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음 날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침대 위에서 효은이 눈을 끔뻑였다. 부스스한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야.”
“응.”
“너 세희랑 여행 간다고 하지 않았냐?”
“……응.”
“갈 거야?”
상호는 자신의 조그마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글쎄.”
또 은호가 됐다. 이 몸으로는 운전을 할 수가 없는데.
그래도 하루면 원래 몸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원래 일정과는 달라지겠지만 1박 2일로 계획을 수정하면 될 일이었다.
상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침대 옆 탁자에 놓인 핸드폰을 집었다. 시간은 아침 7시. 이미 약속 시간이 지나 문자가 몇 통 와 있었다.
‘어려지니까 알람이 울려도 일어나질 못하네…….’
문자를 보낸 사람은 당연히 세희.
-선생님 저 차 앞에 왔어요
-선생님
-선생님 일어나셨어요?
기다리고 있는가 보다. 상호는 서둘러 답장을 보냈다.
-세희야 선생님 어려졌어
-은호니?
-선생님이야...
-방으로 갈게
‘아오, 옷 입어야 되는데…….’
옷이 커서 다 벗겨진 터라, 황급히 일어나서 옷장으로 달려갔다.
화장실에서는 혜소가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세수를 하고 있었다. 상호는 어린이 옷을 꺼내 입으며 물었다.
“혜소 언제 일어났어?”
“아까 알람 울렸을 때요.”
꼬마애보다 더 늦잠을 자버리다니. 상호는 바지를 다 입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창문에서 세희 목소리가 들렸다.
“은호야.”
“선생님이야.”
“문열어.”
“선생님이라고…….”
상호는 한숨을 쉬며 창문을 열었다.
뭔가 평소보다 화사하게 차려입은 세희가 방으로 폴짝 뛰어 들어왔다.
상호를 마주한 세희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은호야.”
“……강상호입니다~.”
“누나랑 여행 갈까?”
“운전을 못 해…….”
“기차 타고 가자.”
세희는 상호를 번쩍 안아 들고 창가로 걸어갔다. 당장이라도 뛰어내리려는 듯했다.
상호는 황급히 창턱을 부여잡았다.
“잠깐만! 잠깐만, 세희야.”
“응?”
“혜소도 같이 가기로 했어…….”
상호의 목덜미에 싸늘한 기운이 쏟아졌다.
“왜요?”
“혜소가, 추석에…… 심심할 것 같아서…….”
“왜요?”
“그게…….”
상호는 살기를 느끼고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위기일발의 상황. 필요한 건 분위기를 반전시킬 만한 농담.
“혜소가 혼자 집에서 나홀로 집에 보면서 나홀로 집에 찍을 것 같아서…….”
“수녀님 계시잖아요.”
씨알도 안 먹혔다. 오히려 진해진 살기가 돌아올 뿐. 이마에 진땀이 삐질삐질 배어나왔다.
상호는 침대에 누워서 멀거니 관망하고 있는 효은을 흘끗했다.
“쟤도, 가족 보러 가야 하고…….”
“안 가는데?”
“……좀 도와줘!”
“니 업보지 내 업보냐? 달게 받아, 이 새끼야.”
그 말이 맞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 누구에게 도움을 비는가. 그는 겸허하게 업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세희야, 미안해…….”
“손들어.”
“응?”
눈을 끔뻑이는 상호에게 세희가 거듭 명령했다.
“손 들으라고.”
“네에…….”
상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양손을 들었다.
“벽 보고 무릎 꿇어.”
“네…….”
“잘못 했어, 안 했어?”
“잘못했어요…….”
침대 쪽에서 효은이 대놓고 비웃는 게 느껴졌다. 욕실에서 나온 혜소도 상호를 봤는지 풉 하고 웃었다.
상호는 코를 훌쩍이며 벽에 머리를 박았다.
‘나는 도은호다…….’
천하의 강상호가 이런 취급을 받을 리 없기에.
‘나는…… 도은호다…….’
‘아니야! 강상호야!’
‘아니에요……. 도은호예요…….’
‘저승부대 미친개 강상호야!’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
눈물을 삼키는 상호의 옆에 세희가 쪼그려 앉았다.
“도은호.”
“네…….”
“잘못했지?”
“네…….”
“이리 와.”
세희는 무릎을 대고 앉아 양팔을 벌렸다.
상호가 코를 훌쩍이며 품에 안기자 세희가 등을 토닥였다.
“또 그럴 거야?”
“아니요…….”
“누나 맘 아프게 할거야?”
상호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꼭 예경이 말하는 것 같아서.
“아니요…….”
“아니지?”
“네…….”
“다음부턴 그러지 마.”
