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사다난한 학교 일과가 끝나고. 종례 시간.
상호는 교탁 앞에 서서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수고했어.”
아이들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보다는 미진 선생님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수업했으니까. 같이 종례하고 싶었어. 괜찮지?”
“네.”
“고맙다.”
상호는 출석부에 끼워놓은 일정표를 흘끗했다.
“평가 한 달 남았네. 그치?”
“네.”
“선생님이 바쁘더라도 최대한 도와줄 테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전화하고. 이제 금방 달려갈 수 있으니까.”
“네.”
“조심히 들어가.”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리끼리 모여 나가는 아이들 사이에서 지윤이 손을 흔들었다.
“쌤예. 시간 나는 대로 스파링 하는 깁니더.”
“응, 그래. 그러자.”
상호도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종례가 끝났다. 이제 교무실 가서 일 살짝 봐주고, 다시 세희와 수업하고, 저녁 먹고 지윤과 대련하고.
그런데 한 명, 아직 교실을 나가지 않은 아이가 있었다.
“……가은아?”
상호의 부름에 가은이 그를 돌아보았다.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친 채로.
가지 않고 그대로 서 있는 것을 보니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가은이 왜?”
“선생님.”
“응.”
“선생님 애인을 죽였던 그 사람.”
가은이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죽었어.”
“죽였어요?”
“아니, 스스로 죽었어.”
“그럼 복수 못 했어요?”
상호는 창밖의 먼 산을 돌아보았다.
“용서를 했지.”
“어떻게요?”
가은의 눈빛이 차갑게 번득였다.
“용서할 수 있는 일이에요? 선생님한텐?”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었어.”
“그러면. 그러면 태화 언니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은요?”
“용서했어.”
“……하.”
가은은 상호를 향해 돌아서며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선생님한테 태화 언니는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나 봐요?”
“가은아.”
상호는 가은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선생님은…… 운이 좋아서, 일이 좋게 끝났어. 선생님이 원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거였어. 그래서 용서한 거야.”
예경은 상호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죽었고. 영주는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김에 그걸 도왔을 뿐이고.
도현은 태화보다 가족과 세상이 중요한 게 당연했고, 리주가 상호와 태화를 몰아붙인 것은 애초에 도현이 66부의 일을 시켰기 때문.
그리고 그 모든 죄의 근원은.
“내 애인을 죽인 놈, 태화를 죽일 뻔한 놈. 그거는 사람이 아니라 악마야. 사람을 미워할 일이 아니야. 그리고 난 당연히 그 악마놈은 용서하지 않았고, 반드시 죽일 거야. 이 두 손으로.”
상호는 가은의 앞에 서서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그거면 설명이 됐을까?”
“죽이고 싶지 않아요?”
가은이 따지듯 물었다.
“화 안 나요? 화냈었잖아요. 다 죽일 것처럼 가놓고서, 왜 아무런 복수도 안 하고 온 거예요? 어떻게 그러는 건데요?”
“그냥.”
상호는 살짝 웃었다.
예경이 죽은 이유를 깨달았을 때, 세상에 복수할 생각은 다 사라져 버렸다.
“날 위해 죽은 사람들이 있었거든. 그래서 나도 그 사람들이 있었던 세상을 위해…… 살기로 했을 뿐이야.”
가은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알겠어요.”
가은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상호는 가은이 왜 그런 말들을 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 말은 해주고 싶었다.
“속편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러울 거야.”
가은의 발이 멈칫했다.
“너도 사실은 편해지고 싶은 거야. 다 잊고. 멀쩡하게. 그런데 방법은 모르겠고.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거지.”
상호는 그 답답한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네 마음을 완벽히 알지는 못해. 너는 나보다 더 힘들 거고, 더 억울할 거야. 하지만…… 네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도와줄게. 그건 내가 할 수 있어.”
“어떻게 도와줄 건데요.”
“잠깐이라도 잊게 만들어 줄게. 친구들하고 같이. 어디를 놀러 가든, 밥을 같이 먹든……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많이 나아질 거야.”
가은은 상호를 노려보며 교실 문을 열었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문을 닫고 가버렸다.
마음의 문은 아직도 굳게 닫힌 듯했다. 교실에 홀로 남은 상호는 가은의 책상으로 다가가 그 위를 손으로 쓸었다.
‘어떻게 해야겠니…….’
도와주고 싶어도 돕지 말라 하면 방법이 없다. 그는 한숨을 푹 쉬며 책상을 하염없이 쓸다가, 창밖에 지는 노을을 흘끗하고 교무실로 향했다.
