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9화 (249/501)

* * *

“배불렁.”

방바닥에 드러누운 태화가 원피스 위로 배를 벅벅 긁었다.

벨트를 대충 묶었는지 꼬리가 삐져나오려고 했다. 상호는 내공으로 꼬리를 톡 치고 밥상을 들어 올렸다.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소 된다.”

“나는 젖소다~.”

“……자고 싶으면 이불 깔고 자.”

“시렁.”

태화는 그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내가 먼저 자면 오빠 심심하잖아.”

“너도 심심하지?”

“웅.”

“그럼 설거지 같이 해.”

“이빨 설거지해야지~.”

쌩하니 도망치는 태화를 무시하고, 상호는 밥상을 치웠다.

좁은 싱크대에서 한창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노파가 등짝을 후려쳤다.

“악! 또 왜 그러세요…….”

“나와라.”

“제가 하면 금방 끝납니다. 그냥 방에 들어가 쉬세요. 괜히 손 시리게 찬물로 설거지…… 악!”

결국 상호는 깨갱대는 개처럼 큰방으로 쫓겨났다.

‘아오, 뭐 하는 할머니야…….’

씻고 잘 준비나 해야겠다. 그는 마당 빨랫줄에 널린 빨래에서 대충 옷과 수건을 걷어 화장실로 향했다.

안에서는 태화가 양치를 마치고 있었다.

“아, 쌤. 씻게?”

“응.”

“물 데워 놔?”

“응.”

상호는 칫솔에 치약을 묻히며 내공으로 수도꼭지를 틀었다.

한쪽에 놓인 커다란 대야에 물이 담기기 시작했다. 태화는 그 위로 손을 가져가 검은 불꽃을 피웠다.

둘은 마주 쪼그려 앉아 물이 덥혀지기를 기다렸다.

“쌤.”

“응.”

“같이 씻을까?”

“씻었잖아, 넌.”

“오늘 샤워볼 샀잖아. 등도 좀 밀고. 그러잔 거징.”

농담이 아니었던 건가. 상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등 밀어주는 게 이상해?”

“뭘 같이 씻어! 등 안 민다고 죽냐? 방에 혼자 살 땐 어떻게 했는데?”

“세희랑 서로 밀었는데.”

태화가 능청스럽게 눈을 끔뻑였다.

상호는 얼이 빠진 채로 양칫물을 뚝뚝 흘리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 등 밀어줄게…….”

“어, 진짜? 진짜? 벗어? 벗는다?”

“수건으로 앞에 가려.”

마당에서 수건이 두 개 둥실 날아왔다. 상호는 그걸 잡아 태화에게 건네려 했다.

별안간 태화가 씩 웃었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쌤. 내가 신기한 거 보여 줄까?”

“뭔데.”

“옷 빼고 순간이동하는 거야.”

그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뭘 뺀다고?”

“보여줄게~.”

“야, 잠깐만……. 하지 마. 하지 말라 했다.”

“초고속!”

“야!”

“메롱~.”

태화는 혀를 쏙 내밀고는 수건을 받아들고 옷을 벗었다.

상호는 옷을 벗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자신까지 벗을 필요는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웃통만 벗었다.

그러자 태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나만 벗겨?”

“……네가 벗은 거지. 네가 등 밀어 달라매.”

“쌤도 등 밀어줄게. 벗어.”

“난 됐어.”

“어어, 나 수건 내린다?”

“야이…….”

결국 상호는 주춤주춤 옷을 마저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둘렀다.

둘은 화장실 한쪽에 놓인 목욕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태화가 앞에 앉고, 상호가 뒤에 앉고.

두른 것이 수건뿐이라 아래가 허전했다.

“뒤돌지 마.”

“도전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봐.”

“돌면 꿀밤 때릴 거야. 진짜 세게.”

“칫.”

태화가 몸을 살짝 숙여 등을 내보였다.

상호는 샤워볼에 거품을 내 태화의 등을 문질렀다. 꼭 순두부 같았다. 아주 미끈하고 고운 순두부.

조금이라도 잘못했다가는 뭉그러질 것 같아서, 힘을 세게 줄 수가 없었다.

‘다칠까 무섭네…….’

그의 시선이 잘록한 등의 중심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척추의 끝에 꼬리가 달린 게 보였다. 엄지손가락보다 살짝 더 굵은 정도의 검은 꼬리.

이 꼬리가 모든 문제를 만들었다.

