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4화 (274/501)

* * *

“오늘 와 이리 맥아리가 없으십니꺼.”

“빨렸어.”

“예?”

“기를 빨렸어.”

상호는 힘없이 주먹을 날리며 중얼거렸다.

지윤이 그의 주먹을 가드로 미끄러트리며 피식했다.

“또 누나분덜이랑 하셨어예?”

“……아니.”

“했구만예~.”

“아니라니까.”

그의 주먹이 지윤의 아랫배를 톡 쳤다.

“대련에 집중해.”

“예.”

지윤이 돌려차기를 날렸다.

상호는 가볍게 바닥을 박차서 발차기를 피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피하지 못할 거리였지만, 그의 몸은 바퀴라도 달린 것처럼 뒤로 쭉 후진했다.

쏜살같이 날아간 손이 지윤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엑.”

지윤은 상호의 손에 이끌려 옆으로 휘청이다가.

콰앙

뿌드득

“켁!”

링 바닥에 쓰러트려졌다.

상호는 관절기를 걸려고 지윤의 위에 올라타다가 방금 들린 소리에 생각이 미쳤다.

‘뿌드득?’

손을 내려다보니 윗옷이 반쯤 뜯겨져 있었다.

“앗…….”

“어라.”

지윤도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당황했다.

“벗을까예? 말로 하시지…….”

“뭘 벗어……. 나중에 사줄게.”

그때 체력단련실 문이 열렸다.

“선생님~. 세희 데려왔…….”

문을 열고 들어서던 나빛은 지윤의 위에 올라탄 상호와 그 손에 쥐인 찢어진 옷을 보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도톰한 입술 사이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간음한 자를 죽이리이다…….”

“안 했어, 나빛아…….”

“마, 퍼뜩 나가뿌라. 한창 좋은디.”

나빛의 뒤를 따라 들어온 세희가 상호의 상태를 보고 중얼거렸다.

“저도 뒹굴 줄 아는데…….”

“유술…… 나중에 알려 줄게.”

상호는 한숨을 쉬며 일어서려 했지만, 지윤의 두 다리가 그의 허리를 옭아매고 있었다.

“……지윤아?”

“포장을 뜯었으믄 책임을 지고 가셔야지예.”

지윤이 키득거리며 다리를 꽉 조였다. 그와 동시에 세희와 나빛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오지윤!”

“아따 이 가스나들 윽수로 끼어드네. 내끼다, 마. 내 수업 시간이라꼬.”

“나도 할꺼야!”

나빛이 외투를 벗어 던지고 링으로 올라오려 했다. 상호는 당황하며 지윤과 나빛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빛아? 너는 무술 할 줄 모르잖아…….”

“저도 할 수 있어요! 슉슉!”

나빛이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며 주먹을 휘둘렀지만, 상호에게는 병아리가 파닥파닥 날갯짓을 하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 일단 해보자.”

그는 뒤로 살짝 물러나 나빛의 공격을 기다렸다.

“와봐.”

“네.”

나빛은 가벼운 몸으로 요리조리 스텝을 밟더니 솜털처럼 하늘거리는 주먹을 날렸다.

나비처럼 날아서 나비처럼 날리는 펀치.

‘막으면 부러지겠는데…….’

그의 팔이 아니라 나빛의 팔이.

상호는 나빛의 팔을 옆으로 톡 쳐내고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덥석 들어 올렸다.

“나빛이는 역시 무술은 못 할 것 같다.”

“헤헤헤…….”

나빛이 헤실헤실 웃었다.

그가 나빛을 내려놓자 이번엔 세희가 링 위로 훌쩍 뛰어 올라왔다.

“다음은 저예요.”

“……그래.”

권법과 유술 수업은 나중에 하려고 했는데. 상호는 입맛을 다시며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물었다.

“검사가 주먹을 쓸 때는 언제지?”

“검을 못 쓰게 되었을 때요.”

“어떤 상황이 있을까?”

“검이 부러졌다거나…….”

“그게 뭘 의미해?”

