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1화 (281/501)

* * *

“방금 봤어?”

세희는 소곤거리는 학생들을 흘끗했다.

“임신이래.”

“누구랑?”

“강쌤이랑…….”

학생들의 눈은 나빛이 들어간 화장실을 향하고 있었다.

어디를 가든 시선이 따라붙었다. 나빛도 그걸 알고 교실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지만, 이렇게 화장실에 갈 때는 어쩔 수 없었다.

세희는 선도부 완장을 만지작거리며 화장실 맞은편 벽에 기대어 기다렸다.

곧 나빛이 화장실에서 걸어 나왔다.

“미안해, 세희야. 헤헤…….”

“뭘 미안해.”

둘은 나란히 걸어서 교실로 향했다.

“아까 보니까 사람들이 네 이야기 하던데.”

“그래?”

“다음에는 선생님한테 이야기하고 수업 시간에 가. 같이 가줄 테니까.”

“괜찮아. 헤헤.”

나빛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세희는 나빛을 교실 앞까지 데려다준 후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난 교무실 갈게.”

“응~.”

나빛이 교실로 들어가자 안이 왁자해졌다.

“니 또 머 묵고 왔나.”

“안 먹었어…….”

“안 묵었는디 배가 와 이러노.”

“아가야가 있으니까 열심히 먹어야지 어쩌겠어. 야, 불 좀 꺼봐. 또 보자.”

“우왓! 언니 뱃속에 불났어!”

“헤헤헤…….”

세희는 잠깐 귀를 기울이다가 교무실로 걸어갔다.

쉬는 시간이 거의 끝나가는 참이라 학생들이 계단을 우르르 오르내렸다. 교무실로 향하는 학생은 세희 한 명뿐이었다.

교무실에 들어서자 상호가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

“아, 세희 왔어?”

“네.”

많이 피곤해 보였다.

자신을 가르치는 것도 힘들 텐데, 나빛의 일까지 겹치니 정신이 없을 것이다. 세희는 상호에게 다가가 어깨를 주물렀다.

상호가 쓴웃음을 지으며 세희를 올려다보았다.

“힘들어 보여?”

“네.”

“괜찮아. 신경쓰지 마. 나빛이는 어때?”

“잘 있어요.”

매 쉬는 시간마다 상호에게 보고를 하는 것이었다. 세희와 은율 둘이 교대로.

능력만 보면 순간이동을 쓰는 태화가 제일 알맞겠지만, 귀찮아하는데다가 관찰력이라고는 쥐뿔도 없으니. 세희도 이 일을 맡은 데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애들이 조금 놀리는데, 선생님 앞에서 하는 것보다 심하진 않아요.”

“그럼 됐어.”

“근데 웬일로 선생님이 일하고 계세요?”

“……너희도 알고 있었구나.”

상호는 얼굴을 살짝 붉히고 헛기침을 했다.

“미진 선생님은 오늘 몸이 안 좋으셔서…… 쉬고 계셔.”

세희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상호의 어깨를 주물렀다. 주물럭, 주물럭. 주먹으로 콩콩 두드리기도 하면서.

“시원하세요?”

“으응. 아, 좋다. 이제 그만해도 돼.”

그래도 세희는 계속 안마를 했다. 고생하는 선생님을 위해. 수업종이 울려도 세희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곧 교사들이 나가고 교무실에 둘만 남았을 때.

상호는 세희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다. 세희 네가 앉아 봐.”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세희도 살짝 마음이 동해서, 의자로 이끄는 상호의 손에 크게 저항하지 않았다.

상호는 세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때?”

“좋아요.”

“내공 넣을게.”

뜨끈한 기운이 흘러들어왔다.

“내공이 같으니까 좀 더 들어가도 괜찮겠다.”

더욱 깊게.

이제는 혈맥이 튼튼해져서 예전처럼 유난스러운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세희는 눈을 감고 상호의 손길을 즐겼다.

‘우와, 시원해…….’

그때 교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상호와 세희 둘 다 깜짝 놀라 문가를 돌아본 채로 굳었다. 그런 둘을 향해 미진의 눈이 번득였다.

“미쳤죠?”

“아니, 그게……. 미진 씨 아프다면서 왜 여기…….”

“숙소가 코앞인데 다 나으면 나와서 일해야죠. 누구처럼 노는 게 아니라. 아니 그것보다, 나빛이 건드렸다면서요. 근데 또 세희를 건드려? 미쳤죠, 진짜?!”

“아니, 이건 그냥 선생님으로서 혈맥이랑 근육을 풀어주는…….”

“벌레야!”

세희는 싸우는 둘을 놔두고 총총걸음으로 교무실을 도망쳐 나왔다.

* * *

“하…….”

