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쿨럭…….”
도현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창을 짚고 간신히 서 있는 그에게 악마가 다가왔다.
“포기해라.”
악마는 평온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도현은 상호에게 같은 말을 했던 것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저 말을 자신이 듣게 될 줄이야.
“못하겠다면?”
“의미 없는 희생이 늘어날 뿐이지.”
주변에는 부상을 입은 수호부대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쓰러트릴 수는 없다. 그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자 노력했는데. 주술사들은 아직도 악마를 봉인하는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다.
악마를 막아내는 것도 이제 한계.
도현은 숨을 몰아쉬며 억지로 창을 들어올렸다.
“말에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냐? 전쟁을 일으킨 시점에서 네놈 말은 들을 가치가 없어진 거야.”
“시간을 끄는군.”
“네놈도 우리가 뭘 준비했는지 몰라서 함부로 못 나서는 거잖아?”
악마는 이번엔 대답하지 않았다.
도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정곡인가? 아닌 척하더니만, 갇혀 사는 건 어지간히도 싫었나보군.”
“그래도 결국 날 어찌하진 못한다.”
악마의 손에 마나가 휘몰아쳤다.
도현에겐 지금 저 공격을 막을 힘이 없었다. 온몸의 내공이 다 바닥난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해야 하는 게 헌터라서.
“그럼 끝까지 해보자고.”
창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작은 돌멩이가 날아와 악마의 머리를 때렸다.
퍽
“…….”
악마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돌멩이가 날아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어이.”
안대를 쓴 사내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반갑다. 내 다리.”
“…….”
“내 다리치고는 실력이 제법이야. 그렇지만 본체를 이길 순 없는 법이지.”
상호는 이죽거리며 칼을 뽑았다.
악마의 시선이 예경의 검을 쓱 훑었다.
“그 여자의 검이군.”
“알아보는구만.”
검에서 짙푸른 초강기가 불타올랐다.
“잘 기억해둬. 이게 널 죽일 검이니까.”
상호는 말을 끝내자마자 악마를 향해 뛰어들었다.
칼끝이 다섯 개로 갈라지며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악마에게 짓쳐들었다. 뱀처럼 구불구불한 검로는 평범한 인간에게는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러나 상대는 인간이 아니었다.
턱
악마가 엄지와 검지로 상호의 검을 잡았다. 네 개의 잔상이 일시에 사라졌다.
“이렇게 느린 검으로…….”
다른 방향으로 도현의 창이 날아들었지만, 악마는 그 역시 잡아내고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렇게 느린 창으로. 누굴 죽이겠다는 것…….”
콰앙
상호의 발이 악마의 턱을 후려쳤다.
기맥이 살짝 뒤틀리는 게 느껴졌다. 상호는 내공을 차분하게 다스리며 재차 몸을 비틀어 돌려차기를 날렸다.
꽈아앙
발에서 대포 소리가 났다.
악마는 살짝 비틀거리다가 고개를 흔들고는, 상호의 다리를 덥석 붙잡고 냅다 던져버렸다.
콰아아아아앙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X벌.”
상호는 피 섞인 침을 뱉고 입맛을 다셨다.
상대가 안 된다. 상대를 해보려면 저승부대급 실력자가 넷은 있어야 하는데, 수호부대원들은 이미 뻗어버렸고 남은 것은 상호와 도현뿐.
심지어 그때는 그나마 성력으로 악마의 몸에 타격을 줄 수 있는 효은과 왠지 모르게 악마가 두려워하는 예경이 있었지만, 지금은 둘 다 없었다.
‘뒤지게 아프네…….’
상호가 툴툴거리는 그때, 악마가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검지의 끝이 협회 건물이 무너진 자리를 향하고 있었다.
“뭔가를 꾸미고 있군.”
신앙인과 주술사, 그리고 태화가 있는 자리.
악마의 손가락에서 보라색 에너지가 쏘아져 나갔다.
“……쳇!”
상호는 다급히 양팔에 호신강기를 끌어올리고 달려들었다.
콰아앙
“컥!”
간신히 막아는 냈지만, 양팔이 부서질 것 같았다. 그는 그 충격에 못 이겨 바위 더미에 처박혔다.
아니, 처박히다 못해 반대편까지 뚫고 나왔다.
콰과과과
“꺅!”
“헉……!”
상호가 엉망진창이 되도록 바닥을 구르자 건물 잔해 반대편에 진을 치고 있던 이들이 깜짝 놀랐다.
