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죽을 뻔했네…….”
상호는 앞문 옆 액자를 떼어내며 한숨을 쉬었다.
노을이 지도록 달라붙는 아이들 때문에 여섯 시가 다 되어서야 사진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사진 속 아이들의 웃음에 꽂혔다.
‘버리긴 아깝네.’
그래서 사진을 주머니에 챙겼다.
슬슬 저녁을 먹을 시간. 늦으면 효은이 또 화낼 것이다. 상호는 불을 끄고 퇴근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응?’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하지만 교실을 둘러봐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공을 못 쓰기 때문인지, 감각이 둔해졌기 때문인지. 집중을 해도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고개를 기웃하며 스위치를 향해 돌아서는데.
“왁!”
누군가가 코앞에 튀어나왔다.
“……켁!”
상호는 깜짝 놀라 나자빠졌다. 이런 식으로 놀라본 적이 아주 오래 되어서.
그는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그 누군가를 올려다보았다.
“지윤……아?”
“쌤 참말로 약해졌네예.”
지윤이 그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예전이었으믄 안 놀랐을 건디.”
“어디 숨어 있었어?”
“교탁이예.”
“아.”
이젠 집중해도 인기척을 느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상호는 한숨을 쉬고 지윤을 올려다보았다.
“장난 한번 치려고 거기 계속 숨어 있었어?”
“장난치기만 할라카는 기는 아니구예.”
“그러면?”
“할 말이 있어서예.”
“할 말?”
“예.”
지윤이 상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단둘이 있어뿔 기회가 영 없드라구예. 이제야 말하게 됐네예.”
상호는 눈을 깜작였다.
“중요한 말이야?”
“글치는 않은디…….”
지윤이 상호의 앞에 주먹을 내밀었다.
“약속 지키주셔가. 감사하다구예.”
상호는 그 주먹을 바라보았다.
다 부숴버리고 오라던 약속.
“아직 끝장은 못 냈어.”
“뽀사뿔고가 아이라 오이소가 중요합니더.”
지윤은 그렇게 말하고 상호의 손을 잡아 주먹을 톡 부딪쳤다.
“쌤 만났을 때 지 기분이 어땠는지…… 쌤은 절대 모를 깁니더.”
“그런가?”
상호는 지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지가 고맙다는디 와 쌤이 고맙다 캅니꺼.”
“그냥, 걱정해 줘서.”
“고맙습니꺼?”
“고맙지.”
“그럼 뭐 해줄 긴데예.”
“응?”
뭔가를 해줘야 하나.
그는 고민하다가 살짝 웃었다.
“소원권 줄게.”
“지금 쓰겠습니더.”
지윤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고는 상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쪽……
상호는 순간 멍해져서 눈만 끔뻑였다.
“……지윤아?”
“원래는 입에다 할라구 했는디……쌤이 너무 어려져 가지구예.”
지윤이 쓴웃음을 지었다.
“쌤도 하이소.”
“볼 뽀뽀…… 해 달라고?”
“예.”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희와도 했고 태화와도 했으니까.
하지만 막상 하려니 마음에 걸리는 것이.
‘형 딸한테 이래도 되나…….’
친구의 딸이라서.
그래도 겨우 볼이니까. 그냥 조카라고 생각하면 문제없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상호는 지윤의 볼에 입을 가져가서.
쪽
짧고 빠르게, 붙였다가 뗐다.
보드랍고 가뭇한 뺨이 그의 눈앞에서 발갛게 물들어 갔다.
“됐어?”
“예.”
지윤이 씩 웃었다.
상호는 지윤의 뺨을 쓱 문지르고 서둘러 앞문으로 걸어갔다. 자신의 얼굴도 붉어졌다는 걸 숨기기 위해서.
“지윤이 숨어 있느라 밥 안 먹었지? 같이 먹을까? 나랑 효은이랑 혜소랑.”
“빡빡이 아가 말입니꺼? 좋지예.”
“뭐 먹을까?”
“낙지볶음 좋아하세예?”
“……혜소랑 먹을 거니까 매운 건 먹지 말자.”
“에엥~.”
둘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 * *
“배부르게 먹었어?”
“네.”
혜소는 그렇게 대답하며 현관에 쪼그려 앉아 신발을 정리했다.
“스파게티는 처음 먹어 봤어요.”
“입맛에 맞아?”
“저는 한식이 더 좋아요.”
“그럼 다음엔 한정식 집으로 가자.”
상호가 혜소의 비니를 쓰다듬자 문가에서 핀잔이 날아왔다.
“꼬맹이 둘이서 뭔 한식이고 한정식이야. 다음엔 초밥 먹을 거야.”
“그럼 우리끼리 가지 뭐.”
“너희끼리 가면 웃기긴 하겠네. 엄마 카드 훔쳐서 한정식 먹으러 온 줄 알겠다, 야.”
