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4화 (264/501)

* * *

“저한텐 아버지였어요.”

상호의 품에 안긴 혜소가 중얼거렸다.

“아니, 아버지랑 어머니를 합친 것보다 더……. 저한테는 하나뿐인 인연이었으니까.”

상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금 허공답보로 하늘 높이 올라와 있었다. 한 손에는 혜소를 안고, 한 손에는 잿가루가 놓인 방석을 든 채.

발치에 영주와 혜소가 살던 집이 보였다.

“어른 되면 은혜를 갚으려고 했는데…….”

혜소가 고개를 푹 떨궜다.

“……다시 못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미안하다.”

상호의 내공이 혜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저씨가 그동안 오해했어. 저번에 밥상 엎은 것도, 칼 들고 화낸 것도…… 다 순전히 내 잘못이었어.”

“오해였던 거죠?”

“응.”

혜소는 눈을 감았다.

“용서할게요.”

상호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는 혜소의 앞에 방석을 내밀었다.

“보내드려. 바람에 훨훨.”

혜소가 눈을 뜨고 잿가루를 한 줌 집었다.

재가 허공에 뿌려지자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시원하면서도 포근한 바람이.

사아아……

재는 그 바람에 실려 저 멀리 날아갔다. 산 너머 추모관 쪽. 전우들의 무덤이 있는 방향으로.

상호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바람 사이로 어떤 소리가 났다.

하하하……

후련한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252. 미쳤나봐

교장실에는 학교로 돌아온 이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상호와 혜소, 해련과 혁과 태화, 민정. 그리고 지금 문으로 들어서는 효은과 세희.

세희는 태화를 발견하고 쌍심지를 켰다.

“야, 이태화.”

“어라?”

태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실쭉 웃었다.

“헹, 채팅한 거 갖고 삐졌냐? 근데 그거 다 진짜지롱~.”

“누구 맘대로 걱정시키래?!”

“엥?”

태화에게 달려든 세희가 단숨에 꼬리를 잡고 관절기를 걸었다.

“너 때문에 밥도 안 먹고 울었어, 개년아!”

“아야야야! 케헥!”

상호는 교장실 바닥을 뒹구는 두 아이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아마 보건실 침대에서 봤던 것 같다.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효은이 그에게 물었다.

“왜 다 여기 모였대?”

대답은 해련이 했다.

“앞으로 어떡할지 논의하려고요. 그런데…….”

해련의 시선이 상호의 품을 향했다. 그곳에는 혜소가 안겨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그 아이는 누구예요?”

“어…….”

상호는 효은과 민정을 흘끗했다.

“아는…… 아는 형이 돌보던 아이예요.”

효은은 기억이 난 모양이었다.

“뭐야, 그 애. 전에 봤던 걔 아냐? 우리 부대 묘지에서 봤던?”

“맞아.”

“누구 앤데? 기껏해야 여섯 살로 보이는데. 그럼 죽은 양반들은 아닐 거고. 니가 아는 형이라고 해봤자…….”

무언가를 깨달은 듯 말꼬리를 흐린다.

효은과 민정의 눈이 상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을 구했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 형.”

그 말에 둘 다 흠칫했다.

효은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고, 민정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났니?”

“응.”

상호가 평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민정의 눈가에 물기가 고였다.

“용서했어?”

“아니.”

용서할 사람은 그가 아니다. 상호는 혜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용서를 받았지.”

알기 힘든 말이었으리라. 민정은 어리둥절해했고 효은은 눈살을 찌푸렸다. 상호는 그런 둘을 향해 쓰게 웃었다.

“나중에 말해 줄게. 일단은…… 혜소야.”

“네.”

“고모들이야, 고모들.”

혜소가 코를 훌쩍였다.

“우리 거사님이랑 친하세요?”

“응. 다들 친했지. 아저씨는 여기 사람들이랑 이야기해야 하니까…… 고모랑 같이 있어. 효은. 얘 좀 데려가서 밥 같이 먹어.”

