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내 명치…….’
상호는 아직도 얼얼한 명치를 쓰다듬으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간신히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시간은 일곱 시. 설미와의 약속은 여덟 시.
하릴없이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웬 전화가 걸려 왔다.
‘뭐여.’
도현이었다.
“어, 형.”
[야, 상호야. 오늘 시간 있냐?]
“갑자기?”
[내가 높으신 분들이랑 약속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널 한번 만나보고 싶어해.]
“내 성격 알잖아.”
얽매이는 건 질색이다. 상호는 질색팔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도현은 볼 수 없을 텐데도.
“안 가. 지들이 오라 그래.”
[너도 이제 그런 사람들이랑 이야기를 해 봐야지. 너 혼자 그놈이랑 싸우러 갈 거야? 특수부대를 만들든 뭘 하든 간에 다같이 이야기를 해야지.]
“에이, 그래도 씨…….”
[나도 같이 가잖아. 둘도 부담스러우면 민정이도 같이 가자 그래.]
“아니, 그것도 그건데. 오늘 약속이 있어.”
[악마를 죽이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야?]
“그건 아닌데.”
상호는 창밖을 흘끗했다.
“지금 세상에서 나한테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사람…… 중 한 명이지.”
[……그러냐.]
도현이 입맛을 다셨다.
[그럼 나중에 약속 잡아준다고 할게.]
“응.”
[그때 보자.]
“어.”
그렇게 통화가 끊겼다.
‘선약이 먼지지…….’
세상을 구하는 일이라 해도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최우선 과제는 세희를 후계로 키우는 것이니. 높으신 분들이야 나중에 만나도 상관없다.
상호는 시계를 흘끗하고 슬슬 나갈 준비를 했다.
* * *
“조용해서 좋죠?”
“……으응.”
작은 방에 둘만 앉을 수 있게 한 가게. 흑단으로 만든 식탁과 벽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겼다.
설미는 상호가 따르는 술을 두 손으로 받으며 웅얼거렸다.
“좋은 곳…… 같아.”
“왜 또 두 손으로 받아요. 누나가 윗사람이면서.”
“으응…….”
“자, 짠.”
잔이 쨍한 소리를 냈다.
상호의 잔은 쭉 비었지만, 설미의 잔은 거의 그대로였다. 상호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음식을 몇 점 집어먹고 물었다.
“아이들 평가 잘 봤어요?”
“으응…….”
“누나 반엔 3학년들도 있잖아요. 헌터 시험 준비는 잘 되어가요?”
“으응…….”
“누나.”
상호가 앞으로 몸을 기울이자 설미가 흠칫했다.
“응……?”
“제 말 듣고 있어요?”
“응…….”
“뭐라고 말했는데요?”
“응…….”
“……안 듣고 있잖아요.”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잔을 들었다.
“누나.”
“응.”
“술게임이라도 해볼까요?”
“교사는 그런 거 하면 안 돼…….”
“그건 어느 나라 교사예요?”
술게임이라는 말에 설미는 깨작깨작 술을 홀짝이기 시작했다.
영 시원찮다. 그를 대하는 태도는 흐릿하다. 물안개 속에 숨는 호수처럼.
상호는 나직하게 설미를 불렀다.
“누나.”
“응.”
“누나는 효은이랑은 친하게 지내면서 왜 나한텐 이렇게 서먹해요?”
“……으응.”
“으응이 아니잖아요.”
“으응…….”
설미가 뺨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답답하다. 전에는 주거니 받거니 잘 마셨는데.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누나.”
“응.”
“나랑 처음 술 마셨을 때 기억나요?”
“나지…….”
“그때 누나가 해준 조언 덕분에 여기까지 왔어요.”
“내 조언……?”
“네.”
그때 설미가 없었다면 교사를 때려치웠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설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난 누나가 그때처럼 편하게 대해 줬으면 좋겠어요.”
나빛을 혼낸 일 때문에 교직에 회의를 느꼈을 때. 그럼 다른 교사에게 넘길 거냐면서 다잡아줬던 그녀.
“내가 X급이라고 해서 누나보다 잘난 인간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직장 후배니까. 누나도 그냥 편하게 대해 줘요.”
“……응.”
설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다가, 술병으로 손을 뻗었다.
상호는 잔을 내밀어 술을 받았다.
“상호야.”
“네.”
“저승부대……인 거지?”
“네.”
조금 낮은 곳에 달린 전등이 설미의 눈동자를 반짝이게 했다.
“추모관에 있는 기록이랑 사진에…… 너도 있는 거야?”
“네.”
“무섭지 않았어?”
그 빛은 호기심이나 신기함이라기보단, 가련한 무언가를 보는 듯 쓸쓸한 동정심을 담고 있었다.
상호는 그 빛을 보고 쓰게 웃었다.
“무서웠죠.”
눈의 흉터가 욱신거렸다.
