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3화 (263/501)

* * *

“왜 이렇게 늦었어?”

“당신이 늦게 온 거잖아요. 나는 먼저 와 있었는데. 또 술 마시다 온 거죠?”

“아니. 놀랍게도 아니야.”

“술 끊었어요?”

“이제 끊었지.”

“참나…… 그래서 어떻게 왔는데요?”

“예쁜 딸 마지막으로 한 번 지켜주고 왔지.”

“나 없이 잘 살았어요?”

“아니.”

“새장가는 들었어요?”

“아니. 바람 한 번 안 피웠어. 그래서 태화는 어떻게 했는데?”

“마중 가서 데려오다가, 거기 좀 더 있고 싶대서. 인사만 하고 왔어요.”

“태화도 언젠가 오겠지?”

“거기를 맘에 들어하는 모양이던데. 오더라도 아주 먼 훗날이 될 거예요.”

“괜찮아. 태화가 좋아하면 됐지 뭐.”

“이제 빨리 가요. 열차 늦겠어요.”

“어이쿠…….”

한 명의 사내와 한 명의 여인.

누가 봐도 사랑하는 사이인 그들은, 어깨를 감싸고 품에 기대어 둘이 가야 할 곳으로 향했다.

251. 혜(惠)와 소(燒)

상호는 도현을 바라보았다.

“이제 형한텐 화난 거 없어.”

상호의 품에 안긴 태화가 도현을 향해 눈을 깜작였다.

“다 좋게 끝났고…… 형한텐 그 방법밖에 없었을 테니까. 형도 마음에 두지 마.”

“고맙다.”

도현이 고개를 푹 숙이고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덕분에…… 이제 정말로, 정말로 쉴 수 있게 됐어…….”

그들의 주변으로 헌터들이 모여들었다. 협회의 헌터들, 학회의 마법사들, 수호부대원들, 예현여고 교사들.

거지꼴이 된 해련과 혁이 상호에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예. 교장선생님은요?”

“삭신이 쑤시네. 아이구……. 내일 출근 못하겠는데?”

해련이 허리를 두드리며 힐끔거리자 혁이 혀를 찼다.

“내일은 휴교하죠.”

“내일? 일주일은 쉬어야 하지 않을까? 피난 간 애들도 돌아와야 하는데…….”

“……월요일까지로 하죠.”

“좋지~.”

주변을 둘러보는 해련의 입에서 미소가 흐려졌다.

쓰러진 사람들과 바쁘게 뛰어다니는 신앙인들.

“아직도 전쟁이 끝나진 않았네요.”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방법은 알았으니 됐죠.”

“어떻게 한 거예요?”

“마음을 담으면 돼요.”

“마음?”

“나중에 알려 드릴게요.”

해련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곧 씩 웃었다.

“그래요.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이제는 쉬어요. 그런데…….”

“예?”

“화는 다 풀렸어요?”

상호는 해련의 말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록 때로는 잘못된 세상일지라도.

당신을 만나고, 당신과 살아온 세상이라서.

“용서했어요.”

예경의 검을 살며시 그러쥐고, 그렇게 대답을 했다.

해련도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상호의 품에 달라붙은 태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태화는 어때. 괜찮니?”

“넹.”

“그래. 다행이다.”

상호는 태화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교장선생님.”

“응?”

“태화 좀 학교에 데려다 주세요.”

그 말에 태화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왜 나랑 같이 안 가?”

“얼마 안 걸려. 나도 금방 학교로 갈 거야.”

“나 버려?”

“뭔 소리야. 내가 널 왜 버려.”

상호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가야 할 곳이 있어서 그래.”

남아있는 몇 가지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그동안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해야 했다.

상호는 태화의 머리를 쓰다듬고 품에서 떼어놓았다.

“갔다 올게.”

“응.”

태화가 손을 흔들었다.

상호는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푸른 하늘을 순식간에 가르며, 폐허 끝 도시를 넘어 산 너머로 날아갔다.

그 모습에는 한 점의 번뇌도 남아있지 않았다.

* * *

리주는 멍하니 폐허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부서진 땅. 하늘을 찌르던 협회의 건물도, 그녀가 늘 내려다보던 도시의 풍경도.

다 무너져 평평해졌다.

“공 소장.”

뒤에서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죗값을 치를 때가 왔어.”

민정의 눈에서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뒤를 돌아본 리주는 텅 빈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죄인인가요?”

목소리에 피로가 가득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던 것뿐인데. 더 많은 사람을 살리려고 노력했을 뿐인데…… 그게 죄인가요?”

“아니.”

민정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내 말을 무시한 벌이야.”

뻐억

민정의 주먹이 리주의 얼굴을 후려쳤다.

“케흑!”

리주는 코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아픈 티를 내기 싫은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얼굴을 부여잡고 바닥을 구르다가 자신의 멱살을 잡는 민정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뭘 놀라? 한 방이면 될 줄 알아?”

민정은 다시 주먹을 들어 올렸다.