상호의 얼굴에는 빨간 손바닥 자국이 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막을 수는 있겠지만, 화난 미진을 상대로 그랬다가는 효은에게 뒷담이 흘러들어갈 게 뻔했기에 그러지 못했다. 그는 한숨을 푹 쉬고 교탁에 교과서를 펼쳤다.

“교과서…… 41페이지. 얘들아…….”

“쌤, 쌤.”

자리에 앉은 태화가 꼬리를 촐랑거렸다.

“개신기한 거 보여줄까?”

“뭔데.”

“불 꺼봐.”

그래서 불을 껐다. 내공을 뻗어서.

태화가 커튼을 치며 핸드폰을 꺼냈다.

“봐봐, 봐봐.”

“뭔데 그래?”

“태교.”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태교?”

태화가 대답 대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곧 익숙한 클래식이 핸드폰에서 흘러나왔다. 태화는 나빛에게 다가가서 핸드폰을 배에 가까이 붙였다.

그러자 배에서 흘러나오는 황금빛이 한층 강렬해지고, 태화가 양손을 뻗어 나빛의 배를 가리켰다.

“밝기 조절 탑재! 원라이트 무드등! 절찬 판매중!”

“…….”

“헤헤헤.”

나빛이 방글방글 웃으며 배를 쓰다듬었다.

대체 저 황금빛의 정체는 뭘까. 상호는 이마를 짚었다. 의사는 상상임신이라면 곧 배가 꺼질 거라고 했는데, 그런 기미도 보이지 않고.

그때 핸드폰에서 격정적인 댄스 음악이 터져 나왔다.

“쌤! 이거 봐봐! 리듬 기능도 탑재라구!”

황금빛이 현란하게 깜빡였다. 둠칫둠칫 리듬을 타며.

“DJ 원라이트!”

“헤헤헤…….”

상호는 번쩍이는 배를 얼이 빠진 채로 쳐다보다가, 혀를 쯧 차고 교실 불을 켰다.

“교실이 클럽이냐, 임마. 장난치지 마. 그리고 태교로 뭔 그런 걸 틀고 있어.”

“그치만! 애가 좋아하잖아!”

“……클래식이나 틀어.”

태화의 핸드폰에서 다시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다시 수업에 집중할 시간. 상호는 교탁 위 교과서를 흘끗하고 칠판으로 돌아섰다.

“오늘은 군단을 이루는 몬스터들의 지휘체계에 대해서…….”

“선생님!”

“응?”

“클래식답게 우아하게 수업해 주세요!”

나빛이 눈을 반짝였다.

너무 무리한 요구가 아닐까. 상호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다잡으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수업 시간이잖아, 나빛아. 수업 끝나고 같이 놀자. 응?”

“네에…….”

풀이 잔뜩 죽은 목소리.

그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물백묵을 우아하게 집었다. 새끼손가락만 쫙 펴서.

그리고 느긋하게 글씨를 쓰며 느끼한 목소리를 냈다.

“자, 군단을 이루는 몬스터들의 종류에는…….”

“상호야?”

어리둥절한 목소리.

“3교시 미진이랑 나 아니야?”

순간이동으로 나타난 민정이 고개를 기웃했다.

상호는 우아하게 물백묵을 든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

“시간표를 잘못 봤나? 근데 뭐 하고 있었어? 목소리가 이상했는데……. 이 음악은 또 뭐야? 상호 이런 취미 있었어?”

“…….”

“아, 방해해서 미안. 누나 교무실에 있을게…….”

파앗

민정은 다시 빛과 함께 사라졌다.

왜 꼭 이런 타이밍에. 상호는 눈물을 삼키며 교실에 흐르는 클래식을 원망했다.

“이 몬스터들을…… 지역별로 분류…… 에휴…….”

“우아하게!”

“지역별로오~. 분류우……. 끄응…….”

“꺄하하핫!”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 * *

상호는 뒷짐을 진 채로 주변을 쓱 훑었다.

날카로운 시선이 향하자 몇몇 아이들이 입을 급히 닫았다. 다른 반 아이들. 급식소 앞에 줄을 선 학생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나빛은 그의 옆에서 조용히 웃고 있었다.

“오늘 순대볶음 나온대요~.”

“으응.”

“맛있겠다~.”

“그러게.”

그는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군거리거나 손가락질하는 학생이 있으면 호되게 혼낼 작정으로.

물론 X급 헌터 앞에서 그런 짓을 하는 학생은 없었다.

“선생님…….”

“응?”

아래를 내려다보니 나빛이 불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표정이 안 좋아요…….”

“으응, 아냐. 그냥.”

주변을 노려보는 눈빛을 본 듯했다. 상호는 씩 웃고 나빛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맛있는 냄새 난다. 그치?”

“네.”

나빛도 다시 웃었다.

줄은 금방 줄었고, 둘도 금방 배식을 받았다. 둘이 자리를 잡자 곧 그의 반 아이들도 따라서 주변에 앉았다.

