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피이이이~.”
태화가 비틀거리다가 침대에 널브러졌다.
“곤해애애애…….”
“하루종일 놀기만 했잖아.”
“노는 게 더 힘드렁…….”
“피곤하면 먼저 씻어.”
“쫌만 쉴래…….”
“그러다가 또 잔다, 임마.”
상호는 혀를 차고 세희와 이츠키를 돌아보았다.
“먼저 씻어.”
“네.”
이츠키가 고개를 끄덕이고 가방에서 옷을 챙겼다.
상호도 씻고 잘 준비를 하려는데,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한 차례 진동했다. 꺼내 보니 지윤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사진 한 장.
지윤 일가가 둘러앉아서 상호가 사준 과일을 먹는 모습이었다.
-잘 묵고 있습니데이~
-지금 머하고 계십니꺼?
상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사실을 전하기로 했다.
-놀러왔다가 숙소에서 쉬고 있어
-누구랑예?
-세희랑 태화랑 이츠키랑 혜소랑
-머하고 놀았는데예?
다 함께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올렸더니, 한참 후에야 답장이 돌아왔다.
-쌤예~
-응
-각오하이소~
-왜...?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걱정에 잠긴 상호의 옆으로 혜소가 아장아장 걸어왔다.
혜소는 상호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눈을 깜작였다.
“아저씨.”
“응?”
“추석엔 원래 가족이 다 모이는 거예요?”
“보통 그렇지.”
그 말에 혜소는 하염없이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 속에 띄워진 지윤의 가족사진을.
상호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혜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모였잖아. 가족끼리.”
“……그러네요.”
혜소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사진을 가리켰다.
“이 애는 누구예요?”
“지영이. 너보다 한두 살 어려.”
“엄청 아가 같은데요.”
“너도 아가야…….”
그때 태화가 벌떡 일어나서 둘 사이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뭐가, 뭐가? 이게 뭔데?”
“지윤이 동생.”
“에이, 뭐야. 쌤보다 안 귀여워.”
“얌마…….”
상호의 옆으로도 세희가 다가왔다.
“다 지윤이 동생이에요? 네 명 다?”
“응. 지영이 지성이 지예 지훈이…….”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뭘?”
어느새 다 씻고 나온 이츠키도 상호의 머리 위로 끼어들었다.
“두 명은 제가 도와주겠습니다.”
“뭘 도와……!”
“서로 돕고 사는 겁니다. 이양도 하나쯤은 맡는 겁니다.”
“뭐래, 난 작년부터 여섯 명 찜해놨어. 딸 셋 아들 셋.”
그 말에 혜소가 슬금슬금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미진과 똑같은 표정으로.
상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혜소를 불렀다.
“혜소야……?”
“저는 가족 아닌 것 같아요.”
“아니, 오해야……. 그리고 우리는 이미 같이 지내는 가족이잖아…….”
“가족 아니에요. 안 할래요.”
“오해라고…….”
“오예겠지.”
태화가 상호를 안아 들었다.
“가자~, 눈나랑 씻으러 가자~.”
“야, 안 내려놔!”
“가족인데 뭐 어때~.”
“세희야, 세희야! 도와줘…….”
“나도 들어갈래.”
“세희야……!”
“은호 누나들이랑 씻자~.”
“혜소야, 도와줘…….”
“누구세요?”
“사카시타……!”
“앞이 안 보입니다.”
“으아아악!”
상호, 아니 은호는 처절한 비명과 함께 욕실로 끌려들어가고 말았다.
278. 중간평가 대비
연휴의 마지막 날에는 무사히 어른으로 돌아왔고, 학교에도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좁은 침대에서 어른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옆에서 곤히 자던 아이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상호는 현관문을 열고 혜소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다녀왔……?”
“쿠우울…….”
방바닥에 효은이 뻗어 있었다.
또 거하게 퍼마셨는지 술병 여럿이 바닥에 굴러다녔다. 개중 하나는 봉진이 상호에게 선물로 주었던 물건이었다.
상호는 효은을 안아 들고 한숨을 푹 쉬었다.
“후우…….”