세희는 그의 머리를 깊숙이 끌어안고 뒤통수와 등을 쓸어내렸다. 누나가 동생을 달래는 것처럼.
상호는 그렇게 한참을 안겨 있다가 얼굴을 뗐다.
“그래서 어떻게 하지?”
“열차 타고 가요.”
“열차?”
“네.”
그러고 보면 태화와 섬에 갔을 때도 열차를 탔었다.
썩 나쁘지 않은 선택지다. 다만 문제는 세희 혼자서 그와 혜소를 데리고 다닐 수 있느냐는 것. 명절에 열차 좌석이 남아 있을지는 둘째 치더라도.
상호는 효은을 돌아보았다.
“같이 갈래?”
“귀찮아.”
“그럼 어쩔 수 없고……. 혜소 준비 다 됐어?”
“네.”
“그래. 그럼 열차 타러…….”
그때 창문으로 태화와 이츠키의 머리가 쏙 튀어나왔다.
“저거 봐. 쫙 빼입었네, 아주 그냥.”
“어쩐지 방에 없다 했습니……커헉!”
이츠키는 혜소를 발견하고는 무슨 섬광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비틀거렸다.
창턱을 놓치고 떨어지려 하는 이츠키를 세희가 달려가 붙잡았다.
“괜찮아?”
“눈…… 눈이…….”
“잡아, 잡아.”
세희는 이츠키를 끌어올려 방에 내려놓았다.
추석에 집에 안 가는 아이들. 세희, 태화, 유학생. 상호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얘들아, 나디아는?”
“하 양이 데려갔습니다.”
그럼 기숙사에 남은 건 이 셋.
기왕 들킨 김에 데려가자.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너희도 여행 갈래?”
“어디로 갑니까?”
“그냥, 정처 없이 기차 타고 돌아다니는 거야. 맛집이 있으면 가보고…….”
“좋습니다. 근데…….”
이츠키가 눈을 감은 채로 머뭇거렸다. 혜소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어서 망설여지는 듯했다.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혜소가 이츠키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저는 언니 뒤에 있을게요.”
“괜찮겠습니까?”
“네. 언니가 괜찮으면 저도 괜찮아요.”
태화가 상호를 내려다보았다.
“몇박인데?”
“2박 3일.”
“준비해오면 돼?”
“응. 준비해서 기숙사 앞으로 나와.”
“오키.”
태화는 연기를 펑 터트리고 사라졌다.
세희도 눈을 뜨지 못하는 이츠키를 문가로 이끌어 갔다.
“이따 뵈어요, 선생님.”
“응. 지금 같이 가자. 효은. 나 간다.”
“그래. 누나들 손 꼭 잡고. 길 잃어버리면 싸돌아다니지 말고 거기 가만히 앉아 있어.”
“얌마…….”
효은이 능글맞은 비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도로 건널 땐 손 꼭 들고.”
“……끄응.”
상호는 꿍얼거리면서 혜소의 손을 잡고 세희의 뒤를 따랐다.
* * *
이화관 앞.
상호는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다 챙겼지? 옷하고 칫솔하고 치약…….”
“네.”
“지갑은?”
“챙겼어요.”
“혜소야, 혹시 모르니까 이거 주머니에 넣고.”
상호는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혜소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백에 하나 미아가 될 경우를 방지해서.
“길 잃으면 주변에 가게나 사람 찾아서 경찰한테 전화하고…… 알지? 아니다, 아저씨 핸드폰 번호 적어줄 테니까…….”
“아 됐어! 가면서 해.”
태화가 상호를 확 잡아끌었다.
“어차피 안 잃어버려. 잃어버려도 쟤가 찾으면 되잖아. 배고파 죽겠으니까 밥이나 사줘!”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쌤 걱정이나 해. 납치당하기 딱 좋은 얼굴이니까. 쭉빵한 아줌마가 부른다고 헬렐레 따라가지 말고.”
“야…….”
“가자!”
“내놔. 원래 나랑 가기로 하셨다고.”
세희가 태화에게서 상호의 손을 뺏어들었다.
그러자 태화는 세희를 째려보다가 상호의 다른 손을 뺏어들었다. 혜소의 손을 잡은 손이었다.
“야, 이태화…….”
“빡빡아, 언니 손 잡아.”
“네.”
“이츠키는 내 손.”
혜소는 태화의 손을 잡았고, 앞이 안 보이는 이츠키도 세희의 손을 잡았다.
순서대로 이츠키, 세희, 상호, 태화, 혜소. 다섯은 나란히 손을 잡고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아침 뭐 먹지?”
“열차역 주변에서 간단히 때우자. 점심을 좀 일찍 먹고.”
“쌤 지갑 나 줘.”
“……왜.”