상호는 핸드폰 카메라를 켜서 화면에 나빛을 담았다.

“나빛아. 여기.”

“아, 네. 김치~.”

나빛이 숟가락을 들고 헤벌쭉 웃었다.

찰칵

상호는 찍은 사진과 문자를 유연에게 보냈다. 안부 인사와 나빛은 잘 지내고 있다는 내용으로.

“이제 먹자.”

“네~.”

나빛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순대를 집었다.

“……욱.”

그 소리에 모두가 멈칫했다.

나빛은 깜짝 놀라서 자신의 입을 가렸다. 그 소리가 왜 나왔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상호는 나빛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네에…… 욱.”

입덧을 하는 듯했다.

성력으로 만든 자식이 뭘 처먹는다고 엄마 입덧까지 시키나. 상호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나빛이 모르도록 속으로만.

“먹지 마. 외식하러 가자.”

“괜찮…… 우욱!”

“일어나, 일어나. 지윤아. 다 먹을 수 있지?”

“지가 짬통입니꺼.”

“미안…….”

“물론 가능하지예.”

지윤이 상호와 나빛의 식판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상호는 지윤의 등을 토닥이고 나빛을 일으켰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순대 좋아하는데…….”

나빛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이제 못 먹어요……?”

“잠깐 그런 거야. 내일 되면 또 바뀌어. 가자, 가자. 어른한테 물어보러 가자.”

둘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급식소를 나왔다.

* * *

“입덧?”

해련이 눈을 끔뻑였다.

“글쎄. 우리 땐 입덧을 해도…… 배고프면 알아서 들어갔고, 애초에 선택지가 없어서. 치킨이 있었겠어요, 족발이 있었겠어요? 있기는 있었지만 동네엔 없었지.”

“그런가요…….”

“물론 과일이 먹고 싶다 하면 여보가 달려가서 사줬지. 그땐 참 좋았는데…….”

상호와 나빛은 교장실 소파에 앉은 채였다. 상호는 회상에 빠진 해련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입덧할 때 잘 먹는 음식은 모르신다는 거네요.”

“그렇지.”

“그럼 누구 물어볼 만한 사람이…….”

“강 선생 주변에 유부녀가 나밖에 없나?”

“네.”

“의외네~. 강 선생은 유부녀도 좋아할 줄 알았는데.”

“……부하 교사를 쓰레기로 만들지 말아 주세요.”

“좋아하는 건 자유지~.”

해련이 능글맞게 웃었다.

어쨌든 입덧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모양이고. 그럼 다른 경험자를 찾아야 하는데. 당장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는 누가 있는지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를 긁적이는 상호에게 해련이 물었다.

“그래서 나빛이는 뭘 먹고 싶어 하는데요?”

“어…….”

상호는 나빛을 내려다보았다.

“뭐 먹고 싶어?”

“아무거나 좋아요.”

“그래도 한번 생각해봐. 냄새랑 맛이랑……. 뭐는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거 없어?”

“으음…….”

나빛은 고민하다가 맑게 웃었다.

“엄마 밥이요.”

“…….”

거기까지 가야 하나. 식사 준비를 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르는데.

상호는 결정을 내리고 해련을 돌아보았다.

“반차 쓰겠습니다.”

“그렇게 해요.”

해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도 받았고 하니 빨리 밥 먹이러 가야겠다. 그는 나빛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나빛아.”

“네~.”

집밥을 먹으러 가는 게 좋았는지, 나빛의 표정은 아주 밝았다.

별안간 나빛이 활짝 웃으며 그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근데요, 선생님~.”

“응?”

“저 과일도 먹고 싶어요.”

“과일? 어떤 과일?”

“밥 먹고 말씀해 드릴게요.”

회색 눈동자가 부담스럽게 반짝였다.

아마 해련의 이야기가 부러웠나 보다.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나빛의 눈빛을 피했다.

“……알았어. 그때 말해주면 빨리 달려가서 사올게.”

“헤헤…….”

나빛은 헤실헤실 웃으며 상호와 함께 교장실을 나섰다.

271. 작은 기적

“네?”

유연이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빛이가 입덧을 한다고요……?”

“예.”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빛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머님 밥이 먹고 싶대요.”

“헤헤.”

상호의 앞에 딱 붙어 선 나빛이 웃었다.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유연의 시선이 나빛의 부른 배를 향했다.

“어제는 안 하지 않았어요?”

“안 했죠.”

“점점…….”

“네. 점점.”

심해진다는 말은 둘 다 하지 않았다.

유연이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나아질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죠.”

“그 말 믿고 보낸 건데…….”

나아지긴커녕 입덧까지 생겼으니. 걱정이 오히려 늘어 버렸다.

상호는 나빛을 살살 밀어붙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밥부터 먹고 이야기…… 할까요, 어머님?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래요.”

유연은 한숨을 쉬고 주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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