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설계도?”
“네.”
미래가 봉투 안의 내용물을 민정의 방 탁자에 늘어놓았다.
민정과 효은, 나빛은 무언가가 빼곡히 그려진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극비리에 입수한 설계도예요. 한번 봐주세요. 극비니까 결계도 치구요.”
“그래야겠지.”
민정은 간단하게 손을 휘저어 결계를 쳤다. 허락된 인원들에게만 정상적인 시력과 청력을 보장하는 마법.
정령들도 감시할 수 없을 터였다. 민정은 그제서야 묻고 싶은 것을 물었다.
“선생님이 보낸 거니?”
“그런 것 같아요. 여기 보시면…….”
미래의 검지가 설계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설계가 틀린 부분이 있거든요. 한두 개가 아니에요. 단위도 틀리고, 단어도 틀리고…….”
“다 찾아서 모아 보면 뭔가가 나오겠네.”
“제 생각도 그래요.”
둘은 머리를 맞대고 설계도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마법공학을 모르는 효은은 설계도 대신 민정과 미래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나빛을 돌아보고는 눈을 끔뻑였다.
“나빛아.”
“네?”
“왜 심통이 났냐?”
“……몰라요.”
나빛은 입술을 삐쭉 내민 채였다.
곧 민정이 볼펜을 들고 설계도에 무언가를 끼적이며 중얼거렸다.
“그램은 대문자로 쓰고 암페어는 소문자로 썼네. 그럼 G, A. 밀리미터도 대문자. M. 그다음은 전자볼트…… 이건 제대로 썼는데 절대 여기 나올 단위가 아니네. E를 쓰고 싶었던 걸까? 그러면…… 게임?”
“여긴 숫자도 틀렸어요. 역산해보니까 전혀 달라요. 8……을 1로 바꾸면 될 것 같은데. 그러면 8일까요, 1일까요?”
“8일 거야. 틀린 걸 보라고 하고 있으니까.”
“그러면 8, 2, 0, 11……. 8월 20일? 11시? 이틀 뒤네요.”
“L, O, S, T……. 로스트 스토리? 아, 게임인가. 이 뒤부터는 아이디겠네.”
민정과 미래는 눈을 마주쳤다.
“게임 채팅으로 이야기하자는 거네요.”
“그렇겠지.”
민정은 효은을 흘끗했다.
“우리는 못 가. 최고 수준의 감시가 붙어 있어서……. 피씨방에 가도 협회에 들킬 거야.”
“그러면…….”
미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밖에 없…….”
“내가 할래.”
나빛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냥 게임에서 채팅하고 오면 되는 거잖아.”
“그치만 언니, 언니는 핸드폰도 제대로 못 써서 맨날 우리한테 물어보잖아……. 게임 아이디는 만들 줄 알아?”
“……아니.”
나빛은 풀이 죽어 쪼그라들었다.
그때 머릿속에 아까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유난히 힘들어하는 친구.
“그럼…… 세희랑 셋이서 가자.”
* * *
“편지는 제대로 갔을까?”
“그러길 빌어야지.”
상호와 태화는 길을 따라 걸었다.
방파제 옆의 부둣가. 나지막한 파도 소리가 적적한 공기를 울리고, 하얀 갈매기 한두 마리가 끼룩거리며 파란 하늘을 날아갔다.
별안간 태화가 콧대를 높였다.
“다행이다 싶지?”
“뭐가?”
“내가 마법공학을 배워놔서.”
상호는 쓰게 웃으며 태화의 뺨을 문질렀다.
“그래. 다행이네. 근데 좀 걱정이다.”
“걱정? 왜?”
“일부러 틀린 것 말고도 실수로 틀린 게 있을까봐.”
“우씨! 누굴 바보로 알아!”
태화는 낄낄거리는 상호의 가슴팍을 찰싹 후려치고는, 앞서 달려 나가서 혀를 쏙 빼물었다.
“토끼! 3초!”
“……얌마, 마을까지 들리겠다. 그리고 니가 뭘 안다고 그래.”
“에베베베~.”
원피스가 바람에 나풀거렸다.
상호는 가만히 태화를 따라 걷다가 마을을 돌아보았다. 조용한 마을의 정경은 마치 그림과 같아서, 이따금씩 돌아다니는 사람을 빼면 꼭 세상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시간마저 멈춰버린, 이 땅의 끝.