마법사여도 잔뼈가 굵어서 주먹이 매웠다. 리주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얼굴을 가렸다.

그때.

“민정아.”

익숙한 목소리.

리주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도현을 올려다보았다.

“나와. 내가 할게.”

도현의 말에 민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오빠가 한다고?”

“응. 멀리 가 있어.”

도현은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

민정은 그런 그를 미심쩍다는 듯 쳐다보다가, 순간이동으로 모습을 감췄다.

리주는 도현의 커다란 손을 보았다. 저거에 맞으면 뼈도 못 추릴 텐데.

“때리시게요?”

“아니.”

도현은 리주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의 목소리에도 피로가 가득했다.

“죗값은 다른 방식으로 치르면 돼.”

“부협회장님도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해요?”

리주가 피식 웃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죄인이지.”

“더 많은 사람을 살리려고 한 게요?”

“어쨌든 죄는 죄야. 더 큰 죄를 피하려고 노력했더라도.”

리주는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그런가요. 그럼…… 감옥에 가든, 사표를 쓰든. 둘 중 하나겠네요.”

“퇴사하겠다고?”

“그래야죠. 죄인인데.”

“그래?”

도현이 리주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근데 나 당신 못 보내주겠는데.”

“네?”

언제 한 번 들어본 소리 같았다.

리주는 움찔하며 물러나려 했지만, 내공이 그녀의 다리를 잡고 있었다.

“……뭐하려구요?”

“당신은 그냥 내 명령대로 따랐을 뿐이야. 죄는 지었지만.”

도현은 아직도 리주의 손을 잡고 있었다.

“내가 당신한테 죄를 짓게 했지. 당신 인생을 내가 망친 거야.”

“대체 무슨 소리를…….”

“같이 속죄하자.”

“네?”

리주는 당황해서 손이 덜덜 떨렸다.

“무슨 소리예요? 동반자살이라도 하자고요?”

“빼앗은 만큼 세상에 갚아야지.”

“네?”

도현의 양손에 리주의 양손이 담겼다.

“죽인 만큼 낳으라고.”

“……네?”

그 말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설마 400명을 낳으란 뜻인가. 어떻게 낳으란 말인가. 이 인간 설마 아기가 나무에서 따는 열매인 줄 아는 건가.

리주의 눈이 핑핑 돌았다.

“그, 그게 무슨…….”

“내가 도와줄게.”

“아니, 당연히,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겠지만! 수학적으로…….”

“오늘부터 노력해야지.”

“뭘 오늘부터예요?! 멋대로……!”

“시끄러.”

도현은 리주의 손을 잡아끌었다.

“따지지 말고 세상에 갚아. 그게 당신 벌이야. 나랑 같이 방에 좀 갇혀 살자고.”

“아니, 아니……!”

리주가 아무리 밀어내도 도현의 손을 뿌리칠 순 없었다. 결국 그녀는 도현에게 질질 이끌려 갔다.

‘미쳤나봐, 이 인간…….’

문득 골계스럽단 생각이 들었다.

영웅에게 주변 사람만 지키는 거냐고 그토록 몰아붙였는데. 정작 자신이 그 영웅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다니.

‘……내가 멍청한 년이었나.’

리주는 반항을 포기하고 도현의 손에 걸음을 내맡겼다.

도현이 어떤 방식으로 그녀를 속죄시킬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 * *

상호는 영주의 집 앞에 내려섰다.

절처럼 생겼지만 절은 아닌, 오방색으로 문양을 그린 집. 주변은 조용해서 새소리만 이따금씩 들려왔고,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늘 그렇듯 가만히 앉아 있을 것이다.

들어가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

‘미안하다고…… 해야겠지.’

마루로 올라서던 상호의 몸이 흠칫했다.

‘이건……?’

탄 냄새. 매캐한 잿가루의 냄새.

혜소는 무사할까. 상호는 황급히 창호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한쪽 벽이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촛불들이 크게 불타오른 모양이었다. 원귀가 날뛴 것처럼 사납게. 아마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이글거렸으리라.

계단 모양 제단에 놓여 있던 촛불은 형체도 없이 녹아내렸다. 딱 두 개만 빼고. 맨 윗줄의 왼쪽 첫 번째 것, 맨 아랫줄의 오른쪽 마지막 것.

첫 번째 촛불은 흔들림 없이 조용히 타고 있었고, 마지막 것은 조금 타다가 만 듯 연기만 피어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제단 앞.

물 한 그릇과, 잿더미가 쌓인 방석.

“…….”

상호는 할 말을 잃었다.

불에 타죽은 사람 앞에 물그릇이 놓여 있을 수 있다니.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방석 밑에 무언가가 삐죽 튀어나온 게 보였다. 그는 무릎을 꿇고 그 무언가를 빼냈다.

접은 종이였다.

‘……뭐야.’

사람은 불에 탔는데 방석과 종이는 안 타다니.

펼쳐 보니 편지였다.

-네가 이걸 본다는 건, 내 주술이 성공해서 내가 죽었다는 거겠지.

