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아주 죽을 맛이라니까.”
상호는 한숨을 쉬고 냉면을 젓가락으로 쭉 당겼다.
“나오면서 보니까 학교 앞에 기자가 쫙 깔렸어. 멍청하지. 대체 누가 거기로 걸어 나가겠냐고.”
“이야~.”
나로가 고기를 뒤집으며 웃었다.
“고생이네.”
“귀찮아 죽겠어, 진짜…….”
“눈을 치료하고 좀 밝게 입어보지 그래? 그러면 못 알아볼 텐데.”
“눈은 안 돼.”
많은 기억이 담겨 있으니. 상호는 고개를 저으며 고기를 집었다.
애꾸눈이라는 걸 들킬까봐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나로 너는 그런 기자 안 달라붙어? 아버님은?”
“나한테 달라붙어 봤자 내가 뭘 해주겠어. 예의없는 사람이 가끔 있긴 한데, 그럴 땐 경호원들이 처리해주지.”
“경호원? 지금은 없잖아.”
“너랑 만날 땐 필요 없으니까. 이모, 여기 된장찌개 하나요.”
나로는 그렇게 말하고 고기를 질겅거렸다.
상호는 냉면 육수를 쭉 들이켜고 나로의 눈치를 살폈다.
“나로.”
“응?”
“너희 회사는 괜찮아?”
“아, 회사?”
나로가 씩 웃었다.
“무너졌어.”
상호는 나로의 시선을 피했다.
“……미안.”
“응? 네가 왜 미안해해?”
“아니 그냥. 더 빨리 끝내지 못해서…….”
“에이, 너 덕분에 다 살았는데 뭐. 다친 직원은 없으니까, 그거면 된 거지.”
일반인들은 진상을 모를 터였다.
어차피 미안해도 저질렀을 일이다. 상호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방금 나온 찌개에 숟가락을 가져갔다.
그때 나로가 손목을 살짝 꺾는 시늉을 했다.
“한잔할래?”
“술? 점심인데?”
“조금만 마시자는 거지. 너 제자도 살고, 다리도 낫고. 이래저래 잘 됐잖아.”
축하주라.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직원을 향해 소리쳤다.
“여기 소주 하나요.”
* * *
그렇게 점심부터 한 잔 걸쳤는데.
“자~.”
해련이 빙긋 웃으며 잔을 들었다.
“강 선생의 정력을 위하여~.”
“네?”
“정욕을 위하여~.”
“더 이상한 거 알죠?”
상호는 한숨을 쉬고 복분자주가 든 술잔을 부딪쳤다.
자리에는 해련만 있는 게 아니었다. 상호의 옆에는 설미, 그 앞에는 미진, 그 옆에는 해련. 해련의 앞에는 상호.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술자리로 끌려와 있었다.
‘조금만 마셔야겠다.’
상호는 잔을 살짝 기울이고 내려놓았다. 그러자 해련이 그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 안 마셔요?”
“점심에 친구랑 마시고 왔어요.”
“그래도 더 마실 수 있잖아. 자, 쭉 해요, 쭉.”
“아니…… 내일 개학이잖아요.”
그래서 설미와 미진의 잔도 그렇게 많이 줄어들지 않은 채였다. 그걸 본 해련이 둘에게도 손짓했다.
“한잔들 해요. 조금 마시는 건 상관없잖아.”
“네에…….”
어른의 말이라 무작정 사절할 수가 없었던 둘은 결국 잔을 쭉 비웠다.
상호도 툴툴거리며 잔을 들었다.
‘이 양반은 교장인지 술꾼인지…….’
어쨌든 맛은 좋았다. 새콤달콤 쌉싸름한 게.
곧 식탁에 전골이 놓였다.
“자, 얼른 먹어요, 먹어.”
“네에…….”
설미는 엉거주춤 국자를 잡았다.
분위기가 많이 어색했다. 필시 상호가 X급이란 걸 알게 되어서일 터.
상호가 둘에게 이야기를 해 준 건 아니지만, 그래도 태화와 관련된 일들을 알고 있는 이상, 태화를 구하고 악마와 싸운 게 상호라는 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을 터였다.
상호는 일부러 살갑게 말을 붙였다.
“설미 누나, 걱정 많…….”
“……응? 어?! 네!”
설미는 허둥대다가 국자까지 놓치고 양손을 가슴팍에 모았다. 놀란 토끼눈을 뜬 채로.
“왜, 왜요, 상호 씨……?”
“……에이, 왜 그래요.”
상호는 국자를 집어 설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제가 저승부대인 게 밝혀졌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된 건 아니잖아요.”
“그, 그치만…….”
설미가 우물쭈물하자 해련도 씩 웃으며 거들었다.
“편하게 대해줘요, 임 선생. 강 선생은 변한 거 없잖아. 다리만 빼고.”
“그치만…….”
“자, 한 잔 더.”
해련이 모두의 잔에 술을 따랐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이 자리가 해련이 그와 설미, 미진의 어색함을 풀어주기 위해 마련한 자리라는 걸 깨달았다.
