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가없고 창창한 하늘 아래.
살아남은 자들은 폐허 한가운데의 악마를 바라보았다.
“크…….”
아직도 왕성하게 꿈틀거리는 그림자. 하지만 반토막난 몸은 이전처럼 재생되지 못하고 있었다.
거인처럼 부풀었던 몸도 이제는 평범한 사람 크기만큼 쪼그라든 채였다.
“허억…….”
그림자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신음이 쏟아져 나왔다.
상호는 형체조차 유지하지 못하는 악마를 향해 두 발로 걸어갔다. 온몸에서 두 가지 색깔의 창염을 피워 올리며.
흐르는 예경의 내공 때문에 혈관이, 근육이 불타는 듯 뜨거웠다.
하지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내가 말했지?”
그는 검을 어깨에 걸쳤다.
“이 칼이 널 죽일 거라고.”
그림자가 위아래로 꿀렁거렸다. 숨을 헐떡이는 것 같기도 했다.
상호가 한 걸음씩 다가가자 그림자가 주춤주춤 물러났다.
“……기다려라.”
악마의 말에 상호는 피식 웃었다.
“왜. 이제 죽을 차례가 되니 겁나냐?”
“아직 힘이 전부 회복된 게 아니었으니까…….”
그림자가 더욱 격하게 꿀렁거렸다.
“본래 힘을 되찾고…… 너를 죽이러 오겠다.”
그림자에서 검은 액체가 터져 나왔다.
액체 사이로 흐릿한 형체가 검은 문으로 도망치는 게 보였다. 상호는 그 움직임을 포착하고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문은 악마가 들어가자마자 사라졌고, 강기는 허공을 갈랐다.
“……쯧.”
상호는 혀를 차고 검을 칼집에 넣었다.
‘도망치는 것 하나는 나보다 훨씬 빠르구만.’
악마는 그렇게 도망쳐 버렸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끝장을 내지는 못했지만, 어떻게 싸워야 할지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영혼을 담은 초강기로 악마의 영혼까지 베는 것.
다만 베어도 죽지는 않은 걸 보니, 아마 무언가가 더 있는 듯싶었다.
‘그건 다음에 만나서 알아보면 되겠지.’
그는 호신강기를 거두고 손바닥에 초강기를 피웠다.
새로이 깨달은 새로운 강기. 검푸른 불꽃 안쪽에 예경의 하늘색 불꽃이 담겨 있었다.
그 색이 좋았다.
그래서 그 불꽃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누나.’
눈을 감자 예경의 기억이 흘러들었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검은 산맥과 그 너머 검은 평원으로 향하기 직전의 날. 저승부대원들이 악마를 상대하기 직전의 날.
영주가 예경을 불렀다.
‘예경.’
둘은 동갑이었다.
‘너랑 상호, 둘 중 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면…… 어느 쪽이 낫겠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대답해줘.’
‘난 못 죽어.’
예경은 단칼에 대답했다.
‘그리고 상호도 못 죽여. 우린 무조건 같이 살아갈 거야.’
‘잘 들어.’
영주가 양손의 검지를 들었다.
‘지금 우리 힘으로는 악마를 못 이겨. 운명의 힘이 너무 강해.’
‘해봐야 아는 거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두 개야. 하나는 네가 내일 악마를 죽이는 거. 대신 다른 열 명은 모두 죽어.’
‘상호도?’
‘상호도.’
‘그럼 다른 방법은?’
‘너희 둘을 엮어서 주술을 걸 거야. 악마를 봉인하는 주술을. 내일 당장 죽이진 못하겠지만…… 대신 네 명이 살게 될 거고, 언젠가는 악마도 죽일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이쪽은 확신하지 못하겠다. 운명의 끝이 잘 보이지 않아서……. 다만 하나 확실한 건, 네가 죽을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거지.’
‘나랑 상호 중에서?’
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경은 단 1초도 고민하지 않았다.
‘날 죽여.’
‘괜찮겠어?’
‘당연하지.’
영주도 더 묻지 않았다. 그리 대답하리라 예상한 듯.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할게.’
‘나는 내일 죽는 거야?’
‘그건 아냐. 상호랑 인사할 시간 정도는 있을 거야.’