효은은 자기가 선택된 것이 귀찮은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상호가 내민 혜소를 잘 보듬어 안았다.

“영주 오빠 아이라고?”

“응. 친딸처럼 돌보던 애.”

“……어쩔 수 없네. 가자, 아가야.”

효은은 혜소의 등을 토닥이며 교장실을 나갔다.

남은 것은 해련, 혁, 민정.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태화와 세희는 무시하기로 했다. 상호는 해련과 눈을 마주쳤다.

해련이 먼저 말했다.

“강 선생.”

“예.”

“교사 일은 계속할 건가요?”

그 말에 세희와 태화가 싸움을 멈췄다.

상호는 자신을 바라보는 두 아이의 시선을 느끼며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글쎄요.”

태화가 벌떡 일어났다.

“쌤 짤렸어?!”

“아니, 악마 때문에.”

“악마? 왜? 쌤이 쓰러트린 거 아니었어?”

태화는 쓰러져 있었으니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상호는 태화의 뺨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끝장을 못 냈거든. 지금부터 준비해야 해.”

“준비? 그 악마 잡을 준비?”

“응.”

“그러면…….”

태화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쌤 학교에 이제 안 오는 거야?”

세희도 흔들리는 눈동자로 상호를 바라보았다.

상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그러진 않을 거야.”

“많이 바빠지시는 거 아니에요……?”

“바빠도 괜찮아, 이제 얼마든지 뛰어다닐 수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상호는 세희와 눈을 마주쳤다.

“나한테 필요한 건 제자야. 내가 실패해도 내 일을 대신 이어가 줄 제자. 내 무공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알고 있는.”

“……아.”

세희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러면…….”

“선생님은 학교에 계속 있을 거야. 지금까지처럼. 대신에 널 가르치는 게 최우선 목표가 될 거고, 다른 아이들은 잘 못 봐주게 되겠지.”

태화의 눈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우씨, 대놓고 편애하게?!”

“그래, 편애다 임마. 어쩔래. 너는 임마 내가 아무리 예뻐해 줘도 한도 끝도 없이…….”

“헹.”

태화도 이제 정말로 질투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상호는 그걸 알아차리고 태화에게 꿀밤을 먹이려던 손을 내렸다.

“어쨌든…… 세희랑 수업하면서도 다른 아이들은 짬짬이 가르칠 수 있으니까, 지금까지처럼 하면 될 것 같아요. 미진 씨가 좀 더 도와줘야겠지만.”

“그런가요.”

해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알고 계속…….”

“잠깐만.”

혁이 손을 들어 해련의 말을 막았다.

“일반 교사로 계속 지내겠다고?”

“네?”

상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안 돼요?”

“안 되지.”

혁이 핸드폰을 흔들었다. 화면에는 상호와 악마가 싸우는 모습이 깨알만하게 나와 있었다.

“X급 헌터인 게 세상에 까발려졌잖아.”

“뭐 어때요. 그거 가지고 알아보는 사람 없을걸요.”

“아니, 내가 허락을 못하겠다고.”

“네?”

“X급이면 홍보대사를 해야 될 거 아냐.”

그런 뜻이었나. 상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싫은데요.”

“같이 싸워주기까지 했는데 이러기야?”

“뭐에 얽매이는 거 딱 질색이라서.”

“어차피 우리 학교 애들은 알아봤을 거고, 소문도 쫙 퍼질 텐데. 그냥 받아들이고 X급으로 살지 그래.”

“아 싫다니까요. 홍보대사 이미 소개시켜 줬잖아요. 그냥 평범하게 교사 일 하게 해 줘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혁은 툴툴거리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래. 알아서 해 봐. 평범하게 살 수 있는지 한번 해 보라고. 아니면 나랑 내기해볼까?”

