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우와~.”
태화가 방바닥에 드러누워 배를 두드렸다.
“오늘 뭔 날이야? 왤케 밥이 맛있어?”
태화의 앞 밥상에는 가재 껍데기가 난잡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신선한 것은 지금 상황에서는 구하기도 보관하기도 힘들어서 냉동으로 샀는데, 그럭저럭 먹을 만은 했다. 상호는 껍데기를 모아 접시에 담으며 대답했다.
“너 심심하니까 밥이라도 맛있는 거 먹으라고.”
“꼭 잡아먹기 전에 살찌우는 것 같애~, 앗.”
태화가 실쭉 웃었다.
“오늘 나 잡아먹으려고 그러는구나?”
그 말을 들은 노파가 가재를 먹다 말고 멈칫하더니,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마루를 향했다.
상호는 당황하며 노파를 불렀다.
“할머니. 먹다 말고 어디…….”
“늙었다고 눈치도 없으랴? 앞집 김할매네에서 자고 올 테니 아침까지 찾지 마라.”
“아니 저기요, 할머니!”
노파는 그의 부름을 씹고 대문을 나갔다. 경공이라도 쓰는 듯이 빠르게.
상호는 굳게 닫힌 대문을 보며 진땀을 흘렸다. 영주의 외조모면 분명 80세쯤일 텐데, 어찌 저렇게 정정하고 신속한지.
‘뭐 하는 할머니야…….’
한숨을 쉬고 다시 밥상을 향해 돌아앉는데. 태화가 그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상호는 반짝이는 빨간 눈동자를 보고 움찔했다.
“……뭐야, 왜.”
“그냥.”
태화가 배시시 웃었다.
“쌤.”
“응.”
“나 졸려.”
“빨리 씻고 자.”
“쌤이랑 같이 잘래.”
“……정리하고 설거지해야 돼. 먼저 자.”
“도와주면 일찍 끝나지?”
“뭘 도와. 그동안 씻고 있으면 되지.”
“물 두 번 데우는 데도 시간 걸리잖아.”
“데우지 말고 자. 난 식은 물로 해도 충분해.”
“쌤.”
“왜.”
“같이 씻고.”
“…….”
“같이 자자.”
태화의 속삭임이 상호의 귀를 간질였다.
막무가내다.
어쩔 수가 없다. 이길 수가 없다.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히힛.”
태화가 씩 웃었다. 맑게, 밝게. 돌담 너머에 휘영청 뜬 달처럼.
상호는 그렇게 환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살며시 손을 들어 태화의 등을 지그시 눌렀다.
“으히히히…….”
태화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품에 안겼다.
둘은 졸리다느니, 빨리 씻으라느니, 시간이 걸린다느니 따위의 말들은 다 잊고,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아주 오랫동안.
시간이 멈춘 것처럼.
239. 이별
부우웅──
마을에 흔치 않은 소음.
부둣가 도로에서 자꾸 자동차 소리가 났다. 나름대로 부드러운 타이어를 써서 자신들의 방문을 감추려 했지만, 상호의 귀에는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지금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온몸의 신경을 바깥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크웅…….”
옆에서 태화가 코를 골았다.
그때 미약한 마나가 땅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상호는 그 마나의 정체를 깨닫고 눈을 번쩍 떴다.
마법진.
마을 하나, 아니 지역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광대한 마법진.
‘수면 마법인가.’
그 외의 무언가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호신강기를 끌어올려 몸을 엄습하는 마나를 막아냈다.
그런 후 빠르게 옷을 입고, 머리맡의 검을 잡고. 태화에게 빵모자를 씌운 후 내공으로 들어 품에 안았다.
큰방으로 나오자 태화가 눈살을 찌푸리며 칭얼거렸다.
“으응……, 쌤…….”
“쉬…….”
그가 머리를 쓰다듬자 태화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아무래도 수면 마법은 마법진의 본질이 아닌 것 같았다. 아마도 순간이동을 막는 좌표 왜곡 결계.