상호는 작년에 영주가 혜소를 통해 편지를 보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도 영주는 그의 마음을 읽은 듯 미리 써둔 글로 대답했었다.

-또 원혼들이 나를 용서하고, 편지만은 남겨둘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원혼들.

편지를 읽은 상호는 저 첫 번째 촛불과 마지막 촛불이 누구의 것인지 깨달았다.

-너도 이제 다 알고 있겠지. 왜 내가 그분을 죽였는지, 왜 네가 살았는지. 왜 너와 그분 둘이어야만 했는지.

-악마를 봉인으로 약화시켜야 했고, 그분과 네 내공이 한데 모여야 했고, 네 소중한 사람이 내 주술에 걸려들어야 했고…… 많은 조건이 있었지만, 결국 해냈으니 딱히 중요치 않은 이야기지.

-그간 마음고생이 많았을 텐데,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진실을 숨기는 게 주술의 일부라 어쩔 수 없었다.

상호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숙여졌다.

-그러나 이게 끝은 아닐 테지. 나는 내 죽음 이후로는 운명을 읽을 수가 없지만…… 그래도 아마 네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을 게다.

그랬다.

아직 끝장을 내지 못했다. 상호는 편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 너한테도 운명을 바꿀 힘이 있을 테니…… 내 도움은 더 이상 필요 없겠지. 혼자서 잘 해내리라 믿는다. 네가 해야 할 일을 해라.

-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부탁?’

상호는 고개를 살짝 기웃하고 다시 편지를 보았다. 글을 읽는 그의 얼굴이 점차 굳어갔다.

-네 제자는 원래 죽을 운명이었다.

-그 아이가 또 다른 악마가 되거나, 영혼을 완전히 잡아먹히거나. 봉인의 후유증으로 영원히 잠들게 되거나. 많은 길이 있었지.

-그 수많은 길들 중에서 네가 원하는 길을 찾아내기는, 또 이미 주술에 힘을 쏟고 있는 내가 네 제자를 살리기 위해 주술을 쓰기는 아주 힘든 일이었다.

상호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영주에게 아무리 노력해도 갚지 못할 은혜를 입은 셈이었다.

‘그런…….’

-그러니 부탁 하나 하자.

-네 제자를 살리느라 혜소의 행복을 빌어주지 못했다. 네가 잘 좀 챙겨라.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솔직히 너도 나한테 잘못한 게 있지 않냐. 나한테 미안하면 좀 도와줘라. 하하하…….

영주의 웃음소리가 상호의 귀에 울렸다. 들어본 지 너무 오래라 희미한, 그러나 호탕한 웃음소리가.

-그리고 이것도 내 주술로 어찌할 수가 없어 부탁하는데……, 내가 죽은 걸 혜소가 모르게 해라. 장례식은 필요 없고, 재는 바람에 날려 보내라.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다.

-이제 온전한 네 생을 살아라. 남의 주술에 휘말리지 않는, 세상에 억눌리지 않는 삶을.

편지는 거기서 끝났다.

상호는 눈을 감고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형.’

그때.

“거사님~.”

문 밖에서 혜소의 시무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요…….”

상호는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영주가 죽은 걸 혜소가 모르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부탁받았는데.

하지만 아무리 그라도 이 모든 흔적을 단숨에 치울 순 없었다.

“다리 다섯에 날개 두 쌍 달린 동물은 세상에 없대요……. 거사님이 있다니까 있겠지만, 사람들이 몰라서 사올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소고기 조금 사 왔으니까 같이 먹어요……. 어? 아저씨?”

마루로 올라선 혜소는 문가를 돌아보는 상호와 눈을 마주치고 잠시 경계하다가, 그가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고 눈을 깜작였다.

“왜 여기 계신…….”

혜소의 시선이 상호의 앞에 놓인 방석을 향했다.

그 위에 소복이 쌓인 잿더미.

“……어?”

고사리손에 들린 비닐봉투가 툭 떨어졌다.

“어, 어어. 아, 아아…….”

혜소는 입을 딱 벌리고 덜덜 떨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상호는 차마 그 모습을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아아아아안돼에에에!”

혜소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잿더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상호는 그런 혜소를 덥석 잡아 품에 안았다.

혜소의 손톱이 상호의 가슴팍을 할퀴었다.

“안 돼! 안 돼요! 밥 같이 먹기로 했잖아요! 고기 사오랬잖아요! 같이, 같이 먹는다고 얼마나…… 얼마나 좋아했는데! 왜 가신 거예요! 왜 그랬어요! 왜! 왜! 왜……!”

동그란 뺨에 눈물이 철철 흘러내렸다.

“한 끼만 먹고 가세요! 이대론 못 보내요! 못 보낸다구요! 안 돼요, 왜, 왜, 왜! 제발, 제발, 제바아아아알!”

상호는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말없이 눈물만 흘리며, 혜소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얼렀다. 그래도 혜소는 발을 동동 구르고 상호의 어깨를 깨물다가.

“아아아아아아악!”

숨통이 끊어질 듯, 긴 비명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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