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0화 (290/501)

* * *

“야.”

“뭐.”

“몇판째야?”

“6.”

“몇승?”

“6.”

세희는 목검을 어깨에 걸치고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런 세희의 옆에서는 태화가 꼬리를 신경질적으로 휘두르고 있었다.

“너 내공은 반납했냐?”

“당연하지.”

“우씨…….”

“한판 졌구만?”

“……흥.”

태화는 콧방귀를 뀌고 세희에게서 멀어졌다. 세희는 그 뒷모습을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니가 물어보는 거야 뻔하지 뭐…….’

경기장 위에서는 은율이 다른 반 학생에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상대 학생이 쓰러지자 주변에서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은율이 강쌤 반이지?”

“응. 반장이래.”

“반장이면 쌤이랑 개인수업도 하고 그러나? 와, 개부러워…….”

“그건 다른 애 아냐?”

은율을 향했던 시선들이 세희에게로 쏟아졌다. 세희는 애써 그 시선들을 무시하며 경기장만 올려다보았다.

“저깄네.”

“엄청 맞던데. 그만큼 센가?”

“쟤가 걔잖아. 작년에 은율이 이기고 1등한 애. 언제였지?”

“올해도 결승 올라갔잖아. 그 유급한 언니 상대로.”

경기장에서는 다음 차례로 태화가 올라서고 있었다.

“쟤 티비에 나온 걔지?”

“응. 강쌤이 목숨 걸고 살렸다던데.”

“아, 나도 1학년 때 강쌤 반 들어갔어야 하는데…….”

“지윤이는 어떻게 알고 갔대? 에휴…….”

태화의 반대편에서도 상대가 올라왔다. 회색 머리, 회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

나빛을 본 학생들이 또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쟤 임신하지 않았어?”

“상상임신이라던데?”

“상상임신을 그냥 혼자서도 할 수 있어? 뭐라도 한 거 아냐?”

“그러게. 쟤 강쌤이랑 자주 붙어 다니던데, 설마…….”

세희는 일부러 크게 쯧 소리를 냈다.

근거 없는 뜬소문. 선생님이 나빛을 건드렸을 리 없다. 나빛의 임신도 성력 때문이었고.

그런데 방금 들은 소리가 조금 마음에 걸렸다.

‘……이유가 없지는 않을 텐데.’

만약 성력 때문에 임신한 게 아니라, 상상임신에 성력이 영향을 미친 거라면.

그 상상임신은 왜 했을까.

그런 의문이 세희의 마음속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큰사부님.’

‘응?’

예경의 생각이 고개를 빼꼼 들었다.

‘왜, 세희야?’

‘선생님이랑 나빛이랑 잔 적 있어요?’

‘……으흠, 글……쎄? 잘 모르겠네.’

그 어물쩍거리는 반응으로 세희는 진실을 알 수 있었다.

‘큰사부님.’

‘응.’

‘제가 언젠가 선생님을 이기는 날이 올까요?’

‘그럼.’

예경이 웃었다.

‘계속 나아간다면 언젠가는 가능하겠지.’

‘그렇죠?’

세희의 눈빛에 한기가 깃들었다.

그날이 오면 알맞은 처벌을 내리리라. 그동안 길러 준 은혜의 보답도 겸해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세희는 그렇게 다짐하며 고개를 들었다. 경기장에서는 나빛이 태화를 수십 개의 황금색 각목으로 후려패고 있었다.

“태화 나빠!”

“왜 또 X랄이야, 악!”

“태화는 그냥 나빠!”

“니가 더 쓰레기야, 이 내숭만 오지는 개년아! 아 씨, 항복! 항복! 니 이긴 걸로 해. 망할년…….”

판정이 내려지자 태화가 경기장에서 내려왔다. 발을 마구 굴러 짜증을 내면서.

세희는 태화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속삭였다.

“약하네.”

“X까.”

태화는 세희를 흘겨보며 중얼거렸다.