“으으응, 찌바러마아…….”
“혜소야, 너는 술 같은 거 마시지 마라…….”
“아저씨도 술 먹고 길바닥에서 잔 적 있다면서요.”
“……그러니까 마시지 말아.”
널브러진 술병들이 저 혼자 가지런하게 정렬되었다.
연휴 내내 마셨을까. 효은의 입에서는 아직도 술 냄새가 났다. 상호는 효은을 침대에 눕히고 주방을 향해 돌아섰다.
해장국을 끓여 놔야 할 것 같았다.
* * *
“언제 왔냐?”
효은이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온 줄도 몰랐네. 애들은 잘 왔어?”
“어.”
“근데 너 혹시 나한테 전화한 적 있었냐? 왜 그런 것 같은 기억이 있지?”
“몰라.”
상호는 넥타이를 매며 혀를 쯧 찼다.
“술 좀 그만 마셔. 혜소가 보고 배우겠다.”
“참나, 내가 애 앞에서 마시는 거 본 적 있냐?”
“눈앞이 아니라도 다 보고 배우지. 해장국 끓여 놨으니까 먹어.”
“출근하냐?”
“응.”
효은이 손을 흔들었다.
“잘 갔다 와.”
“응.”
상호는 검을 차고 방을 나섰다.
* * *
“쪼아!”
“뺙!”
“아이씨, 왜 또 X랄이야!”
태화는 혁구의 부리를 피해 모서리로 도망쳤다. 나빛은 그런 태화를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네가 선생님이랑 추석에 신나게 놀았다는 첩보를 입수했어.”
“첩보? 첩자가 있다고? 누군데!”
“그건 비밀이야! 그치, 지윤아~.”
“너였냐!”
“흥.”
지윤은 팔짱을 끼고 콧방귀를 뀌었다.
혁구가 태화의 어깨에 앉아 딱따구리처럼 목을 쪼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부리는 뾰족한데 피는 나지 않을 정도로 조절을 하고 있었다.
“뺙.”
“아오, 안 꺼져!”
“뺙!”
참다못한 태화는 세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강혁구! 쪼아!”
“뺙?”
혁구는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는 포르르 날아오르는 듯하더니, 이번엔 태화의 반대쪽 어깨에 앉아 다시 목을 쪼기 시작했다.
“악! 왜 내 말은 안 듣는데에에!”
“내가 엄마니까~.”
“그럼 쟤들은 왜 안 쪼는데! 쟤들도 같이 갔는데!”
“넌 너무 많이 갔어~.”
그때 교실 문이 열리고 상호가 들어왔다. 상호는 혁구에게 쪼이고 있는 태화를 발견하고는 눈을 끔뻑였다.
“뭐해?”
“보면 몰라? 도와조! 내가 아픈 게 제일 싫다매! 악!”
“혁구가 너 좋아하나 보다.”
“헛소리하지 말고오오!”
잘 모르겠지만 뭔가 잘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여기고 조례를 위해 교탁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나빛이 검지로 그를 가리켰다.
“쪼아!”
“……응?”
어안이 벙벙한 상호에게 혁구가 날아들었다.
혁구는 상호의 머리 주변을 빙글빙글 날아다니며 머리를 콕콕 찔러댔다. 그 타이밍과 위치가 너무도 절묘해서 상호도 제대로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아야, 아야야! 나빛아, 왜……?”
“간음한 자를 죽이리이다…….”
“안 했어……!”
상호는 한숨을 쉬고 강기로 새장을 만들어 혁구를 가뒀다.
“조례나 빨리 할게. 연휴 잘 쉬고 왔지?”
“네.”
“평가 일주일 남았네.”
“네.”
“아무리 부모님이 돈을 내준다 해도…… 10등 안에 들어서 장학금 따면 좋아하실 거 아냐. 그치?”
“네.”
“그러려면 이번 중간평가에서 실력을 확인해야겠지?”
“네.”
혁구가 담긴 새장이 둥실 날아 나빛에게 날아갔다.
