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배 안 고프세요?”
혜소는 고구마를 우물거리며 물었다.
영주는 늘 그렇듯 눈을 감고 촛불을 향해 앉아 있었다.
“응.”
“호박고구마라 맛있는데. 조금 드셔 보세요.”
“괜찮다.”
사백 개의 촛불은 이제 벽의 한 면을 빼곡히 채워 땀이 날 정도로 환하게 방을 비추고 있었다.
돌연 영주가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 속 촛불이 일순 흔들렸다.
방에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는데도.
“혜소야.”
“네.”
“지금부터 이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마라.”
“……네?”
혜소는 눈을 깜작였다.
그러나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에, 곧 고개를 끄덕이고 맑게 대답했다.
“네.”
그때 문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차는 가까운 곳에서 소리를 멈추더니, 곧 문 여는 소리로, 검 짚는 소리로 바뀌었다.
혜소의 길지 않은 인생에 흔치 않은 소리였다.
“……거사님.”
혜소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불렀지만, 영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턱……
검 짚는 소리가 점점 다가오고.
창호지에 사내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턱……턱……
칼 소리를 따라 점점 커지는 그림자.
혜소의 심장 소리도 따라서 커졌다.
턱
그림자는 세 걸음 째에 창호지를 가득 메웠다.
혜소는 문 너머를 향해 나직하게 물었다.
“……아저씨?”
끼이익……
문이 열리고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피와 흙이 말라붙은 얼굴. 석상처럼 굳은 표정. 만신창이가 된 몸.
손에는 이미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혜소는 흠칫 놀랐다가 다가가서 상호의 손을 잡았다.
“괜찮으세요? 피가…….”
상호는 멍하니 혜소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영주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 X발 새끼.”
완전히 악귀가 되어 버린 얼굴에서 콧김이 뿜어져 나왔다.
“이제 만족하냐?”
영주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누나로 모자라서 제자까지…… 그러고도 또 뭐가 남았어? 왜 아직도 이러고 있는 거야? 뭐 더 가져갈 게 남았냐?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아저씨…….”
“묻잖아, 이 개새끼야!”
상호는 앞을 막아서는 혜소를 밀쳐내고 버럭 소리쳤다.
“다 니가 이렇게 만들었잖아. 아니야? 누나도 태화도 다 니가 죽였잖아. 아니야? 네 그 X벌놈의 주술로 네 외할머니까지 이용하면서 함정을 파가지고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 아니야? 말을 해, 이 X발새끼야!”
그 말에 영주의 몸이 움찔했다.
드디어 뭔가 반응을 보이는구나. 상호는 칼을 들고 비틀거리며 영주에게 다가갔다.
영주가 작게 중얼거렸다.
“외할머니?”
“그래, 이 새끼야.”
“내 외할머니를 뵈었다고?”
“이젠 발뺌이냐? 아닌 척 하지 마. 네가 꾸민 일이잖아! 컥…….”
쿨럭, 기침에 피가 섞여 나왔다.
속이 뒤집어지고 피가 거꾸로 흐르는 울분을, 아직 다 아물지 못한 몸으로 토해내고 있으니. 덧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하나만 물어보자.”
상호는 칼집을 떨어뜨리고 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당장 베고 싶었지만.
꼭 물어봐야 할 게 있었다.
“태화한테 들어간 그놈 영혼.”
아직, 되돌릴 수 있는지.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냐?”
“6년 전에도 같은 질문을 했지.”
영주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없다.”
그때와 대답이 같았다.
그렇게 대답할 줄 알고 있었다. 상호는 예경의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러자 혜소가 그와 영주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안 돼요!”
상호의 살기가 혜소를 향했다.
“비켜.”
“싫어요……!”
혜소는 눈을 질끈 감고 영주의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고사리손으로 옷자락을 꼭 움켜쥐면서.
“거사님은 안 돼요, 우리 거사님 괴롭히지 마요. 그런 분 아니에요. 그러실 분 아니에요…….”
“비키라고!”
“제 소중한 사람이에요, 제발, 아저씨한테 소중한 사람들처럼 제게도 소중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거사님 괴롭히지 마요…….”
칼끝이 흔들렸다.
내공을 쓰지 못하는 지금, 혜소가 다치지 않게 영주를 벨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다친다, 혜소야. 나와.”
“안 돼요. 이러지 마세요, 아저씨…….”
“나오라고.”