상호는 내공을 실처럼 뻗어 마을 전체를 탐색했다.
‘멀리도 있군.’
마법사들은 그의 기감으로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멀리 있었다. 아마도 산 너머에서부터 바다 위까지.
협회의 모든 마법사를 데려온 모양이었다.
상호는 태화를 안은 채로 잠시 눈을 감았다. 이 땅에서 영원히 도망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어떻게 찾아냈는지…… 그건 좀 궁금하네.’
노파가 배신한 것 같지는 않은데.
뭐 어찌됐든 이미 벌어진 일이고, 지금 해야 할 일은 이름 모를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역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도망쳐야 한다.’
차를 타고 도망칠 수는 없다. 빛과 소리 때문에 당연히 들킬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걸어서 포위망을 빠져나간다. 가로막는 모든 이들을 쓰러트리고.
다시 뜨인 상호의 눈에는 각오와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 순간.
츳……
한 자락 내공이 상호의 몸을 스쳤다. 방금 그가 실처럼 내공을 뻗어냈던 것과 똑같은 수법으로.
별안간 바람이 불었다.
“상호야.”
익숙한 내공.
익숙한 목소리.
상호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포기해라.”
도현이 마당에 서 있었다.
전쟁 때 애용하던 창을 들고서.
길쭉한 육각형의 창끝이 달빛을 받아 번득였다.
“하늘에 헌터들이 대기중이다. 절대 빠져나갈 수 없어.”
“어쩌라고.”
상호는 목에서 우두둑 소리를 내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한판 해보지 뭐. 데려와. 싹 다 데려와 봐.”
그 말에 도현이 손가락을 튕겼다.
하늘에서 그림자 네 개가 떨어졌다. 소리 없이, 무게감 없이. 흙먼지도 일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떨어진 이들은 저마다의 무기를 들고 상호를 마주보았다.
검을 든 여인. 철퇴를 든 사내. 복면을 쓴 마법사와 백발이 희끗한 노인.
상호는 그들 모두를 한번 쓱 둘러보고 도현을 노려보았다.
“겨우 이게 다야?”
“수호부대원들이다.”
도현이 창을 한 차례 빙글 돌렸다.
“너도 오며가며 한 번씩은 봤을 거야.”
“…….”
상호의 얼굴이 굳었다. 어쩐지 좀 낯이 익더라니.
해련이 속해 있던 부대, 수호부대. 최전선에서 싸우는 이들이니만큼 저승부대와 비등한 수준의 강자를 여럿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이들 중에서도 도현이 특별히 뽑아 왔다면.
해련과 동급의 실력일 터.
“그래서?”
검푸른 강기가 상호의 몸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불꽃처럼 타오르는 천색창염의 초강기가 상호와 태화를 감쌌다.
상호는 한 손으로는 태화의 등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 검을 뽑으며, 고개를 삐딱하게 앞으로 기울여서 도현을 꼬나보았다.
“내가 누군지 잊었어?”
“알지.”
도현의 창에 누런 불꽃이 피어올랐다.
“천색창염이 최강의 강기인 것도 알고, 네 몸에 예경이 내공까지 담겨 있는 것도 알지.”
“그걸 알면서 나랑 싸우겠다고?”
비릿한 웃음 아래에서는 이빨이 갈리고 있었다.
“내가 내 제자를 죽이려는 놈들하고 봐주면서 싸울 것 같아? 안 죽을 자신이 있어? 내가 안 죽일 것 같아, 정말로? 한번 확인해볼까?”
“네 몸을 내려다봐라, 상호야.”
도현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싸울 수 있는 몸이 아니다. 냉정하게.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리 하나 없는 녀석을 상대로 고전할 만큼 호락호락하진 않아.”
“해 봐야 아는 거지.”
“뭣보다 너와 우리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어.”
“뭔데?”
“체력이야.”