효은은 신발을 대충 벗어던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린애는 정리하고, 어른은 어지럽히고. 아주 주객전도가 따로 없다. 상호는 효은의 신발을 정리하는 혜소에게 속삭였다.
“꼴불견이지?”
“아저씨 애인 아니세요?”
“애인이라도 꼴불견일 순 있지. 나이 먹고 저게 뭐하는 짓이냐. 혜소 너는 저런 거 배우면 안 된…….”
“야, 빡빡아. 애꾸 말 듣지 마.”
“네.”
혜소는 효은을 향해 쫄래쫄래 걸어가 버렸다. 상호의 말은 중요치 않다는 듯이.
상호는 현관에 쪼그린 채로 망부석이 되었다.
‘……아직도 원망하는 중인가?’
그러게 왜 애꿎은 밥상을 엎어 가지고.
잠시 참회의 시간을 가졌다가 안으로 들어가니, 효은과 혜소가 침대에 나란히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그는 혜소의 옆에 다가앉으며 물었다.
“혜소야. 근데 너 몇 살이야?”
“몰라요.”
혜소는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매정한 태도에 살짝 서운했지만, 그래도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지 지어낼 수는 없는 노릇일 터였다. 상호는 다른 것을 묻기로 했다.
“이름도 거사님이 지어줬댔나?”
“네.”
“그럼 출생신고…… 출생신고 맞나? 그런 건 안 한 거야?”
“그런가봐요.”
나이는 모르고 본명은 없다.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혜소는 학교 갈 거야, 안 갈 거야?”
“학교요?”
“응. 초등학교.”
그 말에 혜소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학교는 어떤 곳이에요?”
“음…….”
당장 여기도 학교인데.
백 번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게 나을 것이다. 상호는 혜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나중에 아저씨랑 교실 가자. 수업하는 거 보여 줄게.”
“좋아요.”
혜소의 고개가 위아래로 까딱였다.
상호는 TV로 시선을 돌리며 생각했다. 혜소는 겉보기에는 대충 대여섯 살. 행동이 어른스러우니까 여섯 살이라 치고, 그럼 내후년에 학교를 보내면 될 것이다.
본인이 가고 싶다고 하면.
‘똘똘한 애라 굳이 안 보내도 상관없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친구는 사귀는 게 좋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만약 혜소가 학교를 다니게 된다면 그가 학부형 노릇을 하게 될 터였다. 상호는 그동안 보았던 학부모들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졸지에 애아빠가 되게 생겼네.’
애가 애아빠 노릇을 하게 생겼다.
그래도 내후년쯤이라면 뭔가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짧은 팔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언제까지 이 꼴로 살게 될지…… 에휴.’
한숨이 길고 깊었다.
* * *
자고 있는데 무언가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밧줄이 몸을 묶은 느낌. 무언가가 옥죄어 들어오는 느낌.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눈을 번쩍 떴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끄응……. 몸이 왜 이러냐, 또…….’
그는 답답한 느낌에 가슴을 더듬었다.
뿌드득
‘……응?’
팔뚝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옷이 터진 모양이었다.
‘어라?’
상호는 이게 어찌된 일인지 생각하다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설마……?’
그리고 습관적으로 검을 찾다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불을 켰다.
입에서 멍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여.”
거울 속.
근육이 울룩불룩한 사내가 어린애 옷을 입고 서 있었다.
259. 일어나
“돌아왔네.”
민정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어린이 옷 다 주문해 놨는데…….”
“응? 누나, 뭐라고?”
“아, 아냐.”
상호는 다시 안대를 쓰고 양복을 입고 있었다. 저주에 걸리지 않았을 때의 모습 그대로.
그는 프라이팬에 버터로 구운 빵을 식탁에 놓으며 말했다.
“혜소야, 아침 먹자.”
“네.”
쪼르르 달려와 의자에 앉은 혜소가 눈을 감고 합장을 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누나도 먹어. 야, 효은. 잘 거야?”
“어.”
효은이 이불을 뒤집어쓰며 대꾸했다.
상호는 더 권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민정도 그의 옆에 앉아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민정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상호야.”
“응?”
“어쩌다 저주가 풀린 거야?”
“그냥, 자다가 뭔가 이상해서 일어나보니까 이렇게 돌아와 있던데.”
“자다가?”
“응.”
민정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어려졌을 때도 자다가 그랬댔지?”
“응.”
“특별한 행동을 한 건 없고?”
“응.”
“그러면 아마 주기적으로 발동하는 저주인가 보네.”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주기적? 그니까…… 또 어제처럼 될 수도 있다고?”
“응. 당장 내일 또 발동할 수도 있고. 아니면 며칠, 몇 주마다 발동할 수도 있고. 그런 식일 것 같아.”
“……으음.”