‘……어른은 어른이구만.’
수작부릴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상호는 안심하고 술을 들이켰다.
오늘따라 술이 잘 받는 느낌이 들었다.
* * *
“염병…….”
상호는 비틀비틀 걷다가 가로수에 기대어 앉았다.
잘 받는 줄 알고 넙죽넙죽 마셨더니 이 사달이 났다. 땅이 요동치고 달이 춤을 췄다.
내일이 수업인데.
‘작작 마실걸…….’
후회해도 늦었다. 운기조식을 하면 좀 나아지겠지만 길바닥에서 그럴 순 없는 노릇이고.
‘아이고, 걷지를 못하겠네…….’
길바닥에서 운기조식하기 VS 길바닥에서 자기.
상호는 후자를 택했다.
‘모르겠다…….’
그래서 바닥에 퍼질러 누웠다.
‘상호야, 술 먹고 길바닥에서 자면 안 돼…….’
머릿속에서 예경이 애타게 불렀지만, 때는 너무 늦어 이미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 * *
‘죽는다니까아아아아!’
“……켁!”
상호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새벽녘의 습한 공기가 주변 바닥에 깔려 있었다.
방금 그 목소리가 현실이 아닌 머릿속에서 들렸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술 먹고 길바닥에서 자면 죽는다구! 누나 말 안 들을래! 누나 죽었는데도 눈물 나게 할꺼야? 으헝헝헝…….’
‘아니 누나, 미안해요, 미안해요…….’
‘이제 술 먹지 마!’
예경의 내공이 상호의 가슴을 퍽퍽 쳤다.
남의 영혼이 들어와 있다는 게 참으로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천 대 만 대를 맞아도 상관없었다.
상호는 욱신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짚으려 했다.
“어?”
옷의 소매가 엄청나게 늘어나 있었다. 손을 다 덮을 정도로.
자는 동안 재단사가 다녀갔나. 눈살을 찌푸리며 두 다리로 일어서려 하는데.
바지도 길었다. 질질 끌릴 정도로.
구두도 커졌다. 발이 다 빠질 정도로.
이게 당최 무슨 일인가. 상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뭐야.’
옷이 헐렁하고, 땅이 가깝다.
아직 술이 덜 깬 것이리라. 그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일어섰다가 바로 앞에 있는 가게의 유리창 속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
자신과 같은 옷을 입고 서 있었다.
‘?’
상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256. 나 어떡해
상호는 멍하니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댓 번은 접은 소매. 얼굴의 반을 가리는 선글라스. 그냥 대놓고 작아진 키.
어려졌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어려졌다.
‘대체…….’
10살은 될까. 누가 봐도 초등학교 저학년. 반에서 가장 작은 아이보다 키가 작았다.
넋을 놓은 그의 마음속에 예경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떡해, 어떡해…….’
안절부절못해하는 목소리.
상호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애써 그녀를 달랬다.
‘누나,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상호 너무 귀여워어어!’
‘?’
그쪽이었을까.
‘상호야 누나 어떡해! 누나 심장떨려! 꺄아아악!’
‘……일단 제 심장은 가만히 놔둬 주세요.’
‘꺅! 꺅!’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심장이 마구 벌렁거렸다.
일단 상황 파악은 끝났고, 차분하게 원인과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정리해 보려는데.
‘꺄아아아!’
‘……그렇게 좋아요?’
‘응!’
‘그럼 저도 좋아요…….’
상호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어쨌든 어려진 건 알겠는데, 이유가 뭘까. 마법일까, 환각일까. 아니면 주술일까.
‘생각할 수 있는 건…….’
마법과 주술의 신.
그놈이 그에게 저주를 건 것이다.
‘……그놈이 아니고서야 이런 게 가능할 리가 없지.’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어려지게 할 수 있다니. 상호는 그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아니, 딱 한 명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 사람은 하루아침에 젊어진 게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공이 운용이 안 되네, 큰일났네…….’
상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꼴로는 싸울 수가 없다. 수업을 할 수도 없다. 이대로는 헌터도 선생도 아닌 꼬마일 뿐인데.
설마 이대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 걱정이 앞섰다.
‘민정이 누나한테 물어봐야겠다…….’
다행히 지갑과 핸드폰은 그대로 있었다.
이 꼴로 갔다가는 쓸데없는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 그는 커다란 구두를 질질 끌며 옷가게를 찾아 걸었다.
‘상호야, 나 그거 보고 싶어. 위에는 오버핏에 아래는 반바지고…….’
‘노력해 볼게요…….’
‘꺄아아악!’
‘에휴…….’
* * *
내공을 못 쓰게 되니 교문에 진을 친 기자들을 피해 가지는 못했지만, 대신에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상호는 짧은 보폭으로 열심히 걸으며 생각했다.
‘이거 하난 좋네.’
새벽이라 교정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남교사 숙소까지 가는 길엔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다행이라 여기며 방으로 돌아와 보니 효은과 혜소가 자고 있었다.
