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7화 (247/501)

* * *

“빈집이 생각보다 없네.”

상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대문 밖으로 나왔다.

남해 쪽은 전쟁 때 사람들이 피난을 온 지역이었다. 그래서 찾기 힘들 거라고 예상하긴 했는데.

“마지막으로 한 집만 들러보고 가자.”

“응.”

태화가 못내 아쉬운 듯 바다를 돌아보았다.

약간 높은 지대에 경사지게 이뤄진 마을. 계획해서 만들었다면 관광지가 될 수도 있었을 정도로 경치가 좋았다. 탁 트여서 어디서든 내려다보이는 바다가 특히.

그런 태화의 눈빛을 상호도 알고 있었다.

“걱정 마. 여기 말고도 바닷가는 많잖아.”

“아무 데나 괜찮아.”

태화는 가볍게 휙 돌아섰다.

“쌤이 같이 있으니까. 어디든 상관없어.”

“그래?”

상호는 빙긋 웃으며 태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둘은 낮은 담 사이 골목길을 걸었다. 마지막 남은 집은 마을의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한 집.

그 앞에 다다른 상호는 초록색 대문을 쾅쾅 두드렸다.

“계세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태화가 뒤를 따랐다.

“……오우.”

태화의 입에서 작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아주 낡은 집. 잡초가 무성한 마당. 무너져 가는 담벼락.

딱 봐도 버려진 집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물은 나올까?”

“봐야지.”

상호는 귀를 기울이며 집으로 다가갔다.

마루 위의 큰방. 그리고 그 옆에 부엌. 그리고 그 옆에는 또 문이 다 떨어진 화장실.

쓱 다가가서 보니 샤워기는 없고, 호스가 끼인 수도꼭지, 세숫대야, 90년대에나 썼을 구형 세탁기, 그리고 양변기가 놓여 있었다.

태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부엑……. 낡았어. 냄새나.”

“청소하면 되지. 변기가 있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

수도꼭지를 틀어 보니 물은 잘 나왔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습기가 있네.’

그는 내공을 뻗어 화장실 이곳저곳을 뒤적였다.

역시나. 세탁기 속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아마 작동한 지는 사흘이나 나흘쯤.

누가 살고 있는 집 같았다.

‘여긴 안 되겠네. 다른 마을로 가야…… 응?’

상호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당황했다. 어느새 태화가 사라져 있었다.

‘얘가 어딜…….’

깡촌이니 협회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눈앞에서 사라질 때마다 가슴이 덜컥덜컥했다.

“태화야.”

“쌤, 나 여기.”

큰방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상호는 검을 짚으며 큰방 쪽으로 향했다. 태화는 이미 신발을 벗고 큰방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뭐해?”

“구경.”

“나와. 누가 살고 있는 집이야.”

“엥. 그치만 텅 비었는걸.”

태화가 안쪽을 둘러보았다.

태화의 말대로 안은 휑했다. 벽장 하나. 끝.

희한하게도 여기는 또 사람 사는 느낌이 나지 않았다.

‘비었나?’

화장실의 물기는 비라도 샌 건가. 상호는 고개를 갸웃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벽장을 열어 보니 솜이불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여름엔 못 써먹을 물건이군.’

그렇게 품평을 하고 있는데, 안쪽에서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꺄아아아아아악!”

상호는 급히 내공을 뻗었다.

그러나 내공이 얼마 가기도 전에, 찰나보다 빠르게. 검은 연기와 함께 나타난 태화가 울음을 터트리며 품에 매달렸다.

“꺄악! 꺅! 쌤, 쌤, 으헝헝헝……!”

“뭐야, 왜 그래, 응?”

“시, 시체가, 시체가……!”

“시체?”

고독사인가. 상호는 속으로 침음했다.

“어디에?”

“저기, 저기, 안방…….”

태화의 검지가 안쪽의 방을 가리켰다.

주방 옆에 달린 아주 작은 방. 침대와 TV가 놓인 걸 보니 여기서 생활을 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서서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한 노파가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죽었나?’

상호가 봐도 헷갈릴 정도였다. 혈색도 거무죽죽하고 숨도 쉬는 듯 마는 듯 하는 것이.

그래도 자세히 보니 살아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고 계신 거야.”

“아니야! 죽었잖아!”

“생사람한테 실례다, 임마.”

“으으…….”

태화는 문틀 뒤에 숨어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조심해, 쌤. 갑자기 일어나서 물지도 몰라.”

