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또 왔나요?”
리주는 한쪽 손을 허리에 올리고 삐딱하게 상호를 올려다보았다.
“역시 통행증을 만들어 드리는 게 피차 편하지 않나 싶은데.”
“…….”
상호는 말없이 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들어온 곳은 가짜 66층 리주의 방. 리주의 주변에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수호부대원들 둘이 서 있었다. 검을 든 여인과 복면을 쓴 마법사.
상호의 시선은 오로지 리주만을 향했다.
“아직도 심통이 났어요?”
리주가 싱긋 웃었다.
“스물넷이랬던가? 영웅이라 해도 어린 건 어쩔 수 없네요. 세상과 여자애 하나를 맞바꾼 게 그리도 꼬왔어요?”
“…….”
“자랑스러워해야죠.”
리주는 상호에게 다가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제자가 스승을 따라서 영웅이 됐는데. 내가 선생님이었다면 태화를 응원했을 거예요. 그게 옳은 일이니까. 애초에 도망치지도 않았을 거고.”
“당신.”
상호는 웬만하면 침묵을 지키려고 했지만, 가만히 듣고 있자니 입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겁이 없군.”
“영웅들은 다 똑같은 소리를 하네. 그 말은 마법사님한테도, 부협회장님한테도 들어 봤어요.”
리주는 같은 대답을 해 주었다.
“내 목표는 이미 달성했어요. 세상을 지키는 거. 부득불 사람들을 죽여왔고, 나도 깨끗한 사람은 못 됐지만……. 그래도 세상을 지키는 게 내 정의였으니, 그 정의를 지키다 죽어도 딱히 한은 없어요.”
그녀의 눈에는 신념이 깃들어 있었다.
상호는 가만히 그 눈을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태화나 보여줘.”
“아, 그럼요. 갈까요?”
둘은 수호부대원들과 함께 방을 나섰다.
* * *
시장 골목의 한 가게 앞.
혜소는 쪼그려 앉아서 풀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없어요?”
“없고 자시고가 아니라 모르지.”
의자에 앉은 노파가 혀를 끌끌 찼다.
“다리 다섯 달린 놈은 알아도 날개 네 개 달린 놈을 어찌 아냐?”
“다리 다섯 달린 짐승은 뭔데요?”
“X이 달리면 그게 다리 다섯이지.”
“X이 뭐예요?”
“거시기 모르냐?”
“거시기가 뭐예요?”
“되었다. 머리 깎았으면 모를 수도 있지.”
노파는 고개를 흔들고 어딘가를 턱짓했다.
“저기 저 정류장 보이냐?”
“네.”
“저기서 버스…… 몇 번인진 모르겄다. 하여튼 타고 가면 대학이 있응게 거기로 가서 머리 좋은 놈들헌테 물어봐라. 이런 시장바닥에서 찾지 말고.”
“네.”
혜소는 다리를 펴고 일어서서 고개를 꼬박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이고, 인사도 참 잘하는 것이 앙 깨물어 주고 싶구먼. 근데 너는 남자냐 여자냐?”
“여자예요.”
“내 딸도 너처럼 귀여웠었는데.”
노파는 입맛을 다시고 손을 내저었다.
“어서 가라. 버스 놓치면 또 기다려야 할 거 아니냐.”
“네. 안녕히 계세요.”
혜소는 다시 허리를 숙이고 정류장을 향해 아장아장 걸어갔다. 노파는 그런 혜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다른 노파가 허리를 두드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왔냐? 니는 가게도 혼자 보면서 뭘 이리도 자주 싸대냐?”
“옆집에서 잘 봐주는디 뭐~. 그라는 니는 말도 없이 갑자기 와 가지고는 주인 행세여. 집은 어쩌고 왔어?”
“부서졌다.”
“뭐? 괴물놈들이라도 왔어?”
“몰라. 공무원 놈들이 부순 것 같던데. 나랏밥 먹는 놈들이 부숴 놓고는 그냥 날라버리네. X로잡것들…….”
“허허이~. 웃기는 놈들이네그려.”
노파들은 수다를 떨며 가게를 지켰다.
* * *
기다란 복도의 문들 중 하나를 열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상호는 리주의 뒤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리주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점심은 먹었어요?”
“…….”
“그 정도로 슬퍼요? 이해가 안 가네. 그냥 받아들이면 편하지 않나?”
구태여 대꾸하지 않았다.
위로 열리는 문을 지나고,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고. 리주가 지문인식기에 손가락을 대자 원형 문이 열리며 악마를 봉인한 방이 드러났다.
태화는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완벽하게. 머리카락 한 올의 위치까지 달라지지 않은 채.
“24시간째인데 하나도 안 늙었어요.”
리주는 문가의 벽에 등을 기댔다.
