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7화 (277/501)

* * *

“세희, 태화.”

상호가 둘을 가리켰다.

스탠드에 앉은 둘은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은율이까지.”

은율은 일어나는 게 좀 늦었다. 세 명을 부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상호는 셋을 향해 나오라고 손짓했다.

“나와.”

“셋이서 해요?”

“응. 태화랑 은율이가 같은 편.”

2대 1. 세희와 태화, 은율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운동장으로 걸어 나왔다.

태화가 상호를 향해 물었다.

“다굴빵을 치라는 거야?”

“칠 수 있으면 쳐.”

상호는 태화와 은율에게만 목걸이를 주었다.

세희가 든 검은 목검.

“봐주지 마. 평소처럼 최선을 다하라고. 무슨 말인지 알지?”

“……그래도 돼?”

태화의 시선이 세희의 목을 향했다. 목걸이가 없는 목을.

“괜찮아?”

“괜찮아.”

상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는 단순히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게 아니라, 세상을 구하기 위한 대비책을 세우고 있는 것이기에.

물론 정말로 위험하면 끼어들겠지만.

“적이라고 생각하고. 바로 시작해.”

“응.”

태화와 은율이 세희의 주변을 돌았다. 각각 서로의 반대편에서.

한 명은 1학년 평균 1등.

한 명은 1학년 연말 1등.

둘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아이는 없다. 적어도 동갑내기 중에는.

‘다혜는 동갑이 아니니까…….’

상호는 세 아이를 주시하다가 스탠드 쪽을 흘끗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남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미진, 그리고 구경 중인 혜소가 보였다.

혜소는 세희와 태화, 은율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관심이 생겼나.’

그는 다시 셋에게 집중했다.

둥글게 원을 그리며 돌던 은율이 갑자기 땅을 박찼다. 세희의 눈동자가 태화를 향한 순간이었다.

은율의 눈과 검이 동시에 번득였다.

콰악

“……어?”

검이 손바닥에 가로막혔다. 적어도 검으로 받아칠 줄 알았는데.

은율은 세희의 손에 둘러진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

비교도 안 되게 강대한 기운. 자신의 강기로는 도저히 뚫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강기를 온몸에 두르지는 못할 것이다. 은율은 빠르게 뒤로 물러나 다시 공격할 준비를 했다.

그 사이에 태화의 공격이 이어졌다.

“쌤이 하랬어! 삐지지 마!”

공중에 뜬 태화가 세희를 향해 손을 내리쳤다. 손에는 불꽃으로 만든 장미를 들고 있었다.

세희는 빠르게 호신강기를 둘렀다. 초강기가 아닌 평범한 강기로.

콰아아앙

대폭발이 일어나 흙이 비산했다.

상호는 쏟아지는 흙 사이로 은율이 달려드는 것을 포착했다. 검에는 지금 세희가 두른 강기보다 조금 더 강한 강기가 씌어 있었다.

그대로 베면 베인다.

하지만 세희도 은율의 공격을 이미 알고 있었고,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마치 순간이동을 쓴 것처럼.

은율은 당황하며 허공에 헛손질을 했다.

“어?”

비산한 흙의 일부가 일직선을 그리며 사라졌다.

도화지에 마구 찍은 점을 지우개로 쭉 지운 것처럼.

은율의 눈동자가 그곳을 향했다.

“여기야.”

그 반대편에서 세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퍼억

목검이 은율의 허리를 찔렀다.

“……윽!”

은율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나동그라졌다.

남은 것은 태화.

세희는 태화를 찾아 주변을 재빨리 훑었다.

“얍!”

세희의 다리 사이에 검은 연기가 펑 하고 터졌다.

기습적으로 나타난 태화는 양손을 모아 검지를 세워서 세희를 향해 찔렀다.

“기습 똥침…… 켁!”

“나가 죽어.”