상호는 머리꼭지가 돌아버려서 판단이 흐린 와중에도 그 말을 단박에 알아들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최근까지 현역으로 활동한 사람들이다. 6년 동안 쉬고 있던 너와는 몸 상태부터가 달라. 천색창염강기가 아무리 최강이라 해도…… 다들 네 공격을 피할 실력 정도는 있고, 소모전으로 끌고 가면 네겐 방법이 없다.”
분하지만 도현의 말이 맞았다. 그 사실을 상호도 알았다.
하지만.
싸우다 뒈지는 한이 있어도, 태화를 내줄 순 없었다.
“X까.”
상호의 주변에 강기로 이뤄진 검이 네 개 솟아났다.
“소모전이고 나발이고 다 X발 배때지를 갈라버리면 되는 거 아냐. 곱창 꺼내서 사람이 안 죽어?”
“상호야.”
도현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싸울 셈이냐?”
“앉아서 일하더니 혓바닥이 길어졌네.”
상호는 검으로 도현을 가리켰다.
“형도 사실 무서운 거 아냐? 날 이길 자신이 없어서 이빨만 까고 있는 거 아니냐고.”
“너랑 싸우기 싫다.”
눈이 진심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녀석하고 싸우기 싫다고. 그런데 그렇다고 사람들이 희생되는 꼴을 두고 볼 수도 없어. 그러니까…… 곱게 넘겨라. 그 아이.”
“얘가 무슨 죄를 졌는데?”
상호의 눈에 핏발이 섰다.
“아가리가 있으면 말을 해 봐. 이 애가. 지금 형 눈앞에 있는 이 애가. 살인자야? 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이야? 이 X발……, 왜 또 죄없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데, 개새끼들아!”
“모두를 위해서.”
도현은 슬픈 눈으로 상호를 바라보았다.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 상호야. 그게 세상이야…….”
“X랄빠네, X발련들…….”
상호는 검과 강검으로 도현과 수호부대원들을 겨눴다.
“싸워. 싸워 X발. 아가리를 열어도 말이 아닌 게 나오는데 더 털어서 뭐해. 칼로 정하자고. 누가 맞는지.”
“상호야.”
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너 잡는 데 진짜 이 넷만 데려왔을 것 같냐?”
상호의 눈밑이 꿈틀했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협회에 있는 헌터 싹 긁어모았지.”
쿠웅……
담벼락 너머에 투명한 무언가가 떨어졌다.
하나가 아니었다. 두 개, 세 개. 둔중하게 땅을 울리며 떨어진 그 무언가는 그들이 들어와 있는 집을 둘러싸서 외부와 완전히 격리시켰다.
그 투명한 벽 너머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아니, 백여 명.
혹은 그 이상.
“무예가, 마법사, 주술사…… 있는 대로 다 끌어모았다. 네가 상대할 사람은 여기 다섯뿐만이 아니라 저기 기백명의 헌터들도 있어.”
“……참나.”
상호는 콧방귀를 뀌었다.
날파리 따위 무시해도 상관없다. 호신강기 두르면 끝이니까.
“대단하네. 어. 아주 대단해. 이 많은 사람들이 나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있네. 그럼 바로 시작하자고. 금방 퇴근시켜 드릴게.”
“저 헌터들의 목적은 네가 호신강기를 계속 두르게 만드는 거야.”
도현에게서는 아직도 투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네 내공이 아무리 많아도 그렇게 호신강기를 온몸에 계속, 그것도 최대의 강도로 둘렀다간…… 체력 소모가 극심할 거고, 언젠가는 지칠 거다. 그게 내 목적이야.”
“친절도 하네.”
“말해도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넌 절대 못 이겨.”
도현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그러니까 그 애만 넘겨줘라, 상호야. 부탁이다.”
“꺼져.”
이제는 문답무용. 상호는 강검을 내쏘았다.
칼의 형상을 한 검푸른 불꽃이 수호부대원들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수호부대원들은 그의 강검에 굳이 맞서지 않고 간단히 피해 버렸다.
여자 수호부대원의 검이 상호의 다리를 향해 날아왔다.
