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5화 (275/501)

* * *

“므웅.”

다혜의 손가락이 상호의 입술에 닿았다. 마치 조용히 있으라는 듯이.

상호는 목덜미에 쏟아지는 다혜의 숨결을 느끼며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청각이 예민해진 상태였다.

이곳은 본관 3층의 중앙 소화전 속.

“아 씨, 어디 갔지?”

계단 쪽에서 태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고 빨고 하려면 하루도 부족한데……. 야, 은율. 너 3층 한번 뒤져봐. 난 4층 보고 올게.”

“응.”

발소리가 하나는 멀어지고, 하나는 가까워졌다.

수갑 찬 다혜의 손이 상호의 입을 막았다.

‘왜 숨어야 하는 건지…….’

상호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다혜에게 맞춰 주기로 했다.

은율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소리가 점차 복도 끝으로 멀어져 갔다. 상호는 그 틈을 타 다혜를 돌아보았다.

“다혜야.”

“므아.”

“왜 숨어야 하는 거야?”

“느아우앙.”

물어본 게 잘못이다.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는데.

그때 다혜가 그를 끌어안고 몸을 꿈지럭거리더니, 입마개 찬 볼을 상호의 뺨에 비비다가 속상한 목소리를 내었다.

“우응…….”

입마개를 풀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열쇠가 없었다. 상호는 쓰게 웃으며 다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 지금은 못 풀어줘. 열쇠를 놓고 와서…….”

“느우웅.”

다혜는 괜찮다는 듯 그의 목덜미에 이마를 비볐다.

“다혜 밥 먹었어?”

“느앙.”

“배고플 거 아냐.”

“우우웅.”

“이제 그만 나가서 밥 먹으러 가자. 애들이 장난치는 거야. 괜찮아.”

“아으아으.”

다혜가 소화전을 나가려는 상호를 붙잡았다.

둘이서 더 있고 싶은 걸까. 상호는 탈출을 포기하고 다혜의 다리 사이에 앉았다.

등을 끌어안는 다혜의 몸에서 잔근육이 느껴졌다.

‘아르게스에서 살아남은 아이답네…….’

그는 그렇게 안겨 있었다.

문득 은율의 발소리가 다시 다가오는 게 들렸다. 수색을 마치고 계단으로 모이려는 모양이었다. 다혜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다시 상호의 입을 막으려고 손을 들었다.

피어오른 먼지가 상호의 코를 간질였다.

“에…….”

상호는 고개를 뒤로 까딱이다가.

“에엣취!”

재채기를 했다.

“므앙……!”

다혜가 당황하며 상호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은율의 발소리가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곧 소화전의 문이 살짝 열리고.

“언니.”

그 틈으로 은율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겁에 질린 다혜가 상호를 꼭 끌어안았다.

“므앙…….”

“저희 선생님이에요.”

“아으응…….”

“주세요.”

“느앙!”

다혜는 고개를 저으며 앙탈을 부렸지만, 곧 은율의 눈빛을 견디지 못해 몸을 축 늘어뜨리며 상호를 넘겨주었다.

“느우웅…….”

“자, 오세요. 선생님.”

은율이 두 팔을 벌려 상호를 안아 들었다. 상호는 자꾸 아이들이 자신을 안아 드는 게 많이 불편했다. 진짜로 어린애 취급하는 것 같아서.

“은율아……. 선생님 걸을 수 있어.”

“전 반장이니까 선생님을 책임지고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어요.”

“어느 반 반장이 선생님을 보살펴?”

“우리 반은 그래요.”

“난 그런 거 시킨 적 없어…….”

“제가 정했어요.”

“……응?”

“반장은 반의 규칙을 정할 권리가 있어요.”

“그래…….”

반을 뺏겼다. 상호는 은율의 품에 안긴 채로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때 위층의 수색이 끝났는지 태화가 검은 연기를 터트리며 나타났다.

“야, 위에 없…… 우왓! 쁘띠상호!”

“……이상한 별명 짓지 마.”

