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상호는 혜소를 안고 방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학교 어땠어?”
재밌었냐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돌아올 말을 알고 있었기에.
혜소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선생님도 힘든 직업 같아요.”
“그렇지 뭐. 말 안 듣는 아이도 있고…….”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게 특히요.”
상호는 쓰게 웃었다.
“그건 모든 어른이 그렇지. 그래서 수업 들어보니까 어때? 학교 가고 싶어?”
“저는 그렇게 맞기는 싫어요.”
“아, 그, 그거는……. 초등학교는 그런 거 당연히 안 해. 고등학교에서도 나만 그러는…….”
“농담이에요.”
혜소는 상호의 품에서 내려와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섰다.
“친구들이랑 노는 거는 재밌어 보였어요.”
“그치? 그게 제일 중요하지. 학교에서는.”
“그런데 태화 언니는 항상 그래요?”
“응. 항상 그래.”
상호도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서 외투를 벗었다.
이제 저녁 준비해서 혜소에게 먹이고, 다시 나가서 세희와 수업. 그는 냉장고를 뒤적이며 혜소에게 물었다.
“혜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뭐 해줄까?”
“아저씨.”
“아저씨는 먹는 게 아니…….”
상호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입을 닫았다.
그를 빤히 바라보는 혜소의 눈동자에, 평소와는 다른 기이한 빛깔이 깃들어 있었다.
“아저씨는 언니들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될 거예요.”
아이답지 않게 무거운 목소리.
상호는 가만히 혜소를 바라보다가 씩 웃었다.
“항상 그랬는걸.”
“아주 다른 방향으로요.”
혜소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저는 거사님처럼 많은 것을 보진 못하지만…… 그런 저도 알 수 있을 만큼. 아저씨는 길이 달라요. 언니들과는.”
“같이 가지 못한다는 뜻이야?”
“네.”
상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길은, 내가 내 뜻대로 걸어가는 방향을 말하는 거지?”
“아마도요.”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그는 웃었다. 어느 사진 속 여인처럼.
환하게.
정말 환하게.
“결과가 좋든 나쁘든, 성의를 다할 뿐이야.”
혜소는 상호를 올려다보았다.
밥을 함부로 여겼던 사람.
자기 자신조차 함부로 여기는 사람.
“아저씨.”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바라는 것이 주술이랬어요.”
“응.”
“저는 살면서 딱 하나만 바라왔는데…… 그 주술은 실패해 버렸어요.”
“응.”
“이번에도 실패하면, 아주, 아주 많이 슬플 것 같아요.”
혜소는 상호의 손을 잡아 양손으로 감쌌다.
“그러니까…… 아저씨도, 제가 바라는 게 이뤄지기를 바래 주세요.”
혼자서는 힘든 주술이니까.
“……응.”
상호도 양손으로 혜소의 손을 감쌌다.
“꼭 그렇게 할게.”
떠올리는 사람은 달랐지만, 그 둘이 맞은 운명은 같았다.
이번에는 결과가 다르기를 기도하며.
둘은 그렇게 한동안, 오래도록 손을 맞잡고 있었다.
267. 재앙의 겁화
“오늘 시간 있어요?”
“네?”
미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옆을 돌아보았다. 상호가 파티션에 팔짱을 올린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소리일까.
“갑자기 뭔 시간이에요?”
“칼 사주려고. 제가 녹여 먹었잖아요.”
상호의 시선이 미진의 옆에 놓인 검을 향했다. 학교에서 받은 가검이었다.
“좋은 걸로 사줄게요. 시간 한 번 내요.”
미진은 잠시 고민했다.
당장 몬스터를 잡을 일은 없지만, 부숴 먹은 걸 물어준다면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마침 오늘은 시간이 있기도 하고.
하지만 영 마음에 들질 않았다. 꼬시려는 듯한 저 말투가.
“가는 김에 밥도 같이 먹고.”