“멀쩡한 사람 좀비 취급하지 마. 어쨌든 나가자, 이제.”

그때 노파가 갑자기 일어났다.

‘……X바! 깜짝 놀랐네.’

상호는 식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노파는 반쯤 감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상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더듬더듬 침대를 짚으며 힘겹게 일어났다.

그러고는 상호를 무시하고 주방으로 걸어갔다.

‘눈이 멀으셨나? 아니…… 귀가 안 들리는 건가?’

옆을 돌아보니 태화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노파를 쳐다보고 있었다. 상호는 슬그머니 태화의 어깨를 두드리고 바깥을 눈짓했다.

‘밖으로 나가자.’

‘응.’

고개를 끄덕인 태화가 먼저 마루로 나갔다.

상호도 그 뒤를 따라 검을 짚으며 나가려는데, 무언가가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노파의 손.

“엥.”

상호는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 * *

‘……뭐지?’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앉은뱅이 식탁 위 나물과 밥밖에 없는 시골밥상. 당연히 태화는 손도 대지 않고 큰방에 드러누워 있었다.

“아~. 햄이라도 구워줘~.”

“…….”

평소 같았으면 편식하지 말라고 했겠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밥에 농약이라도 탄 게 아닌가 해서.

아직도 상호의 머릿속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뭐지……?’

왜 밥상을 차려주는지.

이 노파는 뉴스를 보는지 안 보는지. 태화가 누구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일단 핸드폰을 꺼내거나 전화기 근처로 간 적은 없긴 한데.

다른 가족은 있는지 없는지.

상호는 수저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할머니.”

노파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확실히 눈도 보이고 귀도 들리는 것 같은데, 도통 대꾸를 하질 않았다.

“혼자 사시는 거예요?”

노파의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말대꾸는 아니지만 어쨌든 반응은 했다. 상호는 이때다 싶어 식탁에서 조금 물러나 앉았다.

“저희가 밥을 먹고 와 가지고요. 그리고 그냥 빈집인가 싶어서 들어온 건데…… 어르신 계시니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찰싹

노파가 상호의 허벅지를 후려쳤다.

강하진 않았지만 살짝 따끔하다. 상호는 헛기침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가보겠습…….”

찰싹

“……거 어르신, 수화를 한번 해보시면 제가 알아서 해석해볼 테니까…….”

“먹고 가라고.”

“어라.”

말할 줄 아시네. 상호는 머쓱해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밥을 먹고 왔다니까요…….”

하지만 노파는 한마디만 짧게 하고는 식사를 계속했다. 많이 과묵한 성격인 듯했다.

한숨을 쉬고 밥을 뒤적이는데 또 손이 날아왔다.

“아니 먹잖아요, 이제!”

찰싹

‘X바…….’

아무리 그래도 모르는 사람 밥을 덥석덥석 받아먹을 상황이 아니었다. 상호는 밥그릇을 노파에게 밀었다.

“그럼 어르신이 먼저 먹어 보세요.”

그러자 노파는 밥 한 숟갈을 듬뿍 퍼서 입에 넣고는 숟가락으로 상호의 머리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이 호로, 호로잡것아. 어른이 주면 감사하게 처먹을 것이지 독이라도 탔을 것 같으냐? 으응?!”

“악! 아니, 알았어요! 죄송해요, 악!”

어느새 슬그머니 끼어든 태화가 밥그릇을 다 비울 때까지, 상호는 한참 동안 노파의 숟가락찜질을 받아내야 했다.

* * *

“에휴…….”

상호는 한숨을 쉬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화장실은 이제 빤드르르하게 빛이 났다. 허공섭물로 솔질을 하고 내공으로 소독해서. 세탁기에서는 상호가 방금 넣은 세탁물들이 돌아가고 있었다.

밖으로 나와 보니 태화가 마루에 앉아서 동네 똥개와 노는 중이었다.

“니 이름은 인자부터 춘식이여.”

“크르릉…….”

“싫어? 그럼 땡칠이 해.”

“왈왈!”

개가 자세를 낮추며 이빨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상호는 눈을 부라리며 개를 노려보았다.

“낑……!”

살기를 정통으로 맞은 개는 몸을 움츠리고 꼬리를 흔들었다.

태화가 다가가자 또 적의를 드러내려 했지만, 상호가 살기를 한 번 더 쏘니 이제는 배까지 보여주며 필사적으로 애교를 부렸다.