“내가 맞았다고요. 이대로면 50년, 100년까지도 봉인해둘 수 있어요. 대충 계산해도 만 명 이상의 목숨을 살린 거라구요.”
상호를 향한 리주의 눈이 둥글게 구부러졌다.
“영웅님의 제자가.”
그딴 말들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만이 맴돌고 있었다.
이 방법이 맞을까.
정녕 이 길밖에 없는가.
상호는 결정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당신들.”
리주가 말없이 눈썹을 까딱였다.
“하나 착각하고 있는 게 있어.”
그는 절뚝이는 걸음으로 태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침대 옆 머리맡에 서서, 태화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난 영웅이 아냐.”
빨간 뿔.
굽슬한 머리카락.
고요히 감긴 눈과 창백한 뺨. 도톰한 입술.
그 모든 것들을 눈에 마음에 새기고.
“그저 기억 하나에 좀스럽게 몇 년을 파묻혀 살고 있는…….”
나지막이 말을 맺었다.
“비루하고, 옹졸한 인간일 뿐이야.”
예경의 검이 시퍼런 날을 드러냈다.
리주는 상호가 칼을 뽑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죽일 건가요?”
상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아이의 희생까지 헛되게 만들 생각이에요? 그럼 정말로 무슨 의미예요? 이대로 두면 세상이라도 구할 수 있지, 그 아이를 죽여버리면…… 어?”
순간 리주의 얼굴이 굳었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그녀는 곧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막아.”
옆에 서 있던 수호부대원들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네?”
“막아!”
리주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검을 든 여인이 당황하며 상호에게 달려들었고, 복면을 쓴 마법사도 황급히 손을 들어 마나를 끌어모았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곧 상호의 검이 아래로 내리쳐지고.
콰악
다리 한 짝이 허공을 날았다.
243. 너희 모두를 죽이고
“미쳤어?!”
리주가 눈에 핏발을 돋우며 소리쳤다. 목이 찢어지게, 비명을 지르듯이.
“이 미친 새끼! 제정신이야? 미쳤냐고! 애 하나 살리자고 전쟁을 다시 일으켜? 다 같이 죽자고? 아니…… 그동안 죽은 400명은 뭘 위해 죽은 거야? 네가 다 개죽음으로 만들어 버린 거야, 이 쓰레기 새끼야!”
“어쩌라고.”
상호는 그렇게 대꾸하며 태화에게서 호흡기와 전극, 옷 아래의 관들을 떼어냈다.
허벅지의 출혈 때문에 얼굴이 창백했다.
“살고 싶으면 치료나 해.”
“대체 왜 그런 거야? 그걸 말해. 복수야? 다 같이 죽자, 그런 거냐고!”
“안 하면 정말로 그렇게 되겠지.”
방의 한쪽 벽은 완전히 날아가 있었다. 수호부대원들의 작품이었다.
“그 잘난 대가리로 생각해 봐. 날 치료하는 게 나을지, 치료 안 하는 게 나을지. 어느 쪽이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지. 계산해 보라고.”
상호는 피식 웃으며 말을 맺었다.
“그게 당신 주특기잖아.”
“……미친 새끼.”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상호의 말이 맞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리주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66층으로 신앙인 데려와. 가장 높은 등급으로. 따지지 마! 봉인이 풀렸어. 당장 부협회장님 부르고, 헌터 빼고 다 대피시켜! 빨리!”
상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잘린 다리는 수호부대원들이 들고 갔다. 최대한 멀리까지 가져가려는 모양이었지만, 이미 늦었는지 상호가 딱 한 번 느껴봤던 기운이 빌딩 일대를 해일처럼 휩쓸고 있었다.
불길하고 위압적인 기운.
하지만 그딴 것엔 관심 없다.
‘풀린 거 맞지……?’
상호는 마음을 졸이며 태화의 뺨을 쓰다듬었다.
살짝 혈색이 돌아온 것도 같았다. 봉인은 확실히 풀렸으니 아마 금방 정신을 차릴 것이다.
특별한 후유증이 없다면.
‘제발…….’
그는 태화를 품에 끌어안고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허벅지에서 쏟아지는 피가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어갔다.
‘눈 뜨고…… 한 번만 웃어줘.’
그거면 된다.
그것 하나 때문에 이 미친 짓을 저질렀다. 상호는 눈시울을 붉히며 태화의 뺨에 얼굴을 묻었다.
어지러워지는 머릿속에 아침의 일이 떠오르고 있었다.
* * *
“어머.”
해련은 문을 열고 들어서다가 흠칫 놀랐다. 교장실 한복판에 상호가 우두커니 서 있어서.
놀란 것도 잠시뿐, 해련은 곧 조심스럽게 상호에게 다가갔다.
“이야기 들었어요.”
해련의 손이 상호의 손을 감쌌다.
“누나들한테…….”