‘음, 그럼 역시 이 길이 맞겠네.’
예경은 후련해서 웃었다.
기억을 엿보는 상호에게는 예경의 그 후련함이 가슴을 회칼로 저미는 듯 고통스러웠다.
‘근데 네 명이 살아? 누구누군데?’
‘이제 한 명은 상호지. 나머지는 몰라. 내일 되어야 알아.’
예경이 피식했다.
‘그런가. 그럼 기왕이면 효은이가 살았으면 좋겠네.’
‘효은이?’
‘상호를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 아, 그리고 민정 언니도. 상호가 잘 따르니까.’
‘노력해 볼게.’
영주는 그렇게 대답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상호는 내가 널 죽인 줄 알게 되겠네. 좀 섭섭한데. 그래도 뭐, 주술이란 게 다 그런 거지.’
‘내가 말해 줄까?’
‘아니. 굳이 그럴 필욘 없어. 주술이 끝나면 상호도 알게 될 테니까.’
영주가 몸을 돌렸다.
‘가서 자. 내일 네가 제일 고생해야 돼.’
‘너는?’
‘나는 별 좀 보다가 가련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영주의 뒷모습.
예경의 기억은 거기서 끝났다.
‘……형.’
상호는 눈을 떴다.
예경의 내공이 가라앉자 몸이 욱신거렸다. 전투로 분비된 엔도르핀과 아드레날린의 효과가 끝나고 격통과 탈력감이 찾아왔다.
당장이라도 쓰러지고 싶었다.
그렇지만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상호야.”
비틀거리는 그를 민정이 부둥켜안았다.
“괜찮아……?”
“응.”
“잘했어, 잘했어…….”
“누나도.”
상호도 민정의 등을 토닥였다.
민정의 뒤에는 만신창이가 된 도현이 부러진 창을 짚으며 상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묵묵히, 입을 닫은 채로.
상호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직 모든 것을 용서할 수는 없어서.
“누나.”
“응…….”
“태화 어디 있지?”
“태화……? 아, 저기 있다.”
두리번거리던 민정이 신앙인이 모여 있는 곳을 가리켰다.
넓적한 바위 위, 환자들과 함께 누인 소녀. 상호는 한달음에 달려가 그 옆에 무릎을 꿇었다.
아까 봤을 때 그대로. 눈을 감은 모습.
‘왜 눈을 안 뜨는 거지?’
봉인은 분명히 풀렸는데.
대체 왜 눈을 뜨지 않는 걸까. 상호는 태화를 끌어안고 맥박을 짚었다. 맥도 정상이고 숨도 쉬는데. 왜 일어나질 않는 건지.
곁에 다가온 민정이 당황했다.
“왜 아직도 안 일어났어? 자는 건 아니지?”
상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불행이 있으면 행복이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웠는데, 정작 지키고 싶은 사람을 또 지키지 못하다니.
두 번은 안 되는데.
두 번은 싫은데.
‘제발…….’
제발.
제발.
하늘과 거래해 목숨을 목숨으로 바꿔도 좋으니, 제발.
‘눈 좀 떠봐…….’
하나 남은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 * *
“엄마, 엄마.”
촐랑거리며 걷던 태화는 어떤 문과 담벼락을 보고 멈춰 섰다.
검은 바탕에 황금색 글씨.
“요거 머라고 일거?”
“보자. 음…… 같이 읽어볼까? 봐봐.”
“웅.”
“예.”
“예.”
“현.”
“현.”
“괴렵, 특성화, 여자, 고등, 학교. 이어서 읽어 보자.”
“예현게렵특쪙하고등하꾜.”
“응, 그렇지.”
“하꾜야?”
“응. 그런가 봐. 고등학생 언니들이 다니는 곳이네.”
멀리에 운동장이 보였다.
운동장에는 사람들이 엄청 빠르게 뛰어다녔다. 머리를 굵게 땋은 소녀, 피부가 까무잡잡한 소녀.
둘이 가까워질 때마다 챙, 챙, 금속 소리가 났다.
“엄마, 엄마. 저거 바.”
“응?”
“저 언니 칼 들어쪄.”
“그러네.”
“머싯따.”
태화는 교문 가까이에 섰다.
“나도 저렇게 놀고 시퍼.”