상호는 혜소를 힘으로 떼어내려 했지만, 혜소는 영주의 등을 끌어안고 아득바득 버텼다.
결국 상호는 혜소의 앞에 무너지듯이 엎드렸다.
“부탁이다…….”
머리를 처박고 그 위로 손을 싹싹 비비는 상호를, 혜소는 놀란 토끼눈으로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발 부탁이다, 혜소야. 나한텐 더 이상 남은 게 없어……. 내가 평생을 사람 한 명 안 죽이고 살아왔다. 딱 한 번, 딱 한 명만 죽이게 해 줘라. 내 사람들 죽인 새끼, 한 번만 죽이게 해 줘라…….”
“틀렸어요…….”
혜소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 사람들은 아저씨가 행복하길 바라지, 살인자가 되기를 바라진 않았을 거예요……. 다시 잘 생각해 봐요…….”
“제발…….”
상호는 방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그러나 혜소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는 결국 검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일그러진 얼굴이 점차 공허하게 비어 갔다.
“……그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상호의 입이 굳게 닫혔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문가로 향하는 그를 혜소가 슬픈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기운 내세요…….”
“…….”
“번뇌가 사라지지 않으면…… 염주를 굴려 보세요. 방법 기억하고 계시죠? 하얀 알이 엄지에 올 때까지…….”
“…….”
“속는 셈 치고…… 한번 해 보세요.”
상호는 대답 없이 방을 나갔다.
혜소는 멀어지는 상호를 마루까지 나와서 지켜보았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뒷모습이 퍽 처량했다.
‘어떤 슬픈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의 새로운 행복을 찾아내기를. 혜소는 눈을 감고 마음으로 빌었다.
자동차 떠나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 * *
“까치다~.”
나빛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세희는 나빛의 검지 끝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까치 몇 마리가 교문 주변 나무에 앉아 있었다.
“까치네.”
“오늘 선생님 오시려나 봐~.”
“야는 뭔 소릴 하노. 쌤은 도망치고 있다 아이가.”
“뭔가 느낌이 그래. 헤헤…….”
나빛은 볼을 긁적이며 웃었다.
셋은 수업이 끝나 기숙사로 가는 중이었다. 시간은 오후 4시. 다른 반보다 종례가 살짝 늦어 주변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별안간 세희의 눈에 두 여인이 들어왔다. 여교사 숙소 앞의 효은과 민정.
나빛과 지윤도 둘을 본 모양이었다.
“수녀님~.”
셋은 둘을 향해 달려갔다. 효은과 민정도 그녀들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둘의 앞에 다다른 지윤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뭐 더 온 거 없습니꺼?”
“응.”
효은은 고개를 끄덕였고, 민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 건 없는데…… 좀 이상하네.”
“뭐가예?”
“협회 사람들이 안 보여.”
세희와 나빛과 지윤은 눈을 깜작였다.
“없어졌다구요?”
“응. 철수한 모양인데…… 물론 그런 척만 하고 정령으로 감시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어.”
셋은 민정의 말을 듣고 주변을 열심히 둘러보았지만, 셋의 능력으로는 뭐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세희는 입에 손을 얹고 생각에 잠겼다.
“왜일까요?”
“글쎄. 어쩌면…….”
민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도 덩달아 불안감에 휩싸였다.
“어떤 건데요……?”
“아니, 아냐. 기우겠지. 어쨌든 너희는 계속 조심하고 있어.”
“네…….”
세희가 대답하는데 옆에서 나빛이 흠칫했다.
“……어?”
“와 그라노.”
“저기…….”
나빛이 아까와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저 멀리의 교문을 향했다.
세희는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어?’
검을 짚으며 걸어오는 청년.
나빛과 지윤의 입에서 같은 뜻의 단어가 흘러나왔다.
“……선생님?”
“쌤?”
둘 다 세희처럼 얼이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셋의 발이 땅을 박찼다.
“선생님~!”
“쌤예!”
셋은 상호를 향해 신나게 달려갔다.
거리가 멀었지만 누가 봐도 상호였다. 검을 짚고 걷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그래서 특별히 생김새를 살피지 않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셋의 달리는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선생님? 얼굴에 피가…….”
나빛은 당황하며 손에 성력을 담았다.
그 손이 상호의 얼굴을 쓰다듬고 흙을 털었지만, 상호의 멍한 눈은 초점도 없이 허공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세희도 멍하니 상호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어떻게든 쥐어짜냈다.
