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래서 병실.
“상상임신이래요.”
그 말에 병상에 앉은 유연과 그 옆에 선 봉진이 눈을 끔뻑였다. 상호의 반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상상임신?”
“네.”
“배가 나왔는데…….”
“인체의 신비죠. 생각만으로 호르몬을 조절하는.”
상호는 어딘가 당당해진 기색으로 말했다. 그런 그의 옆에서는 나빛이 약간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유연이 얼이 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상상임신이라고요?”
“그렇다니까요. 이거 보세요. 나빛이도 저도 잘못한 게 아니었는데, 어머님이 대뜸 쓰러지시니까 저희도 놀라고…….”
“그치만, 나빛이가 선생님이랑 같이 잤다고…….”
“그게 그 뜻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진짜로 같이 잤을 뿐이다.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의사 말로는 이제 알아서 괜찮아질 거래요. 어머님도 걱정 마시고 쾌차하세요.”
“……네.”
고개를 끄덕이는 유연의 옆에서는 봉진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확실해? 상상임신?”
“예.”
“아쉽구만. 손주 한 번 보나 했는데…….”
정말로 아깝다는 듯한 말투였다. 이따금씩 상호를 흘끔거리는 것이 상호를 사위로 삼지 못해 아깝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상호는 헛기침을 하고 문가로 물러났다.
“그럼 저희는 다시 학교 가보겠습니다.”
“잠깐만, 나빛이도? 저런데 어떻게 학교를 다녀?”
“제 친구 중에 이런 거 잘 치료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걔한테 데려가보려구요.”
X급 헌터의 친구. 유연과 봉진도 이제는 쉽게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살펴 가세요.”
“예, 어머님.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빛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문 너머에서 봉진과 유연의 속닥임이 들려왔다.
“집 사놓은 건 어떡하지? 다시 팔아야 하나?”
“그러게 왜 호들갑을 떨었어요.”
“아니, 매물이 좋은 게 있으니까 빨리 사놨지. 끄응, 강 선생한테 못 주면 들고 있기 힘든데…….”
“어디로 샀는데요?”
“앞집 바로 옆에.”
봉진의 집은 부촌의 주택. 상호의 등에 진땀이 흘렀다.
‘뭔 아파트 앞집 사는 것처럼 이야기를…….’
그는 복도를 걸어가며 나빛을 내려다보았다.
봉진과 유연에겐 걱정 말라고 해 놨지만, 실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었다. 이 작은 뱃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아직 판명 나지 않았기에.
이미 한 번 쓰러진 유연에게 또 충격을 주기 싫어서, 일단은 비밀로 한 것이었다.
“나빛아.”
“네.”
“손 줘.”
그의 말에 나빛은 생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상호는 그 손을 잡고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 *
“왔어.”
“왔냐?”
효은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옆에서는 혜소가 새근새근 낮잠을 자고 있었다.
상호는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점심은 먹었어?”
“어.”
효은은 짤막하게 대답하고 상호의 옆에 선 나빛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이 서서히 밑으로 내려갔다.
“그니까 이게 강상호 애라는 거지?”
“헤, 헤헤…….”
나빛이 당황하며 배를 만지작거렸다.
“죄송해요. 손 잡고 자버렸어요…….”
“뭘 죄송해. 이상하게 들리잖아.”
상호는 나빛의 뺨을 살짝 집었다.
둘은 안으로 들어섰고, 나빛이 침대에 앉았다. 효은은 그런 나빛의 앞에 서서 배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뱃속에 성력이 있다고?”
“응.”
상호는 커튼을 치고 불을 껐다.
그러자 나빛의 배에서 은은한 황금빛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본 효은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뭐야, 이거.”
“뭘까?”
“몰라. 나빛이 너 성창 씹어먹었냐? 똥이 빛나는 거 아냐?”
“아니요…….”
“흠.”
효은이 나빛의 황금색으로 빛나는 배를 유심히 살폈다.
“야, 나빛아.”
“네.”
“평소랑 달라진 거 없지? 배 말고?”
“아마도요…….”
“계시는 그대로야? 눈도 침침하거나 하진 않고?”
“네.”
나빛이 고개를 끄덕였다.
효은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나빛이가 만든 게 맞는 것 같아. 성력으로 생명을 만든 거지.”
