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멍.”
점심시간 후, 쉬는 시간.
의자에 앉은 단비가 꼬리를 흔들었다.
“선생님 무서워지셨어, 멍…….”
“그러게.”
미래는 단비의 책상에 걸터앉아 장갑을 만지작거렸다.
“어제는 엄청 귀여웠는데…… 아, 근데 우리 액자에 사진 누가 가져갔더라.”
“멍! 진짜?! 누구야! 아르르르…….”
“화낼 일이 아냐.”
“멍?”
“사업거리를 찾은 거지.”
“머엉…….”
단비는 눈을 끔뻑이다가 책상에 픽 쓰러졌다.
“세희 언니는 엄청 심하게 맞더라. 괜찮을까……?”
“글쎄. 치료하면 괜찮지 않을까. 언니도 좋아서 하는 것 같더만.”
“난 그렇겐 못 할 것 같아. 멍…….”
그 말에 옆에서 듣던 아리가 중얼거렸다.
“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리는 마조야?”
“……아니. 그냥. X급 헌터한테 배운다는 게 아무데서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런가?”
단비가 아리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아리는 그 시선에 몸을 살짝 움츠렸다.
“왜…… 왜 그렇게 봐?”
“미래랑 너랑은 선생님 친구분한테 배운댔지? 마법.”
“응.”
“그분은 안 빡쎄?”
“응.”
그 말에 단비가 책상을 내려치며 일어났다.
“나 마법 배울래!”
“후회할걸.”
“멍?”
고개를 돌려보니 태화가 문설주에 기대어 있었다.
태화는 단비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은 쓰레기고 무예는 사기다. 따라해.”
“멍…….”
“따라해!”
“멍……, 마법은 쓰레기고 무예는 사기다!”
“마법은! 쓰레기고! 무예는! 신이다!”
“신이다!”
그때 앞문이 벌컥 열렸다.
“어머, 태화가 그렇게 마법을 싫어하는 줄은 몰랐네.”
“……헉.”
태화는 민정의 시선을 피해서 단비가 앉은 의자 뒤에 숨었다.
“태화 업~따.”
“마법이 싫니?”
“아뇨, 그냥 장난으루……. 헤, 헤헤.”
민정은 멋쩍게 웃는 태화와 눈을 동그랗게 뜬 미래, 그리고 아리를 바라보았다.
“오늘부턴 나도 학교에서 수업할 거야.”
“네? 진짜요?”
“응. 전투수업 시간 쪼개서. 무예가들은 미진 선생님한테, 너희는 나한테. 아무래도 미진 선생님이 마법사들까지 가르치기는 힘드니까. 상호보다도 더.”
“오옹.”
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요?”
“응. 오늘부터. 근데 상호 어디 갔는지 아니?”
“몰라요. 밥 먹는 거 아니에요?”
“주변에 있는 거 같은데…….”
민정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문가로 걸어갔다.
“하여튼 알았어. 쉬고 있어, 얘들아. 5교시에 보자.”
“넵.”
태화는 교실을 나가는 민정에게 경례를 했다가, 문이 닫히자마자 경례를 풀고 단비를 향해 돌아섰다.
“마법도 사기지만 무예는 개사기다!”
“멍!”
“아리 너도 따라해! 무예는 무적이다! 무예는 신이다!”
“무예는…….”
“더 크게!”
“신이다……!”
교실에선 그렇게 괴상한 종교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 * *
“여기 있었네요.”
“푸후웁!”
설미는 마시던 캔커피를 뿜고 뒤를 돌아보았다. 상호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상호 씨? 여긴 여교사 휴게실인데…….”
“혼자 있는 거 알고 들어왔어요.”
작은 책장, 화분, 찬장. 불을 켜지 않아 어둑한 방에 창문 모양으로 앉은 햇빛. 그리고 그늘에 놓인 소파와 거기 앉은 설미.
상호는 주변을 한번 쓱 둘러보고 문을 닫았다.
이제 방에는 단둘뿐.
“누나.”
“……으응.”
“갑자기 왜 이렇게 어색해졌어요?”
“그냥…….”
설미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상호 씨는…….”
“둘이 있을 땐 반말하자면서요.”
상호는 친근하게 말을 붙이며 설미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왜 말해 놓고 안 지켜요.”
“그치만…….”
설미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상호는…… 이사장님도 함부로 못 하는 X급인데…….”
“뭘 함부로 못해요. 잘만 굴리는구만.”