‘짜식.’

상호는 살기를 거뒀다.

말 못하는 축생에게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지금의 태화는 절대로 다치면 안 되었다.

개의 배를 긁던 태화가 그를 돌아보았다.

“쌤. 우리 이제 여기 살아?”

“머무르는 거지. 또 어떻게 될지 모르고.”

상호의 시선이 큰방 쪽을 향했다.

지금 그는 내공과 청력으로 노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중이었다. 언제 태화를 협회에 신고할지 몰라서.

아직까지는 수상한 기색이 없다.

그는 태화의 빵모자를 고쳐 씌우며 물었다.

“이따가 바닷가 구경 갈까?”

“바다? 응. 좋지.”

“저녁 먹고 가자. 소화시킬 겸 해서.”

“응.”

둘은 마루에 나란히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 *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리주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못 잡는 게 말이 돼? 왜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야?”

“저기…… 소장님.”

컴퓨터를 들여다보던 직원이 리주를 돌아보았다.

“제보가 또 들어왔는데요. 빨간 뿔이 달린 여학생…….”

“누구랑 있대?”

“자기 또래 친구들이랑…….”

“그럼 아니잖아!”

콰앙

책상 내려치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이곳은 이태화를 잡기 위해 신설된 66부의 정보분석실. 각지에서의 제보, CCTV의 분석, 톨게이트 기록 등을 수집하고 분석하는 곳이었다.

컴퓨터를 보던 50여 명의 직원이 움찔하며 리주를 돌아보았다.

“빨간 뿔? 그건 하나도 안 중요해! 뿔은 용 융합체도 달려 있으니까! 찾아야 하는 건 남자야. 한쪽 눈에 상처가 있고, 다리를 절뚝이는 남자! 그 남자가 같이 다니는 여자애를 찾아야 하는 거라고!”

이미 언론에 뿌려 두었다. 이태화란 여자아이는 그런 남자와 함께 다니고 있을 거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뉴스에 얼굴이 나온 태화에게만 집중했고, 애꾸눈에 절름발이인 검사는 뒷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남자의 사진도 뉴스로 내보내고 싶었지만, 이미 저승부대 보호 프로그램 때문에 CCTV 기록이 싹 날아간 후였다.

그래서 예현여고에 해당 교사의 정보를 요청했더니, 이미 퇴사시켜서 제적을 때렸고 관련 자료는 싹 다 파기했다는, 듣는 사람 어이를 우주로 날려버리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또 도현에게 정부의 협조를 받아 동생의 신상을 알려달라 했더니, 그건 절대 안 된단다. 이유는 말해주지 않고.

리주의 눈이 뒤집어지려 했다.

“정정 보도 준비해. 여자애는 숨어 지내고 있을 거고, 그 남자를 찾아야 된다고. 다들 어떻게든 자극적인 이슈를 만들려고 애한테만 집중하는데…… 이대로는 추적에 혼선만 줄 뿐이야.”

“네.”

한 직원이 달려 나가 언론대책실로 향했다.

거기에도 또 수십 명의 사람이 있다. 또 다른 방에도 수십 명이 일하고 있고, 밖에서 흔적을 찾는 정령사도 수백 명.

지방까지 파견된 수색조도 수천 명.

협회가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데도 소녀 한 명, 사내 한 명을 찾지 못했다.

‘X급 헌터께선 도망도 잘 치시는군.’

리주는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이제 협회와 사회의 추적은 그 남자를 향하겠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더 해야지.’

그 생각과 동시에 리주의 발이 걸음을 떼었다. 그녀의 방으로 가기 위해서.

정확히는, 그녀의 책상 서랍에 들어있는 캠코더를 꺼내기 위해서.

235. 시간을 잊고

마당에 널린 빨래가 바람을 따라 나부꼈다.

그 모습을 큰방에 앉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살금살금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상호는 가만히 기다렸다.

“뭐해?”

태화가 그의 등을 덥석 끌어안았다.

8월 중순, 늦여름이지만 남쪽이라 공기가 더웠고, 그래서 태화는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맨살이 드러난 팔이 상호의 목에 착 감겨들었다.

“모하냐구우우~.”

“편지 써.”

“편지?”

“응.”

앉은뱅이 탁자 위에 놓인 편지지와 볼펜. 태화는 그 물건들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나도 쓸래.”