그게 가능한 일인가. 상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진짜 임신을 했다는 소리야? 의사는 아니랬는데…….”
“글쎄. 그건 모르겠는데.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아니면 진짜 상상임신이랑 겹쳐서 이렇게 된 건지도 모르지.”
“근데 성력으로 생명을 만들 수 있어? 너도 가능했어?”
“난 못했는데, 가능할 수도 있겠지. 신이 천사를 만드는 것처럼.”
“나빛이가 신이 됐다는 소리야?”
“그런 식이란 말이지.”
효은이 혀를 찼다.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을 거 같네. 그래도 위험하진 않아 보여. 일단은 놔둬 봐.”
“……그런가.”
상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죽을병은 아니라는 듯하니.
그런데 갑자기 나빛이 눈을 반짝였다.
“선생님!”
“응?”
“저는 신이에요!”
“……응?”
“이제 제 말 다 들으셔야 해요!”
나빛은 그렇게 말하고는 상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오세요!”
“어…….”
“오세요! 천벌을 내리기 전에!”
“응…….”
천벌은 자주 받아본 것 같은데. 어쨌든 상호는 나빛에게 다가섰다.
나빛이 그의 오금을 톡톡 건드렸다. 무릎을 꿇으라는 듯이.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하려구?”
“꿇으세요.”
그래서 꿇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상호의 얼굴을 나빛의 양손이 덥석 잡았다.
그리고 양 뺨을 쓰다듬었다.
“나빛아?”
“헤헤헤…….”
나빛은 헤실헤실 웃으며 상호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행복해져라~. 행복해져라~.”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이거 하려고 그랬어?”
“신님의 행복마사지예요!”
“그래…….”
나빛의 손이 얼굴을 조물조물거렸다. 황금빛 성력을 품고.
가만히 받고 있으니 정말 행복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상호는 눈을 감고 가만히 그 손길에 얼굴을 내맡겼다.
그런데 갑자기 효은이 깜짝 놀랐다.
“야, 너 흉터 지워져!”
“……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상호는 황급히 나빛의 손을 떼고 거울로 달려가 안대를 들췄다.
흉터가 살짝 흐릿해져 있었다. 아주 조금.
“아…….”
“서, 선생님. 죄송해요…….”
나빛이 울먹이며 성창을 만들었다.
“다시 만들어 드릴게요…….”
“……나빛아?”
“흉터가 없으면 선생님이 아니에요……!”
“나빛아……?”
“제가 멋지게 그려 드릴게요!”
“나빛아……!”
황금빛이 상호를 향해 날아들었다.
* * *
“……그런고로.”
상호는 교탁 옆에 선 나빛의 등을 토닥였다.
“나빛이 임신한 거 아니니까, 다른 반 애들이 뭐라 하면 아니라고 해.”
“네에.”
아이들이 눈을 깜작이며 대답했다.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러나 딱 세 아이는 그렇게 멍청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세희. 태화. 그리고 지윤.
“좋겠네, 쌤은?”
“……뭐가.”
“했는데 없어서.”
“……안 했어.”
“했자나아아아!”
태화가 책상을 발로 뻥 까고 일어섰다.
“나랑은 며칠을 잤으면서도 안 했으면서! 쌤은 왜 머리 하얀 여자들만 좋아해? 하얀 머리 페티시야?!”
그 말에 하솔이 갑자기 사레에 걸렸다.
“켁, 켁…….”
“얜 또 왜 이래? 어쨌든! 나도 오늘 미용실 가서 탈색할 거야! 그럼 쌤이 날 X나게…… 켁!”
“헛소리하지 마.”
상호는 돌아온 물백묵을 잡아채고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상상임신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니까, 괜히 너희들끼리 이상한…….”
“쌤예.”
지윤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엔 이쪽인가.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지윤과 눈을 마주쳤다.
“왜?”
“지금 그 말을 우덜보고 믿으라구예.”
“진단서…… 있어.”
“X급 헌터헌티는 쉬운 일이겠지예.”
지윤이 눈을 부라렸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안 난다 카드라구예.”
“아니…….”
“지는 걱정이 됩니더. 당장 내일 지 책상에 청첩장이 놓여 있을까봐서예.”
“아니야. 진짜.”
상호는 한사코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지윤아. 걱정하지 마.”
“만약 진짜 그렇게 되믄…… 식장에 불지를 겁니더.”