“나하고는…… 너무 먼 사람이라…….”
“뭐가 멀어요. 이렇게 가까운데.”
상호는 설미의 귀에 속삭였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기만 했을 뿐인데, 그의 입과 설미의 귀는 손가락 하나만큼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핑계 대지 말고 옛날처럼 해요. 난 바뀐 거 없다고요. 다리만 빼고.”
“으응…….”
설미의 입가에 어색한 웃음이 걸렸다.
그녀는 무언가 급한 일이 생각났다는 듯이 황급히 소파에서 일어났다.
“상호야, 나 수업 준비하러 갈…….”
하지만 상호의 손이 그녀의 손을 확 잡아끌었다. 일어나려던 설미는 비틀거리다가 상호의 품에 쓰러졌다.
설미는 당황한 눈빛으로 상호를 올려다보았다.
“……상호야?”
“누나.”
상호는 설미를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계곡에서 했던 말.”
“……앗.”
설미의 눈이 핑핑 돌았다.
“으, 어…….”
“아직 유효해요?”
“아니, 어, 그게…….”
설미는 몸을 빼려 했지만, 상호가 손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놔줘…….”
“대답해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점심시간도 끝나가잖아요. 아무도 안 올 거예요.”
상호는 설미와 눈을 마주쳤다. 머리카락이 겹쳐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난 누나랑 지금까지처럼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응…….”
“누나 나랑 친한 거 맞죠?”
“으응.”
“더 친해질 거죠?”
“으응…….”
설미의 얼굴은 불이라도 붙은 듯 뜨거웠다. 열기가 상호의 얼굴까지 올라올 정도로.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응…….”
“다음에 술 한잔 해요. 둘이서만.”
“응…….”
상호는 그제서야 설미의 손을 놓아주었다.
설미는 도망치듯이 방을 빠져나왔다. 터질 것처럼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꾹꾹 누르면서.
상호의 눈이 그 뒷모습을 쫓았다.
문 닫히는 소리 사이로 예경의 생각이 끼어들었다.
‘아~. 나도 좀 튕겼으면 상호가 이렇게 꼬셔줬을 텐데~.’
‘……꼬시는 거 아니에요.’
‘상호는 바람둥이야~.’
‘끄응…….’
반박하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상호는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희 상태나 보러 갈까.’
이제 그의 수업은 학교 종이 아니라 세희에게 맞춰져 있었다. 종이 쳐도 세희가 일어나 있지 않으면 수업을 할 수 없으므로.
그는 여교사 휴게실을 나와서 양호실로 향했다.
261. 사람 맘을 몰라
“강쌤이다.”
“쉿…….”
다른 반 아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달라붙었다.
상호는 입꼬리를 올릴 듯 말 듯 애매한 표정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학생들을 보면 웃는 습관이 들었지만, 세희를 팬 직후라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 반으로 오겠다고 하지는 않겠지.’
지금은 세희에게 집중해야 할 때. 반을 옮겨오는 아이들을 받아줄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독한 선생으로 낙인찍히는 게 차라리 좋은 일이었다.
‘양호실에 선생님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세희가 일어나면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어서. 상호는 부디 그렇길 바라며 양호실의 문을 열었다.
“어머, 강 선생.”
해련과 보건 선생이 그를 돌아보았다.
“세희 보러 왔어요?”
“예.”
“우린 나가 있죠, 성 선생. 강 선생, 누구 오면 연락해요? 교장실에 있을 테니까.”
“네.”
둘은 쌩하니 나가 버렸다.
마음을 읽기라도 했나. 상호는 해련의 도움에 고마움을 느끼며 세희가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세희는 아직 자고 있었다.
‘아프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는 세희의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너를 아프게 하는구나.’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서로 선택을 했으니.
금방 일어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뭔가 시간을 때울 일이 없을까. 침대 옆에 앉아 소일거리를 찾는 상호의 눈에 세희의 검이 들어왔다.
뽑아 보니 가검이었다.
‘슬슬 진검을 쓸 때가 됐지.’
나중에 사 줘야겠다. 미진의 검과 함께. 상호는 검을 납도하고 침대 옆에 기대어 두었다.
그때 마음속에서 예경의 생각이 들렸다.
‘상호야~.’
‘네?’
‘네가 와봐야 될 것 같은데…….’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어디를요?’
‘따라와.’
갑자기 눈앞이 어두워졌다.