‘살기엔 나쁘지 않네.’
이곳에 온 지도 어언 일주일째. 노파는 둘을 신고할 기색이 없었고, 마을 사람들도 소식이 느린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도시 처녀와 절름발이 헌터가 사랑의 도피를 했구나,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머무르기 좋은 곳이었다.
‘이대로…….’
상념에 빠져 있는 그의 눈앞에 태화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쌤.”
“응?”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맞춰볼까?”
“해봐.”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글쎄.”
“했구만~.”
태화가 몸을 야단스럽게 좌우로 휘저었다. 원피스 아랫단이 바람을 머금고 둥글게 부풀어 올랐다.
“나랑 있는 게 그렇게 좋아?”
“좋지.”
상호는 피식 웃었다.
“근데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는 생각 안 해.”
“왜?”
“그건 내리막길을 앞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니까.”
그는 태화와 눈을 마주쳤다.
“우린 올라갈 거잖아.”
“우리?”
태화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다가, 실쭉 웃었다.
“나랑 같이 가겠다는 거지?”
그 말에 상호의 뺨이 붉어졌다.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글쎄.”
“아 왜! 똑바로 말해 봐! 너랑 밤새도록 뒹굴고 싶다고 왜 말을 못 해!”
“……얌마!”
“라고 할 뻔~.”
둘은 그렇게 시간을 잊고 바닷가를 걸었다.
236. 살판
PC방.
세 소녀가 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세희는 의자에 앉은 채로 눈을 끔뻑였다.
“게임으로 선생님이랑 채팅을 한다고?”
“그렇다는디.”
세희의 양옆에서는 지윤과 나빛이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지윤이 수첩을 흘끔거리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미래가 다 가입해삤다드라. 기냥 로그인해서 게임 키고 친추해뿔고 기다리믄 된다 카든데.”
“아, 이것도.”
나빛이 주머니에서 작은 보석을 꺼냈다.
“민정 선생님께서 주셨어. 정령이 감시하는 걸 방해하는 결계래.”
“줘 바라.”
지윤은 보석을 받아 내공을 불어넣었다.
보석에서 아주 작은 마나의 일렁임이 퍼져나갔다. 끊임없이 계속.
“잘 되는 거 맞겠제?”
“잘못 만드셨을 리 없지.”
X급이니까. 세희는 그렇게 대답하고 게임을 켰다.
비록 채팅일 뿐이지만 이렇게라도 연락을 할 수 있다는 게 참으로 기뻤다.
“선생님 아이디는 뭐야?”
“Teacher X.”
친구추가를 해 보니 이미 접속중. 그걸 본 셋은 자기들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선생님.”
나빛이 낮게 중얼거렸다.
세희는 더듬더듬 마우스를 놀려 상호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선생님
잠시 후에 대답이 채팅창에 올라왔다.
-누구니?
-세희예요
-다행이다, 편지 잘 받았나 보네
-네
분명히 상호다. 셋의 눈이 반짝였다.
그런데 그때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야
-천세희
-천세희
-천세희
보나마나 그년이다. 세희의 이마가 확 찌푸려졌다.
‘X년이 지 때문에 얼마나 걱정한지도 모르고…….’
세희는 신경질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꺼져
-나 쌤 **봤다
게임 내의 필터링 때문에 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채팅을 치는 사람이 태화라서 자동으로 읽혔다.
그런데 나빛은 못 읽는 모양이었다.
“별별이 뭐야?”
“……몰라도 돼.”
그러는 동안에도 채팅은 계속 올라왔다.
-**큼ㅋㅋ 니 팔뚝만함ㅋㅋ 들어올 때 ** 커서 ** 찢어지는줄; **을 *나게 싸는데 ** 터질뻔함 그담에 **으로 *치기하니까 쌤도 **려서 **해주고 밤마다 **게 **해서……
세희는 이를 갈며 차단을 박았다.
‘망할년…… 살판났네.’
괜히 걱정했다. 이렇게 잘 살고 있는 줄 알았으면 마음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그때 상호의 귓속말이 올라왔다.
-다들 잘 지내? 효은이랑 민정 누나는?
-감시받고 계세요
-어떻게?