“지금은 내가 어른이잖아.”
“안 돼.”
“달라고!”
“안 된다고…… 야이씨, 안 내놔!”
“아싸~! GSH 블랙 카드!”
“야!”
274. 여행을 떠나요
“좀 빨리 와버렸네.”
상호는 아이들과 함께 기차역의 입구를 올려다보았다. 키가 작아져서 그런지 평소보다 높아 보였다.
“안에 김밥집 있을 거야. 먹으면서 기다리자.”
“아 왜~. 왜 겨우 김밥인데~.”
“도착하면 제대로 먹자니까! 자꾸 그러면 안 사준다.”
“카드가? 나한테? 있는데?”
태화가 카드를 까딱이며 혀를 쏙 내밀었다.
그러자 세희가 카드를 확 채가며 눈을 부라렸다.
“남의 여행에 따라와놓고는 뭔 행패야. 얌전히 따라다니기나 해.”
“참나, 추석에도 선도부 일 하냐?”
태화는 혀를 차며 기차역 안으로 들어갔다.
천장이 넓은 공간, 한쪽 구석에 단출한 식당가가 보였다. 상호는 검색하면서 봐두었던 김밥 가게를 향해 걸어갔다.
명절이라 사람이 많았다. 세희와 태화가 그의 손을 꼭 잡고 걸었고, 이츠키도 혜소를 업고 셋의 뒤에 딱 붙었다.
다섯은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 * *
“어서오세…….”
여자 점원은 인사를 다 끝맺지 못했다. 문으로 들어선 아이들의 모양새가 범상치 않아서.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셋. 열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하나. 비니를 쓰고 스님처럼 차려입은 대여섯 살 아이가 하나.
다들 배낭을 하나씩 메고 있었다.
‘가출소녀들인가?’
그렇게밖에 안 보였다.
아이들은 자리를 잡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한 아이는 머리에 뿔이 달려 있었는데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했다. TV에서 봤던가. 하지만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츠키, 조심해. 여기 물컵 있어.”
“알겠습니다.”
한 아이는 맹인인지 눈을 감고 식탁 위를 더듬거렸다.
또 한 아이도 한쪽 눈에 안대를 썼다. 머리를 굵게 땋은 아이 말고는 한 명도 평범해 보이는 아이가 없었다.
점원은 그 비범한 아이들을 흘끗하며 주문 받을 준비를 했다.
곧 머리를 굵게 땋은 아이와 뿔 달린 아이가 계산대로 다가왔다.
“참치김밥 하나랑 소고기김밥 하나요.”
머리 땋은 아이가 카드를 내밀었다.
다섯 명이 먹기에는 양이 적다. 그중 두 명이 어린이라고는 해도.
‘돈이 별로 없는가 보다…….’
점원은 씩 웃으며 카드를 받아들었다.
“네, 계산해드리겠습니…….”
“아, 잠깐만요.”
그런데 뿔 달린 소녀가 손을 들고는 머리 땋은 아이를 돌아보았다.
“야, 돈까스 김밥 하나 먹고 싶지 않냐?”
“뭘 더 먹을라고 그래. 가서 먹는다고 했잖아.”
“돈까스는 언제나 옳아!”
“시끄러. 우리 카드도 아니잖아.”
그 말에 점원은 카드를 긁으려다가 멈칫했다.
‘……훔친 카드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일단 모른 척 계산하는데 마음이 영 찜찜했다. 그때 이번엔 테이블 쪽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배고픕니다.”
“좀만 참아. 가면 배불리 먹자.”
외눈 남자아이가 맹인 여자아이를 달랬다.
아마 눈이 안 보이다 보니 보살핌을 받는 모양이었다. 점원의 콧날이 조금씩 시큰거렸다.
‘저 어린 애들이…….’
간다는 것은 급식소나 보육원을 찾아 간다는 것일 테다. 돈이 없으니 무임승차를 하려고 할 것이고.
점원은 김밥을 집어서 썰었다.
“참치김밥이랑 소고기김밥 나왔습니다.”
“아, 감사……합……?”
세희의 눈이 멍하니 끔뻑였다.
“여기는…… 김밥이 되게 기네요…….”
“우리 가게는 그래요. 열차 같죠?”
“아아, 예…….”
역이라서 그렇구나, 세희는 그렇게 여기고 상호와 아이들에게 돌아왔다.
김밥을 본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왜 이렇게 길어?”
“두 개를 합쳤나 본데……?”
“이쪽은 돈카츠가 들었습니다.”
“세희야, 이거 진짜 한 줄에 2천원이야?”
“영수증에는 그렇게 나와 있는데…….”
“뭐 어때! 그냥 먹어. 돈까스 쪽은 내 거야!”
점원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아이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