그녀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말없이 눈을 감았다. 소중한 사람을 똑같은 방식으로 잃는 아픔이 어떤 것일지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그때 해련의 귀에 상호의 목소리가 닿았다.
“교장선생님.”
나직하고, 고요했다.
해련은 고개를 들어 상호를 바라보았다.
“말해요.”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상호의 눈빛은 차갑고 또 뜨거웠다.
“뒷일을 부탁드리려고 왔어요.”
해련은 그 말을 알아듣고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강 선생.”
“네.”
“나는…… 가족이 있어요.”
해련의 눈이 젖어 들었다.
“그래서 강 선생이 그런 선택을 한다는 게…… 나한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에요. 이해하죠?”
“예.”
“그렇지만…….”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강 선생이 정말 그 길로 가겠다면…… 말리진 않을게요. 각자 입장이 있고 뜻이 있는 거니까…….”
“죄송합니다.”
상호는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해련이 벽에 걸린 검을 집으며 물었다.
“반 아이들한테 인사는 했나요?”
“이제 하러 갑니다.”
“그럼 인사 끝나면 연락 한번 줘요. 그때부터 대피시킬 테니까……. 피난이 끝나면 나도 싸우러 갈게요.”
그 말에 상호는 살짝 목이 메었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거, 알고 계시죠.”
“물론.”
해련은 슬픈 눈으로 웃었다.
“그게 우리 일이잖아요.”
그야말로 헌터.
상호는 약간의 위안과 부끄러움을 느끼며 돌아섰다.
“감사합니다.”
“먼저 가 있어요. 금방 따라갈 테니까.”
방을 나서는 그에게 해련이 손을 흔들었다.
상호는 문을 닫고 잠시 복도 벽에 기대었다. 든든한 우군이 생겼지만, 한편으로는 지금부터 자신이 할 일에 대해 조금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뜻은 정해졌고, 곧 분노와 절망이 그 일말의 죄책감마저 살라 없애 버렸다.
그는 거침없는 걸음으로 교실을 향했다.
* * *
“아.”
상호가 문을 열자 아이들이 흠칫했다.
다들 미동도 하지 않고 상호를 바라보았다. 나빛이 조금씩 울먹일 뿐. 단비마저도 귀나 꼬리를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태화의 상태에 대해 들은 모양이었다.
상호는 교탁 앞에 서서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자리 두 개가 비어 있었다.
“세희는?”
“방에 있심더.”
지윤은 풀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데려올까예.”
“아니.”
세희는 모든 진상을 알고 있으니까. 굳이 지금 하는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상호는 아이들과 눈을 마주쳤다.
“너희도 대충 상황은 알지?”
“모르겠어요…….”
미래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반에서 제일 똑똑한 미래도 저럴 정도면 다른 아이들은 어떨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상호는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람을 잡아먹는 악마가 있어.”
괴물의 왕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그가 예경의 검을 칼집째로 들어 보이자 아이들의 시선이 검에 집중되었다.
“그 악마가 내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고.”
그 악마는 실체가 없고.
“이제는 태화까지 잡아먹으려고 해.”
역겨운 시체 냄새를 풍기며, 인간이 모이는 곳에 나타난다.
“난 그 악마의 아가리를 찢으러 갈 거야.”
상호는 아이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슬퍼하는 눈도 별처럼 반짝인다. 저 눈을 그토록 열심히 지켜왔는데.
이제 자신의 손으로 저 빛을 지워야 했다.
“그런데 그러면 너희가 위험해져.”
단비가 눈을 깜작였다.
“멍……, 저희……가요?”
“응. 그래서 말인데……. 이 자리에서, 여기서.”
상호는 뒷짐을 지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작별해야 할 것 같다.”
“……작별이요?”
나빛의 회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처음부터 말해줄게.”
상호는 왼쪽 바짓단을 걷고 안대를 벗었다.
번개 맞은 고목처럼 검게 말라비틀어진 다리와, 세로로 길게 눈을 가르는 흉터가 드러났다.
“궁금하지 않았어? 내가 왜 몸을 안 고치는지. 내가 왜 효은이와 서로 잘 아는 사이인지. 내 옛 애인이 어떤 사람인지……. 미래가 특히 많이 궁금했지?”
“그건 지도 궁금합니더.”
지윤도 예경에 대한 이야기는 모른다. 상호가 X급이라는 것은 알고, 옛 애인을 잃었다는 사실까지는 알지만, 예경이 누구인지, 상호에게 어떤 사람인지는 몰랐다. 그걸 아는 아이는 세희뿐.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이제 알려줄게.”
때가 됐다.
“내가 어느 부대에 있었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무엇과 싸워 왔는지…….”
부대라는 말에 몇몇 눈치 좋은 아이들이 움찔했다. 은율, 미래, 아리, 하솔, 그리고 가은.
상호는 눈을 감았다.
“전부 다. 들려줄게.”