“비기는 비밀이니까 비기인 거야.”

“비기가 있긴 있어?”

“두고 봐.”

그 말을 끝으로 태화는 멀리 걸어갔다. 애꿎은 돌부리를 걷어차면서. 2패를 적립한 게 많이 분한 모양이었다.

세희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목검으로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자신이 올라갈 차례.

‘세희 잘해~.’

‘네.’

세희는 예경의 응원을 받으며 경기장으로 올라갔다.

280. 시합 속의 아이들

“6승! 6승! 멍! 멍!”

단비가 눈을 반짝이며 꼬리를 마구 흔들었다. 복슬복슬한 갈색 털이 허공에 마구 뿜어져 나왔다.

“본선! 본선 갈 수 있어요?!”

“글쎄, 운이 조금 필요할 것 같아.”

“멍…….”

“그래도 잘했어.”

“멍!”

상호는 쓴웃음을 짓고 숟가락을 들었다. 그 위에 묻은 단비의 털을 털어내면서.

오전 예선이 끝나고 점심시간. 식탁에는 그의 반 아이들이 2열로 앉아 있었다. 상호의 옆에는 2학년, 앞줄에는 1학년.

가은은 제일 먼 곳에 앉아 있었다.

상호는 그 모습을 곁눈질로 살피며 생각했다.

‘혼내야 할 텐데.’

일부러 졌다. 초란과 단비에게. 그 사실을 상호도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 범인이 범인인지라 혼내기가 껄끄러웠다.

‘시험 끝나면 말해야겠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밥을 먹으려는데, 숟가락 주변에 혁구가 얼쩡거렸다.

상호는 검지로 혁구의 이마를 쓰다듬고 숟가락을 들었다.

“쌤.”

별안간 태화가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쌤. 쌤.”

“왜.”

“랍스타. 안 까먹었지?”

“연말에 사준다고 하지 않았냐?”

“아니야. 이번이야. 10등 안에 들면 꼭 사주기야.”

“안에만 들면 얼마든지 사줄게. 그래서 너 예선은 몇 승이야?”

그 말에 태화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8.”

“10등 못하겠는데?”

“우씨, 두고 봐. 한 달 내내 랍스타만 먹어서 쌤 통장 비워버릴 거야.”

“해 봐.”

상호는 피식 웃고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너희는 어떻게 됐어? 예선?”

“10승이요!”

“10승입니더.”

“지윤이는 이번이 처음이지? 10승?”

“진작 가능했지예. 야덜만 안 만났으믄…….”

지윤이 2학년 아이들을 눈짓하며 말을 흐렸다.

지윤도 충분히 상위권에 들 실력이 있었지만,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다 괴물들이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운이 좋나 봅니더. 이대로믄 8강까진 갈 것 같아예.”

“그래. 열심히 해 봐. 은율이랑 사카시타랑…… 나디아는?”

“10승이요.”

“9승입니다.”

“빠르.”

나디아가 손가락 일곱 개를 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나빛이 따라서 손가락 일곱 개를 폈다.

“나디아, 이거는 칠이야. 칠.”

“찌르?”

“칠, 칠.”

상호는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네.”

다들 성적이 좋아졌다. 나디아도 본선 턱걸이 정도는 하게 되었고.

제일 중요한 아이는 따로 있었지만.

그 아이의 성적은 궁금하지 않았다.

“세희도 별일 없었지?”

“네.”

세희는 짧게 대답하고 묵묵히 식사를 계속했다.

아마 본인의 눈에도 슬슬 보일 터였다. 상호는 세희가 나름의 깨달음을 얻었길 바라며 숟가락을 들었다.

그런데 밥 위에 혁구가 앉아 있었다.

“혁구야, 나 밥 먹어야 돼…….”

“뺙.”

“나빛아, 혁구 좀 데려가 줄래?”

“네. 꾸꾸야!”