“나한테 말해. 적어 줄게.”

“천세희에게. 안녕 세희야? 나는 매일 밤 쌤의 노리개가 되어…….”

“비켜.”

“우씽.”

“좀 있다가 쓰게 해 줄게.”

상호는 태화의 뺨을 쭉 잡아당기고 다시 편지에 집중했다. 편지지 위에는 주소를 적어 둔 봉투가 놓여 있었다.

수신지는 나로의 회사.

발신지는 따로 적지 않았다.

‘답장은 못 받겠지만…… 어쩔 수 없지.’

그는 편지를 계속 써내려갔다.

* * *

나빛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선생님과 태화가 사라진 지 일주일 째. 개학을 한 지는 6일째. 선생님이 사라진 후로 수업은 덜 힘들어졌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몸을 뒤척이다 보니 세희 생각이 났다.

‘세희 방에 놀러 갈까…….’

세희는 유난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일주일 내내.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거나, 흠칫하며 놀라는 등. 수업을 받을 때도 넋이 나간 모습으로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좋아하는 선생님도, 친한 친구도 사라진 학교. 나빛과 지윤도 멀쩡하진 않았지만, 세희는 유독 그 정도가 심했다.

‘이따가 가 봐야겠다. ……응?’

띠로로롱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누구한테 온 전화일까. 나빛은 맹한 얼굴로 핸드폰을 꺼내다가, 곧 상호에게서 온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황급히 화면을 확인했다.

‘으잉……. 오빠네…….’

나빛은 통화를 연결하고 풀죽은 목소리를 내었다.

“응, 오빠.”

[잘 지내냐? 몸은 좀 어때?]

“그냥 그래……. 무슨 일이야?”

[이모가 너한테 편지 보내셨어.]

“이모?”

금시초문이었다. 나빛은 머리를 긁적이며 눈을 깜작였다.

“……우리 이모 있었어? 엄마 외동 아니야?”

[그동안 외국 나가 계셨어. 너는 모르겠지만.]

“그래……? 그 이모께서 편지를 보내셨다구?”

[응. 내 회사로 보내셔가지고, 지금 내가 들고 학교로 가고 있다. 좀 있다가 부르면 나와.]

“으응…….”

통화가 끊겼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갑자기 이모가 생기고 그 이모가 편지를 보냈다니.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지……?’

기다려보면 알게 될 것이다. 나빛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 * *

“자.”

나로가 편지를 건넸다.

나빛은 그 편지를 받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오빠도 받았어? 오빠한텐 뭐라고 하셨어?”

“나는 어릴 때 뵌 적이 있어서. 그냥 안부나 좀 물어보시더라.”

“으음……. 알았어. 근데 오빠.”

“응?”

“선생님한테 연락 온 거 없어……?”

나빛의 눈이 촉촉해졌다.

나로는 그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없어.”

“……그렇구나.”

나빛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알았어, 땡큐. 잘 가…….”

돌아서려는데 나로가 말을 걸었다.

“잠깐만, 나빛아. 여기가 2학년 기숙사지?”

“응? 응.”

“1학년 기숙사는 어디야?”

“저어기. 근데 그건 왜?”

“만날 사람이 있어서.”

나로는 나빛의 어깨를 두드렸다.

“기운 내. 상호는 괜찮을 거니까. 평범한 녀석이 아니잖아.”

“으응.”

“갈게. 잘 지내.”

“응…….”

요즘은 잘 지내기 힘들지만. 나빛은 멀어지는 나로에게 손을 흔들며 애써 웃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편지를 뜯었다.

‘이모는 어떤 사람일까……, 어?’

첫 문단을 읽은 나빛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빛아, 이모다. 오랜만이지? 물론 우리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네가 돌잡이를 하고 있었으니 기억은 못 하겠지만. 네가 내 곁에 있을 때는 꼭 내 손을 잡으려 했던 기억이 난다.

손.

나빛은 그 단어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선생님이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왜 이모인 척했을까. 누군가가 편지를 가로채는 것을 걱정한 모양이다.

‘으헤헤, 선생님이 나한테만 편지 보냈다. 헤헤, 헤헤헤…….’

입꼬리가 하늘로 승천하려 했다.

사실 나빛이 편지를 받게 된 것은 상호가 편지를 안전하게 보낼 방도가 나로의 편으로 보내는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지만, 머리가 꽃밭이 되어버린 나빛은 미처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다.