“또 내기예요? 이사장님 혹시 경마나 토토 좋아하세요?”

“이젠 상사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구만.”

“X급 까면 X급 대우 해준다면서요.”

“평범한 교사로 살겠다는데 교사로 대우해야지.”

혁은 그렇게 대꾸하고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상호는 입맛을 다시고 해련을 돌아보았다.

“뭐 어쨌든…… 학교는 계속 다니게 될 것 같은데. 다음 주 월요일에 연댔죠?”

“응. 기숙사는 내일부터 다시 받고.”

“그럼 그때 뵐게요.”

“어디 가요?”

“정리해야 할 일이 좀 남아 가지고.”

죽은 사람. 산 사람. 하나씩 찾아야 한다. 상호는 민정을 향해 눈짓하고 문가로 걸어갔다.

“가보겠습니다.”

“어, 나도 같이 갈래.”

“저도요.”

태화와 세희가 상호의 앞에 다가와 섰다.

안 그래도 태화는 데려가려고 했고, 세희도 딱히 상관없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고리를 잡았다.

“그래. 가자.”

* * *

조수석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핸들을 잡은 상호는 슬쩍 눈동자를 굴려 옆을 보았다. 그곳에는 효은이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아니, 그냥.”

효은은 눈썹을 한 번 까딱이고 그의 다리를 흘끗했다.

“다리는 누가 고쳐줬어?”

“협회 소속 신앙인이.”

“여자?”

“남자.”

상호는 별 생각 없이 대답하다가 무언가를 깨닫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야, 질투하냐?”

“질투? 질투는 무슨. 멋대로 넘겨짚지 마.”

“그냥 좀 아쉬운 정도인가? 너한테 치료 안 받아서?”

“넘겨짚지 말라고.”

효은이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운전이나 해.”

“단단히 삐졌구만.”

상호는 낄낄거리며 효은의 볼을 콕콕 찔렀다.

“미안해, 어쩔 수 없잖아. 근데 니는 진짜 그런 사소한 거에 삐지는 건 고쳐야…….”

빠악

“……켁!”

상호의 머리가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효은은 손을 거두고 심통이 난 표정으로 창가를 향해 돌아앉았다. 뒷자리에서 그들이 하는 꼴을 지켜보던 태화가 한마디 했다.

“맞을 것 같더라.”

“너까지, 끄응…….”

상호는 뒤통수를 문지르며 백미러로 민정과 눈을 마주쳤다.

“누나, 형은?”

“연결이 안 되네.”

민정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쉬고 싶겠지. 제일 오래 싸웠으니까. 급한 일이니?”

“아니, 급한 건 아냐.”

이제 급한 일은 없다. 천천히 나아가도 된다.

살짝 웃어 보이는 상호에게 세희가 물었다.

“근데 저희 어디 가는 거예요?”

“음, 그냥…….”

상호는 먼 산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고마운 사람 만나러.”

* * *

태화는 묘비에 새겨진 이름을 읽었다.

-이중선의묘

“진짜야?”

“응.”

상호는 뒷짐을 진 채로 태화의 뒤를 서성였다.

“널 끝까지 지키려고 하셨어.”

태화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잘 믿기지 않는걸.”

“그게 진실이야.”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을 진실.

상호는 태화의 머리를 쓰다듬고 돌아섰다.

“인사 나누고 있어.”

“응.”

태화는 조용히 무덤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민정, 효은, 세희가 혜소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상호는 그들에게 다가가 핀잔을 날렸다.

“뭐해?”

“야, 이거 봐봐.”

효은이 혜소의 비니에 앉은 나비를 가리켰다.

“뭔 짓을 해도 안 떨어지네. 머리에 꿀 발라 놨니?”

“아니요.”

“근데 왜 이런다냐.”

효은은 혜소의 비니를 벗기고 빡빡 밀어 동그란 머리의 냄새를 맡았다.