“강기 싸움에서 졌다는 거요.”

“그렇지.”

갑자기 뻗은 상호의 손을 세희가 황급히 피해냈다.

“그렇기 때문에, 검사가 주먹을 쓴다는 거는 자신보다 강한 상대로부터 도망치다가 반격해야 하는 상황이란 걸 뜻해.”

“네.”

“그걸 염두에 두고 대응해봐.”

“네.”

세희는 다시금 자세를 낮추어 상호의 주먹을 피했다.

어쨌든 반격하란 말.

세희의 발이 바닥을 쓸며 상호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려 했다.

“강자를 상대할 땐 기다려야 해.”

상호는 세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윽……!”

“상대가 한 번이라도 실수할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거야. 그게 아무리 길게 느껴지더라도.”

고수가 실수하기를 바라는 것은 요행을 바라는 것과 같지만, 그래도 실수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치고 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끈질기게 버텨.”

“……네.”

세희는 상호의 무릎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애초에 이렇게 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스승이 난이도를 조절하고 있다는 뜻. 조금 버겁더라도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답이 보일 터였다.

곧 상호의 움직임에서 빈틈이 드러났다.

‘여기……!’

세희의 손이 상호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꼿꼿이 힘을 준 중지에는 혈을 누르기 위한 내공 한 자락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터억

“허초와 실초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지?”

상호는 일부러 천천히 세희의 손을 잡아냈다. 세희의 눈으로도 충분히 볼 수 있도록.

“널 꾀어들이는 건지, 진짜 허점인지. 잘 살펴야 해.”

“……네.”

세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거뒀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나빛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세희야! 도망쳐!”

“응?”

어리둥절해하는 상호에게 나빛이 재차 소리쳤다.

“선생님 상대는 저예요! 세희 때리지 마요! 차라리 절 때리세요!”

“나빛이 넌 무예가가 아니잖아…….”

“저도 무예 배우면 지윤이처럼 선생님 밑에 깔릴 수 있어요?”

“아니…….”

“저도 선생님이랑 굴러다닐래요!”

“안 돼…….”

“자! 올라타세요!”

나빛이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팔다리를 대자로 뻗어서.

상호는 고개를 돌리고 확확 달아오르는 얼굴을 가렸다.

“일어나, 나빛아…….”

“올라타세요!”

“선생님 죽을 것 같아…….”

“죽어도 제 위에서 죽으세요.”

“선생님 정신 나갈 것 같아…….”

“안 올라오시면 제가 갈게요.”

나빛은 꾸물꾸물 기어서 상호의 다리 아래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상호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 애들 이상해…….’

그 사실을 1년 반이 넘어가는 시점에서야 알게 되다니. 상당히 늦은 감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었다.

그가 링 밖으로 뛰어내리자 나빛이 쫓아왔다. 성력으로 만든 널빤지에 누운 채로.

꼭 공포영화에서 나올 법한 거꾸로 기어 다니는 귀신 같았다.

“선생님~.”

“제발…….”

“선생님~!”

“제발……!”

토요일 점심, 별관의 복도.

애꾸눈 남선생과 흰머리 여제자의 추격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263. 어린 누나들

어둑어둑한 저녁의 운동장.

상호는 팔짱을 낀 채로 세희를 바라보았다.

“시작해.”

“네.”

검을 든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세희의 몸이 순식간에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밝고 푸른 불꽃에 휩싸인 채. 하늘 높은 곳에 다다른 세희는 아래를 한 번 일견하고는 유성처럼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아앙

운동장에 거대한 구덩이가 생겼다. 반경 5m, 깊이 1m 정도.

중요한 것은 규모보다는 힘의 방향이다. 상호는 구덩이의 모양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느낌이야.”

“성공인가요?”

“응. 잘했어.”

염마격락. 무방비 상태의 적을 갑자기 타격하기 위한 공습용 기술. 원리가 크게 어렵지는 않아 쉽게 익힐 수 있을 터였다.

“다음은 이거야.”

