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러니까…….”
세희는 나빛의 머리 위를 쳐다보았다.
“이걸 네가 낳았다고?”
“응!”
나빛은 의기양양하게 허리에 손을 올리고 눈을 반짝였다.
“선생님이랑 내가 만들었어!”
“새를?”
“응!”
“…….”
자리에 앉은 아이들이 조용히 눈빛을 교환했다.
그 시선들은 잠시 방황하다가 태화에게로 귀결되었다. 네가 한마디 해 보라는 듯이.
태화는 뚱하게 눈을 끔뻑이다가 입을 열었다.
“넌 사람이 새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하냐?”
“기적인 거지~.”
“병아리가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하냐?”
“닭!”
“달걀은 달에서 가져오냐?”
“아!”
깜빡했다는 듯이 이마를 탁 치는 나빛을, 아이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지윤은 한숨을 쉬고 물었다.
“그래서 야는 이름이 머고.”
“지어줘. 헤헤…….”
“하나찜닭?”
“하나치킨?”
지윤과 태화가 차례대로 말했다.
그러자 나빛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짐과 동시에, 아기새가 삐약거리며 날아올라 태화의 머리를 쪼기 시작했다.
“아야! 악!”
“어어, 이 시끼 나는디?”
“먹는 거 아니야! 그리고 강씨야!”
“그럼 강치킨…… 악! 왜 나만 쪼는데! 야, 하나빛! 얘 좀 떼어보라고!”
“태화 나빠!”
“X뇬아아악!”
* * *
“모서리무서워모서리무서워모서리무서워…….”
“뭐하냐?”
“무서리모서워…….”
교실 한가운데에 태화가 머리를 싸쥐고 엎드려 있었다.
왜 또 모서리 공포증이 도졌나. 상호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가볍게 무시하고 교탁으로 걸어갔다.
“나빛이 몸 이상 없지?”
“네~.”
“수업 들을 수 있지?”
“네. 근데 선생님.”
“응?”
나빛이 머리에 새를 얹은 채로 웃었다.
“애기 이름 지어 주세요.”
“이름?”
상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작명 센스 같은 건 없는데.
문득 그런 말이 생각났다. 여자들은 애완동물 이름 지을 때 음식 이름으로 짓는다고. 순대, 치즈 같은.
‘노란색이니까…….’
“어……. 계……계란찜?”
“네?”
나빛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강계란찜이요?”
뭔가 큰 잘못을 한 것 같다. 상호는 손사래를 치고 말을 고쳤다.
“병…… 병아리 색이니까, 아리…… 강아리…….”
“네?”
이번엔 아리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아차…….’
아리도 안 되면 뭘로 지어야 하나. 당황한 상호의 눈에 이츠키가 들어왔다.
“사카시타, 병아리가 일본어로 뭐야?”
“히요코입니다.”
“히요코?”
상호는 턱을 괴고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효꼬? 혀꼬? 아니, 그냥 꼬꼬가 나을 것 같기도…….”
“혁구!”
“……응?”
그는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다.
나빛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강혁구!”
“너무 쌈박하지 않아? 병아리 이름치고는…….”
“혁구야!”
“뺙.”
아기새가 좋다는 듯 삐약거렸다.
“봐요! 혁구도 좋대요. 혁구야~.”
“뺙.”
“혁구야!”
“뺙!”
“…….”
좋다는데 뭐 어쩔 것인가.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혁구……로 하자.”
태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병아리 이름이 강혁구…… 악!”
“혁구야! 쪼아!”
“뺙!”
“이런 X팔, 엄마랑 자식이 쌍으로……! 악! 악!”
포르르 날아든 혁구가 태화의 머리를 콕콕 쪼기 시작했다. 상호는 그런 둘을 내버려두고 돌아섰다.
“수업 준비해서 나와.”
“아이씨, 쌤! 이거 좀 떼봐! 쌤 자식이잖아!”
“안 죽어. 엄살부리지 말고 얼른 나와.”
“아아아악──!”
* * *
“잘했어.”
상호는 대련을 끝낸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태화, 은율, 지윤. 그리고 셋을 상대로 싸운 세희.
“지윤이는 아직 초강기를 상대하기엔─” “삐약.” “내공이 부족하잖아.”
“예.”
“그러니까─” “뺙!” “목검이라고 해서 받아치려고 하지 말고, 마나를 잘 느껴서 치명적인 공격은 피할 줄 알아야 해. 안 그러면 다친다.”
“예.”