나빛이 혁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혁구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상호의 밥을 점거했다. 그 모습을 본 나빛이 눈을 반짝였다.

“사춘기인가 봐요!”

“낳은 지 얼마나 됐다고…….”

상호는 당황하며 혁구를 살살 밀어냈지만, 혁구는 뽀송뽀송한 엉덩이로 상호의 손을 밀쳐내며 밥 위에 눌러앉았다.

태화가 혁구를 내려다보며 눈을 끔뻑였다.

“반찬이 되고 싶다는 건가?”

“얌마. 음식 취급하지 마.”

상호는 혀를 찼다.

그때 앞에서 보고 있던 단비가 음식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선생님한테 관심을 받고 싶은가 봐요.”

“관심?”

“네. 그런 것 같은데요. 멍.”

동물끼린 뭔가 통하는 게 있나. 상호는 혁구를 피해 밥을 퍼서 식사를 했다.

그러자 혁구가 날개를 펴 밥을 온통 덮어 버렸다.

‘얘가 왜 이래…….’

꼭 아이들이 심통을 부리는 모습과 닮았다. 그렇지만 혁구에겐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상호는 한숨을 푹 쉬며 혁구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밥 좀 먹자, 혁구야…….”

“뺙─ 뺙─.”

파닥이는 날개와 다리가 장난치는 아이들을 퍽 닮아 있었다.

* * *

2학년은 전원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7승을 한 나디아까지.

1학년도 대부분 본선에 진출했다. 딱 한 명만 빼고.

상호는 옆에 앉은 미래를 돌아보았다.

“몇승이랬지?”

“6승이요.”

미래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미래는 6승. 단비도 6승. 하지만 단비의 상대들이 더 승수가 높았기에 단비만 본선에 올라갔다. 그래서 단비는 경기장 앞의 줄에서 신나게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상호는 아까 봐두었던 미래의 시합을 떠올렸다.

“뭐가 부족했던 것 같아?”

“화력이요.”

“그거 말고는?”

“더 큰 화력이요.”

“화력 말고…….”

미래의 시선이 자신의 몸을 향했다.

“제가 너무 느려요.”

머리에 프로펠러도 달고, 손과 발에 부스터도 달았지만, 그래도 마법사들의 순간이동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녀는 마법사가 아닌 마법공학자였기에.

그래도 평가 성적에는 연연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에…… 순간이동을 하는 몬스터를 만난다면, 어떻게 대처할 거야?”

“순간이동…….”

미래가 눈을 반짝였다.

“유도탄을 개발할 거예요!”

“……그래. 정답은 하나가 아니니까. 적절한지 아닌지는 만들어 봐야 알겠지. 그치?”

“네.”

둘은 운동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전보다 사람이 확 줄어든 64강전. 본선에 나가지 못한 아이들은 스탠드와 경기장 주변에 서서 시합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 경기장들 중 하나에 아리와 이서가 올라섰다.

“벌써 우리반끼리 붙었네요.”

미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째 옆이 허전했다. 미래는 의아한 눈으로 옆을 돌아보았다가 상호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어디 가셨지?’

깜짝 놀라 토끼눈으로 주변을 살피는데, 별안간 바람이 한 차례 불더니 상호가 제자리에 다시 나타났다.

상호는 눈을 끔뻑이는 미래를 바라보며 멋쩍게 웃었다.

“혹시 무슨 말 했어?”

“벌써 우리반끼리 붙었다고…… 근데 어디 갔다 오셨어요?”

“언니들 시합 좀 보느라. 보자……. 아, 이서랑 아리가 붙었구나.”

“누가 이길 것 같으세요?”

“글쎄. 지난번 성적대로면 이서가 이기겠지. 아, 맞다. 미래야. 선생님이랑 같이 하늘에서 볼래?”

“하늘에서요?”

“응. 위에서 보면 언니들 시합까지 같이 볼 수 있으니까. 너도 날아다닐 수 있잖아.”

“좋아요. 가요.”