* * *
“켁!”
상호는 경기를 일으키며 눈을 떴다.
영혼이 영혼을 납치할 줄이야. 이런 식으로 사람 정신도 잃게 만들 수 있다니. 그래서 대체 어디로 데려온 걸까.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 방문 앞이었다.
“흑, 흑, 흐어엉…….”
안쪽에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린 소녀 울음소리.
이곳에서 들릴 소녀의 목소리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뭐야.’
세희가 왜 울고 있나. 상호는 당황하며 문에 귀를 붙였다.
세희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 저도 태화처럼 선생님이랑 놀고 싶은데…….”
“응응…….”
“저는 맨날, 선생님한테, 맞기만 하고오…….”
“그래그래…….”
예경이 세희를 달래는 소리도 들렸다.
“상호는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알아요, 아는데에……. 선생님이 저하고만 안 놀아줘요…….”
“그래도 네가 상호한텐 하나뿐인 제자야. 학생이 아니라 진짜 제자.”
“저도 선생님이랑 놀고 싶어요…….”
상호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수련, 대련, 수련, 대련. 항상 공부벌레처럼 검술 공부에만 몰두하던 세희에게 저런 마음이 있는 줄 전혀 몰랐다.
하기사 저 나이대의 아이가 놀고 싶은 마음이 없을 순 없는 법이었다. 그것도 옆에 노는 사람이 있으면 더더욱.
‘왜 몰랐지…….’
그는 코를 훌쩍이며 문을 열었다.
열려고 했다.
‘뭐여, X벌. 왜 안 열려.’
문고리는 덜그럭거리기만 할 뿐 열리지 않았다.
기껏 불러 놓고 왜 잠가 놨나. 상호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누나? 누나! 문이 안 열리는데…….”
안에서 세희와 예경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런데 세희야.”
“네…….”
“선생님이 어디가 좋니?”
“다 좋아요, 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그럼 선생님이랑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야?”
“그…….”
세희가 떠듬거리며 대답했다.
“단둘이…… 여행 가는 거요…….”
태화가 많이 부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야 몇 번이고 같이 가줄 수 있다. 가을이고 하니 식도락 여행을 떠날 수도 있을 것이고. 세희를 살찌우는 데에도 좋을 터였다.
곧바로 계획을 짜고 있는데 예경이 말했다.
“그럼 여행 가서 뭐 하고 싶어?”
“그냥 밥도 같이 먹고…… 같이 걸으면서 이야기도 하고…….”
세희는 코를 훌쩍이다 더 서럽게 울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때리기만 해요…….”
상호는 자신의 가슴팍을 때렸다.
‘미안해…….’
사과해야 하는데.
아무리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안에서는 소리가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그는 목소리를 높여 둘을 불렀다.
“누나, 안 들려요? 누나? 세희야, 미안해. 문 좀 열어 봐…….”
안쪽에서는 이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상호는 계속 문을 두드렸다.
“세희야, 미안해. 내가 몰랐어. 시간 나는 대로 같이 놀러 가자. 응? 세희야, 미안해…….”
이곳에 왔을 때처럼, 갑자기 머릿속이 아뜩해졌다.
* * *
“세희야 미안해…….”
상호가 세희의 품에 얼굴을 박은 채로 중얼거렸다. 후회에 흠뻑 젖은 목소리로.
세희는 그런 상호를 내려다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
어떻게 마음을 알았을까.
양호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단둘뿐. 세희는 주변을 쓱 둘러보고 조심스럽게 상호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아이일 때의 상호도 귀여웠지만, 어른 상호도 이렇게 눈을 감고 품에 안겨 있으니 뭔가 귀여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손으로, 하염없이 머리카락을 쓸었다.
‘우와……. 얼굴선 봐…….’
약간의 눈호강도 겸해서.
그렇게 흐물흐물한 미소를 지으며 쓰다듬는 와중에, 상호의 고개가 움찔했다.
상호는 잠시 그대로 멈춰 있다가.
“……엇.”
자신이 얼굴을 묻은 곳이 세희의 품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동그란 눈이 세희를 향했다.
“세희……야?”
“네.”
세희는 빙긋 웃었다.
상호는 앉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미안…….”
“괜찮아요.”
세희의 손이 상호의 뺨을 쓸었다.
“곧 추석이네요.”
상호는 세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을 잡고 씩 웃었다.
“그러게.”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맞잡은 두 손으로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