“킁킁…… 흠, 뭔가 고소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애한테 뭐 하냐, 좀 냅둬.”

아버지 같은 사람을 잃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혜소가 아무리 어른스럽고 의연해도 이런 식으로 건드리면 속이 상할 터였다.

상호가 혜소에게 도로 비니를 씌우는데, 민정의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을 확인한 민정이 상호에게 눈빛을 보냈다.

“상호야.”

“응.”

상호는 민정에게서 핸드폰을 넘겨받아 전화를 받았다.

“형.”

[민……? 아, 상호냐. 웬일이야.]

“잤어? 전화를 안 받아 가지고.”

[아, 그게…… 좀 바빴어.]

핸드폰 너머에서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도현은 아니고, 아마도 여자.

상호는 눈을 끔뻑이다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말을 이었다.

“형, 그게…… 아니, 이걸로 말하긴 좀 그렇고. 시간 언제 돼? 중요한 할 말이 있는데.”

영주가 죽은 것도 전해줘야 하고, 예경에 관한 이야기도 전해줘야 했다. 지금 말하기에는 말이 너무 길고 혜소도 옆에 있어서 껄끄러웠다.

도현이 헛기침을 했다.

[으흠, 시간? 글쎄, 내일은 어떠…….]

[아으, 잘못, 잘못했어요…….]

‘?’ 상호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분명히 여자 목소리. 그런데 울먹이는 목소리라서 누군지는 알 수가 없었다.

[더, 더 못 하겠어요. 조금만 쉬게 해주세요. 으……!]

[야, 상호야. 잠시만.]

황급히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됐다, 미안하다. 무슨 말 하고 있었지?]

“만날 시간 있냐고……. 대체 뭔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나, 나중에 말해 줄게. 그래서 언제 만나자고?]

“형이 정하라고……, 정신이 없구만, 아주.”

상호는 한숨을 쉬었다. 큰일이 끝났는데도 이렇게 바쁜가. 하긴 부협회장으로서 뒤처리를 하긴 해야 할 것이다.

“바쁜가 본데 내일 전화할게.”

[어, 어. 그래. 미안해. 내일 보자.]

그때 문을 벅벅 긁는 소리가 났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까불게요, 지금까지 깝죽댄 거 다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5분만이라도 쉬게……!]

[끊는다!]

도현은 다급히 전화를 끊어 버렸다.

상호는 핸드폰을 쥔 채로 멍하니 서 있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형이 누굴 때리고 있나……?’

여자를 때릴 사람이 아닌데.

아무리 고민해봐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상호는 그냥 생각을 포기하고 핸드폰을 민정에게 돌려주었다.

태화를 돌아보니 세희와 무어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인사는 다 했나.’

슬슬 돌아가면 될 것 같았다.

“얘들아, 가자.”

“아, 네.”

세희가 태화의 손을 잡고 상호에게 달려왔다.

그런데 효은이 상호의 허리를 검지로 쿡쿡 찔렀다.

“왜.”

“이야기 좀 해.”

또 무슨 일인가. 상호는 아이들과 민정을 향해 먼저 가라는 눈짓을 했다.

민정과 아이들이 멀어지기도 전에 효은이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야, 왜, 왜…….”

“시끄러. 따라와.”

설마 아까 삐졌냐고 한 것 때문에 화가 났나. 상호의 입에서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알았어, 미안해. 좀 장난친 거 가지고…….”

“뭔 소리야?”

효은이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살짝 치뜬 눈의 속눈썹이 참 길었다.

“어떻게 한 거야?”

“뭐가?”

“그놈, 어떻게 쓰러뜨렸냐고.”

악마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예경의 검은 이제 허리에 차여 있었다. 상호는 예경의 검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어디부터 말해 줘야 하는지.

“누나가…… 그러니까, 예경이 누나가. 내공에 영혼을 넣는 방법을 알고 있었거든?”

“어.”

