어야 할 것 같아서……. 그때 그거 미진이한테 보여줘도 될까?”
세희가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상호의 옆을 알짱거렸다.
상호는 설미의 말을 듣고 곰곰이 고민했다. 정령의 영상 재생을 말하는 것이리라. 거기에는 그가 나빛을 끌어안는 모습이 나온다.
‘세희한텐 숨겨야겠지…….’
그래서 그는 세희의 등을 토닥였다.
“들어가 있어.”
“무슨 일인지 알려주시면 안 돼요?”
“나중에 알려 줄게. 나중에.”
세희는 살짝 입술을 씰룩였다. 투정을 부리고 싶어하는 아이처럼. 하지만 곧 군말 없이 본관을 향해 걸어갔다.
상호는 세희가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설미를 돌아보았다.
“지금 볼 수 있어요? 물 필요한 거 아니에요?”
“물은 정령이 주지.”
설미가 손을 까딱여 상호와 미진을 불러들였다.
스탠드에 둘러앉은 셋은 설미의 손을 따라 바닥에 쏟아지는 물을 내려다보았다.
설미가 그 물에 속삭였다.
“너희가 본 걸 보여줘.”
곧 바닥에 고인 물에 무언가가 비치기 시작했다. 하늘도 아니고, 스탠드 위의 플라스틱 빗물받이도 아니었다.
이불, 그리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
미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이게 정령들이 본…….”
“응. 맞아.”
설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째 이불이 지나치게 익숙했다. 한 달 전에 본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꼭 어제 본 것처럼.
‘……?’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속의 상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보고 또 봐도.
‘……어제 모텔 이불인데?’
그렇게밖에 안 보였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설미에게 알리려는 순간, 물에 비친 이불 속에서 가느다랗고 하얀 팔이 튀어나왔다.
수면의 파동이 소리를 전했다.
[아……!]
“어?”
설미가 흠칫했다. 물속의 여인과 똑같은 목소리로.
곧이어 물속의 그 팔과 이어진 몸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언가에게 들이박히고 있는 것처럼.
[으! 으으……!]
덜덜 떨리는 손이 이불을 꼭 부여잡았고, 물에 비치지 않는 곳에서는 온갖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상호의 머릿속이 점점 하얗게 탈색되어 갔다.
“…….”
“…….”
“……하.”
미진이 코웃음을 쳤다.
“그랬겠네요. 오해가 있었겠네요.”
“…….”
“제가 큰~ 오해를 했어요. 그죠? 강 선배님이 날 안았을 리 없는데. 효은 언니만 바라보는 지고지순한 순정남인데. 그죠?”
“…….”
“이 남자는 누군데 이렇게 신났을까. 궁금하네요. 그죠? 이야, 자세도 소리도 개가 따로 없어요. 그죠? 이 짐승 새끼가 세상을 구한 X급 헌터님일 리 없는데 말이에요. 그죠?”
“…….”
“죽어.”
이제는 존대도 안 한다. 미진은 그 말을 남기고 설미의 손을 잡아끌었다.
상호는 물웅덩이를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저항할 수 없는 업보의 굴레를 느끼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미쳤지……. 내가 미쳤지…….’
술 마시지 말라던 세희의 목소리가, 텅 비어버린 그의 마음속에 절절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286. 남의 여자
“서방님 오셨어요~?”
간드러짐과는 거리가 먼 목소리.
“소식 들었어요~.”
“…….”
“첩을 만드셨다고오~.”
“…….”
“음~. 그럴 줄 알았지~. 언니밖에 없다면서 나랑 잘 때부터 알아봤지~.”
효은이 되도 않는 교태를 부리고 있었다.
“왜 대답이 없지? 우리 서방님은 애꾸지 벙어리는 아닐 텐데~.”
“……죄송합니다.”
“으음~, 아냐~. 난 설미가 같이 쓰는 건 상관없어~. 근데 새끼야. 니가 먼저 설미한테 술 마시자고 했다며.”
“…….”
“나는 그 쌩난리를 쳐서 겨우 해주더니, 다른 애들한텐 아주 자동문이네?”
“……그럴 리가요.”
“그래서.”
“…….”
“좋았냐?”
상호는 현관에 선 채로 진땀을 흘렸다.
“기억 안 나.”
“기억이 안 나? 기억 못 할 거면 왜 했는데? 말이 되는 소릴 해, 이 새끼야.”