상호는 땅을 짚고 피가 흐르는 고개를 들며 중얼거렸다.
“……염병.”
못해먹겠다.
애초에 승산도 없고, 쓰레기들을 위해 싸울 맛도 안 나고. 보람도 없는 일을 굳이 해야 하나 싶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신앙인들을 눈빛으로 물리고 태화가 누워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태화의 옆에는 상호의 다리를 치료했던 신앙인 청년이 서 있었다.
“비켜.”
상호가 턱짓하자 청년이 옆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상호가 태화를 안아드는 것을 보고는 눈에 불을 켜고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뭡니까? 더 안 싸우려고요?”
“한번 싸웠으면 됐지. 해보니까 안 되더라고.”
“치료해 줄게요. 계속 싸워줘요. 지금도 사람들이 다치고 있다고요…….”
멀리서 주술사들을 쪼던 리주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뭐야, 왜 벌써 온 건데? 큰소리치면서 가더니 도망가려고?”
상호는 리주의 말은 그냥 씹어 버렸다. 그가 아무런 대꾸도 않자 주변에서 성난 이들이 따지고 들었다.
“도망치는 거야? 다들 죽을힘을 다해서 싸우고 있는데!”
“그러고도 X급이야? 당신이 그럴 자격이 있어?!”
“이 비겁자야!”
상호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사람들의 힐난은 계속되었다.
“특별취급을 받았으면 받은 값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전쟁을 막을 생각이 없어요? 당신 저승부대 맞아요?”
“당신 잘못이잖아! 당신이 봉인을 푼 거잖아! 양심이 있어?!”
결국 상호는 눈깔이 뒤집혀 버렸다.
“……이 X발새끼들!”
그의 몸에서 터져 나온 내공이 모두를 짓눌렀다.
“컥…….”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그들에게 상호는 씹어뱉듯 쏘아붙였다.
“특별취급? 그래, 받았다. 내 애인은 세상에서 제일 특별하게 죽었고, 나는 나라에서 제일 특별한 장애인으로 살았지. 이 개새끼들아, 너희야말로 양심이 있냐?”
“커흑…….”
“그것도 모자라서 애 아버지를 고문해 죽여버리고, 죄 없는 애를 잡아가서 다시는 못 일어나게 만들어버리고, 그게 너희가 말하는 양심이냐? 너희는 너희가 세상에서 제일 깨끗하냐?”
예경의 검이 그들 모두를 빙 둘러 겨눴다.
“똑똑히 알아둬, X발것들아. 구더기도 지들이 먹는 게 시체인 줄은 안다. 니들은 시체 위에 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벌레만도 못한 종자들이고, 난 그딴 새끼들 살리려고 칼을 든 게 아니야.”
“……그래도.”
신앙인 청년은 진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사람은 살려야 합니다.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게…… 헌터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돌아온 게 특별취급이라고.”
“……그럴지라도 사람은 살려야 합니다.”
지금껏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도 복장을 터지게 하는 말이었다. 상호는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검을 움켜쥐었다.
“또 그렇게 남한테 희생을 강요할 셈이냐?”
떨리는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혐오와 분노가 묻어났다.
“정의로운 척하지 마, 이 더러운 새끼야. 결국 너희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더럽게 살아남았기 때문이고, 정의로운 사람은 이미 다 죽었어.”
“설령 그렇더라도…… 더러운 입일지라도. 그게 정의든, 정의로운 척이든…… 정의롭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청년이 착잡한 표정으로 나직하게 말했다.
“인정합니다. 저는 귀하가 말하는 것처럼 더러운 사람이고,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무책임한 인간입니다. 그렇더라도…… 제가 구더기만도 못한 존재더라도. 사람이 죽는 걸 방관할 순 없어요.”
“그러면…….”
상호의 부릅뜬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애인은 왜 죽은 거냐?”
“…….”
“네 말대로 그게 정의라면, 그게 양심이라면…… 왜 저승부대가 열두 명뿐이고, 왜 다들 죽어야 했던 거냐? 대답해 봐.”
대답하지 못하는 청년에게 상호는 눈을 번득였다.
“대답해 봐.”
“…….”
“대답해 보라고.”
“…….”
“대답하라고, 이 개새끼들아!”
일갈이 천둥처럼 일대를 울렸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병X새끼들.”
상호는 태화를 안고 그곳을 걸어서 빠져나오려 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절박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제발 도와주십쇼…….”