‘히히, 나 먼저 봐야지…….’

빨리 읽고 효은과 민정에게 가져가야겠다. 나빛은 그렇게 생각하며 편지를 계속 읽었다.

-오늘 새 집에 들어왔다. 산세가 아주 험한 곳이야. 차가 들어오질 못해서 짐을 옮길 때는 힘들었지만, 막상 들어와서 보니 경치가 좋아서 그런 고됨도 다 잊게 만든다.

절룩이는 다리로 산을 올랐으니 당연히 힘들 것이다. 나빛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선생님…….’

편지는 계속 이어졌다.

-아들도 여기 경치를 좋아하는지 오래 눌러살자더라. 물론 아들 병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더 머무를지 덜 머무를지가 결정되겠지만. 일단은 마음에 든 것 같아서 다행이다.

‘태화도 잘 지내고 있는 걸까.’

-나빛이 널 얼른 보고 싶지만, 아들 병이 갑자기 악화될까 봐 곁을 떠날 수가 없어. 만나는 건 훗날로 미뤄야겠다. 그래도 편지는 계속할게. 그때까지 잘 지내렴.

나빛은 그걸 보고 헤벌쭉 웃었다.

‘히힛……, 나한테,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나한테. 히히히…….’

세희도 아니고, 은율도 아니고, 지윤은 더더욱 아니고.

오직 그녀만이 담임의 총애를 듬뿍 받는.

‘수! 제! 자! 라구~. 우헤헤헤…….’

나빛은 폴짝거리며 효은과 민정이 있을 여교사 숙소로 달려갔다. 어깨와 콧대가 한껏 올라가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불어온 강풍이 나빛을 덮쳤다.

“꺅! ……어?”

강풍과 함께 나타난 사내.

교장실에서 봤던, 헌터 협회의 부협회장.

나빛은 반사적으로 편지를 구겨 입에 넣으려 했다.

“안 되지.”

눈 깜빡할 사이. 사내의 손에는 이미 편지가 들려 있었다.

“이익……!”

나빛이 성창을 만들어 공격했지만, 도현은 허공섭물만으로 성창을 으스러트리고 편지를 읽었다. 그런 그를 나빛이 온몸을 던져 막으려 했다.

“제 편지예요……!”

“궁금해서 꼭 봐야겠구나. 뭐길래 하 사장이 직접 갖다주고, 날 보자마자 먹으면서까지 숨기려 하는지.”

“달라구요! 소중한 편지란 말이에요!”

“분석 좀 하고. 암호일 수도 있으니까.”

“줘요! 줘요! 우아헝헝헝…….”

아무리 손을 뻗어도 헛수고. 나빛은 급기야 주저앉아서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빛이 번쩍이며 나빛의 옆에 민정이 나타났다.

효은도 함께.

“뭐야, 왜 울어.”

효은은 나빛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둘을 본 나빛은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이 아저씨가! 제 편지 막 뺏어가요! 제 편지인데……!”

“돌려줘.”

효은이 그렇게 말하며 도현을 째려보았지만, 도현은 고개를 저으며 편지를 둘에게 보여주었다.

“봐봐. 이거.”

“뭐.”

“상호 글씨 같지 않냐?”

“……모르겠는데.”

“난 그런 것 같다.”

편지는 도현의 양복 안주머니로 들어갔다.

“그런고로 이건 압수야. 분석이 끝나면 돌려줄게.”

효은은 혀를 찼다.

“오빠가 얠 울린 걸 알면…… 걔가 절대 가만두지 않을걸.”

“더한 짓도 하고 있는데 뭐.”

도현은 그 말을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결국 편지를 가져가 버렸다. 나빛은 코를 훌쩍이며 효은을 올려다보았다.

“어떡해요……? 저 편지는…….”

“알아. 걔가 보낸 거.”

“……아세요?”

“글씨가 똑같던데.”

효은은 눈살을 찌푸렸다.

“걔가 븅신이 아닌 이상 저기다 중요한 내용을 썼을 리가 없어. 저건 미끼일 거야. 아마도.”

나빛의 마음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미끼요?”

“응. 빈껍데기지. 협회의 눈을 피하기 위한.”

“빈껍데기…….”

나빛은 허공을 올려다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때 멀리에서 프로펠러 소리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민정쌤~. 나빛이 언니~.”

프로펠러 모자를 쓴 미래가 종이봉투를 흔들며 날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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