이 꼬리만 없었어도 중선은 암을 치료할 수 있었을 것이고, 태화가 협회에게 쫓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게 없었다면 우리도 못 만났겠지만.’

상호는 묵묵히 태화의 등을 문질렀다.

그런데 태화가 나직이 그를 불렀다.

“쌤.”

“응?”

“손으로 씻겨줘.”

“……손?”

“응. 그거는 아파.”

특별히 부드러운 소재로 샀는데.

하긴 살결이 워낙 고와서 그럴 만도 하다. 상호는 그 말을 의심하지 않고 샤워볼을 벽에 걸었다.

그는 손에 거품을 내어 태화의 등에 얹었다.

‘나무토막이다……. 나무토막이다…….’

이렇게 야들야들한 나무토막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 그래도 상호는 뇌를 비우고 태화의 등을 문질렀다.

태화가 몸을 움찔거리며 킬킬거렸다.

“간지러~.”

“미안.”

“쌤.”

“응?”

“뭔가 아빠랑 딸 같지 않아?”

그런가.

분명 그럴지도 모르지만,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선생과 학생이 할 짓은 아니긴 하지.”

“그런 거야? 넌 지금부터 내 학생이 아니다, 뭐 그런 느낌?”

“그래도 너는 학생이지, 임마.”

곧 따뜻하게 데워진 물이 거품을 씻겨 내렸다. 상호는 바가지를 대야에 던지고 태화의 등짝을 가볍게 쳤다.

“다 됐다.”

“땡큐~. 자, 이제 쌤이 등 대…… 오우, 쒯!”

“야, 뒤돌지 말라고 했지!”

“쒜에에엣!”

“아오……!”

* * *

“아~.”

이불에 누운 태화가 키득거렸다. 머리에 여전히 빵모자를 쓴 채로.

“폰 있었으면 천세희한테 바아~로 자랑했는데~.”

“……하지 마.”

상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중얼거렸다.

“애들이 그거 들으면 협회로 갈지도 몰라.”

“근데 애들 이미 알고 있어~.”

“뭐?”

이게 뭔 소리인가. 방금 폰이 없어서 자랑을 못 한다고 하지 않았나.

얼이 빠진 채로 멍하니 있는데, 태화가 실쭉 웃었다.

“피씨방에서 애들한테 알려주고 왔거든. 쌤이랑 같이 씻는다고.”

“……예언자냐?”

“글구 예언 하나 더 했어.”

“뭔데?”

“더워서 다 벗고 잘 거라고.”

상호는 태화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아야!”

“또 시작이지……. 빨리 자.”

“우웅.”

태화가 눈을 감고 그의 옆에 달라붙었다.

‘이러니까 덥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그는 태화를 밀어내지 않았다. 좀 더운 것쯤이야 참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어둠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방 쪽.

‘할머니가 일어나 계신가.’

그렇게 여기고 잠을 청하는데, 갑자기 불이 확 켜지더니 노파가 다가와 그와 태화의 어깨를 두드렸다.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어르신? 왜 그러세요?”

“…….”

“뭐 시킬 거라도 있으세요?”

노파는 말없이 따라오라는 손짓만 할 뿐이었다. 상호와 태화는 이불에서 일어나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노파의 뒤를 따랐다.

둘을 작은방으로 데려간 노파가 침대에 깔린 새 이불을 가리켰다.

‘?’

이게 무슨 뜻인가. 상호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혹시.

“……여기서 자라고요?”

“…….”

노파가 묵직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설마 진짜 연인으로 보였던 걸까. 상호는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 저희가 왜 할머니 침대를 뺏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고 할머니는 할머니 침대에서…….”

노파는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고는 방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언뜻 봐도 80은 되어 보이는 노인이 저런 미제 손짓은 어찌 아시는지.

그때 뒤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철컥

벨트 끄르는 소리.

‘……응?’

풀썩

빵모자 떨어뜨리는 소리.

상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하아…….”

이어지는 엷은 한숨.

“집주인이 하라는데 뭐 어쩔 수 없지……. 안 그래, 쌤?”

“…….”

“뭐해? 벗어.”

“……뭘 벗어!”

상호는 뒤를 돌아보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태화도 지지 않고 눈을 부라렸다.

“우리는 집주인이 원하는 걸 제공해야할 의무가 있어!”

“뭘 원한다는 거야, 임마! 사람의 호의를 왜곡하지 마!”