세희는 목검으로 태화의 머리통을 때렸다. 청량한 수박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싸쥐고 바닥을 구르던 태화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엥? 여기가 오디지? 난 누구징?”

“안 아프잖아. 바보야. 목걸이 했으면서.”

“익숙한 하늘이다아──.”

비틀거리며 바보 행세를 하는 태화를 내버려 두고, 세희는 상호를 돌아보았다.

상호는 살짝 웃었다.

“나쁘지 않았어.”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겼으니 그의 기준은 달성한 셈이다.

“다음엔 나빛이까지 해서 3대 1로 해 보자.”

“나빛이까지요?”

세희가 멀거니 눈을 깜빡였다.

“나빛이까지 같이 싸우면 정신없어서 힘들 것 같은데…….”

“그게 중요한 거야. 정신없는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냐. 나중에는 지윤이까지 끼울 거니까 각오 단단히 해.”

“네.”

“어쨌든 방금은 잘했어.”

검을 막아내는 근력과 초강기, 폭발을 막는 호신강기, 상대의 눈에서 사라지는 경공, 그걸 알아챈 상대를 기만하는 보법, 검을 휘두르는 속도, 순간이동에 반응하는 반사신경까지.

완벽하진 않았지만, 부족함도 없었다.

“이제 수업하자.”

상호는 세희와 눈을 마주쳤다.

“쉴 필요 없지?”

“네.”

세희가 빙긋 웃었다.

목검에서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시작해요.”

“그래.”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뽑았다.

그런 둘의 모습을 아이들, 그중에서도 혜소가 특히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 복잡한 눈빛으로.

곧 둘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266. 눈이 좋은 아이

“안 아파요?”

“응?”

세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혜소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동그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많이 아파 보여요.”

“아프지.”

안 아플 리는 없다.

세희의 옆에서는 나빛이 성력으로 치료를 하는 중이었다. 금색의 빛이 닿을 때마다 세희의 얼굴에 난 상처가 하나씩 사라져 갔다.

“그래도 아픈 건 별것 아니니까.”

수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움직일 힘이 있으면 움직여야 했다. 운동장으로 다시 걸어가려는 세희를 나빛의 걱정 담긴 목소리가 불러 세웠다.

“세희야. 좀 쉬어…….”

“괜찮아.”

세희는 살짝 웃고 상호에게로 걸어갔다.

* * *

수업을 받을 때마다 항상 만신창이가 되었다.

옷이 찢어지고, 헤지고. 입술이 터지고, 살을 베이고. 그래도 세희는 쉼 없이 수업을 받았다. 치료받고, 대련하고, 치료받고, 대련하고.

세희가 여섯 번째로 쓰러졌을 때, 점심시간 종이 울렸다.

“식사하자.”

상호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집어넣었지만, 세희에게는 대답할 기력이 없었다.

짓밟힌 팔이 너무 아팠다.

“으…….”

세희는 입에 들어간 흙을 뱉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흐릿한 시야에 나빛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나빛은 성력을 여러 번 써서 그런지 지친 기색이 조금씩 엿보였다.

하지만 세희보다 힘든 건 당연히 아니었기에, 티를 내지는 않았다.

“누워 있어. 치료해 줄게…….”

“일으켜줘.”

“누워 있으라니까…….”

뒤따라 다가온 지윤이 세희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괘안나?”

“응.”

“괘안타면 괘안은 거겠제.”

지윤은 세희의 옷에 묻은 흙을 털었다.

그 모든 모습을 혜소는 스탠드에 앉아 지켜보았다. 어린 소녀의 분투와 무정하다시피 제자를 구타하는 선생을.

그 무정한 선생은 돌아서서 어딘가로 걸어갔다.

‘모르겠어…….’

혜소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혜소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밥 먹으러 갑니다.”

뒤를 올려다보니 눈을 감은 소녀가 서 있었다.

“같이 먹으러 가는 겁니다.”

“저 빵 먹어서 배불러요.”