새장이 허공에 녹아들자 혁구가 폴짝 뛰어 나빛의 정수리에 자리를 잡았다. 상호는 거둬들인 내공을 갈무리하고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평가 때까지는 다 같이 수업할 거야. 세희만 따로가 아니라……. 그러니까 평소에 궁금한 거 있었으면 이번에 물어봐.”
“네~.”
“갈아입고 나와. 기다릴게.”
“네~.”
그와 아이들은 각자 수업 준비를 했다.
* * *
[선생님~!]
“응?”
상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콰아아앙
그가 서 있던 스탠드에 거대한 강철 주먹이 내리꽂혔다.
[제 배틀슈트 좀 봐주세요! ……어라?]
막을 줄 알았는데 설마 못 막았나. 미래는 당황하며 주먹을 들어 아래를 확인했다.
부서진 콘크리트 파편밖에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위험하잖아.”
전혀 놀라지 않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앗! 역시 X급!]
“다른 사람한텐 이러면 안 돼. 알지?”
[당연하죠! 선생님한테만 이러는 거라구요.]
로봇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자신만만한 포즈를 취했다.
[성능 한번 확인해 주세요!]
“그건 평가엔 쓰지 말라고 했잖아.”
[평가엔 안 써요.]
“그러면 그냥 중간평가랑 상관없이?”
[네. 전 이게 더 중요해요. 어차피 학비는 제가 내고 있으니까.]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땅으로 훌쩍 내려섰다.
“움직임은 좀 빨라졌네.”
[돈 좀 발랐죠. 히히.]
“그래도 마나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말짱 황이야. 그쪽도 개조했어?”
[네!]
로봇의 몸체에서 기계음이 울렸다. 무언가가 윙윙 돌아가는 소리.
그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로봇의 주먹이 마나에 휩싸였다.
[신개념 마법진 드라이브예요! 원통 여러 개에 마법진을 파편화시켜서…….]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저번보단 훨씬 좋네.”
지난번엔 2학년을 상대로는 쪽도 못 쓸 성능이었는데. 이제는 제법 아이들과 맞상대를 해볼 법했다.
상호는 검에 강기를 둘렀다. 학생 수준으로 가볍게.
“한번 보자.”
그의 몸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미래는 화면에 뜬 문구를 읽었다. 옆구리에 무언가가 다가왔다는 내용의 경고.
로봇이 팔을 크게 휘둘렀다.
“구조적으로 느릴 수밖에 없어.”
상호는 주먹을 피하며 로봇의 옆구리에 칼을 휘둘렀다.
“카메라의 성능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조종사가 그걸 인지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니까. 헌터의 눈보다 느릴 수밖에 없…… 응?”
타타탕
로봇의 골반과 허벅지 사이 연결부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비살상용 고무탄. 한 발이 아니었다. 상호는 세 발의 총알을 엄지와 검지, 검지와 중지, 중지와 약지로 잡아냈다.
입가에 웃음기가 살짝 비쳤다.
“제법 날카로웠어.”
[진짜요?!]
“하지만 같은 상대한테 두 번 통하진 않을 것 같네.”
[괜찮아요! 목표는 일격필살이니까. 실전에서는 마나폭약이 내장된 총알을 쓸 거라구요. 지금 선생님처럼 잡고 있어도 터지게.]
“나쁘지 않네. 위력을 봐야겠지만.”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로봇의 팔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앗! 언제!]
“그래서 느리다는 거야.”
상호는 씩 웃고 검을 집어넣었다.
“저번보단 나아졌다. 조금 더 개조해 봐.”
“네엥…….”
미래가 로봇 뚜껑을 열고 한숨을 푹 쉬었다.
다른 1학년 아이들은 미진의 지도를 받는 중이었다. 상호는 대련 중인 하솔과 단비를 지켜보다가 2학년 쪽을 흘끗했다.
2학년은 민정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태화야, 마법은 어떻게 하라고?”
민정의 물음에 태화가 머리를 긁적였다.
“마누라도 모르게……요?”
“며느리도 모르게. 상대가 네 뜻을 알지 못하게. 그렇지 않으면 마법은 의미가 없어.”