“내가 하자고 하진 않았어……, 아마도.”
“기억을 왜 못해? 깨면 다 기억날 거 아냐?”
“너도 나랑 처음 한 거 기억 못 하잖아!”
그 말에 효은이 눈을 치켜떴다.
“아아, 그러네. 니는 사람 인사불성일 때 개통해놓고, 기왕 길 뚫렸으니까 쓴다면서 들락거리는구나? 아하~.”
“……아니야.”
“그럼 니가 인사불성이었으니까 무죄라고? 으음~. 뭐 그럴 수 있지. 술 마시고 하면 뭐든 용서되잖아. 그치?”
“…….”
“그래서 기억을 못해?”
“……기억났어.”
“그치?”
효은이 가까이 오라고 손을 까딱였다.
상호는 침대 옆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침대에 얼굴을 박았다. 그의 귀에 효은의 속삭임이 닿았다.
“어떻게 했는지 나한테 해봐.”
* * *
살살 하면 살살 한다고 뭐라 하고. 열심히 하면 이렇게 잘 했냐고 비꼬고. 매도로 점철된 고통의 의무방어전은 혜소가 문을 두드림으로서 급하게 끝이 났다.
‘다행이다…….’
참으로 시기적절하게 와 주었다. 상호는 그의 옆에 앉아 TV를 보는 혜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혜소가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끔뻑였다.
“왜요?”
“아니, 그냥.”
“맞다, 아저씨.”
“응?”
“돈은 어떻게 버는 거예요?”
“돈?”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걸까. 어리둥절해하는 상호에게 혜소가 말을 이었다.
“사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비싸?”
“막 비싸진 않은데…….”
“말해. 말하면 사줄게.”
“제 돈으로 사고 싶어요.”
“뭐 누구 선물이라도 사려고?”
그 말이 맞았는지, 혜소가 우물쭈물해하다가 한숨을 폭 쉬었다.
“이츠키 언니한테…… 사주고 싶은 게 있어요.”
“아하.”
상호는 평가 때 혜소가 도망가던 것을 떠올렸다. 혜소가 눈뽕을 쏴서 이츠키가 나디아에게 패배했던 경기.
그 일에 대해 사과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뭐 살 건데?”
“비밀이에요.”
혜소가 눈을 살짝 흘겼다.
“아저씨는 언니한테 다 말할 거잖아요.”
“내가? 아냐, 내가 입이 얼마나 무거운데…….”
“아저씨는 못 믿어요.”
“……끄응.”
완전히 신뢰를 잃어버린 듯했다.
어쨌든 돈을 벌고 싶다지만, 대여섯 살 애가 일을 구할 수는 없다. 법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돈을 조금 벌고 싶은 거라면.
“그러면 아저씨 일 도와줄래? 급여를 줄 테니까.”
“일이요?”
혜소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떤 일이요?”
“뭐 그냥 설거지를 도와준다거나…….”
상호는 말하다 말고 혜소를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그러자 혜소가 몸을 움츠리며 그를 째려보았다.
“기분 나빠요.”
“……키 본 거야. 설거지는 너한텐 힘들겠고……. 으음, 나중에 같이 생각해 보자.”
“네.”
그와 혜소는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한참 동안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무언가가 상호의 엉덩이를 쿡쿡 찔렀다. 상호는 눈을 끔뻑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침대에 드러누운 효은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야, 니.”
“뭐.”
“설미가 연락 안 했어?”
“응.”
그 맹한 대답에 효은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쓰레기야, 연락 안 한다고 이러고 있을 거야?”
“무슨 일 있으면 꼭 말하라고 했어…….”
“니가 먼저 연락해야지, 미친놈아! 이 새끼 이거 착한 여자만 만나 가지고 받아처먹을 줄밖에 모르네. 쓰레기가…….”
“그런 거야……?”
상호는 당황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알았어, 밖에서 통화하고 올게…….”
“걔가 괜찮다고 했다고 괜찮은 줄 넘어가지 말고. 밀어붙여서 얼굴이라도 보란 말이야, 새끼야. 혼자 있게 하지 말라고.”
효은의 핀잔이 가슴을 콕콕 찔렀다.
스스로의 이야기란 것은 상호도 알고 있었다. 그는 황급히 핸드폰과 외투를 챙겨 방을 나섰다.
마침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