……‘꼬시려는 듯한’이 아니라, 대놓고 꼬시는 말투가.
미진의 눈 밑이 꿈틀했다.
“뭔 밥이에요. 칼만 사고 오면 되지.”
“기왕 서울 가는 김에 맛집이나 가보자는 거죠.”
“됐어요. 생각 없어요. 칼만 사줘요.”
“생각해 봐요. 먹고 싶은 거 있는지. 어쨌든 종례한 다음에 가는 거예요?”
“……예.”
미진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답을 받아낸 상호가 씩 웃고 문가로 걸어갔다. 그 웃음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꼭 자기 계획대로 되었다는 투라서.
‘짜증나, 진짜…….’
그녀는 혀를 차며 일을 계속했다.
* * *
“얘들아, 선생님 왔…….”
“쌤! 쌤! 얘 좀 봐봐!”
방금 막 문으로 들어선 상호에게 태화가 달려왔다. 한 손으로 나빛을 질질 끌고서.
“얘 살 엄청 쪘어! 배 나온 거 봐!”
“으이잉…….”
나빛이 울상을 지으며 태화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태화는 기어코 나빛을 상호의 앞에 세웠다.
“봐봐!”
“친구들 좀 가만히 놔둬라, 임마.”
“그치만! 진짜 뽈록 나왔는걸.”
“나와봤자 얼마나 나왔…….”
뽈록 나와 있었다. 옷 위로도 보일 만큼.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눈을 끔뻑였다.
“……나왔네?”
“흑……!”
나빛이 울먹이며 성력으로 각목을 만들었다.
“태화 미워……!”
“아니 이거 미친년아니야! 빠따 안 치워?!”
“태화 나빠!”
“빠따 들고 뭐라는거야, 멍청아! 악!”
각목이 태화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상호는 태화를 쫓는 나빛의 배를 쳐다보며 고개를 기웃했다. 살이 쪘다기엔 너무 배만 나왔다.
저래서야 마치.
‘임산부 같은…….’
상호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쓸데없는 상상일 뿐이다. 절대 그럴 리 없으니까. 그냥 살이 조금 찐 것뿐이다.
상상일 뿐이다.
상상.
‘조례나 해야지.’
그는 나빛과 태화를 내공으로 붙잡아 각자의 자리에 내려놓았다.
“쌤! 얘가 빠따로 나 때렸어!”
“선생님, 태화가 자꾸 놀려요…….”
“앉아, 앉아. 선생님 조례 좀 하게. 어디 보자……. 안 온 사람은 없고.”
상호와 세희의 눈이 마주쳤다.
“세희는 학교 끝나면 선생님한테 와. 같이 검 사러 가게.”
“검이요?”
세희가 눈을 반짝였다.
“학교 끝나고 바로 가요?”
“응. 미진 선생님까지 같이.”
그 말에 세희의 입술이 아주 살짝 앞으로 튀어나왔다.
“……알았어요.”
뭔가 심기를 건드렸을까.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웃어 보였다.
“밥…… 밥도 맛있는 거 사줄게.”
“네.”
여전히 튀어나온 입술. 그 옆에서 태화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도 외식할래!”
“지도 외식할랍니더.”
“넌 빠져, 돼지야! 쌤, 나 랍스터 언제 사줄 거야?!”
“평가 잘 보면 사주기로 했잖아…….”
상호는 한숨을 쉬고 손을 내저었다.
“됐어. 수업이나 하자. 갈아입고 나와.”
* * *
“도검상은 어디로 알아봤어요?”
미진이 조수석에서 벨트를 매며 물었다.
“뭐 어디 듣도 보도 못한 곳으로 가는 건 아니죠?”
“글쎄요. 발품 팔아봐야죠.”
상호는 핸들을 잡으며 대답했다.
사실 그는 도검상에 대해서는 쥐뿔도 몰랐다. 한평생 검을 사볼 일이 없었기에. 검에 대해 아는 건 많아도 그걸 파는 곳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었다.