“큐티상호? 미니상호? 상호주니어는 내가 만드는 게 상호주니어고.”

“남들이 들으면 어쩌려고……. 차라리 이름을 새로 지어.”

상호가 혀를 차는데, 은율이 눈을 반짝였다.

“은호.”

“……응?”

그는 눈을 끔뻑이다가 대답했다.

“그래, 뭐. 은호도 좋고…….”

그러자 이번엔 태화가 눈을 부라렸다.

“태호.”

“태호도 뭐 나쁘진 않네. 그냥 대충 아무렇게나…….”

“은호.”

“태호.”

“도은호.”

“이태호.”

둘의 눈동자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놔두면 또 싸우겠다. 은율에게 안긴 상호는 손사래를 치며 둘을 밀쳐냈다.

“은호로 해. 은호…….”

“편애애앳!”

“시끄러! 뭔 편애야. 도은호야 도은호, 이 모습으로는. 앞으로 그런 줄 알아.”

“우씨…….”

태화는 입을 삐죽 내밀고 꿍얼거리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러든가. 근데 쌤 밥 먹었어?”

“아니. ……아, 맞다.”

세희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상호는 당황하며 은율과 태화를 돌아보았다.

“세희랑 밥 먹기로 했는데…… 빨리 기숙사 가자.”

“세희랑?”

“응. 오늘 같이 수련 가기로 했는데 못 가게 돼서. 둘이서 여행 가기로 했어. 당일치기로…….”

“그으래~?”

태화의 입술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우리 은호 맘마 먹으러 갈까?”

“……응?”

“누나가 맘마 줄게.”

“뭔, 뭔 맘마야. 세희가 기다리고 있다니까…….”

“누나들 방으로 가자. 야, 은율. 네가 데려가. 난 동반 공간이동 못하니까. 내가 밥 사올게.”

“응.”

은율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태화가 검은 연기를 남기고 사라졌다.

아주 죽이 척척 맞는다. 이 둘이 이렇게 친했던가.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은율을 올려다보았다.

은율이 그를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은호야.”

“……지금은 상호야.”

“도은호.”

“상호라고…….”

“누나랑 맘마 먹을래?”

“강상호라니까……!”

“가자.”

은율은 상호를 품에 꼭 끌어안아 항의를 묵살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잘 보여주지 않는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다혜는 그런 둘의 뒷모습을 소화전에 처박힌 채로 멍하니 쳐다보다가, 입술 사이로 얼빠진 목소리를 흘렸다.

“……아으.”

264. 다 이상해

“왜 도은호예요?”

나빛이 서운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나호라는 이름이 더 좋은데…….”

“그냥 은율이가 거기 있었으니까……. 이름이 뭐가 중요해. 어차피 본명은 강상호인데…….”

“오지호는 안 됩니꺼?”

“뭐가 중요하냐고…….”

지켜보던 태화가 한마디 했다.

“그럼 합쳐서 오나호 해.”

“……어감이 굉장히 이상하네.”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도시락은 세 개. 방에 모인 사람은 세희를 제외한 2학년 전원. 나빛과 나디아와 지윤은 굶으면서도 상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니꺼 상호가 아이고 은호란 말입니꺼?”

“……상호인데 가명이 은호인 거지.”

“그니꺼 우리 은호야가 누나덜이랑 뒹굴어뿔고 싶다 아입니꺼?”

“밥 먹고 있잖아…….”

그는 일부러 천천히, 깨작깨작 밥을 먹었다.

하지만 야속한 도시락은 점점 비어만 갔고, 그럴수록 아이들의 눈빛은 초롱초롱 빛이 났다.

그 눈빛을 견디기가 아주 힘들었다.

‘빨리 세희 보러 가야 하는데…….’

상호는 빈 도시락을 내려놓고 은근슬쩍 문가로 걸어갔다.

“얘들아, 선생님 세희 데리고 올게~.”

“네~.”

나빛이 황금색 밧줄로 상호를 묶으며 밝게 웃었다.