사내가 머리를 조아렸다.
상호는 곧 그 사내가 중선의 장례식장에서 마지막까지 정신을 차리고 있었던 이라는 걸 기억해냈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저희가 다 잘못했습니다. 버러지들 목숨 한 번 살린다 생각하고 도와주십시오…….”
사내가 눈물을 흘리며 애걸했지만, 이미 부서져버린 마음에는 닿지 않았다.
“X까.”
상호는 그 손길을 뿌리치고 걸어갔다.
* * *
[똑똑히 알아둬, X발것들아.]
핸드폰에서 담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운전대를 잡은 아버지가 뒷좌석에 앉은 그녀를 흘끔 돌아보았다.
“뭐 보고 있니?”
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구더기도 지들이 먹는 게 시체인 줄은 안다. 니들은 시체 위에 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벌레만도 못한 종자들이고, 난 그딴 새끼들 살리려고 칼을 든 게 아니야.]
흘러나오는 것은 방송국의 전투 중계.
아이들 앞에선 항상 유순하게 웃던 담임이, 차가운 목소리로 헌터들에게 욕을 내뱉고 있었다.
[정의로운 척하지 마, 이 더러운 새끼야.]
항상 가증스러운 위선자라고 생각했는데.
[대답하라고, 이 개새끼들아!]
자신만큼, 어쩌면 자신보다 더.
깊은 한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병X새끼들.]
그래서 담임의 그 말들이, 가은에게는 약간의 동질감을 들게 했다.
가은은 핸드폰 화면 속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 사내를 가만히 바라보며 그 목소리에 계속 귀를 기울였다.
* * *
“후우…….”
도현은 부러진 창대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상호가 한 방에 날아가 버린 후 혼자서 분전하며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지만, 아직도 주술사들에게선 기별이 없고 그를 도우려는 헌터들마저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이젠 정말로 가망이 없어 보였다.
“슬슬 포기하고 싶지 않나?”
악마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내게는 보인다. 네 눈 속의 흔들림이.”
“그건 그냥 힘들어서 그런 건데.”
도현은 능청스럽게 받아치고 부러진 창에 초강기를 둘렀다.
“혹시 배추가 뭔지 아냐?”
“너희 언어는 이미 완벽히 습득했다.”
“그럼 무슨 뜻인지 알겠네.”
“어려운 길을 가는군.”
악마의 등 뒤에 수십 개의 검이 나타났다. 완전한 칠흑색. 빛을 빨아들이는 색깔의 강검. 도현도 그걸 보고 최대한 많이 강검을 만들었다.
두 개.
체력이 슬슬 바닥이 나 버렸다.
‘……베여서 죽는 게 아니라 힘들어 죽겠군.’
도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호신강기를 올렸다.
그가 창과 강검으로 악마를 공격해 들어가자 악마가 검을 조종해 막았다.
카각
그리고 수많은 강검들로 도현의 등을 공격했다.
도현은 쏟아지는 강검의 비를 몸을 비틀어 피했다. 하지만 하나를 채 피하지 못해 어깨를 베이고 말았다.
촤아악
피가 철철 흘렀다.
그 감각에 몸을 움찔하는 순간, 악마는 빈틈을 놓치지 않고 도현의 명치에 주먹을 날렸다.
퍼억
“……커헉!”
도현은 가슴팍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지 않으면 죽는다. 그런데 일어날 힘이 없었다. 포기하지 않고 다리에, 손에 힘을 주려 했지만 이젠 정말로 한 톨의 힘도 남지 않았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기까진가.’
먼저 간 전우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맑고 정겨운 하늘에 악마의 얼굴과 강검을 든 손이 침범해 들어왔다.
“즐거웠다.”
악마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내리쳤다.
도현은 눈앞으로 닥쳐오는 시커먼 강검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나도 간다. 얘들아…….’
그렇게 곧 찾아올 고통을 기다리는데.
콰아앙
머리를 베었다기엔 너무 큰 소리가 났다.
도현은 자신의 몸이 하늘을 날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엔 대가리만 잘려서 날아가는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고 목도 팔다리도 멀쩡히 달려 있었다.
누군가가 착지와 동시에 그와 악마를 날려버린 것이다.
‘누구……?’
도현은 어안이 벙벙해서 눈을 끔뻑였다. 그때 비산하는 흙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젊은 목소리.
늙은 말투.