“미진 씨가 아는 데는 없어요? 원래 쓰던 검은 어디서 샀어요?”
“협회 옆에……. 근데 거기는 요즘 질이 안 좋대서. 계속 양산형 제품만 들어온대요. 원래부터 좋은 물건 찾기 힘들기도 했고.”
“하긴 헌터들이 들락날락할 테니까……. 다른 데로 가야겠네요.”
뒷좌석에서는 세희가 열심히 검색을 하고 있었다. 상호는 거울에 비친 세희를 흘끗하며 물었다.
“세희 가보고 싶은 데 있어?”
“여기 좀 괜찮은 것 같아요. 대룡검상…….”
“그래? 거기로 가보자. 주소 찍어줘.”
차가 서울을 향해 달렸다.
* * *
“어서오세요~. 대룡검상입니다.”
체격이 다부진 청년이 허리를 숙였다.
상호와 미진, 세희는 안으로 들어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노랗고 은은한 조명, 벽면을 빼곡히 채운 거치대와 무기들. 꼭 박물관과 신발 전문 매장을 합쳐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꽤 이름난 곳인지, 매장 안에는 헌터로 보이는 이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칼을 좀 보러 왔는데요.”
상호의 말에 청년이 팔을 뻗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안내한 곳은 검이 가득 걸린 벽이었다. 점원은 사서가 책을 찾듯 검들을 손끝으로 더듬거리며 물었다.
“어떤 검을 찾으세요?”
“한번 봐야 될 것 같은데요.”
상호는 세희를 돌아보았다.
“골라봐.”
“만져도 돼요?”
“네. 들어 보세요.”
세희는 점원의 말을 듣고 검들을 둘러보았다.
그런 다음 하나를 집어 뽑다가, 다 뽑기도 전에 고개를 저으며 검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점원이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어떤 물건을 선호하시나요? 날 폭이나, 손잡이 재질이나…….”
“저는…… 잘 몰라요. 만져봐야 알아요.”
상호는 다음 검을 고르는 세희를 지켜보았다.
이번 물건도 영 아니올시다였는지, 세희는 다시 검을 내려놓고 머리를 긁적였다.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릴 듯싶었다.
그 옆에서 미진도 검을 고르기 시작했다.
“이 검은 어디 물건이에요?”
“아, 그거는 저기 뉴타입코리아라고 실험적인 시도를 자주 하는 곳이에요. 되게 가볍죠?”
“네.”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좀 걸리지만 한번 손에 익고 나면 쾌검을 쓰기도 좋고, 피로하지 않아서 오래 싸울 수 있어요.”
“그럼 이거는 어디 거예요?”
“그거는 이제 TG암스라고 태궐 쪽…….”
상호는 둘의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검을 쓱 둘러보았다.
예경의 검보다 좀 더 세련된 디자인, 멀끔한 칼날. 사실 품질로 따지자면 여기 걸린 그 어느 검을 가져와도 예경의 검보다 나았다. 개벽 전에 만들어진 것을 주워다 썼으니까.
‘칼이 뭐 휘두르는 느낌만 좋으면 되지.’
초강기를 쓸 수 있는 이들에게는 그랬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세희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응?”
“선생님 검 좀 빌려주세요.”
“비교하려고?”
“네.”
상호는 허리에 찬 검을 빼서 세희에게 건넸다.
세희는 살짝 검을 흔들었다. 무게중심을 가늠하는 듯이. 그러고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선생님 검은 어디 거예요?”
“글쎄. 누나도 몰랐을걸.”
‘응! 몰라!’
‘……갑자기 나오시면 제가 너무 당황스러워요.’
알 턱이 없다. 검에 이름이 쓰여 있는 것도 아니고. 손질하면서 몇십 몇백 번을 봐 왔지만 그런 흔적은 코빼기도 없었다.
세희는 검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상호에게 돌려주었다.