“같이 받아서 한두 입만 먹으면 됩니다.”

이츠키는 혜소를 등에 업고 눈을 떴다.

곧 세희와 지윤, 나빛이 합류했고, 아이들은 다 함께 급식소로 향했다. 혜소는 고개를 돌려 상호를 바라보았다.

상호는 아이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 * *

혜소는 식탁에 턱을 괴었다.

“세희 언니.”

“응.”

“왜 세희 언니만 이렇게 심하게 맞아요?”

세희는 밥을 오물거리다가 대답했다.

“내가 선생님한테 제일 가까운 사람이니까.”

“가까우면 때려도 돼요?”

“필요하니까.”

세희의 옆에서는 이츠키가 눈을 감은 채로 더듬더듬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 이츠키의 숟가락에 태화가 김칫국물을 몰래 붓고 낄낄거렸다.

세희는 태화를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야. 걱정 안 해도 돼.”

“아저씨도 원해서 하는 일이에요?”

“아마도. 어쨌든 필요한 일이니까.”

“왜 필요한 일이에요?”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가르쳐주는 거니까.”

지금 당장은 어쨌든 그렇다.

하지만 혜소는 이해를 하지 못해 뚱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게 왜 언니인 거예요?”

“내가 선생님이랑 제일 가까워서?”

“그럼 왜 그런 역할을 맡긴 거예요?”

“내가 제일 적합하니까.”

“……이해가 안 돼요.”

혜소의 눈동자가 아래를 향했다.

“어떻게 제일 가까운 사람을 때릴 수 있는지…….”

그러고도 멀쩡히, 무심히. 태연하게 생활하고 또 때린다는 것이, 혜소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잘 모르겠어요.”

“사실 나도 잘 몰라.”

“네?”

“그냥 선생님이 좋으니까 따라가는 거지.”

세희는 씩 웃고 태화의 등짝을 후려쳤다. 이츠키의 숟가락에는 태화가 조리실에서 순간이동으로 훔쳐 온 통마늘 한 알이 쌀밥 깊숙이 박혀 있었다.

“아야! 왜 때려, 개년아!”

“작작해, 멍청아.”

“마늘 몸에 좋은 거 모르냐? 마늘이 뭐 어때서! 한국에 왔으면 마늘을 먹어야지!”

“자, 자. 너 많이 먹어.”

“흐으응! 잘못했어, 꼬리 살살 잡아…….”

혜소는 나빛이 준 소시지를 오물거리며 티격태격하는 둘을 바라보았다.

* * *

점심시간이 끝난 후, 아이들은 교실에서 쉬었고, 혜소는 화장실을 가기 위해 복도를 걸어갔다.

지나가는 학생들이 혜소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애기다.”

“진짜 애기네. 저번에 봤던 그 강쌤 닮은 애보다 더.”

혜소는 아장아장 계속 걸었다.

화장실에 가보니 만석인데다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래도 다른 층 화장실을 써야 할 듯싶었다.

‘2층으로 가야지.’

그래서 중앙 계단으로 향했다.

2층으로 내려가 보니 3층과 달리 남자 화장실이 있었다. 혜소는 남자 화장실을 지나쳐 여자 화장실로 가려다가, 남자 화장실에서 나오는 상호를 맞닥뜨렸다.

세수를 했는지, 얼굴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혜소 어디 가?”

“화장실이요.”

혜소의 목소리에는 약간 쌀쌀맞은 데가 있었다. 아끼는 아이를 그렇게 심하게 때린다는 것이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러고도 이렇게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이 못마땅하고 불쾌해서.

“화장실? 위층은 다 쓰고 있나 보네.”

“네.”

대답하던 혜소는 상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가 멈칫했다. 평소와 다른 빛깔이 보여서.

눈시울이 조금 붉었다.

“……아.”

시선을 느꼈을까. 상호는 혜소를 향해 씩 웃었다. 작위적인 느낌이 드는 미소.