“무서워도…… 누군가는 해야 했고, 내가 갈 길이 그것밖에 없었어요. 그 길이 아니면 혼자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외로운 길보다는, 무서워도 함께 가는 길이 좋았어요.”
갑자기 가슴속에서 무언가 비비적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아잉~. 상호 너~무 로맨틱해~.’
‘…….’
상호는 무시하고 술을 홀짝였다.
설미는 그의 말을 듣고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효은이…… 말이야?”
“아니요.”
그쪽으로 생각했던 걸까. 상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스승님이요.”
“스승님?”
“지금은 돌아가셨어요.”
“아…….”
설미가 잔을 내리며 쩔쩔맸다.
“미안해…….”
“괜찮아요. 누나한텐 다 말해줄 수 있으니까.”
상호는 일부러 키득거렸다.
“꿉꿉한 이야기만 하고 있네. 마셔요, 마셔.”
“으응.”
“누나.”
“응?”
“예전에 했던 말 기억나요?”
“……응?”
그 말에 설미가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상호는 딱히 무언가를 노리고 물은 질문이 아니었다.
“나 취한 거 보고 싶다고 했었잖아요.”
“아, 응. 그랬었지…….”
“오늘 봐요.”
“응?”
“그동안은 진짜 취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는 취기가 오른 사람처럼 낄낄 웃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한번 취하게 만들어 봐요.”
* * *
“그런데 웬 새가 뿅 하고 나온 거예요. 머리로. 아이, 얼마나 놀랐는지…….”
“새……가?”
“네. 그게 그…… 황금색인데, 병아리는 아니고 뱁새? 오목눈이? 그렇게 생겼는데, 크기는 쪼매난 놈이 부리는 세~상 옹골차가지고 머리를 쪼는데…….”
“아프겠다아…….”
설미가 잔을 두 손으로 모아 잡고 웃었다.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상호는 한숨을 쉬면서도 키득거리며 잔을 연신 기울였다.
“걔 이름이 혁구거든요?”
“혁구?”
“강혁구. 애들이 제 성씨 따 가지고 지었어요. 별명이 이제 꾸꾸인데……. 고놈이 저한테 장난을 자꾸 쳐요. 애들처럼…….”
“어떻게에……?”
“제 밥 위에 철퍼덕 누워버리고, 수업시간만 되면 시끄럽게 삐약삐약 울고……. 머리에 새똥을 싼 적도 있어요.”
“아하하, 그게 뭐야. 하하…….”
설미가 깔깔 웃자 상호도 웃음이 났다.
거나하게 취기가 올라서 그런지 입꼬리가 제멋대로 올라갔다. 정신줄을 놓지는 않았지만 알딸딸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병을 들어 설미와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웠다.
그런데 설미가 턱을 괴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상호……야아.”
“네.”
“너 있잖아.”
“네.”
“뭔가…… 달라진 것 같아.”
“난 달라진 거 없다니까요. 그건 누나가 자꾸 X급을 의식해서…….”
“아니, 아니야. 달라졌어.”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뭐가요?”
“좀 더 잘 웃고…… 사람이 선해진 것 같아.”
“전에는 안 선했어요?”
“응. 전에는 항상 툴툴거리고 무심한 감이 있었는데…… 저번에 그 사건 이후로, 잘 웃고, 뭔가 다정해진 것 같기도 하고 그래. 꼭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설미가 빙긋 웃었다.
“그래서…… 보기 좋아. 정말로.”
“……다행이네요. 근데…… 내가 그렇게 툴툴거렸어요? 티 나게?”
“응.”
한 치의 고민도 없는 즉답.
상호는 설미의 미소를 피해 고개를 푹 숙였다.
“몰랐어요.”
“어릴 땐 그럴 수도 있지~.”
설미가 흐흐 웃었다.
누나 행세. 선배 행세. 나이도 경력도 1년밖에 차이 안 나지만, 그래도 언제나 늘 그를 나이만 먹은 애 취급.
그녀는 전부터 그랬고, 상호는 그 모습을 좋아했다.
“2차는 어떻게 할까요?”
“2차? 괜찮을까? 내일도 수업 있는데…….”
“조금 더 마시고 싶은데.”
상호의 한쪽 눈과 설미의 두 눈이 마주쳤다.
“난 누나랑 더 이야기하고 싶어요. 누나는요?”
설미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곧 부드럽게 웃었다.
“나도.”
서로를 더 알고 싶다. 그 마음은 둘이 같았다.
상호는 외투를 챙기며 물었다.
“그러면, 어차피 운전하긴 글렀으니까, 저번처럼……?”
“응. 저번처럼.”
“편의점에서 사가야겠네요.”
“응.”
설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상호의 곁에 붙어 방을 나섰다.
둘은 서로의 취기에 이끌리듯 서로를 향해 비틀거리다가, 기대고 기대어 어깨를 맞붙이며 가게를 나섰다.
