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안녕~.”
나빛은 방어막 속에서 손을 흔들었다.
“지윤이랑 시합하는 건 오랜만이네, 헤헤…….”
“그러게 말이다잉.”
지윤도 나빛에게 손을 흔들었다. 평범한 가죽 반장갑을 낀 맨손을.
그 손에 하얀 강기가 둘러졌다.
“나빛이 니 내헌티 맞아삔 적 없제?”
“응.”
“살살하께. 이리 온나.”
지윤은 나빛을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태연한 듯하면서도 빈틈이 없게.
나빛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보호막과 함께 둥실 떠올랐다.
그녀의 주변에 성창이 수십 개 생겨났다.
“간다아~.”
나빛의 말과 동시에 지윤이 땅을 박찼고.
콰앙
움푹 패인 발자국이 남았다.
지윤은 세희나 은율만큼 손이 빠르지 않았다. 경공과 보법 또한 그 둘보다 뛰어나지 못했다. 대신에 순수한 힘, 그리고 한 방향으로의 폭발적인 속도는 그 둘보다 나았다.
단숨에 천장까지 뛰어오른 지윤은 천장을 박차고 나빛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나빛과 성창들이 지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얏!”
나빛의 기합과 함께 성창이 날아들었다.
지윤은 몸에 호신강기를 둘러 창을 쳐냈다. 성력은 대체로 강기보다 약해서 성창에 찔릴 걱정은 크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선물!”
황금빛 사슬이 지윤의 다리를 묶었다.
나빛의 보호막에 달려들던 지윤은 그 사슬에 붙잡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큭……!”
지윤은 급히 그 사슬을 잡아 힘으로 끊어냈다.
하지만 검으로 자르는 게 아니라 시간이 걸렸고, 그 시간 동안 나빛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성창들이 지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콱
콰직
지윤이 성창을 쳐내자 성창이 땅에 박혔다.
하지만 또 사슬이, 또 성창이 끊임없이 지윤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지윤은 계속 성창과 사슬을 쳐내고 부쉈지만, 나빛은 너무도 쉽게 성창과 사슬을 만들었다.
‘이대로는 답이 없겠고마.’
지윤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땅을 박찼다. 이번엔 옆으로.
벽을 박차며 방향을 꺾는 지윤의 앞을 평평한 보호막이 가로막았다.
콰악
지윤은 그 벽 또한 방향을 전환하는 데 사용해서, 천방지축으로 질주한 뒤 도약해 나빛의 보호막을 때렸다.
보호막이 쩍쩍 갈라졌다.
“웃…….”
나빛은 당황하며 보호막을 재생시켰다.
빈틈이 생겼다. 보호막이 아닌, 나빛의 행동에.
‘날 묶었어야제.’
보호막을 재생시키지 말고. 먼저 지윤을 방해했어야 했다. 나빛은 빠르게 도망칠 수가 없으니까.
지윤의 손에 둘러싸인 강기가 뾰족한 형태를 갖췄다.
콰창
다시금 내지른 주먹에 보호막이 박살났다.
나빛은 자신을 잡으려 드는 지윤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헤헤, 졌다.”
방긋 웃었다.
사람을 맥 빠지게 하는 웃음이었다.
“……쳇.”
지윤은 이번 기회에 나빛을 붙잡아 관절기의 맛을 보여주려 했지만, 그 웃음을 마주하고는 입맛을 다시며 손을 거뒀다.
“이제 니는 쌤 수제자니 뭐니 하지 말래이.”
“앗!”
그 말에 나빛의 눈동자에 쌍심지가 켜졌다.
“안 돼! 그럼 이 시합 무효야! 다시 해……!”
“에헤이, 뭐라카노. 다 지나갔디.”
“우이잉…….”
나빛이 울상을 지으며 지윤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시합이 끝났음에도 아웅다웅하는 둘에게 진행교사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들아, 이야기는 내려와서 해라.”
“아, 넵. 죄송합니데이~.”
“죄송합니다…….”
둘은 같은 계단으로 후다닥 경기장을 내려왔다.
281. 함정
“아이씨…….”
태화는 눈앞의 상대를 보고 진땀을 흘렸다.
“왜 또 나야…….”
“아으.”
다혜가 눈을 반짝이며 검을 들어 올렸다.
칼날에 붉은 강기가 피어오름과 동시에 경기장에 결계가 올라왔다. 결계가 오르기 직전, 그 너머에서 경기장 바로 옆까지 다가온 민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화 잘해.”