하지만 눈을 가릴 수는 없었다.

혜소는 상호를 향해 양팔을 뻗었다.

“아저씨.”

안아달라는 듯이. 혹은 안아주겠다는 듯이.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눈을 끔뻑이다가 혜소를 안아 들었다.

“응, 왜?”

“……그냥요.”

품에 안긴 혜소가 상호를 토닥였다.

등을 두드리려는 듯했지만, 팔이 짧아 옆구리까지 뻗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도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상호는 그제야 진짜 웃음을 지으며 혜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냥이야?”

“네. 그냥.”

혜소는 그렇게 한참 동안 상호를 다독였다.

* * *

“오늘도 고생했어.”

상호는 교탁에 손을 올리고 열다섯 명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곧 평가네. 그치?”

“네.”

“잘 준비해서 보고…… 태화랑 미래랑 아리는 누나 수업 잘 듣고 있나?”

“네.”

“가은이는…….”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미진 선생님한테는 잘 배우고 있지?”

“……네.”

가은이 언짢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말하기 싫은데 마지못해 한다는 듯이.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선생님이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너희한테 소홀히 하고 있지만…… 그래도 너희가 도와달라고 하면 그때는 도와줄 거야. 알지?”

“네~.”

“고맙다.”

상호는 교탁을 탁 쳤다.

“수고했다. 들어가서 쉬어.”

“네~.”

아이들은 하교 준비를 했다.

혜소는 의자에서 일어나 상호를 향해 걸어가려다가, 아직 이츠키가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자리에 가만히 남았다. 이츠키의 등 뒤에.

일어나려 했던 기척을 느꼈는지, 이츠키가 눈을 감은 채로 혜소를 돌아보았다.

“혜소.”

“네.”

“얼굴 한 번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네.”

혜소는 허공을 더듬거리며 다가오는 이츠키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왔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혜소의 이목구비를 훑었다.

“볼이 말랑말랑합니다.”

“네.”

“되게 귀여울 것 같은데.”

“그건 모르겠어요.”

혜소는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언니는 제 얼굴만 못 보는 거예요?”

“체질이 특이해서.”

이츠키는 혜소의 볼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옆에서는 하교 준비를 마친 아이들이 하나둘씩 교실을 나서고 있었다.

“영혼과 인연을 보는 눈입니다. 혜소는 인연은 적은데 영혼이 커서.”

“커요?”

“밝습니다. 작은 태양처럼.”

가방을 둘러멘 태화가 한마디 했다.

“빡빡이니까 빛나는 거지.”

“넌 조용히 해.”

세희가 태화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이츠키는 그런 둘의 기척을 귀로만 느끼다가 혜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늘만 온 겁니까? 학교에?”

“아니요. 아저씨 방에 같이 살고 있어요.”

“그럼 학교에 자주 오는 겁니다.”

“눈 아프지 않아요?”

“괜찮습니다. 눈은 감으면 되니까.”

이츠키의 손이 혜소의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곁에 있으면 뭔가…… 따뜻한 기분이 들어서.”

혜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알겠습니다.”

이츠키는 혜소를 놓아주고 중얼거렸다.

“……꼬마 해님.”

혜소는 이츠키를 두고 상호에게 걸어갔다. 상호는 그런 혜소를 안아 들고 교실을 나섰다.

그제서야 가방을 챙기는 이츠키의 옆에 세희가 앉아 물었다.

“이츠키는 혜소 얼굴 모르는 거야?”

“네.”

“궁금해?”

“궁금합니다.”

만져보기만 해도 귀여운 걸 알겠다. 하지만 눈이 부셔서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못 보면 못 보는 대로 사는 겁니다.”

“아니 그게……, 사진 찍으면 되는 거 아냐? 사진도 눈부셔?”

“……에.”

이츠키는 가방을 싸다 말고 눈을 끔뻑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