“노는 건 아닌 것 같은걸.”
“재미써 보여.”
까만 눈동자로, 완전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보고 있으니 소녀들이 싸우는 곳에서 한 남자가 절뚝절뚝 다가오기 시작했다. 키에 맞지 않는 짧은 검을 짚으며.
태화는 가까이 다가온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이 사내도 햇살의 역광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안대를 썼다는 것과, 아주 잘생겼다는 것만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우아. 오빠 짱 잘생겨써.”
“……으흠.”
태화의 말에 사내는 당황한 듯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그러고는 곧 씩 웃으며 태화를 내려다보았다.
“뭐 보고 있니?”
“오빠 얼굴.”
“……아니, 방금까지 뭐 보고 있었잖아.”
“쩌거.”
태화는 몽땅한 검지를 들어 싸우는 소녀들을 가리켰다.
사내가 태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헌터에 관심 있니?”
“헌떠?”
“사람을 지키는 일이야.”
“뭐한테서?”
“무엇으로부터든.”
사내는 검을 톡톡 두들겼다.
“괴물과 싸우기도 하고, 사람과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세상과 싸우기도 하지.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우오옹~.”
“그러려면 무엇보다 너 자신이 강한 몸과 마음을 갖는 게 중요한 거야. 무예든, 마법이든, 주술이든.”
“머시써.”
“……듣고 있는 거 맞니?”
“웅.”
태화는 배시시 웃고 물었다.
“그러면 나두 헌떠 될 수 이써?”
“당연하지. 누구든 될 수 있지.”
“근데 나 할 줄 아는 게 업써.”
“배우면 돼.”
“되는 것도 업구, 가족도 업써.”
“아니야.”
사내의 머리 뒤에서 태양이 빛났다.
“중요한 건 네가 그 누구보다도 선한 마음씨를 가졌다는 거야. 네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상관없어. 할 줄 아는 게 없어도, 되는 게 없어도, 가족이 없어도. 될 수 있는 게 헌터야. 사람을 지키는 데에는 아무런 조건도 필요하지 않아.”
“잘 모르게써…….”
“넌 이미 알고 있어.”
사내는 태화보다 훨씬 키가 커서, 올려다보려니 목이 아플 정도였다. 태화는 동그란 눈을 깜작이다가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두 나는 그런 거 모탈 꺼 가태.”
“왜?”
“그냥…… 나는 아무것도 아닌걸. 내가 아빠한테 마자쓸 때 말려준 사람두 업꾸, 돈 업써서 우러쓸 때 도아준 사람도 업써. 밥 머글 때도 혼자 먹구 혼자 설거지햇꾸, 아플 때도 병원 혼자 가써.”
태화의 입꼬리가 씰룩씰룩 올라갔다. 스스로 비웃듯이.
“내가 누굴 지킨다 해두…… 아무도 안 좋아할 꺼야.”
“아니야.”
사내는 안대를 벗어 태화의 손의 쥐여 주었다. 안대의 뒷면에는 태화가 좋아하는 고양이 캐릭터가 수놓여 있었다.
“옛날에 말했지? 세상에 아무리 적어도 한 명은 분명히 널 아낀다고.”
“그랬등가?”
“응. 근데 그게 아니야.”
사내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널 아끼는 사람들이 많아. 너 때문에 울고 웃는 친구들이 있고, 널 위해 세상과 싸우는 선생님도 있지. 너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냐. 오히려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누군가에게는 세상보다도 귀한, 그런 사람이야.”
“진짜루?”
“그럼.”
“그 사람들은 어디 이써?”
사내는 말없이 엄지를 들어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싸움을 마친 소녀들이 그들을 향해 돌아서고 있었다.
“쌤예, 뭐 하십니꺼? 지들 싸우는 기는 안 보고…….”
“선생님, 조언은요?”
“아, 미안. 미안.”
사내는 당황하며 소녀들에게 돌아갔다.
그때 소녀들이 모인 곳의 바깥 언저리 계단 같은 곳에서, 빨간 뿔이 달린 소녀가 일어섰다.
엉덩이엔 검고 매끈한 꼬리가 달려 있었다.
“어이.”
그 소녀가 태화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짝다리를 짚고 허리에 손을 얹은 채.