“태화는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세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안 돼요…….”
“…….”
“안 돼요, 선생님…….”
다리에 힘이 탁 풀렸다.
땅바닥에 주저앉아버린 세희의 뒤로 민정과 효은이 달려왔다. 둘의 얼굴에도 당황이 가득했다.
“야, 애는? 애는 어디 버리고 왔어?”
“…….”
“상호야, 태화는……?”
“…….”
묵묵부답.
지윤과 나빛도 상황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나빛의 동그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갔다.
지윤은 상호의 앞섶을 움켜쥐었다.
“쌤예, 뭡니꺼. 뭐가 우찌 된 깁니꺼. 와 태화가 없어예?”
“…….”
“고 기집애 어데 갔습니꺼. 말하라구예. 나빛이 울잖아예. 빨리 괘안타고 말해 주이소. 와 말을 못합니꺼!”
상호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넋이 나가서, 아무런 대꾸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지윤은 그 모습을 보고 상호의 가슴팍에 머리를 들이박았다.
“와……, 와 말을 못하는디예……. 태화 어디 갔냔 말입니더…….”
“…….”
“쌤이, 쌤이 누군디 와 못 지켰습니꺼……. 쌤이 누군디…….”
누군가가 살며시 지윤의 손을 잡아 상호에게서 떨어뜨렸다. 지윤은 자신의 손을 잡은 민정을 눈물이 고인 눈으로 돌아보았다.
민정이 아이들을 한데 모아 품에 안았다.
“윽, 끅, 으흑…….”
나빛이 끝내 울음을 터트렸고, 세희는 상호처럼 텅 빈 눈으로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상호는 아이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쓰러질 듯 비틀대며 남교사 숙소로 향했다.
민정은 아이들의 등을 다독이다가 효은을 흘끗했다.
“안 따라가도 되겠어?”
“혼자 있고 싶겠지. 그나저나 결국 또 봐 버렸네.”
효은이 먼 산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 표정…….”
민정은 고개를 푹 떨궜다.
예경을 잃고 다리까지 절게 된 상호에게 또 짐을 지우지 말자고 도현과 약속했었는데. 교사가 된 후로 잘 웃게 된 상호를 보고 기뻐했던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결국은 이렇게.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다시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표정을, 또 보고 말았다.
‘미안해, 예경아…….’
그녀도 아이들의 머리 위에 얼굴을 묻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242. 운명의 종착
쪼르르……
상호는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얼굴을 씻으려고 수도를 틀었는데,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이게 다 무슨 짓인가 싶었다.
다 의미 없는데.
거울을 올려다보니 꾀죄죄하고 볼품없는 사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멍청한 새끼.’
그는 수도를 잠그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귀찮다. 다 귀찮다. 그래서 그냥 피와 흙을 묻힌 채로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더러워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다 의미 없으니까.
아까부터 코를 찌르는 시체 냄새가 조금 거슬렸지만, 전장에서 굴렀던 그에게는 그리 큰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곧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죽은 듯이 깊게.
* * *
“아직도 일이 바쁘냐?”
아버지의 물음에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제 많이 해결됐어요.”
“그래?”
도현의 아버지가 고개를 기웃했다.
“그런데 아직도 피곤해 보인다.”
도현은 말없이 밥그릇을 내려다보았다.
간만에 갖는 가족끼리의 식사. 그런데 영 입맛이 없었다. 좋아하는 반찬이 식탁에 깔려 있는데도.
목에 무언가가 걸린 것처럼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밥을 깨작이는 그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푹 쉬다 가라. 직장일은 잠깐 잊고.”
“예.”
도현은 무겁게 숟가락을 들었다.
* * *
피가 말라붙은 눈꺼풀은 뜨기도 힘들었다.
자고 일어나니 새벽. 세상이 고요하고 어두웠다. 아직도 어디선가 썩은 내가 흘러들고 있었다.
상호는 아직 캄캄한 천장을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
곧 아침이 온다.
출근해야 할까. 한 명이 없어진 교실에 무슨 말을 하며 들어서야 하나. 아이들의 얼굴은 어떻게 볼까. 세희를, 나빛을, 지윤을. 그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교실을 시끄럽게 울리던 태화의 웃음소리를 다시 들을 순 없는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문득 첫 상담 때가 기억이 났다.
‘선생님이랑 약속 하나 해.’
‘뭔데요?’
‘네가 우리 학교 무사히 졸업하면 선생님이 소원 하나 들어줄게.’