지윤의 눈동자 속에서 불꽃이 일렁였다.
반면 세희의 눈동자에서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한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선생님.”
“……응, 세희야.”
“꿈에서 뵈어요.”
“으응…….”
제자에게 크게 혼나겠구나. 상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마음속에서 예경의 생각이 고개를 빼꼼 들었다.
‘그러게 왜 학생을 건드렸어!’
‘……누나까지 이러지 말아 주세요.’
다 설명했는데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다. 그는 눈물을 삼키고 나빛의 등을 토닥였다.
“자리 가서 앉아. 수업하자.”
“네~.”
“당분간 몸 조심하고…….”
“네~.”
“불편한 거 있으면 바로바로 선생님한테 말해.”
“네~.”
나빛이 방긋 웃자 상호도 살짝 웃었다.
그 애틋한 웃음을 본 원년 3인방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상호에게 다가왔다.
“이거 임신 맞구만? 누굴 속이려고.”
“상상임신이라구예. 내 그런 기는 평생 처음 들어 보는디예. 쌤예 소설 써도 되겠습니더. 선생이 학생 건드리는 소설이나 쓰시지예.”
“그건 수필이지.”
“…….”
상호는 이제 달릴 수 있었다.
콰앙
“앗! 튄다!”
“잡아! 야, 다 나와! 쌤 잡아!”
“거기 서요! 죽여버리게!”
“서겠니……?!”
“서라고오오!”
그는 아이들의 살기를 피해 멀리, 아주 멀리 달아났다.
* * *
“그래서 여기로 왔어요?”
“네.”
상호는 교장실 소파에 누워서 팔로 눈을 가렸다.
“우리 애들 좀 이상한 것 같아요.”
“강 선생이 원인 아닐까?”
“저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어요.”
“눈을 가리고 할 말이 아닌걸.”
해련은 그의 옆에 앉아서 무릎베개를 해 주었다.
“그래서 애들은 그렇다 치고. 어쩌다 학생을 임신시킨 거예요? 강 선생이 그런 사람인 줄 몰랐네.”
“교장선생님이 하실 말씀은 아니죠.”
“나는 이렇게 탱글탱글하게 젊어졌잖아~.”
“……어쨌든 안 건드렸어요. 상상임신이래요.”
“상상임신?”
“네.”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쏟아졌다.
“그것 말고 더 있긴 한데……. 설명하긴 힘들어요. 어쨌든 임신은 아녜요.”
“다행이네.”
해련이 상호의 머리를 쓸었다.
“그래도 겉보기에는 영락없는 임신이잖아요. 학부모는 알아요?”
“네.”
“학교 계속 다니기로 했어요?”
“……그거는 아직.”
“물어보고 잘 대처해요. 알죠?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그럴게요.”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이 컴컴했다. 나빛이 임신한 게 아니라 다행이고, 건강한 것도 다행이지만, 앞으로 나빛을 어떻게 돌봐야 할지, 또 다른 아이들의 오해는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안 그래도 요즘 정신이 없는데.
‘힘들어…….’
‘힘내! 상호는 할 수 있어!’
‘그니까 깜빡이 좀 키고…… 끄응, 사랑해요…….’
‘파이팅!’
‘끙…….’
사랑스러운 목소리마저 어지러운 날이었다.
270. 쾌락 없는 책임
“야, 하나빛.”
태화는 방문을 쿵쿵 두드렸다.
“언제 나오냐고오오~.”
“으, 응. 나갈게.”
곧 나빛이 문을 열고 나왔다. 펑퍼짐한 원피스와 두꺼운 가디건을 입은 채.
밖에서 기다리던 태화와 나디아는 나빛의 차림새를 보고 눈을 끔뻑였다.
“너무 티나지 않냐?”
“그런가? 헤헤……. 그래도 편하잖아.”
“몰라. 알아서 해.”
태화는 혀를 차고 검지로 나빛의 배를 빙글빙글 문질렀다.
“애 이름은 뭐냐? 강…… 강…… 강아지? 강냉이? 강낭콩?”
“헤헤, 남자면 강일. 여자면 강하나.”
“둘째부터는 강둘 강이냐?”
“강이 강두리……, 헤헤.”
나빛은 빙긋 웃으며 나디아와 팔짱을 끼었다.
“가자. 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