또 어려질 거란 말인가. 하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저주가 풀렸다는 해석보다는 주기적으로 발동과 해제를 반복한다는 해석이 더 옳을 터였다.
“그럼 그 주기를 알아내야 그놈이랑 싸우는 걸 대비할 수 있겠네.”
“그렇겠지.”
민정이 고개를 끄덕이고 토스트를 베어 물었다.
“어차피 학교에 남아서 세희한테 무공 가르칠 거였잖아. 천천히 알아내면 되지 뭐. 협회는 전력에 공백이 생기니까 조금 바빠지겠지만.”
“그건 그렇지.”
상호는 손에 든 토스트를 입에 욱여넣고 현관으로 향했다.
“나 출근할게. 혜소 저녁에 보자.”
“네.”
“잘 다녀와.”
혜소와 민정이 손을 흔들었다.
그는 둘에게 마주 손을 흔들고 문을 나섰다. 원래대로 돌아온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줄 생각에 걸음이 가벼웠다.
‘야외 수업도 다시 하고, 선생님들한테 인사도 하고…….’
허리에 찬 검이 아이들 꼬리처럼 살랑거렸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그가 교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자 선생들이 파티션 아래로 머리를 쏙 숨겼다. 무슨 악마라도 본 것처럼. 딱 한 명, 건흠만은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상호는 눈인사를 받고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분위기가 왜 이래?’
그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자리로 걸어갔다.
오늘도 일찍 출근해서 뭔지 모를 업무를 보는 미진. 그리고 그 옆에서 방금 막 출석부를 챙긴 설미. 둘은 상호가 다가가도 필사적으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술자리에서 뭐 실수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건 아닌데.
상호는 어색함을 풀어보기 위해 씩 웃으며 물었다.
“그저께 잘 들어갔어요?”
“네…….”
설미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고, 미진은 뭐가 그리 바쁜지 열심히 키보드만 두드렸다.
설미가 출석부를 품에 꼭 안으며 떠듬거렸다.
“상호 씨…… 어제 하루종일 어디 있었어요……?”
“존댓말 하면 대답 안 해줄 거예요.”
“어디 있었어……?”
“그냥, 교실에 애들이랑 있었어요.”
“그렇구나…….”
대답을 들은 설미는 황급히 문으로 걸어가려 했지만, 상호가 은근슬쩍 길목을 막아서서 그러지 못했다.
“많이 바빠요?”
“으응…….”
바쁘다는데 잡아두기도 좀 그렇다. 그게 핑계임을 알면서도 상호는 살짝 몸을 틀어 길을 터주었다.
“알았어요. 그럼 이따 쉬는 시간에 봐요.”
“응…….”
설미는 그와 거리를 두고 벽에 붙어 길목을 지나갔다.
이 서먹함을 어찌 풀어야 하나. 선물이라도 사 줄까. 상호는 나중에 효은에게 설미가 뭘 좋아하는지 물어봐야겠다 생각하며 미진을 불렀다.
“미진 씨.”
“네.”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2학기 일정 한번 띄워주세요.”
그 말에 미진이 군말 없이 일정표를 띄웠다.
상호는 화면에 뜬 일정표를 읽다가 눈을 끔뻑였다.
“뭐야, 오늘 국제교류였어요?”
“취소됐어요.”
“취소?”
미진이 그를 흘끗했다. 한심하다는 눈빛을 숨기지 못한 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느 나라에서 학생을 보내겠어요.”
“아하.”
그러면 국제교류는 물 건너갔고.
중간평가는 10월 초. 예현제도 10월 중순. 기말평가는 12월 초. 그러면 9월은 온전히 수업에 집중할 수 있을 터였다.
‘잘됐네. 세희 위주로 수업하고 애들 평가 준비 봐주면…….’
상호는 미진의 어깨를 토닥였다.
“됐어요. 고마워요. 근데 나 없을 때 뭐 중요한 일 같은 거 있었어요? 애들한테.”
“아뇨.”
“다행이네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진이 눈을 흘겼다.
‘또 뭔가 잘못했나…….’
이제는 그러려니 넘길 수 있었다.
상호는 출석부를 챙기며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일 언제 끝나요?”
“휴학 때문에 일이 쏟아져서.”
“어제 하루종일 교무실에 있지 않았어요?”
“그래도 안 끝나네요.”
“뭐 도와줄 건 없고요?”
“예.”
“대충 하고, 1교시에는 운동장으로 와요. 미진 씨가 수업 도와줘야 되니까.”
“일이 많…….”
미진은 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상호의 얼굴을 보더니 입술을 살짝 깨물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네.”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상호는 미진의 어깨를 토닥이고 문으로 향했다. 뒷짐을 지고 여유가 넘치는 걸음으로.
그런 그의 뒷모습에 미진의 날카로운 눈빛이 달라붙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