순수한 마나의 집약체인 강기, 그리고 마나를 적절한 방향으로 흐르게 해 위력을 발휘하는 마법. 둘은 강함의 방향이 달랐다.
“그러니까 네가 뿔빔을 쏠 때는…….”
“마각초살포!”
“……마각초살포를 쓸 때는, 미리 깔아놓은 마법이 있어야 한다는 소리야.”
“네! 왕언니!”
상호는 태화의 이마에 지탄을 날렸다.
“악!”
“이젠 다른 선생님들한테까지 그러냐?”
“우씨, 친하면 좋잖아!”
“임마, 너랑 선생님이랑 나이차가 몇이야. 14살 차이 아냐? 네 주변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그 말에 민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상호는 그 낌새를 알아차리고 말꼬리를 흐렸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누나……?”
“나이가 많구나.”
“아니, 그게 아니라…….”
“아줌마구나…….”
“뭔 소리야! 절대 아냐. 누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교장선생님도 있고…….”
“전혀 위로가 안 돼…….”
민정은 코를 훌쩍이며 스탠드 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민정의 등을 토닥였다.
“아니라니까, 누나가 얼마나 젊어 보이는데. 교복 입고 돌아다녀도 안 들킬걸?”
“진짜……?”
“그럼! 서른둘……이면 아직 결혼하기엔 이른 나이잖아? 아줌마 소리 들을 나이가…….”
결혼 이야기를 꺼내자 민정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상호야.”
“응?”
“누나 동창들 다 결혼했더라…….”
“…….”
“누나 어떡해……? 이러다간 결혼도 안 하고 아줌마가 되어버려…….”
민정이 고개를 푹 숙였다.
상호는 차마 더 위로하지 못하고 민정의 등만 토닥이다가, 운동장에 서 있는 태화를 돌아보았다.
“태화야.”
“웅.”
“앞으론 언니라고 불러…….”
“응? 그럼 쌤은 오빠라고 불러?”
“난 안 돼.”
“흥, 자기 맘대루야.”
태화는 콧방귀를 뀌고 스탠드로 돌아와 앉았다.
간신히 기운을 차린 민정이 다시 2학년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상호는 민정이 나빛과 지윤을 부르는 모습을 확인하고 1학년 쪽을 돌아보았다.
미진이 하솔과 직접 대련을 하고 있었다.
“검을 뻗지 말고 기울이는 거야. 그렇지…….”
상호는 그 모습을 유심히 살피다가 슬쩍 다가섰다. 약간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하솔이 아니라 미진에게.
그는 한걸음에 미진의 뒤로 다가서서 검을 함께 잡았다. 골프 강사가 학생의 자세를 바로잡을 때처럼.
“조금 더 기울여요. 늘어뜨린다는 감각으로…….”
미진의 뒷목에 상호의 숨결이 닿았다.
“……꺅!”
깜짝 놀란 미진은 몸을 움찔하며 팔꿈치로 상호의 명치를 가격했다.
“……켁!”
불의의 급습을 맞은 상호는 명치를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 그의 엉덩이를 미진이 세차게 걷어찼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이 쓰레기야! 어딜 뒤에서 안으려고 그래!”
“커흑, 오해, 오해가…….”
“애들 앞이라고 넘어갈 줄 알았어요?! 죽어, 죽어 그냥!”
“악! 끄윽…….”
미진은 상호에게 혐오 가득한 눈빛을 쏘아내고 씩씩거리며 뒤돌아섰다.
만신창이가 된 상호의 옆에 미래가 다가와 물었다.
“선생님.”
“으응…….”
“선생님은 총알도 잡으면서 왜 미진 선생님이 때리는 건 못 피해요?”
“투기……, 살기가 없으니까…….”
“선생님이 마조라는 소문이 있어요.”
“도대체 누가…….”
“저도 논리적으로 그게 옳다고 생각해요.”
“아니야…….”
“수녀님한테 물어봐도 돼요?”
“안 돼…….”
스탠드에서 아이들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쪽팔려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마조 아니라고…….’
그는 그렇게 명치 속 갈기갈기 찢긴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아주 오랫동안 고개를 땅에 처박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