“……쯧.”
상호는 다리의 호신강기를 강화시켜 여인의 검을 걷어찼다.
도현의 말이 맞았다. 그는 호신강기를 계속, 온몸에, 최대로 둘러놓을 수가 없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한 시간도 못 가 퍼져버린다.
그렇기에 4할 정도의 강도로 호신강기를 둘러만 놓고, 그때그때 공격에 반응해서 강화를 시키는 것이었다.
다만 이 방법의 단점은.
“큭!”
같은 실력의 강자를 상대로는 다칠 수도 있다는 것.
상호는 어깨를 찔러드는 도현의 창을 검으로 후려쳐 밀어냈다.
콰앙
결계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폭발음. 코앞에서 맞았다면 충격파만으로 사람을 터트려 죽였을 위력이었다.
둘은 다시금 서로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쾅 쾅 콰드득
검과 창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소리가 수차례 이어졌다.
상호는 이를 갈며 검에 내공을 더 불어넣으려 했다. 도현의 창대를 베기 위해.
하지만.
후웅
등 뒤에 철퇴가 날아오고 있어서, 그 내공은 호신강기에 투자될 수밖에 없었다.
‘……젠장.’
일대일로 싸우면 천색창염으로 뭐든 벨 수 있는데, 여럿에게 공격당하니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더해서.
슈욱
결계 밖에서 날아오는 이기어검, 불덩이, 광선.
그의 호신강기에는 흠집 하나 내지 못했지만 자꾸 시선을 현혹시키며 허점을 노출시켰다.
그 시간이 비록 찰나에 불과하더라도, 도현과 수호부대를 동시에 상대하고 있는 상호에게는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다.
‘망할…….’
밖에서 들어가는 공격은 통과시키고 안에서 나오는 공격은 차단시키는 결계.
상호는 검을 날려 결계를 깨부수고 헌터들을 썰어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수호부대원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벅찼다.
‘너무 불리해.’
공격을 피할 수 없는 몸이라서.
뭣보다 개인 대 다수의 전투에서는 다수의 연수합격이 얼마나 조밀한지, 또 개인이 그 협공을 얼마나 훼방 놓을 수 있는지가 중요한데, 다리가 없다시피 해서 한 자리에 붙박여 있으니 다수의 입장에서는 공격이 꼬일 걱정이 없어 한 곳에만 쏟아부으면 되는 것이었다.
공세가 더욱 가혹해졌다.
‘제기랄…….’
상호는 강검을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를 전부 회수해 호신강기에 보탰다. 공격을 막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뿐인 강검으로는 도현과 수호부대원들을 상대하는 게 불가능했다.
퍼억
“……윽.”
상호의 몸이 크게 비틀거렸다.
옆구리에 꽂힌 손날. 노인의 손에서 흘러나온 내공이 상호의 호신강기를 깊숙이 파고들으려 했다.
상호는 그 내공을 밀어내고 노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동시에 강검이 노인의 뒤에서 날아들었다.
턱
하지만 검들은 노인이 사라진 허공만을 베었다.
검이란 것은 무릇 달려들며 베어야 빨라지는 것인데, 그마저도 불가능하니 공수 양면으로 하자가 생겼다. 장기로 치면 차포 떼고 싸우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아니 그보다 더 심했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쿠울…….”
다들 태화를 공격하지는 않는다는 것. 상호는 품에 안긴 태화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아직 곤히 자는 중이었다.
‘목표가 태화이니…… 다치게 할 리는 없겠지.’
물론 그렇다고 태화를 보호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태화가 다치진 않을 거란 사실이, 상호에게는 작은 위안이 되었다.
‘계속 자고 있어줘.’
잔인한 현실을 마주하지 않도록.
상호가 그런 바람을 품는 순간, 날카로운 예기가 상호의 이마를 스쳤다.
투둑……
핏방울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상호는 얼굴에 흘러내리는 피를 느끼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포기해라.”
도현이 나직이 말했다.