-부협회장 아저씨가 학교에 와 있어요
잠시 채팅이 끊겼다.
-언제부터? 개학 전날부터?
-그런 것 같아요
-협회 놈들이랑 싸우진 않았어?
-싸우진 않았어요 다들 건강해요
-그나마 다행이네
지윤이 속삭였다.
“야 세희야. 쌤은 우째 지내시냐꼬 물어바라.”
안 그래도 이미 채팅을 치고 있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지내세요?
-자세히는 말 못하는데... 그럭저럭 잘 지내고는 있다 근데 상황을 바꿀 방법이 생각이 안 나서... 이 생활이 좀 길어질 것 같아 -조심하세요...
-응 걱정 말고 잘 지내
“나, 나도 할래.”
나빛이 끼어들어 키보드를 잡았다.
-선생님...
-응?
-저 나빛이에요...
-아 나빛아... 잘 지내지?
-네...
-그래 기운 내고, 금방 볼 수 있게 노력할게
-네...
“비키라. 다음은 내다.”
이번엔 지윤이 키보드를 잡았다.
-쌤예
-지윤이도 같이 있어?
-추석 전까진 볼 수 있겠지예?
-노력해 볼게 기다리고 있어
-사랑합니데이~
“앗!”
나빛이 눈에 불을 켰다.
“치사해! 갑자기!”
“니가 안 한 기지 내 잘못이가.”
“나도 할래!”
“에헤이, 니 차례는 지나갔디.”
투닥거리는 둘을 놔두고 세희는 채팅을 이어나갔다.
-다음 채팅은 언제 해요?
-그건 나중에 다시 알려 줄게, 선생님은 뉴스 좀 확인해야 하니까 태화랑 이야기하고 있어 차단했는데. 세희는 흙 씹은 표정을 지으며 태화의 차단을 풀었다.
그러자 채팅이 좌르륵 쏟아졌다.
-야
-야
-야
-꼽냐??
-꼬우면오또카징? 난맨날쌤이랑자는데~
세희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졌다.
-이***아
-모라는거징???
-**같은 *** **내버리기전에 **싸지말고 ***같은*아
더 이상 사람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빛과 지윤은 눈이 뒤집어지려 하는 세희의 등을 두드리며 달랬다.
“세희야, 심호흡, 심호흡…….”
“후우, 후우…….”
“들이쉬고, 내쉬고. 그렇제. 키보드에서 손 띠고…….”
그때 채팅이 또 올라왔다.
-야 하나빛 오지윤
둘의 눈이 화면을 향했다.
-쌤이 나랑 평생살고싶다함ㅋㅋㅋㅋㅋ 이거진짜임ㅋㅋㅋㅋ둘의 마음속에서도 무언가 끊어졌다.
-**까지말래이
-진짠뒈~ 막 나랑같이걸으면서~ 시간이멈췄으면좋겠다구~ 평생함께걷자구~ 고백받아버렸음~ ㅋㅋㅋㅋㅋ-뭐라구 하셨다구...?
-내가좋대ㅋㅋㅋㅋ
멍하니 넋을 잃은 둘에게 태화의 결정타가 날아왔다.
-아 그리고 여기 따뜻한물이 안나와가지고ㅋㅋㅋㅋ 나랑쌤이랑같이씻음ㅋㅋㅋㅋㅋ 내불로물데워서ㅋㅋㅋ
“…….”
-그리고 에어컨도 없어가지고ㅋㅋㅋ 밤에 잘때 은근슬쩍 하나씩 벗는데 쌤도같이벗음ㅋㅋㅋㅋㅋ 곧**거같은데 애이름추천받음ㅋㅋㅋ
“…….”
“…….”
“……X발년.”
세희는 다시 차단을 박았다.
잔뜩 신난 걸 보니 아주 제대로 살판이 난 모양이었다. 역시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던 것이다.
상상을 해 보니 더 빡쳤다.
‘지 혼자 선생님이랑 씻고 자고…….’
그래도 한편으로는.
‘……잘 지내서 다행이긴 하네.’
안심이 됐다.
세희는 피식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늘어졌다. 그녀의 옆에서는 지윤과 나빛이 이를 갈며 상호에게 분노의 귓속말을 보내고 있었다.
“우씨, 선생님 채팅 안 보시나 봐…….”