약간의 마나가 몸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목걸이가 걸려 있음에도, 민정이 따로 추가한 보호 마법. 태화는 그 마법의 존재를 느끼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래야 할 정도로 실력 차이가 났다.
‘대진운 드럽게 없네. X팔…….’
다혜의 발이 땅을 박찼다.
태화는 곧바로 순간이동으로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자 다혜는 달리면서 몸을 앞으로 기울인 상태로 180도 몸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더니, 뒤로 공중제비를 넘어 벽을 차고 뛰어올라 순식간에 태화에게 달려들었다.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유연함의 문제도 아니다.
그냥 사람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윽……!”
태화는 짧게 순간이동을 했다. 바로 옆으로. 그러자 다혜의 검이 태화가 원래 있던 자리를 가르나 싶더니.
검로를 직각으로 틀어서 태화를 쫓아왔다.
‘켁!’
태화는 작고 까만 보호막을 만들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
꽃잎처럼 작은 보호막들이 검에 달라붙어 속도를 감속시키고, 옆면을 밀어 궤도를 바꿨다. 거기에 더해서 수십, 수백 겹의 보호막이 칼날에 부딪히며 공격을 막았다.
그 틈을 타 순간이동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으아으~.”
다혜가 멀리 허공에 나타난 태화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 웃음이 태화에게는 비웃음으로 보였다.
말을 못 하는 게 사람 속은 더 잘 긁는다. 태화는 눈을 부릅뜨고 온몸에 검은 화염을 둘렀다.
“웃어?”
“므아?”
“내가 웃겨? 앙?”
“우웅…….”
다혜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혜는 곧 빙긋 웃고는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달려들었다. 칼날을 시퍼렇게 번득이면서.
태화는 다혜를 향해 온몸의 불꽃을 내뿜었다.
푸화아악
액체라도 되는 것처럼 눅진하고 농밀한 불꽃이 공간을 잠식해 들어갔다. 바닥을, 그리고 공중을.
다혜는 그 불꽃을 피하지 않고 호신강기를 둘렀다.
화르륵……
검은 불꽃이 태화의 모습을 감췄다.
순간이동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다혜는 내려치려던 검을 거두고 감각에 집중했다. 사방이 불꽃이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바람, 소리, 그리고 마나.
다혜의 검이 불꽃 속 어딘가를 찔렀다.
“윽!”
그 속에서 당황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제대로 타격이 들어가진 않았는지, 검에는 긁히는 감각만 느껴질 뿐 무언가를 밀어내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다혜는 검을 거두고 다시 주변에 집중했다.
인기척. 혹은 인공적인 마나의 흐름을 찾아서.
따닥……
무언가 딱딱한 것이 부딪히는 소리.
이건 속임수.
후웅……
불순한 마나의 움직임.
다혜는 그 움직임을 느끼는 즉시 그곳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것이 사람이든, 마법이든, 베어 버릴 요량으로.
퍽……
그 마나는 싱겁게 터져 버렸다. 작은 물풍선을 터트리듯이.
그런데 주변의 불꽃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아으?”
다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불꽃은 사그라든 게 아니라 한 점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다혜의 가슴팍 앞으로. 다혜는 불길하게 소용돌이치는 화염을 보고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 검은 화염을 흡수하는 점은 정확히 같은 거리를 움직여 따라왔다.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어진 것처럼.
“므아……!”
“비기.”
뒤에서 태화의 속삭임이 들렸다.
“오르판 파이어!”
주문이 끝나기도 전에 점이 한 번 꿈틀이더니, 극한의 극한으로 응축된 마나가 일시에 터져 나왔다.
꽈아아앙
* * *
“어이쿠…….”
건흠은 경기장을 올려다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학생 수준의 마법이 아니었다. 악마 융합체가 마법에 능통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다만 그 상대도 학생 수준이 아니긴 했다.
사아악……
흑연이 사라지고 경기장 위의 상황이 드러났다.
“쿨럭, 케흑…….”
바닥에 쓰러진 다혜가 기침을 했다.
반면에 태화는 멀쩡한 모습으로 다혜 앞에 서 있었다. 검고 매끈한 꼬리를 살랑이면서.
진행교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태화, 승.”
“훗.”
태화는 손에 묻은 불꽃을 털어내고 경기장 아래로 내려섰다.
태화가 다가오자 건흠의 옆쪽에 서 있던 민정이 씩 웃었다.
“잘 따라하네.”
“훗. 당연하죠.”
태화는 어깨를 으쓱여 우쭐대고는, 주변을 쓱 둘러보더니 촐싹대며 어딘가로 달려갔다.