내일 수업이 있다는 사실은 그새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 * *
‘……미쳤지.’
상호는 눈을 뜨며 생각했다.
창문에서 아침의 온기가 느껴졌다.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전자시계가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다.
8시.
오전 8시.
진작에 출근했어야 할 시간이었다.
‘……아냐. 아직 안 늦었어.’
설미를 안고 달리면 3분 내지 5분이면 간다. 후다닥 준비해서 출발하면 충분하다. 어제와 똑같은 옷을 입고, 술 냄새를 풍기며 꼬질꼬질한 꼴로 출근하게 되겠지만.
어쨌든 빨리 가야 한다.
상호는 머리를 때리는 숙취를 억누르며 옆을 돌아보았다.
“설미 누……?”
혀가 멈춰서 말을 짓지 못했다.
침대 위까지 굴러다니는 술병. 그건 전혀 놀랍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는 외투와 옷. 거기까지도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품에 안긴 설미의 상태와, 그런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그의 상태는 납득도 이해도 할 수 없었다.
상호는 새근거리는 설미를 내려다보며 그대로 굳어 버렸다.
“…….”
너무 깊이 알아버린 모양이었다.
285. 개를 만드는 물
“상호야…….”
설미는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올리고 웅얼거렸다.
“미안해.”
“뭐가요.”
“내가 시작한 것 같아…….”
“그게 왜 미안할 일이에요.”
상호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으면서.
“했으면 내가 했겠죠. 막을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효은이한텐…… 어떻게 말해……?”
“걘 그런 거 신경 안 쓴대요.”
본의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으니.
“어서 옷 입어요. 빨리 달리면 조례는 할 수 있으니까.”
덤덤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실은 상호도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심지어 이번엔 확인할 것도 없이 백 퍼센트.
‘으아아아…….’
‘상호는 안 건드리는 사람이 없네~. 스승도 건드려, 치고받던 악우도 건드려, 전우 누나도 건드려, 제자도 건드려, 이제는 직장 선배까지~.’
‘……아아아악!’
‘다음은 직장 후배인가아~.’
‘아아아아아악!’
‘그다음은 형수들인가아~?’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아차, 그 전에 직장 최상급자가 있구나~.’
‘최고령자겠죠…….’
더 이상 건드릴 일 없을 것이다. 이미 예경 빼고 셋을 더 건드려 버렸지만.
상호는 한숨을 쉬고 설미를 돌아보았다.
“누나.”
“으응.”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책임질 수 있으니까, 무슨 일이 생기든 간에 숨기지 말고 말해요. 알았죠?”
“……응.”
설미가 블라우스 단추를 채우며 웃었다.
곧 둘 다 나갈 채비를 끝냈다. 상호는 설미의 눌려있는 연갈색 곱슬머리에 손가락을 넣어 두어 번 들썩였다.
“가죠.”
“응.”
둘은 함께 문을 나섰다.
* * *
“뭔 짓을 한 거예요?”
책상 앞에 앉은 미진이 표독한 눈빛을 지었다. 출석부를 챙기던 상호는 뜨끔해서 말을 더듬었다.
“뭐……, 뭐가요.”
“아침부터 술냄새를 뿜고 다니잖아요. 입 열지 마세요. 냄새나니까.”
“……조금 마셨어요.”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미진의 시선이 교무실 입구를 향했다. 방금 설미가 헐레벌떡 출석부를 챙겨서 달려 나갔던 참이었다.
“설미 선생님한테서도 술 냄새 나던데. 둘이서 마신 거예요?”
“네.”
“미쳤죠?”
“…….”
그냥 술만 마셨다고 하고 싶은데, 미친 짓을 실제로 해버렸다.
그래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할 수는 없으니.
“……그냥 술 마시고 잠만 같이 잤어요.”
“뭐요?”
미진의 눈빛에 살기가 깃들었다.
“설미 선생님이랑 잤다고요?”
“……잤죠. 잠만.”
“미쳤죠?”
“잠만 잤다니까!”
“저번에 나 건드린 것처럼 건드린 건 아니고요?”
계곡에 갔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상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눌렀다.
“아니에요. 그때도 건드린 거 아니었고.”
“건드렸잖아요! 이제 와서 발뺌하기예요? 같이 확인해 놓고…….”
“아니라니까요. 설미 선생님이 확인해 줬어요. 아, 암튼 됐고. 나중에 이야기해요. 나 조례 늦었어요.”
“자기가 늦게 출근해놓고 왜 나한테 짜증이에요!”
“나중에 얘기해요, 나중에…….”
미진은 도망치듯이 교무실을 나서는 상호를 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서로 확인해 놓고 왜 발뺌을 하는지.
‘참나……, 쓰레기야. 진짜…….’
하지만 평가 직후라 해야 할 일이 많았고. 그녀는 곧 다시 컴퓨터에 시선을 돌리고 업무를 계속했다.
속으로 직장 선배를 잘근잘근 씹어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