“다녀오세요~.”

“말이랑 행동이 달라, 나빛아…….”

“헤헤헤…….”

결국 상호는 탈출에 실패하고 밧줄에 묶여 방 한가운데에 앉혀졌다.

“헤헤헤…….”

그의 주변에 아이들이 둥글게 둘러앉았다.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상호의 눈동자에 불안감이 깃들었다.

“……얘들아?”

“은호야~.”

나빛이 방글 웃었다.

“나빛이 누나라고 해봐, 헤헤헤…….”

“나빛이 누……나.”

“으헤헤헤…….”

온통 발갛게 물들어버린 나빛을 제치고 태화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야, 은호.”

“……왜.”

“따라해봐. 일 더하기 일은…….”

“안해.”

상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대로 가다간 어른으로 돌아가도 애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슬슬 기강을 잡아야 할 듯했다.

“얘들아.”

“웅.”

“선생님 앞에 앉아 봐.”

아이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의 앞에 모여 앉았다.

하지만 지금은 장난을 치려는 게 아니었다. 그는 양반다리를 하고 무릎에 손을 얹었다. 아버지가 딸을 혼낼 때처럼.

“얘들아. 내가 선생님이지?”

“엉.”

“네.”

“어른이지?”

“네.”

“너희가 선생님을 어른 취급하지 않는 거는 아주 예의 없는…….”

“어쭈, 훈계하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태화가 상호에게 달려들었다.

“어린애 주제에 누굴 훈계해! 얌전히 귀여움이나 받아!”

“야, 임마……!”

“헤헤헤, 우리 은호 너무 귀여워…….”

나빛도 가세해서 상호의 뺨을 문질렀다.

다른 사람들한테 들킬까 봐 새 이름을 지었더니 이젠 맘 놓고 애 취급을 하고 있었다. 툭하면 은호라는 이름을 부르면서.

그렇지만 이 몸으로는 애들을 혼낼 수가 없었다.

‘에휴, 그냥…… 이 몸일 때는 은호로 살아야겠다…….’

상호는 눈물을 삼키며 운명을 받아들였다.

* * *

“그래서 못 오셨어요?”

“으응.”

상호는 이츠키의 품에 안긴 채로 웅얼거렸다.

자기 방의 문턱을 밟고 선 세희가 그를, 그리고 그 뒤의 아이들을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이태화.”

“웅.”

“너지.”

“모가?”

“나만 쏙 빼고 선생님 데리고 있던 거.”

“아니?”

태화가 어깨를 으쓱이며 아이들을 빙 둘러 가리켰다.

“다 같이 한 건데?”

“왜?”

“너만 쌤이랑 놀러갈라 그랬대서~. 괘씸해갖고 잠깐 쌤 데리고 있었…….”

그 순간 세희의 몸에서 강대한 내공이 흘러나왔다.

비록 상호의 원래 내공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동안 꾸준히 단전을 넓히는 수련을 해왔던 터라 일반 학생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거기다 상호가 단전을 꽉꽉 채워 넣어 주기까지 했으니.

아이들과 상호는 유형의 압박을 느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세희, 야……?”

“나도…….”

세희가 주먹을 부들부들 떨더니 빽 소리쳤다.

“나도 선생님이랑 놀꺼라고!”

투화악

내공이 해일처럼 그들을 덮쳤다.

“우왓……! 역시 삼좌!”

“머꼬, 은제 이리 세짔노.”

다른 아이들은 마나가 익숙하거나 내공이 있어서 세희의 기에 휩쓸리지 않았지만.

몸이 초기화되어버린 한 사내는 그렇지 못했다.

“……꼬로록.”

“어? 선생님!”

“쌤예! 아이고, 세희가 은호 보내버리네…….”

“선생님! 선생님!”

상호는 세희의 당황한 외침을 들으며 정신을 잃었다.

* * *

‘몸이 X밥이 됐군.’

그게 눈을 뜨고 나서의 첫 감상이었다.