“천~세~희~ X빱앙~. 어딨징?”
건흠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아직 경기장 위에 쓰러져 있는 다혜를 돌아보았다.
다혜가 고개를 살짝 돌려 건흠과 눈을 마주쳤다.
“……아으.”
죄송하다는 듯한 투였다.
건흠은 그냥 말없이 웃었다. 다혜가 경기장에서 내려와 다가올 때까지.
그리고 거칠거칠한 손으로 다혜의 등을 토닥였다.
“방심했어?”
“아으.”
“괜찮다. 다음에 잘하면 돼.”
“아으웅.”
다혜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인 채로 건흠의 손을 두어 번 조물거리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어딘가로 달려갔다. 태화가 세희의 앞에서 깐죽거리고 있는 방향이었다.
“천세희가 X발리는 벙어리 언니~, 내 마법 한방에~ 뚝배기 깨졌…… 뭐, 뭐야!”
“므아아앙!”
다혜가 세희의 품으로 달려들어 눈물을 펑펑 흘렸다.
“아으, 아으아으, 느아아…….”
“방심하다가 졌다구요?”
“므아응, 므앙…….”
“저랑 못 놀아줘서 미안하다구요?”
“느아앙…….”
세희는 눈을 끔뻑이며 다혜의 등을 토닥였고, 그런 세희의 옆에서는 태화가 심통이 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이고 있었다.
건흠은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민정을 흘끗했다.
‘X급…….’
저번 평가까지는 다혜가 압도적이었는데.
‘X급은 가르치는 것도 X급인가.’
하긴 경험의 수준이 다르니. 요령이 아주 없는 게 아니고서야 하급의 헌터들보다는 훨씬 잘 가르칠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혜를 그가 데리고 있는 게 옳을까.
더 올라갈 수 있는 아이를 붙잡고 있는 건 아닐까.
‘……아직 잘 모르겠군.’
해가 중천인데도, 가을바람이 유난히 차게 느껴졌다.
* * *
“저 언니 엄청 강한 언니 아니에요?”
미래가 망원경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태화 언니가 더 강한 거예요?”
“글쎄. 다혜가 좀 방심한 것 같기도……. 하지만 방심하지 않는 것도 실력이니까.”
상호는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태화가 이긴 건 기쁘지만, 다혜와 세희의 시합을 볼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쉬웠다.
1학년 경기장에서는 64강전이 계속 진행 중이었다. 하솔의 경기장 앞을 알짱거리는 해련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옆의 경기장에서는.
“끼이잉……!”
단비가 네 발로 달리고 있었다. 쏟아지는 불덩이 마법을 피해서.
미래는 그 꼴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단비는 가끔 보면 개 융합체가 아닌 것 같아요.”
“응? 그러면?”
“개한테 사람이 융합된 게 아닌가…….”
“…….”
불가능한 일이다. 융합체란 것은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의 존재가 겹치는 것인데, 저쪽 세상에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상호는 쓰게 웃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건 알지?”
“농담이에요.”
미래도 진지하게 말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앗, 단비 졌어요.”
“그러게. 하솔이는 이겼네.”
조용히 경기장에서 내려오는 하솔. 뭔가 신난 듯이 어깨를 으쓱이는 해련. 상호는 그들을 내려다보다가 2학년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경기장에 익숙한 모습의 두 아이가 올라서고 있었다.
* * *
“64명 중에 하필 우리끼리 붙다니.”
이츠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칼에 붙은 부적을 한 장 떼었다.
“나도 모르게 주술을 썼나 봅니다.”
“네?”
나디아가 눈을 깜작였다.
그럴듯한 대답이 돌아오기를 바라진 않았다. 이츠키는 부적을 팔랑거리며 나디아에게로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둘 다 아직 경공은 쓰지 않았다.
‘성력…….’
이츠키의 눈이 나디아의 검을 향했다.
서양식 양손검. 작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크다. 몇 번 맞붙어 본 바로는, 검술의 실력은 평범한 수준.
그러나 이츠키 자신도 검술로는 썩 훌륭하지 못했다.
요는 성력과 주술의 싸움.
‘일단은 탐색을…….’
이츠키는 손가락을 튕겨 부적을 날렸다.
담긴 것은 약한 저주. 하지만 맞으면 전투를 하기는 곤란해진다. 다만 날아가는 속도가 워낙 느려서, 평범한 사람도 피할 수 있었지만.
다행히 나디아는 다른 아이들만큼 빠르진 않았다.