“그래서, 그 내공을 내가 받아서…… 내 안에 누나 영혼이 있는데, 그거를 영주 형이 계획해서…….”

“어.”

“그니까 막…… 이렇게 저렇게 해 가지고, 영주 형 주술대로 운명이 흘러서? 내가 누나 영혼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됐고? 뭐 그런 식으로 나도 내공에 영혼을 넣을 수 있게 돼서…… 그걸로 쓰러트렸어.”

개떡같이 말했는데 알아들을 순 있을까. 상호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효은을 바라보았다.

효은은 팔짱을 끼고 그를 멀거니 쳐다보고 있었다.

‘또 뭔 개소리냐고 하겠지…….’

상호가 그렇게 포기하고 있을 때, 효은이 그의 앞머리를 잡아 살짝 잡아당겼다.

“아야야, 왜, 왜.”

물어도 묵묵부답.

그래도 아프진 않았다. 상호는 효은의 손이 이끄는 대로 머리를 내렸다.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숙이고.

그러자 양 뺨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응?”

효은의 품.

굳어버린 상호의 귀에 효은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수고했어.”

“…….”

그런 거였나.

상호는 긴장을 풀고 효은을 끌어안았다.

“아직 안 끝났어.”

“알아, 새끼야.”

효은의 손이 등을 토닥였다.

“그래도 수고했어.”

상호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맨날 싸우고 욕해도 이럴 때는 좋다. 꼭 오래된 친구 같은 느낌. 서로를 마음 깊이 이해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그런데 효은이 한마디를 더 속삭였다.

“내일 정신과 가보자.”

“……응? 뭔 소리야?”

“뭔 소리는 내가 할 말이야 이 새끼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니 안에 언니 영혼이 있어? 미쳤냐?”

“아니…….”

고개를 들어 보니 효은이 울먹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상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진짜로 미쳤다고 생각하는구나!’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아니, 설명을 해도 믿을 것 같지 않은데.

그는 당황하며 효은의 등을 토닥였다.

“야, 야. 나 안 미쳤어. 방금 그건 다 농담이고…….”

“머리 다친 거야? 너 내일 나랑 병원 가. 보험 없어도 되니까 종합 검사 받아. 돈 다 내줄게.”

표독스런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뭔가 마음이 아프면서도 기쁜 것 같은데 어쨌든 답답하다. 상호는 주먹으로 가슴을 퍽퍽 두드리며 하소연했다.

“진짜 안 미쳤다니까? 그래, 검사 받자. 검사 받아. 나 멀쩡하면 뭐 해줄 건데?”

그 말에 효은이 코를 훌쩍이며 입을 씰룩였다.

“진짜야? 진짜 괜찮아?”

“그렇다니까…….”

“진짜지?”

“응, 응. 진짜야. 아주 말짱하다고. 뭐 문제지라도 풀어 줘?”

“……알았어.”

상호와 효은은 함께 차를 주차한 곳으로 걸어갔다. 민정과 아이들이 저 멀리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걷다 보니 문득 예경의 기억이 떠올랐다.

“야, 근데 있잖아.”

“응?”

“누나는 네가 나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대.”

상호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죽기 전부터…… 너랑 나랑 사귀었으면 하고 바랐나 봐.”

“…….”

어째 말이 없다.

한참을 걸어가던 그는 옆이 허전하다는 것을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효은은 우두커니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왜 안 따라와?”

“…….”

효은은 어깨를 부들부들 떨더니.

“……언니이이이이!”

울음을 터트리며 민정을 향해 달려갔다.

“언니! 얘 이상해! 예경이 언니랑 이야기를 했대! 차키 나 줘! 병원부터 가게!”

“야, 안 미쳤다고!”

“언니이이이!”

둘은 그렇게 쫓고 쫓기며 민정과 아이들을 향해 달려갔다.

253. 다 함께

다음날 아침.

“선생니이이임!”