‘뭐든지요?’
‘뭐든지.’
뭐든지.
‘……나는.’
널 위해서라면, 뭐든지.
상호는 손을 얼굴 앞으로 들어 올렸다. 손목에 묶인 염주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염주알들 사이 단 하나의 하얀 염주알.
‘이 하얀 알의 바로 위부터. 하나, 둘, 셋. 이렇게 108번을 세는 거예요.’
‘108번씩이나?’
‘네. 그렇게 108번을 제대로 셌다면 엄지에 하얀 알이 있을 테고……. 만약 아니라면, 제대로 안 센 거죠.’
혜소는 그렇게 말했다.
108번을 세어 하얀 알이 엄지에 오지 않았다면, 마음이 혼탁하여 평정을 잃은 것이니 다시 잘 생각해 보고, 하얀 알이 엄지에 왔다면 그때는 마음 따라 행하시라고.
안 그래도 지금 스스로의 생각에 확신이 없었다.
상호는 속는 셈 치고 눈을 감았다.
‘하나.’
둘, 셋.
텅 빈 마음속에 상념이 하나둘씩 찾아오기 시작했다.
‘잊어라.’
도현의 말.
‘어쩔 수 없었다.’
영주의 말.
상호는 무시하고 계속 염주알을 세었다. 열, 열하나, 열둘.
‘꺄하하하!’
경망스런 웃음소리.
염주를 세던 손이 움찔했다.
‘쌤~ 밥사조~.’
‘편애 금지!’
‘나랑 같이 가겠다는 거지?’
그 방정맞은 목소리는 곧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바뀌었다.
‘미안해.’
‘보내줘.’
‘사랑해.’
마지막은 목소리가 뒤섞여서 들렸다. 같은 최후를 맞이한 두 사람의 목소리가.
그 목소리에 정신이 팔려, 어디까지 셌는지 잊어버렸다.
‘백둘인가.’
상호는 감으로 다시 숫자를 찾아 세어나갔다. 백둘, 백셋, 백넷.
백여덟.
마지막 숫자를 세고, 슬며시 눈을 떴다.
‘…….’
검은색.
엄지 밑에 놓인 염주알은 검은색이었다.
색을 확인한 상호는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그래.’
손에 힘줄이 불거졌다.
우두둑
동그란 염주알이 바닥에 뿔뿔이 흩어져 굴러다녔다.
상호는 뜯어버린 염주의 줄을 내던지고 검을 잡았다. 더 이상 머릿속이 비어있지 않았다.
세상이 틀렸다 하더라도.
자신이 미쳤다 할지라도.
‘나는 내 길을 간다.’
그는 비틀거리며 방을 나섰다.
* * *
영주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 옆에 앉아서 합장하고 있던 혜소는 낌새를 느끼고 영주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혜소야.”
영주는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고기를 좀 먹어야겠다.”
“고기요?”
혜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주는 고기를 거의 먹지 않았다. 이따금씩 사 오는 것도 혜소 자신에게 먹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웬일로 고기를 찾는지.
그래도 맛있는 요리를 해 주고 싶어서, 살짝 웃으며 되물었다.
“어떤 걸로요?”
“날개 두 쌍에 다리 다섯 달린 짐승의 고기야.”
혜소는 눈을 깜작였다.
날개 두 쌍에 다리 다섯 달린 짐승이 대체 뭔가.
“……그런 동물도 있어요?”
“찾으면 있을 거야. 조금 먼 시장에 나가야 할 수도 있지만.”
“네…….”
혜소는 지갑을 챙기려고 일어섰다가, 문득 어제의 일이 생각이 나 영주를 돌아보았다.
“그 아저씨가 또 오면 어떻게 해요?”
“괜찮아.”
전혀 괜찮을 것 같지 않았다.
멀리까지 나갔다가 상호가 또 오면 어떡하나. 혜소 자신이 없으면 단칼에 영주를 죽이려 들 것이었다.
그 걱정 때문에 혜소는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정말 괜찮아요?”
“응.”
영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걱정 말고 다녀오렴.”
그렇다면 괜찮을 터였다.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니까.
혜소는 걱정을 거두고 지갑을 챙겨 방을 나섰다. 짤막한 다리로 아장아장 걸어서.
“다녀올게요.”
“응. 조심히 다녀와.”
곧 문이 닫혔다.
영주는 살짝 눈을 떠 촛불들과 물 한 그릇을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