“읏!”
나디아는 성력을 두른 검을 휘둘러 아슬아슬하게 부적을 쳐냈다. 첫 본선 경기라 그런지 동작이 빠릿빠릿하게 날이 서 있었다.
부적이 바닥에 하늘하늘 떨어졌다. 빨간 글씨가 쓰인 노란 부적. 이츠키는 나디아 모르게 그 부적을 흘끗했다.
그렇게 위치를 외웠다.
‘대인지뢰지.’
신발로 밟기만 해도 위력은 발휘된다. 물론 그 사실은 나디아도 알고 있을 터.
그래서 이츠키는 공방을 이어가려는 척 달려들다가.
검을 떨어뜨렸다.
“어?”
나디아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츠키는 양 소매에 숨겨둔 부적을 꺼내 나디아에게 휘둘렀다. 양손으로. 나디아의 검을 몸을 비틀어 피해내며.
“큭……!”
당황한 나디아는 검을 놓고 손에 성력을 둘러 부적들을 잡아채려 했다.
하지만 그 부적들도 이츠키의 속셈은 아니었다.
퍼억
이츠키의 다리가 나디아의 발을 걸었다.
“어?”
나디아가 넘어졌다.
이츠키가 처음에 던졌던 부적 위로.
‘이거야.’
이츠키는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나디아의 검을 집어 들었다. 나디아는 현기증이 나는 저주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츠키가 나디아를 향해 검을 들어 올리는 순간.
번쩍……
밝은 빛이 이츠키의 눈을 덮쳤다.
“……크흡!”
난데없는 공격에 이츠키는 눈을 가리고 비틀거렸다.
빨리 시야를 되찾아야 한다. 처음 던진 부적은 적용 시간이 길지 않았다. 시간을 끌면 역공당한다.
그런데 섬광탄을 맞은 것처럼, 시야가 돌아오질 않았다.
“으……!”
“흐읍!”
밝은 빛 속에서 나디아의 기합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충격이 이마를 때리고.
“끄응…….”
이츠키는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 * *
“어…….”
혜소는 쓰러지는 이츠키를 보며 안절부절못해했다. 구경해보고 싶어서 살짝 와봤더니 자신 때문에 이츠키가 당할 줄이야.
‘어떡하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일단은 더 방해가 되지 않게 숨어야겠다. 혜소는 진땀을 흘리며 돌아서서 상호의 방을 향해 도망쳤다.
나중에 꼭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 *
‘아이고…….’
상호는 별관 쪽에서 남교사 숙소 쪽으로 가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진땀을 흘렸다. 아이는 짧은 다리를 바쁘게 놀리며 되똥되똥 도망치는 중이었다.
경기장에서는 잠시 시력을 잃은 이츠키가 나디아의 부축을 받아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혜소야…….’
결계가 쳐져 있는데도 주술의 빛은 보이는 모양이었다.
나디아는 졸지에 32강까지 가게 되었다. 사실상 진 것이나 다름없었는데도. 그렇지만 운 또한 전투의 일부이니, 상호는 구태여 승패를 바로잡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참…… 이츠키는 좀 억울하겠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이츠키였지만, 패자조로 향하는 걸음은 망연자실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덧 64강도 다 끝났다. 2학년에서 살아남은 아이는 지윤, 태화, 나디아, 세희, 은율.
나빛은 지윤에게 졌고, 이츠키는 나디아에게 졌다.
1학년에서 살아남은 아이는 이서, 하솔, 가은.
미래는 옆에 있고, 아리는 이서에게 졌고. 초란과 단비는 다른 반 아이들에게 졌다.
‘나쁘지 않네.’
아마 이번에도 반평균 1등은 유지될 것이다. 다혜가 떨어졌으니 2학년 우승도 그의 반 아이가 할 확률이 높았고.
다만, 그가 지금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아이들의 성적이나 반 성적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세희를 향했다.
세희는 32강 상대로 만난 학생을 목검으로 두들기고 있었다.
‘네가 얼마나 배우는지…….’
얼마나 많은 전투를 보고 느끼는지.
그게 그에겐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생사경엔 비할 바 못 되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공부해 봐.’
그는 경기장에서 내려가는 세희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조금 돌려 1학년 경기장을 흘끗했다.
32강.
가은과 하솔이 경기장에 오르고 있었다.
282. 무사기
“설하솔.”
진행교사가 헛기침을 했다.
교장의 손녀라는 걸 아는 걸까. 하솔은 뺨을 바닥에 붙인 채로 생각했다.
“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