아무리 몸이 어려졌기로서니 설마 학생 내공을 처맞고 기절까지 할 줄이야. 옛 전우들이 보면 폭소할 만한 일이었다.

‘아니야! 우리 상호 약골이어도 괜찮아! 귀여우니까!’

‘……누나가 이렇게 귀여운 걸 좋아하는지 몰랐어요.’

상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누운 곳은 세희의 방, 세희의 침대. 옆에서는 따뜻한 숨결이 뺨으로 쏟아졌다. 그곳을 돌아보니 세희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곁에 함께 누운 채.

“일어나셨어요?”

“으응.”

“죄송해요. 제가 선생님 어려진 걸 생각 못하고…….”

“아냐. 나도 몰랐어.”

상호는 손을 뻗어 세희의 등을 토닥였다.

“놀랐어?”

“네.”

“괜찮아, 괜찮아.”

세희는 그제서야 살짝 웃으며 상호의 뺨을 문질렀다.

“그런데 은호가 뭐예요?”

“남들 앞에서 부를 이름이 필요해서……. 그냥 은율이 동생인 척 하기로 했어. 도은호라고.”

“천세호는 안 돼요?”

“이름이 뭐가 중요하니…….”

잠시 기절했을 뿐 몸은 정상이었다. 상호는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방에는 둘뿐이었다.

“세희 너 밥은 어떻게 했어?”

“안 먹었어요.”

“먹어야지. 뭐 먹으러 갈까?”

“아침은 굶어도 돼요.”

세희가 그의 손을 잡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선생님.”

“응?”

“안아봐도 돼요?”

“……으응.”

좁은 품이 그를 꼭 안았다.

가까워져 더 따뜻해진 숨결이 상호의 귀에 속살거렸다.

“선생님.”

“응.”

“저 듣고 싶은 말 있어요.”

“뭔데?”

“맞춰보세요.”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듣고 싶은 말이라. 뭐가 있을까.

“용돈 줄까?”

“아뇨. 세 글자예요.”

“……예뻐? 아니, 예쁘네?”

“아뇨.”

“귀여워?”

“아뇨. 조금 더.”

조금 더라. 상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사……랑해?”

그 말에 세희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답이라는 듯이.

그 순간 누군가가 옷장 문을 뻥 박차고 튀어나왔다.

“아이씨, 그걸 왜 말해!”

“응……?”

얼이 빠진 상호에게 태화가 소리쳤다.

“쌤 첫사랑은 나잖아!”

“이 가스나는 또 무신 소리고.”

침대 밑에서 아이들이 고개를 쏙 쏙 쏙 차례대로 내밀었다.

“쌤 첫사랑은 따로 있다 아이가. 둘째가 나제.”

“둘째는 수녀님이야! 셋째가 나야!”

“저는 넷째로 충분합니다.”

“네!”

다 듣고 있었던 걸까. 상호는 흔들리는 눈으로 세희를 돌아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설명을 구하는 눈빛으로.

세희는 씩 웃으며 상호의 머리를 품에 안고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내가 이겼으니까 오늘은 내 거야.”

“야, 반만 찢자.”

태화가 상호의 다리를 잡았다.

“나 반만 줘. 빨리 쓰고 줄게. 야, 나빛. 다시 붙일 수 있지?”

“도전해볼 가치가 있다고 봐.”

나빛도 그의 다리를 잡았다.

납치도 모자라 토막살해까지 하루 만에 겪게 생겼다. 상호는 기겁하며 다리를 털어냈지만, 이제는 지윤과 은율, 이츠키, 나디아까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얘들아…….”

“손도 나쁘지 않제.”

“야, 꺼져! 그럼 내가 몸통 가질 거야.”

“다리는 취향이 아닙니다만…… 발이 귀엽긴 합니다.”

“얘들아……?”

“몸통도 위아래로 나누면 되지 않아?”

“천재야?”

“얘들아……!”

아이들의 손이 그의 사지를 잡아당겼다. 사지뿐만이 아니라 몸통까지.

상호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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