태화는 건들거리는 소녀를 올려다보며 입을 헤 벌렸다.
“우아, 언니 쭉쭉빵빵해.”
“오옷, 뭘 좀 아는 꼬마구만.”
뿔 달린 소녀는 모델처럼 이리저리 포즈를 취하며 잘난 척을 했다.
“각이면 각! 선이면 선! 이 몸이 바로 교내 최고의 미인이시라고.”
“가슴도 개커.”
“아, 이건 뽕이야. 너한테만 알려주는 건데.”
“엥.”
태화는 눈을 끔뻑이다가 물었다.
“언니, 이 학교 조아?”
“학교? 좋지. 밥이 진짜 맛있어. 잘생긴 쌤도 있고, 놀릴 때 반응이 좋은 애도 있지.”
“친구야?”
“친구는 아니고. 숙명의 라이벌이랄까? 라이벌이라기엔 내가 너무 강하긴 하네. 헹.”
“재미써 보여.”
“재밌어.”
소녀가 실쭉 웃었다.
“너도 크면 여기로 와. 후회 안 할 테니까. 학비가 좀 비싸서 힘들 수도 있지만…… 그 나이에 내 몸매를 알아볼 정도의 천재라면 전액 장학금으로 들어올 수 있을지도? 꺄하하!”
뿔 달린 소녀는 낄낄거리며 친구들에게로 돌아갔다. 태화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웅얼거렸다.
“엄마.”
“응?”
“나 여기 갈래.”
그러자 여인이 태화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여기가 좋아?”
“웅. 나 꼭 여기 갈꺼야.”
“……그래.”
여인은 따뜻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태화야.”
“웅.”
“밥 골고루 먹고. 친구들이랑 재밌게 놀고.”
“웅.”
“배 따뜻하게 하고, 찬 거 많이 먹지 말고. 양치도 꼭 하고, 아플 때는 꼭 선생님한테 바로바로 말하고.”
“웅.”
“잘 지내야 해.”
“웅?”
태화는 고개를 퍼뜩 들어 여인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여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고, 대신 방금 전까지 맞잡고 있던 손에 웬 곰인형 하나가 달랑 들려 있었다.
태화는 자신이 잡은 곰인형의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오늘이 무슨 날인지 기억해냈다.
5월 5일.
처음으로 받았던, 어린이날 선물.
“……엄마.”
갑자기 키가 커진 것 같았다.
씩 웃는 얼굴의 눈가에 물기가 고였다.
“고마워.”
* * *
태화는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머리가 까치집이 된, 안대를 쓴 사내.
얼굴에 피가 말라붙고, 옷은 찢어지고.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사내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그녀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태화는 잠긴 목으로 간신히 소리를 내었다.
“쌤.”
상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태화야?”
“쌤.”
“태화야.”
“응, 쌤.”
“태화야!”
상호가 태화를 와락 끌어안았다.
“태화야, 태화야……. 태화야……. 괜찮아? 괜찮은 거지? 응?”
“응, 괜찮아.”
“다행이다, 다행이다…….”
상호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태화는 손을 들어 상호의 뺨을 쓰다듬었다.
“왜 울어……. 울지 마…….”
“안 울게 생겼냐? 니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고. 너 죽는 줄 알고 나도 죽는 줄 알았어, 바보야…….”
“구래?”
그 말에 태화는 상호의 얼굴을 부여잡고 입술을 쭉 내밀었다.
“웅~, 분위기 타고 키스 한판~.”
그러자 상호가 뺨을 붉히더니, 엷은 한숨을 내쉬고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짧게 해.”
“엥?”
이게 웬일인가. 평소 같았으면 장난치지 말라고 혼냈을 텐데.
의외의 반응에 태화는 눈을 깜작이다가.
“오케이!”
활짝 웃고 입술을 들이박았다.
“간다! 감동의 입술박치기! 웅~ 쪽쪽쪽……부웨에엑! 맛이 왜 이래!”
“토하고 피 쏟고 그랬으니까.”
“천세희 생리대 냄새 같애, 우욱…….”
“야, 너는 표현을 해도 꼭…….”
“꾸웨에에에엑!”
폐허에 한 소녀의 구역질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