“은율이도 마찬가지로─” “뺙뺙.” “마나에 집중하면 눈으로 확인하는 것보다 좀 더 빠르게 반응할─” “삐약.” “수 있단 말이야.” “삐약.” “둘 다 기감에 집중하자. 알았지?”
“네.”
“태화는─” “뺙.” “마법을 배웠으면─” “뺙.” “좀 활용─” “뺙.” “을…….”
“뺙.”
상호의 머리 위에서 혁구가 쉴새 없이 울어댔다.
머리를 둥지로 아는 걸까. 가늘고 긴 아이들의 머리카락보다는 훨씬 새집에 가까운 형태이긴 했다.
뚱한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보는 상호에게 나빛이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이 좋은가 봐요~.”
“……수업할 땐 곤란하네.”
“제가 불러 볼게요. 꾸꾸야~.”
“뺙.”
혁구가 나빛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다른 사람들 말은 다 안 듣고 나빛의 말만 듣는다. 상호는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다시 수업을 위해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뭐 말하고 있었지?”
“태화는 훌륭하고 완벽해서 오늘 저녁에 랍스터나 사줘야겠다.”
“아, 맞아. 태화 넌 반응도 느리면서 순간이동 하나만 믿고 설치는데, 그러다간 크게 다친다. 너도 기감 느끼는 연습 하자. 지윤이랑 은율이랑.”
“아 왜왜왜왜! 난 완벽해서 그딴 거 필요 없단 말야!”
무언가가 목을 긁었다. 태화는 흠칫하며 반대편으로 물러났다.
아주 작고 검푸른 바늘이 목 옆에 두둥실 떠 있었다.
은율과 지윤 또한 흠칫하며 각자의 목을 긁은 바늘을 내려다보았다.
“기감이 약하면 이렇게 기습당하는 거야.”
상호는 강검을 거뒀다.
“그러니까 수련 열심히 해. 기감을 가다듬지 않으면 좋은 헌터도 못 되고, 세희도 평생 못 이길 테니까.”
태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쌤.”
“응?”
“얘 시험 봐?”
곧 다가오는 중간평가. 그리고 연말평가.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중간만. 연말은 안 보고.”
이제 시험은 큰 의미 없다.
그냥 경험을 늘리기 위해 중간까지만 참가하고, 연말에는 불참. 그에게 집중적으로 가르침을 받고 있는 세희가 평가에 참여하면 불공정한 처사가 되어 버릴 터였다. 다혜처럼.
“중간평가 때는 내공 좀 빼내고 참가시킬 거야. 그러니까 너희도 똑바로 노력하면 이길 수 있어.”
“그럼 우리랑 수업을 해! 맨날 쟤랑 놀지 말고!”
“누가 놀아 임마……. 너는 네가 안 오는 거잖아.”
그는 한숨을 쉬고 소매를 걷었다.
“그래. 지금 하자.”
상호의 몸이 순간 사라졌다.
태화와 은율, 지윤은 몸을 움찔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나에 집중해.”
목소리는 들리는데,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구태여 보려고 하지 마. 기감은 촉각과 같아. 촉각은 계산이 필요 없어. 시각보다 빠르다는 뜻이야.”
은율의 옆에 나타난 상호가 손가락을 내질렀다. 가느다란 목을 향해서.
은율이 화들짝 놀라 호신강기를 두르려는 순간.
촤악……
상호의 팔이 천수관음처럼 수십 개로 늘어났다.
“윽……!”
“찾아.”
내공이 담긴 단 하나의 손가락을 찾아라. 상호는 짤막하게 내뱉고 은율을 향해 손가락을 찔러 들어갔다.
은율은 황급히 손바닥에 강기를 둘렀다.
퍼억
“그래.”
상호는 자신의 손가락을 막은 은율의 손바닥을 보며 웃었다.
“그렇게 느끼는 거야.”
“……네.”
은율도 희미하게 성취감이 담긴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은율은 곧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작였다.
“그런데 선생님, 방금 그거 어떻게 한 거예요?”
“응?”
“분신인데 하나는 내공이 담기고 나머지는 없고…… 그런 것도 할 수 있어요?”
그 말에 상호는 말없이 웃었다.
‘노가다지 뭐겠니…….’
내공을 담아 찌르고, 내공을 빼서 다른 곳으로 찌르고, 다시 내공을 담아 처음과 같은 곳을 찌르고, 또 빼서 또 다른 곳으로 찌르고. 그 짓을 아주 빠르게 수없이 반복한 것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태화가 눈을 번득였다.
“쌤! 그거 몸으로도 할 수 있어?”
“아니.”
“나 앞뒤로 안아줘!”
“못한다고.”