상호의 검이 세희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세희는 꿈쩍도 하지 않고 검로에 집중했다.

칼날에서 피어오른 불꽃이 세희의 시야를 뒤덮었다.

파르륵……

그 어둡고 밝은 푸른빛에 정신이 팔려서 칼끝을 놓쳐 버렸다. 세희는 당황하며 눈동자를 굴려 상호의 검을 찾았다.

검은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아.”

“검로를 숨기는 기술이야.”

첨청뢰. 본디는 찌르면서 순간적으로 밝은 초강기를 만들어 눈을 멀게 하는 기술이었지만, 상호의 강기는 색깔이 어두워 그렇게 쓸 수가 없었다.

상호는 검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

“내공이 더 많아지면 몸 주변에 기의 장을 펼쳐 놔. 눈에만 의존하면 안 돼.”

“네.”

“한번 따라 해 봐.”

세희가 기세 좋게 검을 들어 올렸지만, 곧 난색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불꽃…… 내뿜는 거는 어떻게 하는 거예요?”

“박수를 친다고 생각해. 네 내공을 부딪쳐서.”

그 말에 세희의 검에서 불꽃이 작가 팔락였다.

말만 하면 다 알아듣는다. 상호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호신강기를 둘렀다.

“해봐.”

“네.”

그가 세희에게 펼쳤던 기술이 고스란히 그에게 펼쳐졌다.

얼굴로 날아든 검에서 하늘색 불꽃이 밝게 명멸했다. 상호는 그 즉시 손을 뻗어 세희의 칼날을 잡았다.

“이렇게. 기로 느끼면서 잡는 거야.”

세희는 잘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게 되려면 내공이 얼마나 많아야 해요?”

“네가 검강과 호신강기를 두르고도 내공이 따로 남을 만큼. 자, 이건 됐고.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자.”

수업은 계속 이어졌다.

* * *

상호는 밤이 깊어서야 검을 집어넣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네.”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린 세희가 검을 축 늘어뜨렸다. 그래도 그동안 제일 배우고 싶었던 것들을 배워서인지 표정은 아주 밝았다.

이어진 상호의 말에 세희의 얼굴은 더 환해졌다.

“내일은 같이 강원도 가자.”

“정말요? 수련이에요?”

“응. 마나도 좀 쌓고. 너 실전 수업도 하고. 앞으로 자주 갈 거야. 괜찮지?”

“네!”

상호는 싱글벙글 웃는 세희를 바라보며 마주 웃었다.

“그래. 그럼 내일 가게 준비해놔. 푹 쉬고, 잘 자고.”

“네. 내일 뵈어요.”

세희가 허리를 꾸벅 숙이고 웃었다.

상호는 기숙사를 향해 멀어지는 세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둘이 같이 가서 운기조식을 하면 내공을 두 배로 벌 수 있을 텐데. 경호를 서줄 누군가를 데려갈까.

‘교장선생님이나 민정이 누나랑 갈까? 아냐, 세희는 둘이서 가고 싶어하는 것 같던데……. 이번엔 둘이서 갈까. 운기조식은 나중에 하고…….’

그런 생각을 하며, 그도 곧 남교사 숙소로 향했다.

* * *

그게 어제인데.

상호는 조그마해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

못 가게 생겼다.

‘염병…….’

또 어려져 버리다니.

저번은 월요일이었고 이번은 일요일이니 5일 만에 재발한 셈이다. 상호는 한숨을 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옆에는 혜소와 효은이 새근거리며 자고 있었다.

‘그래도 주말이라 다행이네…….’

저번엔 하루 만에 돌아왔으니, 그때와 같다면 내일은 정상적으로 수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주말만 잘 버티면 된다.

그는 옷장으로 걸어가 안을 뒤적거렸다.

‘누나가 준 옷이…… 어디 있더라…….’

민정이 사준 어린이 옷들.

찾아서 입어 보니 몸에 꼭 맞았다.

‘양복보단 편해서 좋네.’