미래는 품에서 프로펠러 모자를 꺼냈다.

* * *

“…….”

“…….”

아리와 이서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 다 과묵한 타입. 그래서 서로 이야기한 적이 별로 없었다. 말수 없는 건 비슷해도 사귀는 친구는 또 달라서, 아리는 하솔, 초란과 친했고 이서는 그나마 가은, 그리고 2학년들과 친했다.

그래서 이야기를 했더라도 한 번, 혹은 두 번.

아니, 사실은 이야기한 적이 있긴 한지도 의문이었다.

‘싸워본 적은 많지만.’

이서는 말없이 검을 뽑아 아리를 겨눴다. 세로로 기다란 노란색 뱀눈을 마주하며.

그때 아리가 먼저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뻔하지.’

익숙한 패턴이다. 이서는 당황하지 않고 아리를 향해 마주 뛰었다.

어차피 근거리에선 무예가가 유리하고.

아리의 속임수도 다 꿰뚫고 있었기에.

팟……

아리가 푸른 스파크를 남기고 사라졌다.

나타난 곳은 이서의 등 뒤. 이서는 눈으로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인기척으로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달리던 속도 그대로 앞구르기를 했다.

빠지지직

저릿한 감각이 이서의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푸른빛을 번쩍이면서.

확인할 시간은 없었다.

‘쓸데없는 것에 신경쓰면…….’

뒈지게 맞는다. 은율과 세희에게 강제로 주입당한 가르침.

이서는 자세를 바로잡고 곧바로 아리에게 돌진했다.

또 순간이동. 하지만 이것도 은율과 세희에게 배웠다.

인간을 상대하는 인간의 심리를.

‘바로 공격하겠지.’

공격해서, 반응시키고, 그 시간 동안 정비해서 다음 행동을 이어간다. 그게 순간이동을 쓰는 마법사의 행동 패턴.

그 패턴을 깨부수려면.

‘반응을 최소화시켜서…….’

조금씩 시간을 번다.

피부에 저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전기 마법의 전조. 이서는 몸을 슬쩍 비틀어 그 저릿한 감각의 궤적에서 벗어났다.

푸른 번개가 이서의 옆을 때렸다.

꽈앙

“……큭.”

팽창한 공기를 통해 약간의 충격이 느껴졌다.

어쨌든 피했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그렇게 얻어낸 보상. 아주 찰나의 순간. 0.1초도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이서는 공중에 뜬 아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리가 당황하며 순간이동을 쓰려 했지만.

퍼억

이서가 번개를 피하고 달려든 것이 너무 한순간이라, 아리는 연속으로 순간이동을 하지 못하고 칼을 맞았다.

“윽…….”

아리는 명치를 누른 검을 내려다보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쿠웅……

작은 흙먼지가 일고.

“권이서. 승.”

판정이 내려졌다.

* * *

“생각보다 열심히 하네요.”

미래는 망원경을 내리고 상호를 돌아보았다. 상호는 2학년 경기장 쪽에 한눈을 팔고 있었다.

“선생님?”

“응? 아, 응.”

“이서 경기 보셨어요?”

“봤지.”

대답하는 와중에도 상호의 눈동자는 바쁘게 운동장들을 오가고 있었다.

미래는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이서는 평소에는 엄청 게으른 것 같은데. 평가 때는 진지하네요.”

“그러게. 나도 신기해.”

이서가 은율과 세희에게 모종의 정신개조를 당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상호는 그 사실을 미래에게는 알려주지 않기로 했다.

그때 미래가 아래를 가리켰다.

“다음은 하솔인가 봐요. 아, 단비도 있네.”

“그래?”

하지만 상호는 미래가 가리킨 곳을 잠깐 흘끗할 뿐, 곧 빠르게 2학년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려놓았다.

미래는 그 모습을 보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저희 경기는 안 보실 거예요?”

“아니, 그게…….”

상호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 나빛이랑 지윤이랑 시합 중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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