* * *
다른 선생들은 그새 다 퇴근했고, 교무실엔 미진 혼자였다.
미진은 지금도 무언가 일을 하고 있었다. 대체 일을 어디서 가져오는 걸까. 상호는 그런 의문을 품으며 미진에게 다가갔다.
“퇴근 안 해요?”
“예.”
미진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그렇게만 대답했다.
이쪽도 설미처럼 서먹해졌다. 원래도 교류가 깊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평소엔 짜증도 내고 화도 냈는데.
상호는 설미 자리의 의자를 끌어와 미진의 옆에 앉았다.
“안 도와줘도 돼요?”
“네.”
여전한 단답.
상호는 입맛을 다시고 미진의 옆에 바싹 다가앉았다.
“미안해요.”
“……갑자기 뭐가요.”
“수업도 시키면서 일도 떠맡기는 게.”
미진은 혀를 차고 그를 흘겨보았다.
“겨우 그것만요?”
“네?”
“아녜요, 됐어요. 알면 방해하지 말고 퇴근해 주세요.”
상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쌀쌀맞구만…….’
장난기가 조금 동한 그는 일부러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혹시 어깨 뻐근하지 않아요?”
그 말에 미진의 어깨가 움찔했다.
“……아니요.”
“많이 뭉친 것 같은데.”
“아닙니다.”
미진은 급히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상호의 손은 이미 목표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에헤이, 앉아 봐요.”
상호는 미진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그 순간 미진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 변태 새끼야!”
쫘악
“……켁!”
상호는 얻어맞은 뺨을 부여잡고 책상에 얼굴을 박았다. 미진은 그를 내버려두고 씩씩거리며 벌떡 일어났다.
“X급이면 뭐해, 사람이 더러운데! 저질이야 진짜…….”
“…….”
무예가끼리 어깨 근육 좀 풀어주는 게 뭐 어때서.
그래도 화를 낼 때는 말이 는다. 그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듯했다. 더 처맞고 싶지 않다면.
‘그거면 됐다, 에휴…….’
상호는 뺨을 문지르며 터덜터덜 교무실을 나섰다.
262. 어느 주말
[아무도 없던데?]
“뭐?”
상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뭔 소리야? 거기 앞집에는 가 봤어?”
[안 계시던데? 영주 외할머니 계시냐 물어도 없고…….]
“그럼 내가 귀신을 봤다는 소리야?”
멀쩡히 있던 사람이 땅으로 꺼졌나 하늘로 솟았나. 고개를 기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말에 마주 앉아 밥을 먹던 효은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귀신을 봤다고?”
동그랗게 뜬 눈에 눈물이 찰랑찰랑 고여갔다.
또 시작이다. 상호는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냐! 그런 거 아니라고.”
“너 그거 빠짐없이 의사한테 말해. 알았어? 죽은 언니 목소리가 들리고, 귀신이 보인다고. 숨기지 마.”
“아니라니까…….”
하지만 효은은 들은 척도 않고 식사를 계속했다. 코를 연신 훌쩍거리면서.
이런 취급을 받으면 멀쩡한 사람이라도 미쳐 버리리라. 참다못한 상호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났다.
“응?”
효은이 당황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너, 너 뭐해?”
“그래, 나 미쳤다.”
상호의 양손이 효은의 두 뺨을 감쌌다.
“너한테 미쳤…….”
빠악
숟가락이 상호의 얼굴을 때렸다.
“식당에서 뭐 하는 짓이야, 병X아!”
"……."
상호는 얼굴에 달라붙은 밥풀을 떼며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급히 시선을 돌렸다.
‘염병……. 아, 통화 중이었지.’
전화기에서 도현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야, 상호야?]
“어. 잠깐 효은이랑 이야기 좀 하느라.”
[어쨌든 할머니는 안 계시고…… 집은 고쳐 놨어. 또 일 생기면 연락해라. 나 바빠서 이만 끊을게.]
[도련님! 끊지 마세요, 저 죽어……!]
“어.”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상호는 무시하기로 했다.
‘이 할머니는 또 어디로 가셨대……. 어디서 찾아야 하나, 참…….’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곁으로 웬 너덧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다가왔다.
“아저씨.”
“응?”
“아저씨 티비 나온 아저씨예요?”
선글라스 위로 흉터가 보였나 보다. 상호는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이들을 흘끗하고 아이에게 씩 웃어 보였다.
“그래 보여?”
“네.”
“네가 믿는 게 정답이야.”
아이가 종이를 내밀었다.
“싸인해주세요.”
“싸인?”