“어머,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247. 할 수밖에 없으니
상호는 멀리에서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냥 떠나버리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해련이 도착해 버렸다. 그녀의 뒤편 하늘에는 민정과 학회의 마법사들, 예현여고 교사 몇 명이 날아오고 있었다.
‘……쳇.’
상호는 대충 기댈 만한 벽을 찾아 그 앞에 앉았다.
헌터들을 억누르려고 내공을 끌어낸 탓에 또 기혈이 뒤틀렸다. 아니, 기혈뿐만이 아니라 복장도 뒤집어진 채였다. 쓰레기들을 상대하느라 분통이 터져서.
그래도 태화의 얼굴을 보니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왜 눈을 안 뜨니…….’
걱정도 사라졌으면 좋으련만.
태화의 얼굴을 쓰다듬는 상호의 옆에 누군가가 착지했다.
“결국 저질렀나.”
혁이었다.
“확실히 비범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구만.”
“…….”
“이미 일어난 건 어쩔 수 없지. 근데 왜 여기 이러고 있어?”
“……싸울 수 있는 몸상태가 아니라서.”
“그래도 S급보단 강할 거 아냐? 빨리 합류하라고.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혁은 그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상호는 전장을 향하는 혁의 뒷모습에 대고 혀를 찼다. 이런 와중에도 출근 타령이라니.
‘……학교.’
문득 아이들 생각이 났다.
교실 바닥에 떨어진 개털. 야외수업을 하고 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후텁지근한 땀 냄새. 쓰지 말라고 해도 기어코 쓰는 화장품 냄새와 쉬는 시간마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그 모든 것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일단은 쉬자.’
그는 태화를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주변에서 폭발음이 일어나도, 상호가 안고 달리면서 이리저리 흔들려도, 태화는 눈을 뜨지 않았다. 잠든 것처럼 고르게 숨을 쉴 뿐.
덜컥 겁이 났다. 뭔가 주술과 관련된 후유증이 남은 게 아닐까.
그때 태화의 입술 사이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엄마…….”
바람 앞의 촛불처럼, 당장이라도 꺼질 듯한 목소리.
또 안 좋은 꿈을 꾸는 걸까. 상호는 조용히 태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전장을 돌아보았다.
새롭게 참전한 헌터들이 악마를 둘러싸고 있었다.
* * *
“오잉.”
태화는 눈을 끔뻑였다.
어딘지 모를 거리. 하지만 아주 익숙한 느낌. 건물은 연필로 그린 듯 경계가 희미하고, 파스텔 톤의 하늘은 그림처럼 예뻤다.
그 외에는 색채가 없는 온통 하얀 세상.
동그란 눈이 아래를 향했다.
“뭐여.”
다리가 짧았다.
아니, 몸이 다 짧았다. 몸도 다리도 팔도 손가락도.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은 네다섯 살 아이처럼 눈이 낮았다.
태화는 어리둥절하다가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고민했다.
“어…….”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거리에는 달콤한 냄새가 가득했다. 설탕 냄새 같았다. 조금 뭉근한 것을 보아 아마도 솜사탕.
태화는 그 냄새를 따라 걷다가 골목 사이의 그늘을 들여다보았다.
사아아……
바람 소리가 기이했다.
그늘의 깊은 곳, 온통 시커먼 자리에서 무언가가 손짓하고 있었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았고,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부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태화는 동그란 눈을 깜작이며 그늘로 걸어가려 했다.
“태화야.”
골목으로 들어서기 직전에, 따스한 손이 태화를 붙들었다.
기억에 없는 목소리.
그런데도 그리운 목소리.
태화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손을 잡은 이를 올려다보았다.
“손잡고 다녀야지.”
햇살의 역광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굽슬한 머리카락과 고운 얼굴선은 알아볼 수 있었다. 태화는 여인을 빤히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엄마.”
“응.”
“엄마?”
“왜, 우리 공주님?”
여인이 웃었다.
태화는 멍하니 서 있다가 무심코 양손을 올려 머리를 더듬었다.
“……어라.”
“왜?”
“나 뿔 오디갓찌?”
“뿔? 그런 게 왜 있어. 아이구, 우리 공주님 걸어다니면서 꿈꾸네.”
여인은 태화의 손을 살짝 잡아끌었다.
“가자. 솜사탕 사 줄게.”
“솜사땅?”
“좋아했잖아. 얼른 먹으러 가자. 다른 것도 사 줄게.”
“웅.”
태화는 자신이 무언가를 떠올리려 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여인과 함께 거리를 아장아장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