“넌 이미 지쳤어.”
“…….”
상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도현은 창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더 싸워봤자야. 네가 이런다고 결과는 달라지지 않아.”
“……닥쳐.”
도현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내공이 많고 강기가 단단해도, 절름발이가 아이 한 명을 지키면서 동실력의 다섯 명과 잔챙이 수백의 방해를 상대하자니 체력도 기력도 심력도 남아나질 않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몸에 힘이 없었다.
손아귀가 얼얼하고 눈앞이 침침하고 다리는 후들거리고. 호신강기도 유지하기가 버거웠다.
하지만 쓰러질 수가 없었다.
쓰러져서는 안 되었다.
“애를 넘겨. 그게 너도 편하고 나도 편하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야.”
“닥치라고.”
상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받아치며 검으로 모두를 겨누었다. 하나 남은 시야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다 꺼져. 다 죽여버리기 전에 당장 꺼져. 마지막 기회야. 난 경고했어…….”
“쌤.”
순간 상호의 몸과 머릿속이 정지했다.
“괜찮아? 피 많이 나…….”
태화가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턱끝에 맺힌 핏방울이 태화의 가슴팍에 떨어졌다. 하얗고 파란 꽃무늬 원피스가 검붉게 물들어갔다.
상호는 간신히 입을 열어 어렵사리 따뜻한 목소리를 내었다.
“괜찮아. 너는 더 자고 있어.”
태화는 잠에 취한 듯 흐릿한 눈빛으로 상호를 올려다보았다.
“약 발라야지…….”
“괜찮아.”
“호 해줄까……?”
“괜찮다니까. 아무것도 아냐. 눈 감고 있어.”
상호는 검을 늘어뜨리고 태화의 등을 토닥였다.
그때 어디선가 광선이 날아왔다. 태화의 머리를 향해.
“웃……!”
그는 식겁하며 황급히 태화를 끌어안았다.
핏
광선은 태화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주 얕은 혈선을 남기며.
태화가 몸을 움찔했다.
“……아야.”
혈선의 끝에 피가 한 방울 맺혔다.
상호는 그 단 한 방울의 피에 이성을 잃었다.
“이……!”
격노가 몸을 휩쓸어서 말하는 법도 잊었다.
그는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검에서 피어오른 검푸른 불꽃이 하늘을 향해 끝없이 치솟았다.
그걸 본 도현의 안색이 급변했다.
“야, 임마. 마을 사람들까지 죽일 셈이냐!”
“이 X발새끼들……!”
“강상호!”
하지만 상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100미터는 거뜬히 넘어 보였다. 어림잡아 120미터. 호신강기도 포기하고 모든 내공을 쏟아부어 완성한 초강기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능히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었다.
그 강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결계 밖 헌터들, 심지어는 수호부대원들까지 식은땀을 흘렸다.
“막아!”
저걸 휘두르면 120미터 이내의 모든 인간이 죽는다. 헌터고 민간인이고 전부 다. 도현은 온 내공을 창끝에 집중해 검을 막을 준비를 했지만, 천색창염의 완성된 초강기는 막을 수 없다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수호부대원들은 아예 검을 막는 걸 포기하고 상호를 향해 달려들으려는 중이었다.
그때.
“안 돼.”
검을 쥔 상호의 손에 작고 하얀 손이 얹혔다.
“쌤까지 사람 죽일 필요 없어.”
그 손이 상호의 팔을 끌어내리려 했다.
“나만…… 나쁜 년이면 돼.”
상호는 그렇게 말하는 태화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뭔 소리야?”
“내가 갈게.”
태화가 빙긋 웃었다.
“쌤이 다치는 거, 쌤이 나쁜 사람 되는 거…… 난 안 볼래. 그냥 내가 갈게.”
“무슨 소리냐고!”
왜 너까지 돌아버린 거냐. 상호는 손을 덜덜 떨며 이를 갈았다. 이 초강기는 길게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가 그냥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태화가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
상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곧 입술과 입술이 떨어지고. 품에서 내려선 태화가 뒷짐을 지고 다시 한번 입을 맞추며.