그의 입에서 오래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 * *
아주 오랜 이야기가 끝나고.
아이들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X급이요?”
단비가 침묵을 깨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승부대요……?”
“응.”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한테 증명할 방법은 없다. 뭐 있다 해도 너희는 알아볼 수 없는 것들뿐이겠지만……. 그래도 효은이가 있으니 아주 허무맹랑하다 생각하진 않겠지.”
그 말대로 모두의 눈동자엔 의심의 빛이 없었다.
미래가 평소답지 않게 말을 떠듬거리며 물었다.
“그 악마, 그분을 죽인 그 악마가…….”
“지금 태화에게 봉인되어 있는 놈이야.”
“그럼 그 악마의 봉인을 풀면…….”
“다시 전쟁이지. 그래서 작별이야.”
상호는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미안하다. 무책임한 어른이라서……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이미 결정했으니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은율이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저희도 그게 옳다고 생각해요.”
“다는 아닐 거야.”
상호는 쓴웃음이라도 지어주려 했지만, 입꼬리가 조금도 올라가지 않아 금방 포기했다.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아이들도 있겠지. 더 많을 수도 있고. 그런 아이들은 날 원망해도 좋아. 나는 제자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선생 실격인 놈이고…… 수만 명 목숨보다 내 옆사람이 소중한, 개만도 못한 놈이다.”
“아니에요.”
나빛이 벌떡 일어섰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니에요. 선생님 나쁜 사람 아니에요…….”
“용서 안 해도 돼. 아니, 용서하지 마라. 전쟁을 겪어 본 놈이 전쟁을 강요하고 있으니…….”
상호의 눈이 번득였다.
“그래도 난 해야겠다.”
그 말에 지윤이 그와 눈을 마주쳤다.
“지도 가겠습니더.”
“안 돼.”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다.
“S급 헌터도 파리 잡듯이 죽이는 놈이야. 내가 너희까지 보호할 여유가 없어.”
“그래도…….”
“너희가 있으면 내가 약해진단 소리야.”
상호는 고개를 푹 숙이는 지윤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 보는 게 마지막이 될지도 몰라. 내가 죽을 수도 있고, 운 좋게 살아도 전쟁이 일어나면 만나기 힘들어지겠지. 그 전쟁도 언제 끝날지 모르고…….”
“그러면.”
이츠키가 그를 바라보았다.
“어디서 만납니까?”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힘들 것 같고…… 끝난 뒤에도 만날 수 있다면, 여기로 모이자.”
“학교로 말입니까?”
“응.”
“그럼…….”
이츠키도 눈을 내리깔았다.
“작별, 입니까.”
“끼잉…….”
단비가 꼬리를 가만히 두지 못하고 마구 흔들었다. 초조해하는 모습이었다.
“다……. 다 헤어지는 거야……?”
“어쩔 수 읎제.”
지윤이 단비의 등을 토닥였다.
“태화가 더 중요하디.”
“어쩔 수 없지만……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 멍…….”
상호는 단비의 머리도 쓰다듬고 나빛을 바라보았다.
나빛은 이제 울먹이지 않았다. 상호가 작년에 혼냈을 때처럼, 울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의연하게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다들 가족들한테 가.”
상호는 나빛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가서 대피해야 한다고 설명드려. 특히 집이 서울에 있는 사람들은 남쪽으로 벗어나고. 나빛이, 오빠한테 말하는 거 잊지 말고.”
“네…….”
“TV나 라디오에서 눈 떼지 마. 핸드폰으로 뉴스 계속 확인하고……. 변하는 상황에 적응하는 거, 항상 가르쳤지?”
“네.”
아마도 이게 마지막 가르침이 될 것이다.
“소중한 사람은 목숨 걸고 지켜라.”
상호는 가은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을 느끼며 나직이 말했다.
“그 사람이 죽으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내가 너희한테 가르친 것들로…… 잘 지켜내. 그게 가족이든 친구든.”
그리고 검을 짚으며 문가로 향했다.
“이제 갈게.”
“세희는 안 보십니꺼?”
“보고 가야지. 내가 가고 나면 교장선생님이 방송으로 알려주실 거야. 그동안 부모님한테 먼저 연락드리고, 기숙사에 챙겨야 할 게 있으면 미리 챙겨.”
이로써 전해야 할 말은 모두 전했다. 시간이 부족해 마음은 전하지 못했지만.
상호는 문을 열고 한 발짝 나갔다가, 더 나아가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열두 쌍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빠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갈게.”
“쌤예.”
지윤이 다가와 주먹을 내밀었다.
“뽀사뿔고 오이소.”
그러기 힘들다고 몇 번을 설명했는데.
하지만 상호는 아주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지윤과 주먹을 맞부딪쳤다.
“그래.”
그리곤 곧바로 몸을 돌려 이화관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