“당연히 강상호 신음소리 매드무비지. 어쭈, 안 벗어? 나 초고속 탈의한다?”

“염병하지 마, 임마. 야, 그거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초고속!”

“……야!”

청량한 꿀밤 소리가 방을 울렸다.

237. 푸른 바다를 좋아하는

“쿠울…….”

품에 안긴 태화가 조그맣게 코를 골았다.

상호는 태화의 등을 느리게, 살살 토닥이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침 차려야지.’

생각과 동시에 몸이 저절로 일어났다.

큰방으로 나와보니 노파가 이미 일어나서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노파를 향해 아침 인사를 건넸다.

“일어나셨어요?”

노파는 대답하지 않았다.

노파의 시선은 담 너머 멀리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할머니.”

상호는 노파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가족분들은 안 계세요?”

묵묵부답.

말 못할 사연이 있는가 보다. 그는 그렇게 여기고 다른 것을 물었다.

“나물이 애매하게 남았는데 비빔밥 해서 먹을까요? 약간 매운 거 드실 수 있죠?”

“…….”

“금방 차릴게요.”

“…….”

상호가 일어나서 주방으로 향하고 나서도, 노파는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았다.

* * *

아침을 다 먹고 설거지까지 마친 후.

마루에 누워 있는데 태화가 그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았다.

“쌤.”

“응?”

“바다 보러 가자.”

너도냐. 상호는 입맛을 다시며 몸을 일으켰다.

“하루 한 번은 꼭 보러 가네.”

“할 것도 없잖아. 심심해.”

“그래. 가자.”

준비랄 것도 없다. 둘은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섰다.

굽이진 골목을 지나고, 부둣가 도로를 지나서. 모래밭은 없고 바위뿐인 바닷가.

태화는 상호의 손을 잡고 바위가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나 떨어지면 잡아 줘야 돼~.”

“언제는 뛰어다녔으면서.”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징~. 어쨌든 잡아 줄 거지?”

“당연하지.”

네가 위험에 빠진다면, 언제든 몇 번이고.

상호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바위를 힘겹게 건넜다.

“쌤, 참치 잡을까?”

“안 돼 임마. 또 얼마나 앓을라고.”

“그래도 맛있었잖아.”

“뭘 그래도야! 주술 쓰지 마.”

“헹.”

둘은 같은 바위 위에 섰다.

바위가 세모나고 위가 좁아서 꼭 붙어 있어야 했다. 그는 태화를 뒤에서 끌어안고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태화는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화야.”

“응.”

“바다가 좋아?”

“응.”

가끔 짓는 고요한 표정. 반쯤 감은 눈과 아주 살짝 벌어진 입술.

나이답지 않은 고혹이 그곳에 묻어 있었다. 이렇게 입만 다물고 있으면 금방 단아한 얼굴이 되는데, 왜 말만 꺼내면 애가 되어버리는지.

상호는 태화의 그런 표정을 볼 때마다 가슴 한켠이 먹먹해져 왔다.

그래서 일부러 볼을 꼬집으며 장난을 걸었다.

“아야!”

“왜 그렇게 멍을 때리고 있어.”

“그냥. 경치 좋잖아.”

“심심해서 나왔더니 더 심심한 거 보고 있냐. 저쪽으로 가자. 저기는 좀 잡을 만한 게 있을 것 같네.”

“응.”

태화는 씩 웃고 그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다시 바다를 돌아보는 검은 컬러렌즈 밑에서, 숨길 수 없는 쓸쓸함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들이 없어서 그런가.’

무언가를 잃은 사람들이 바다를 좋아한다.

태화는 아마 어릴 때부터 바다를 좋아했을 것이다. 지금 바다를 보는 것도 친구들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친구들이 덮어왔던 상처가 드러났기 때문일 터.

어떻게 해야 다시 덮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는 태화를 번쩍 들어 품에 안았다.

“우왓!”

“자꾸 어딜 보는 거야. 나랑 있을 땐 나한테 집중해.”

“엥, 그거 밤에도 적용되는 거야?”

“……아니, 밤에는 신경 꺼.”

“흥, 자기 맘대루야.”

태화는 입술을 삐쭉 내밀다가, 곧 키득거리며 상호의 목에 팔을 감았다.

하루 한 번은 꼭 걸어 익숙해진 바닷길을, 두 사람이 다리 한쪽과 검 하나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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