애틋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좋았어.”
초강기가 흩어져 사라졌다.
“쌤이랑 있어서 좋았어. 작년 개학식부터 오늘 이날까지…… 쌤이랑 있어서 기분 나빴던 적 한 번도 없었어.”
상호의 눈동자는 망부석처럼 허공의 한 지점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뇌의 모든 능력을 끌어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섬에서 아플 때 걱정해 준 거. 내가 장난쳐도 절대 진심으로 화내지 않은 거. 혼내도 마지막엔 꼭 달래 준 거…… 다 좋았어. 다 고마워. 나는 그런 거…… 쌤이 처음이었어.”
그딴 거 모른다.
그딴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과거의 일 따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지금 그의 목표는 하나, 태화를 지키는 것.
그런데 그 태화가, 그의 목표를 부정하고 있었다.
“그동안 말 안 들어서 미안해.”
태화가 상호를 꼭 끌어안았다.
“근데 오늘 한 번만 마지막으로…… 말 안 들을게.”
상호는 정신을 퍼뜩 차리고 태화를 끌어안았다.
“……안 돼.”
“미안해.”
“안 돼, 안 돼. 안 돼. 절대 안 돼. 지랄하지 마. 날 죽여도 너는 안 돼. 너는…… 너는.”
그의 목소리는 정신병자처럼 빠르고 낮았다.
“너는 웃어야 돼. 행복해야 돼. 그래야 옳아. 그게 아니라면 세상이 미친 거야. 행복이 있으면 불행이 있고, 불행이 있으면 행복이 있어야 해. 그래야 옳아. 그게 세상의 법칙이라고 했어…….”
“난 지금까지 충분히 행복했는데.”
태화는 배시시 웃었다.
“잘 몰랐나 보네. 그리고 지금도 행복해. 쌤이랑 같이 있어서.”
“헛소리하지 마!”
상호는 태화를 끌어안은 채로 검을 치켜들고 주변을 노려보았다.
“꺼져! 이 X발새끼들, 세상을 구하고 싶으면 니들이 죽어! 왜 또 죄없는 사람을 데려가려 하는데, 이 역겨운 새끼들아! 두 번은 안 돼. 두 번은 안 된다고, 이 버러지들아!”
입에서 게거품이 튀었다.
“남의 시체로 연명하는 구더기 새끼들! 역겨워, 역겹다고! 도대체 얼마나 파먹어야 만족할 거냐? 응? 구더기끼리는 안 갉아먹냐? 제발 부탁이다. 너희끼리나 씹고 뜯어. 깨끗한 생사람 시체로 만들어 먹지 말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외쳤다.
하지만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돌로 된 가면을 쓴 것처럼. 냉랭하고 무정한 얼굴로, 그와 태화의 주변에 귀신처럼 서 있었다.
태화가 상호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보내줘.”
“뭘 보내? 너 입 닫고 가만히 있어. 또 이상한 소리하면 진짜 혼낼 거야. 이 X발련들, 뭘 꼬라보고 자빠졌어! 덤비든가 꺼지든가, 둘 중 하나만 해!”
“보내줘, 쌤.”
“혼낸다고 했지!”
상호가 버럭 윽박질러도 태화는 놀라지 않고 그저 웃었다.
“쌤.”
“왜.”
“쌤은 헌터 선생님이지?”
“……왜.”
“나는 헌터 학생이고.”
“그래서 뭐.”
“헌터는 사람을 지키는 직업이잖아.”
태화의 빨간 눈동자가 상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내줘.”
목소리가 어른스럽다.
철없는 아이. 방정맞은 아이. 예닐곱 살 혜소보다 더 바보 같고 유치하고 미련한 아이.
그렇게 여겨왔던 아이가, 지금 상호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한없이 어른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안 된다.
죽어도 안 된다.
“안 돼.”