“비슷한 검은…… 없을까요?”
“비슷한 거? 이게 맘에 들어?”
“네.”
예전에 썼던 감각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주문제작하는 방법도 있긴 해.”
“주문제작이요?”
“응.”
상호는 점원을 돌아보았다.
“보통 얼마죠?”
“주문제작이요, 아무래도 개인 맞춤형 주문제작은 회사는 안 받고 장인들만 받으니까……. 싼 것도 3천부터 시작할 거예요.”
그 말에 세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 그냥 학교 칼 쓸래요.”
“그래도 진검을 써야지. 가검은 베어 넘길 때 쓸데없는 힘이 들어.”
“지금 당장 필요하지는 않으니까…….”
부담스러운가 보다. 상호는 세희의 뺨을 살짝 문질렀다.
“그럼 나중에 다시 보러 오자. 천천히 생각해 봐. 미진 씨는 골랐어요?”
“네.”
미진이 검을 하나 들어 보였다.
“쓰던 검이랑 비슷한 게 있어서. 이걸로 할게요.”
“그래요. 이건 얼마예요?”
점원이 벽을 흘끗했다. 상호도 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격표에는 9900000라고 적혀 있었다.
‘……얼마지?’
상호는 0을 세다가 미진을 돌아보았다.
“비슷해서 사는 거…… 맞죠?”
“돈 많잖아요.”
“많지는 않은데…….”
“그러게 누가 남의 칼 녹이래요.”
“자고로 칼이란 건 소모품…….”
“위자료인 셈 치세요.”
면죄부인가. 상호는 얼마 전에 한식당에서의 일을 떠올리고는 군말 없이 지갑을 꺼냈다.
“……계산해 주세요.”
* * *
“밥은 맛있네요.”
조수석에 앉은 미진이 새침하게 말했다.
접시당 몇만 원인데 맛이 없으면 진작에 망했을 것이다. 상호는 주머니에 싸늘하게 식은 지갑을 집어넣으며 눈물을 삼켰다.
“위자료……는 다 때운 거예요?”
“앞으로 하는 거 봐서요.”
“충분히 낸 거 같은데…….”
상호는 뒤에 앉은 세희를 흘끗했다. 세희는 멀뚱히 창밖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배가 부른 듯 배에 손을 얹고서.
입이 짧아서 남들보다 많이 먹진 못했지만, 입맛에는 잘 맞았던 듯했다.
“세희 그럼 다음엔 다른 가게 가서 칼 찾아볼까?”
“네.”
“그래. 나중에 시간 나면 가자.”
차가 학교를 향했다.
* * *
방으로 들어서자 효은이 침대에 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효은은 TV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심드렁하게 물었다.
“뭐 하다 왔어?”
“세희랑 미진 씨랑. 칼 사러 갔었어.”
“솔직히 말해 봐. 외도했지?”
“……아니.”
바닥에는 혜소가 엎드려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상호는 혜소의 옆에 앉아 뭘 하는지 지켜보았다.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무언가를 그리는 중이었다.
“혜소 뭐해?”
“그림 그려요.”
“무슨 그림이야?”
온통 하늘색. 그리고 노란 점.
혜소는 노란 크레파스를 끼적이며 중얼거렸다.
“몰라요.”
“태양이야?”
그렇다기엔 너무 작은데. 차라리 별 같았다.
“잘 그리네.”
“점인데요.”
“……색칠을 잘하네.”
“그냥 한 가지 색으로 덮은 건데요.”
“딱 보면 알지.”
상호는 혜소의 머리를 쓰다듬고 일어났다.
“밥 먹었어? 혜소랑?”
“어.”
“그럼 나 애들이랑 수업하고 올게.”
그가 구두를 신자 효은이 눈살을 찌푸렸다.
“또?”
“또가 어딨어. 하루종일 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일이다.
“갔다 올게.”
상호는 씩 웃으며 다시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