상호는 거울 속 자신을 슬쩍 살피고 핸드폰을 찾았다. 세희에게 수련 계획이 파투났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세희야 선생님 또 어려져서 못 갈 것 같아...

그렇게 문자를 보냈더니 금방 답장이 왔다.

‘일어나 있었나.’

같이 수련 간다고 일찍부터 일어났나 보다. 상호는 살짝 미안한 마음으로 답장을 확인했다.

-왜 못 가요

‘?’

머릿속이 멍해졌다.

‘……어라? 화났나?’

그는 안절부절못해하며 대가리를 열심히 굴렸다. 세희가 왜 화가 났을까. 평소대로라면 ‘괜찮아요’ 나 ‘다음에 꼭 같이 가요’가 나왔을 텐데.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안 나와서, 살짝 찔러 보기로 했다.

-못 가지 않을까...?

-왜 못 가요?

-선생님이 내공을 못 써...

-그럼 다른 곳으로 가요

-운전을 못해...

-걸어서 가요

‘걸어서……?’

이 꼴로 도보여행이라. 상호는 눈을 끔뻑이다가 딱히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해 답장을 보냈다.

-내일 수업해야 하는 거 알지? 당일치기로 가는 거야

-네

-일단 아침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네

-뭐 먹을지 생각하고 천천히 나와

-네

시계는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딱 나가면 될 터.

그는 어린이 운동화를 신고 문을 나섰다.

* * *

……그렇게 여학생 기숙사로 향했는데.

“므앙.”

다혜에게 잡혀 버렸다.

“…….”

“아으.”

이른 아침의 기숙사 앞 주차장.

다혜는 자신이 들어 올린 조그마한 소년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낯이 익은데 언제 봤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므아앙.”

“…….”

“아으으으──.”

“……다혜야.”

“느앙?”

다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살짝 웃어 보였다.

“아저씨야.”

그 말에 안 그래도 큰 다혜의 눈이 더욱 휘둥그레지면서, 입마개 속 입술에서 침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날 먹을 걸로 보나?’

상호의 이마에 흐르는 진땀이 점점 늘어갔다.

내공을 쓸 수 없는 지금은 다혜가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데. 다혜가 그를 해코지할 일은 아마 없겠지만, 그래도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상호는 다시 한번 웃었다.

“내려줘, 다혜야. 아저씨 갈 데 있어…….”

“아으아.”

하지만 다혜는 수갑을 찬 손으로 그를 안아 든 채 내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기숙사 쪽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유괴범이야아아!”

“……응?”

목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니, 이화관의 창문에서 태화가 잠옷 위로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기다려, 쌤! 내가 구해줄게!”

“뭘 구해 임마! 대낮부터 장난치지 말고…….”

“므앙……!”

“……엥?”

태화에게 핀잔을 날리던 상호는 다혜의 품에 안긴 채로 눈을 끔뻑였다. 쌩쌩 부는 바람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중이었다.

‘……납치당한다!’

납치당하고 있었다.

당황해서 얼떨결에 상호를 들고 뛰게 된 다혜는 순식간에 목련관 옥상까지 도망쳤다. 그런 다혜의 뒤를 태화가 쫓으며 소리쳤다.

“우리 쌤 납치당한다아앗!”

그러자 이화관 창문에서 한 명이 더 뛰쳐나왔다. 머리띠로 앞머리를 올리고, 잘 때 입는 편한 옷차림을 한 은율이.

은율은 어려진 상호를 보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으, 아으…….”

그 기세에 식겁한 다혜는 목련관의 옥상을 박차고 본관 옥상을 향해 훌쩍 뛰어올랐다.

그 품에서 상호가 필사적으로 다혜를 불렀지만.

“다혜야? 아저씨 내려줘…….”

“아으으아…….”

다혜는 그를 더 깊숙이 끌어안고 달릴 뿐이었다.

“야! 우리 쌤 내놔! 우리꺼야!”

“느으으으……!”

“쌤! 걱정마! 우리가 구해서 내 방으로 데려가줄게!”

“그것도 납치잖아!”

“내놓으라고오오!”

“므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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