“나와바라, 마. 내가 해 보께.”
“싫어, 내가 보낼 거야……. 어? 꺼졌어. 뭐야?”
“니가 잘못 누른 거 아이가? 니 머 눌렀노?”
“모르겠어, 으잉…….”
“하이고……. 그라니까 내가 헌다 켔제!”
“우이잉…….”
* * *
“간만에 친구들 보니까 좋지?”
“웅.”
뒷자리에 누운 태화가 싱글벙글 웃었다.
좋다니 다행이다. 상호는 차 문에 기대어 선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을과 아주 멀리 떨어진 도시의, CCTV 없는 한적한 길가.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부탁한 심부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학교 사람들은 무사하고.’
설계도로 만든 암호가 잘 작동한다는 것도 확인했다. 남은 것은 상황을 확인하고 계획을 세워 다음 연락 때 알려주는 것. 그는 PC방에서 본 뉴스 기사를 떠올렸다.
뉴스로 미루어보아 협회는 헛다리를 제대로 짚은 모양이었다. 나빛에게 보낸 가짜 편지의 내용을 철썩 믿었는지, 해안이 아닌 산간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다는 기사가 수두룩했다.
‘당장은 안전하겠지만…….’
앞으로는 또 모를 일이다. 안심해서는 안 된다. 상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심부름을 간 여학생들이 장바구니를 들고 그에게 걸어왔다.
“아저씨~. 가져왔어요.”
“아, 고맙습니다.”
상호는 장바구니를 받아들고 씩 웃었다.
“내가 몸이 불편해가지고……. 도와줘서 고마워요. 남은 돈은 사례로 가져요.”
“저어기…….”
“네?”
“혹시 번호…… 알려줄 수 있으세요?”
선글라스 아래 상호의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아뇨, 핸드폰이 없어가지구. 어쨌든 고마워요. 잘 가요.”
“네…….”
여학생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한숨을 쉬며 차를 돌아보자 태화가 실쭉 웃고 있었다.
“인기 많네.”
“……몰라.”
상호는 혀를 차고 트렁크를 열었다.
트렁크에 실린 아이스박스를 열자 꽉 찬 검은색 얼음에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태화가 마법으로 만든 것이었다.
거기에 냉장, 냉동해야 하는 식재료들을 골라 담고, 나머지는 아이스박스 옆에 대충 쏟아 부은 후 트렁크를 닫았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
“뭐 더 살 거 없지? 옷 같은 거 필요해?”
“아니, 괜찮아.”
“갈까?”
“응.”
곧 검은색 세단 한 대가 한적한 길가를 달려갔다.
* * *
“할머니, 진지 드세요.”
상호는 밥상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작은방에 있던 노파는 구부정한 허리를 두드리며 큰방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말없이 상호를 바라보았다.
‘반찬이 마음에 안 드시나?’
태화가 좋아하는 것 위주로 사오긴 했다. 그래도 별로면 별로라고 말을 좀 해주면 좋으련만.
그는 마루 쪽을 향해 소리쳤다.
“세화야, 밥먹자.”
“웅~.”
세화. 노파 앞에서 쓰게 된 가명이었다.
마당에서 놀던 태화가 마루로 뛰어올라왔다. 손과 원피스 밑단에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상호는 그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뭐하다 왔어?”
“땡칠이랑 놀았엉.”
“손 씻고…… 아니, 옷에 다 묻었네. 그냥 씻고 와. 씻고 와서 먹어.”
“웅.”
태화가 화장실로 달려갔다.
상호는 한숨을 쉬고 뒤돌아섰다가, 아직도 수저를 들지 않은 노파를 보고 당황했다.
“아니 왜 안 드시고…… 얼른 드세요, 먼저.”
노파는 묵묵히 숟가락을 들었다.
상호도 밥상 앞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입맛에 맞으세요?”
“…….”
“다음엔 좀 더 간간한 걸로 살까요?”
“…….”
“아니면 싱거운 걸로?”
“…….”
반응도 없는 게 다혜보다 더 답답하다. 상호는 질문을 포기하고 밥이나 먹기로 했다.
곧 목욕을 마친 태화도 자리에 함께했다.
“우왓, 햄이다.”
“햄만 먹지 말고 다른 반찬도 먹어.”
“웅~.”
태화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햄부터 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