‘설명하기 귀찮네.’
상호는 갈아입은 옷만 현관에 대충 던져두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문제는 출근을 어떻게 하느냐. 무작정 여교사 숙소 쪽으로 가기는 하는데, 뾰족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서 민정에게 가긴 하지만, 민정도 특별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터.
‘돌겠네.’
그렇게 한숨을 쉬며 여교사 숙소 건물 현관으로 들어서는데, 미진과 눈이 마주쳤다.
상호를 발견한 미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켁!’ 상호는 주춤하며 걸음을 멈췄다. 예전에 해련의 방문을 열려고 하다가 들키고 곤욕을 치렀던 게 기억나서. 게다가 어제 술자리에서도 어색해서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아니, 술자리뿐만이 아니라 X급이라는 게 밝혀진 후부터 계속.
하지만 미진은 상호를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누구……?”
하긴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한 일일 터였다. 눈에 흉터가 남아 있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어려질 거라고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미진이 다가와 상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일로 왔니?”
“어…….”
미진의 눈은 귀여운 것을 보는 듯 초롱초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본 상호는 차마 자신이 강상호라고 말하지 못했다.
“누나…… 찾으러…….”
“누나?”
“김민정……이라고…….”
“아아.”
미진은 별 의심 없이 그를 민정의 방으로 데려갔다. 미아를 대하는 듯 손까지 꼭 잡아서.
“민정이 언니.”
문을 두드리자 민정이 금방 문을 열었다.
“으응……?”
“여기, 이 아이가 언니를 만나러 왔다는데요.”
“누구…….”
민정은 눈을 비비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어려진 상호를 발견했다.
“…….”
“……안녕하세요~.”
“…….”
상호가 꼬박 허리를 숙이자 민정이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
“민정이 언니?”
“……아?”
“저 출근 준비하러 갈게요.”
“어, 응, 고마워.”
미진은 상호를 민정에게 맡기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남은 둘은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상호야?”
“누나는 알아보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나도 모르겠어.”
상호는 한숨을 폭 쉬고 안으로 들어갔다.
“누나도 잘 모르는가 봐? 마법은 아닌 거지?”
“그런 마법이 있었으면 세상이 뒤집어졌을걸.”
“그럼 역시 주술인가?”
“그런 것 같은데……?”
민정은 상호의 뺨을 양손으로 빙글빙글 문지르며 걱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
“어떡하지? 효은이는 알고 있어?”
“아니. 자길래 두고 왔어.”
상호의 키는 민정의 명치까지밖에 닿지 않았다.
“방법은…… 없는 거지?”
“응. 마법으로는. 근데 수업 가야 하지 않니? 오늘부터?”
“그래서 걱정이야.”
학교로 돌아오고 첫 수업이라 빠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 저주가 언제 풀린다는 보장이 없으니, 언젠가는 아이들에게 설명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계속 아이들을 안 보고 살 수는 없으니까.
상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눈살을 찌푸렸다.
“수업도 수업인데, 문제가…… 지금 그놈이 쳐들어오면 막을 사람이 없잖아.”
“그러게. 오빠한테 말해서 대비해야겠네. 그런데…… 그래도 빠른 시일 내에 쳐들어오진 않을 것 같아.”
“왜?”
“이 저주는 악마한테도 엄청 힘든 저주였을 거야. 그렇지 않다면 며칠 전에 싸울 때 썼겠지. 이거는 아마 시간을 끌려고 그놈이 특별히 공들인 걸 거야.”
“힘을 수복하기 위해서?”
“그렇지. 내 생각은 그래.”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머리 좋은 민정의 말이니 그의 생각보다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상호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 같네……. 나 이제 수업하러 갈게.”
“괜찮겠어? 그 몸으로?”
“실내수업 해야지 뭐. 2학기엔 몬스터 생태 수업도 있으니까.”
“애들이 엄청 놀랄 텐데.”
“……어쩔 수 없지.”
충격이 좀 심하긴 하겠지만, 숨기는 것보다는 낫다. 얼떨결에 미진에게는 숨긴 꼴이 되어버렸지만.
그는 문을 나서다가 민정을 돌아보았다.
“효은이한테 잘 말해 줘.”
“응……. 근데 미진이는 어떻게 해?”
“미진 씨한테는 일단 숨겨줘.”
진실을 알게 되면 둘 다 쪽팔려 죽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문을 나서려는데, 민정이 머뭇거리며 입을 우물거렸다.
“저기, 상호야.”
“응?”
“한번 안아봐도 돼?”
“……응?”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갑자기? 누나는 상관없긴 한데…….”
“안는다?”
“응.”
머리에 뭔가가 턱 하고 놓였다.
‘?’
“우와…….”
민정이 상호의 머리통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쏙 들어오네.”
“…….”
“효은이도 좋아하겠다.”
“글쎄. 근데…… 언제까지 안고 있게?”
“조금만 더…….”
“누나, 나 출근…….”
상호는 민정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한참을 더 그렇게 안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