“뻥치지 마! 할 수 있잖아아아!”
태화가 불꽃을 휘날리며 상호에게 달려들었다. 안아 달라는 듯이 양팔을 쫙 펼쳐서.
그때 어딘가에서 단호한 외침이 들렸다.
“쪼아!”
“뺙!”
혁구가 태화를 향해 포르르 날아가기 시작했다. 느린 듯하면서도 은근히 속도가 빨랐다.
태화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식겁하며 줄행랑을 쳤다.
“쌔애애앰! 난 쟤 한 번도 안 때렸는데 쟨 나 때리잖아! 왜 안 막아?!”
“넌 좀 맞아야 돼.”
“우씨, 두고 봐! 내가 쌤 애 낳으면 아빠 때리라고 할 거야! 여섯 명 낳아서 아침마다 다구리 칠 거야!”
“알아서 해…….”
“아니 이 튀겨먹을 메추리 새끼 좀 떼어보라고오오!”
혁구는 순간이동으로 도망치는 태화를 쫓아 기어코 머리를 쪼았다. 콕콕, 콕콕.
운동장에 익숙한 절규가 울려 퍼졌다.
“나만 미워해애애애!”
* * *
“웅냠냠…….”
나빛이 행복한 표정으로 입을 우물거렸다.
이서는 그 옆에 앉아 밥을 깨작이다가, 조심스럽게 나빛을 불렀다.
“언니.”
“응?”
“이제 몸 괜찮아?”
“응!”
이제 입덧을 하지 않는다는 게 기뻤는지, 숟가락에 얹힌 밥이 평소보다 봉긋했다.
이서는 식판 옆에 앉은 혁구를 흘끗했다.
“혁……구. 진짜 언니가 낳은 거야?”
“응.”
나빛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는 뻘쭘한 표정으로 국을 뒤적였다.
‘진짜 애를 임신한 줄 알았네…….’
담배에 이어 임신까지 덜컥 해버리는 개막장 양아치인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직 사람이 새를 낳았다는 건 이해가 안 됐지만.
혁구가 나빛의 식판에 놓인 밥알을 쪼아먹기 시작했다.
“밥도 먹어?”
“응. 귀엽지!”
“……으응.”
대체 정체가 뭘까. 이서는 진땀을 흘리며 나빛과 혁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헤헤헤……?”
나빛의 웃음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혁구의 이마를 쓰다듬던 검지도 곧 움직임을 멈췄다. 이서는 묘한 공포감을 느끼며 나빛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세희 볼에 밥풀 묻었다.”
“어디요?”
“잠시만. 내가 떼줄게.”
상호가 검지에 밥풀을 묻혀 세희의 볼에 문질렀다. 세희는 황급히 볼을 닦으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선생님!”
“킥킥…….”
상호가 키득거렸다.
그런 그를 향한 살기를 이서는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옆자리에서 시작되어 상호를 향해 뻗어 나가는 덩굴 같은 살기를.
나빛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꾸꾸야.”
“뺙.”
혁구가 포르르 날아올랐다.
“응?”
상호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혁구를 올려다보며 눈을 끔뻑였다.
“나빛아, 혁구 데려……?”
쀽
상호의 머리 위로 황금색 액체가 쏟아졌다.
“…….”
“선생님, 머리에 새똥…….”
세희가 서둘러 휴지를 가져왔지만, 황금색 액체는 휴지에 묻어나지 않고 상호의 머리에만 묻어 있었다. 제 의지를 가진 듯이.
“나빛아……?”
상호가 불러도 나빛은 외면했다.
“이서야, 밥 맛있지~.”
“……응.”
“나빛아……?”
“나도 맛있어~.”
“으응.”
“나빛아……!”
“헤헤헤…….”
나빛이 밝게 웃었다.
이서는 그 모습을 보고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빛에게는 깝치지 말아야겠다고.
‘……무서운 언니야.’
이서도 곧 식사를 계속했다. 금색 새똥을 뒤집어쓴 상호를 외면한 채.
어느새 돌아온 혁구가 나빛의 식판 옆에 살포시 앉았다.
“뺙.”
273. 배낭여행
“다 들고 갈 수 있지?”
“아니예.”
지윤이 심통이 난 표정을 지었다.
“지 집까지 같이 가주셔야겠는디예.”
“……으음.”
상호는 진땀을 흘렸다.
추석 전날 저녁. 지윤의 집에 보낼 선물을 산 참이었다. 상호의 옆에서는 혜소가 자기 키보다 높은 선물 더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말했잖아, 이번에는 못 간다고…….”
“와 못 가시는디예.”