상호는 다시, 다시, 또다시 그 말을 뱉었다.
“죽어도 안 돼. 네가 무슨 헌터야?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넌 어린애야. 앞으로 더 살아야 하는 어린애라고. 넌 네 선택이 무슨 의민지도 몰라. 알량한 정의감 따위에 취한 것뿐이야.”
“정의감엔 취해도 되지 않나, 싶은데. 정의잖아.”
태화는 쓰게 웃고 상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갈게. 쌤.”
“뭘 가? 내가 널 놓을 것 같아?”
그때 발밑에 흐르던 마나가 사라졌다.
순간이동을 막는 마법진이 해제된 것이다. 상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안 돼.”
“쌤.”
태화는 상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사랑해.”
그리곤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상호는 품에서 흘러나오는 연기를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도현의 옆에 태화가 서 있었다.
“……태화야?”
“미안해. 쌤. 미안해……. 그런데 난 이렇게 배웠어. 딱히 미련도 없구…….”
태화는 손을 살짝 흔들었다.
“미안해.”
상호는 할 말을 잃었다.
도현이 창을 내리고 태화를 내려다보았다.
“가자.”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고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상호는 얼이 빠진 채로 멍하니 서 있다가, 헉 하고 숨을 들이키며 내공을 뻗으려 했다.
하지만 아까 무리해서 초강기를 쥐어짜낸 탓에 기혈이 뒤틀려 있었다.
“컥……!”
그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런 와중에도 태화는 놓칠 수 없어서, 힘겹게 손을 뻗으며 대문을 향해 기어갔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태화야…….”
태화는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이미 결심을 굳혔는지, 그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른스럽게 의연한 걸음으로.
도현도 상호를 한 번 흘끗하고는 대문을 나섰다.
“철수해.”
“예.”
더 이상 전투가 불가능한 상태라고 판단했을까. 수호부대원들은 상호를 경계조차 하지 않은 채로 도현의 뒤를 따랐다.
상호의 눈이 뒤집히려 했다.
“이…… X발, 안 돼…….”
이대로 보낼 수 없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컥…….”
결국 상호는 입에서 피를 한 바가지 울컥 토해내고는, 균형을 잃고 고꾸라져 땅에 얼굴을 처박았다.
어둠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240. 희생
간밤의 모든 일이 꿈이었기를.
바라고 또 바랐지만, 눈을 뜨는 상호의 얼굴에는 피와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쿨럭.”
입에서 적갈색 액체가 끈끈하게 흘러나왔다.
상호는 소매로 입을 닦고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투의 여파로 무너진 집과 담벼락이 보였다.
그나마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는 대문 주변 담 너머에서, 해무를 뚫고 노란 아침놀이 올라오고 있었다.
“쿨럭, 쿨럭…….”
그는 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뒤틀린 혈맥과 꼬인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단전을 부수고 팔다리를 잘린 것보다 더한 고통이 가슴속을 메우고 있었다.
되찾아야 했다.
태화를 되찾아야 했다.
‘차…….’
차에 타야 한다. 상호는 대문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갔다.
그때 대문이 열리고 한 인영이 마당으로 들어왔다. 허리가 약간 굽고 키가 작은 그림자.
노파였다.
“뭐야.”
노파는 부서진 집을 쳐다보며 눈을 끔뻑이다가, 상호를 발견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그래도 상호는 멍한 얼굴로 대문을 향해 계속 걸어갔다. 절뚝. 절뚝.
이윽고 노파가 넌지시 물었다.
“몸은 괜찮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완전히 넋을 잃은 표정으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뿐인 눈의 초점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 어딘가에 맺혀 있었다.
노파는 눈을 감았다.
“이제는 네가 말이 없어졌구나.”
절뚝, 절뚝.
상호는 노파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말없이 지나쳐 대문을 나갔다.
노파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부서진 집은 고치면 되겠으나…….’
부서진 마음은 어찌해야 할지.
노파는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긴 한숨을 바람에 흘려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