바람처럼 달려온 나빛이 상호의 명치에 정수리를 들이박았다.

“선생님!”

“커헉! 쿨럭, 어윽……. 그래, 나빛아.”

“선생님, 선생님……! 태화는요?”

“잘 지내. 지금은 세희랑 놀고 있어.”

둘이 선 곳은 이화관 앞. 나빛의 뒤편에는 나빛의 부모와 나디아가 멀뚱히 서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호는 품에 안겨 울먹이는 나빛의 머리를 씩 웃으며 쓰다듬었다.

“괜찮아. 울지 마, 울지 마. 다 잘 끝났으니까.”

“선생님…….”

나빛의 손이 상호의 옷을 움켜쥐었다.

“응?”

“태화랑 뽀뽀했죠……?”

“……으응?”

나빛의 머리카락이 올올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오빠 태블릿으로 다 봤어요…….”

이 빌어먹을 방송국 놈들이 그것까지 중계했나. 상호는 진땀을 뻘뻘 흘리며 나빛을 살살 밀어냈다.

“나빛아, 그건 태화가 억지로…….”

“저도 억지 부릴 줄 아는데…….”

“크흠!”

뒤에서 나디아와 유연과 봉진이 듣고 있다. 상호는 헛기침으로 나빛의 말을 덮고 나디아를 향해 웃었다.

“나디아, 안녕.”

“네!”

“미안해, 걱정 많이 시켜서…….”

“으응, X랄.”

“…….”

어지럽다.

상호의 시선이 이번에는 봉진을 향했다.

“안녕하세…… 아버님, 그건 뭐예요?”

“이거?”

봉진은 웬 작은 상자를 하나 들고 있었다.

“오다가 주웠는데.”

“…….”

“자네 와인 좋아하나?”

“……아뇨.”

“이런……, 그럼 보관했다가 좋은 사람 주라고. 묵히면 더 좋은 물건이니까.”

“…….”

상호는 봉진이 내민 상자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와인 쪽은 까막눈인데. 그래도 효은에게 주면 좋아할 것이다. 그래서 일단은 받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런 선물을…….”

“인생사 새옹지마라잖나.”

봉진은 묘하게 흐뭇한 눈빛을 짓고 있었다. 어째 땡 잡았다는 표정으로 보이기도 했다.

“자네가 내 사위가 될 수도 있고, 뭐 그런 거지. 앞날은 모르는 거니까.”

“…….”

벌써부터 예비 사위 취급인가.

상호는 유연의 눈치를 살폈다. 이쪽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하지만 표정이 없어서 의중을 알기 힘들었다.

“……어쨌든 감사히 받겠습니다.”

“음, 그래 그래. 앞으로도 우리 딸 좀 잘 부탁하네.”

“예에…….”

“이만 갈게. 나빛아, 잘 지내고.”

“네~.”

나빛은 언제 화냈냐는 듯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봉진이 먼저 차에 올랐고, 유연은 차에 타기 전에 잠시 상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꼭 무언가를 재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를테면 사윗감으로 어떤지라든가.

상호는 유연의 눈빛을 피해 고개를 푹 숙였다.

“들어가세요.”

유연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차에 탔고, 곧 차가 교문을 나갔다.

‘휴우…….’

한바탕 폭풍이 지나갔다. 상호는 한숨을 쉬고 나빛과 나디아의 짐을 들었다.

“가자, 나빛아.”

“아, 맞다.”

나빛이 그의 손을 잡았다.

“다리…… 괜찮으세요?”

“응.”

왼발이 땅을 톡톡 두드렸다.

“멀쩡해. 이제 너희랑 직접 대련할 수 있어.”

“우와.”

그 말에 나빛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빨리 수업하고 싶어요, 헤헤…….”

상호의 얼굴에도 마찬가지로 미소가 번졌다. 아이들의 웃음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랐다.

“나도.”

빨리 월요일이 왔으면 좋겠다. 상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화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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