“약속……, 약속이 있어.”
“뻔하지예. 세희 아니믄 태화 아닙니꺼.”
지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하긴 머스마 같은 가스나는 싫으시겠지예.”
“아니야, 지윤이 네가 얼마나 예쁜…….”
그 말에 혜소가 눈살을 찌푸리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으.”
학생한테 껄떡댄다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상호는 굴하지 않았다.
“아니 봐봐! 눈도 크고 코도 오똑하고 입술도 도톰한데. 몸매…… 아니, 아무튼 왜 네가 머스마야?”
“깜둥이라서예?”
“넌 그냥 건강하게 보기 좋은 정도…….”
혜소가 중얼거렸다.
“변태.”
“…….”
상호는 그 말에 그대로 격침당했다.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지윤이 고개를 푹 숙인 상호를 놔두고 선물 더미를 들어 올렸다.
“하여튼 알았어예. 잘 묵겠습니더.”
“……으응.”
“허리 쫌만 숙여 보이소.”
“응?”
쪽
“갑니데이~.”
“…….”
지윤은 상호의 뺨에 짧게 뽀뽀를 한 뒤 후다닥 방을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본 혜소가 한마디를 더 했다.
“저질.”
“……조카라서 그래.”
“친척이에요?”
“아니. 아저씨하고 거사님하고 같이 알던 친구 딸이야.”
“그럼 저도 조카예요?”
“비슷……하겠지?”
“그럼 저한테도 시킬 거예요?”
“아니…….”
어디까지 쓰레기로 만들 셈인가. 상호는 한숨을 쉬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혜소가 그의 배에 가로로 엎드렸다.
“혜소야, 숨막혀…….”
“아저씨는 숨쉬는 공기도 아까워요.”
“……끄응.”
그때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꺼내 보니 세희에게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어, 세희야.”
[선생님, 내일 몇 시에 출발해요?]
“태화 모르게 일찍…… 한 일곱 시쯤? 아침은 밖에서 먹을 거야.”
[그럼 오늘 수업은 일찍 해요?]
“응. 빨리 끝내야지. 좀 이따 보자.”
[네~.]
통화를 끊자 혜소가 물었다.
“내일 어디 가세요?”
“응. 세희 언니랑 여행.”
저번에 약속했던 대로, 추석이라 여행을 가기로 했다. 2박 3일. 어딘지는 정해두지 않고.
혜소가 그의 배 위에서 눈을 깜작였다.
“고모들은요?”
“고모들은 알아서 지내겠지.”
“쓰레기.”
“아니…….”
애가 왜 미진을 닮아가냐. 상호는 헛기침을 하고 혜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희는 추석에 같이 보낼 사람이 없으니까…… 아저씨가 같이 놀아주는 거야. 태화는 그동안 많이 놀았으니까 빼는 거고.”
“그럼 저는요?”
“응?”
혜소는 살짝 심통이 난 표정이었다.
“저도 같이 보낼 사람 없는데요.”
“여행……가고 싶어?”
“그건 모르겠는데, 어쨌든 같이 보낼 사람이 없어요.”
“고모들…… 고모들 있잖아.”
“고모들도 편히 쉬고 싶으실 거예요.”
너만은 절대 편히 놀도록 놔두지 않겠다. 혜소는 그런 뜻을 담은 눈빛으로 상호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상호는 진땀이 났다.
‘……복수인가?’
“그래도…… 세희 언니랑 단둘이 가기로 해서…….”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댔어요.”
“세희가 기뻐하지 않을 거야…….”
혜소가 입술을 삐죽였다.
“알았어요. 그럼 저는 집에서 밥이나 먹고 티비나 볼게요.”
상호는 문득 깨달았다. 그가 출근하고 나면 혜소는 하릴없이 방에 누워서 티비를 보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따분하게 시간을 때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그래서.
하면 안 되는 말을 했다.
“그럼……. 그럼 같이 여행 갈까?”
“네.”
혜소가 기다렸다는 듯이 즉답했다.
저질러 버렸다. 이걸 세희가 알면 크게 혼날 텐데. 상호는 말을 하자마자 후회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순 없었다.
“……그래. 내일 가자.”
“네. 뭐 준비해가면 돼요?”
“내가 다 챙겨 줄게…….”
“네.”
혜소가 그의 배 위에서 장난스럽게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상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혜소의 볼을 문질렀지만, 속으로는 내일 찾아올 운명을 직감하며 덜덜 떨고 있었다.
‘세희야, 미안하다…….’
미안할 짓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또 약속을 어겨 버렸으니.
그는 자신의 나약한 마음을 책망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