연예인 취급인가. 상호는 눈을 끔뻑이다가 주머니를 더듬거렸다.
“펜이 없는데.”
아이는 계산대로 달려가서 금세 펜을 구해 왔다.
종이에 싸인을 해서 남에게 주기는 처음이다. 상호는 이게 맞나 싶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름을 휘갈겨 적었다. 알아볼 수 없도록.
“자.”
“감사합니다.”
아이는 고개를 꼬박 숙이고 가족에게 돌아갔다.
생경한 경험을 했다. 상호의 입술에서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유명인이 됐나 본데.”
“좋냐?”
“좋은 건 아니고.”
상황이 웃길 뿐이다. 그는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효은은 수저를 들지 않고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왜.”
“좋은 게 아닌데 왜 웃어?”
“……응?”
효은의 눈에 눈물이 찰랑찰랑 차올랐다.
“조울증이야?”
“아니, 뭔 조울증이야…….”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휴지로 효은의 눈가를 콕콕 찍었다.
“병원 갈게. 갈게. 주말에 갔다 올게. 대신 의사가 멀쩡하다고 하면 다시는 의심하지 않기야. 알았어?”
그러자 효은이 하늘이 무너진 표정을 지었다.
“……야.”
“응?”
“오늘이 주말이야.”
“…….”
토요일 아침. 어느 식당.
상호는 숟가락을 든 채로 굳어 버렸다.
* * *
왜 몰랐을까. 아침부터 출근도 안 하고 외식을 하고 있는데.
상호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푸우…….”
“고민이 많으신가 봅니다.”
마주 앉은 중년의 남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심리 상담 센터의 상담사. 연두색의 방 한쪽 선반에는 인형과 카드 따위가 여럿 놓여 있었다.
“우선…… 제일 큰 고민이 뭐가 있을까요?”
“고민…….”
상호는 또 한숨을 쉬었다.
“여자친구가 절 미친놈으로 봐요.”
“이유 없이요?”
“아뇨, 이유는 있는데…….”
“이유가 뭘까요?”
“그게…….”
입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제가…… 체질이 좀 특이해서요.”
“체질이요.”
상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체질인지 말해줄 수 있어요?”
“그…….”
상호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죽은 사람…… 목소리가 들려요.”
“…….”
상담사는 손을 모은 채로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괜히 말했다. 믿을 리가 없는데. 상호가 그렇게 후회하고 있을 때, 상담사가 씩 웃으며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럴 수 있어요. 세상이 많이 바뀌었으니까. 정령을 다루는 사람도 있고, 신앙인 분들이 계시를 받기도 하고요. 충분히 그럴 수 있죠.”
믿어주는 걸까.
상호는 살짝 용기를 얻었다.
“그렇죠?”
“네. 그런데 구체적으로 누구의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비밀…… 지켜 주실 거죠?”
“물론이죠. 상담 내용은 어디에도 보여주지 않아요.”
“그런가요. 그럼……, 그 목소리가 이제, 제 죽은 애인인데…….”
“애인이 어떤 일을 했어요?”
“그게…… 저승부대라고, 전쟁 때 몬스터들 땅에 가서 싸웠던 부대거든요. 거기에 저랑 제 애인이 있었는데…….”
“아하…….”
상담사가 곤란하다는 듯이 웃었다.
* * *
그렇게 허언증 진단을 받을 뻔했지만, 다행히 상담 결과를 들으러 들어온 효은을 상담사가 알아봐준 덕에 미친놈 취급을 피할 수 있었다. 테스트 결과도 정상으로 나왔고.
상호는 건물을 나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니까 나 안 미쳤다니까. 이제 믿지?”
“흥.”
“이런 거 가지고 시간 낭비하게 하지 마. 애들 가르치는 것만 해도 힘들다고.”
“……흥.”
효은이 코를 훌쩍이고 차에 탔다.
정상인 판정을 받았으면 기뻐할 일이지 왜 또 울까.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운전석에 올랐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효은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뭐 해줄 거야?”
“뭐가.”
“그동안 미친놈 취급했잖아.”
“미친놈 맞잖아.”
“그래서 사과 안 할 거야?”
상호의 손이 효은의 가느다란 목을 주물렀다.
“뭐 성의라도 보여주지 그래.”
“성의?”
효은은 콧방귀를 뀌더니 갑자기 머리를 묶기 시작했다. 상호는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뭐해?”
“성의를 보이라매.”
효은이 그가 앉은 운전석 등받이를 뒤로 확 젖혀버렸다.
“보여줄게, 새끼야. 스틱 세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