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4화 (244/501)

* * *

시내라고 하기엔 초라한 상가.

과거에는 읍에서 제일 번화한 구역이었겠지만, 지금은 사람 한 명 없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런 읍내의 입구로 한 미니버스가 들어서고 있었다.

미니버스는 어느 건물 앞, 정확히는 그 앞에 주차된 검은색 세단 뒤에 멈췄다.

벌컥……

운전석 문이 열리고 상호가 내려섰다.

상호는 세단에 가까이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기름은 말랐을 것이고 배터리는 방전됐을 것이다.

“미래야, 지윤아.”

“네.”

미래와 지윤이 차에서 내려 후다닥 달려왔다. 지윤의 손에는 주유소 직원을 재우고 훔쳐 온 기름통이 들려 있었다.

“기름 꽉 채우고, 시동 걸리는지까지만 확인해줘.”

“네. 맡겨두세요.”

미래가 기계 장갑을 끼고 세단의 보닛을 열었다.

뒤로 물러난 상호의 눈에 미니버스 안의 아이들이 들어왔다. 세희와 나빛이 태화의 손을 잡고 있었다.

태화는 멍하니 상호만 바라보는 중이었다.

‘……나빛이는 불안하게 하면 안 되는데.’

마음속이 복잡해졌다.

이제 차가 다 고쳐지면 바로 출발해야 한다. 당분간은 아이들을 만나지 못할 터.

아니, 당분간이 맞긴 할까. 그 기간이 얼마나 될지는 상호도 몰랐다. 일주일, 한 달, 어쩌면 그보다 더 길어질 수도 있었다.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이 될지도.

상호는 고민하다가 미니버스에 다가가 문을 열었다.

“세희야, 나빛아.”

둘의 눈이, 모두의 눈이 상호를 향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작별하는 거 아니야.”

상호는 단호한 목소리로 굳게 약속했다.

“금방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러니까 절대 울거나 마음고생 하지 마. 특히 나빛이. 알았지?”

“……네.”

나빛이 코를 훌쩍였다.

울지 말랬는데 벌써 울고 있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울지 말래도.”

“진짜…… 다시 볼 수 있는 거죠?”

“당연하지. 내가 누구…….”

나빛은 모른다. 그가 X급 헌터라는 것을.

상호는 말을 끊고 살짝 웃었다.

“믿고 기다리고 있어.”

“그럴게요…….”

나빛이 젖은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호의 눈이 세희를 향했다.

세희는 슬픈 표정이 아니었다. 낙담한 표정도 아니었다. 그저 정말로, 진심으로 상호를 믿는 듯이 의연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네겐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알아서 잘할 것이다.

그는 둘의 머리를 쓰다듬고 뒷줄에 앉은 미진을 바라보았다.

“애들 잘 부탁해요.”

미진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미 누나도. 내 걱정 하지 말고.”

설미도.

“교장선생님은 애들 잘 지켜주시고.”

해련도 고개를 끄덕였다.

“효은이랑 누나는…… 형 만나면, 아직 안 늦었으니까 도로 무르라고 해. 정정방송을 내보내든 뭘 하든.”

“그럴 것 같진 않네.”

민정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도 한번 마음먹으면 절대로 안 멈추니까…….”

“그럼 끝까지 가는 거지.”

상호는 태연자약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묫자리는 좋은 곳으로 정해져 있잖아.”

“너도 참…….”

민정은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말은 해 볼게. 효은이는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뇌가 있으면 얠 건드리진 않겠지.”

상호의 눈이 번득였다.

“그땐 진짜 다 같이 죽는 거야.”

“……그래.”

“야.”

효은이 혀를 찼다.

“너도 내 걱정 하지 말고, 애나 잘 지켜.”

상호는 효은을 바라보았다.

도현이 효은을 볼모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전우고, 둘끼리도 친하니까.

그리고.

‘형도 알고 있겠지.’

효은에게 위해를 가하면 상호가 어떻게 나올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고, 그렇기에 겁을 주고 협박할지언정 몸에는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효은은 지금 상호의 소중한 사람이었고, 그걸 도현이, 그리고 리주가 이용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없었다.

그렇지만 방법은 이것밖에 없으니.

“민정이 누나. 효은이 잘 지켜 줘.”

“으응.”

민정이 그와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눈빛에 결의가 담겨 있었다.

상호는 효은과, 설미와, 미진과. 그리고 아이들과 눈을 한 번씩 마주치고 차에서 물러났다.

미래와 지윤은 이제 기름을 넣고 있었다.

“태화야. 갈 준비하자.”

그가 부르자 태화가 차에서 내렸다. 마치 꿈을 꾸는 사람처럼 몽롱한 표정이었다. 넋이 반쯤 나간, 얼이 빠진 표정.

태화는 유령처럼 미끄러지듯 상호의 옆에 서서, 버스에 탄 아이들을 향해 중얼거렸다.

“……잘 있어.”

작별 인사.

상호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더 나은 인사말을 찾지 못했다.

그때 미래와 지윤이 상호를 돌아보았다.

“쌤예, 다 됐습니더.”

“세 통 꽉꽉 넣었어요.”

“잘했어.”

상호는 둘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너희도 나중에 보자.”

“예.”

지윤이 주먹을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담에 보입시더.”

“응.”

상호는 지윤의 주먹에 주먹을 가볍게 부딪쳤다.

지윤의 주먹이 이번엔 태화를 향했다.

“니도.”

“……응.”

태화의 주먹이 힘없이 부딪혔다.

“와 이리 맥아리가 없노. 팍팍 내질러야제.”

그렇게 핀잔을 주어도 태화는 멍한 눈으로 허공만 바라보았다. 결국 지윤은 상호에게 눈인사를 하고 미래와 함께 버스로 돌아갔다.

상호는 세단의 뒷문을 열었다.

“타.”

태화가 뒷좌석에 앉았다.

곧 미니버스에서도 해련이 운전석에 올랐다. 핸들을 잡은 해련이 상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강 선생, 갈게요.”

“예.”

“나중에 봐요.”

“예.”

곧 미니버스가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상호는 멀어지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울먹이는 표정으로 끝까지 그를 보려 하는 나빛과, 귀를 축 늘어뜨린 단비,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는 설미까지.

그 모두의 시야에 가만히 담겨 주었다.

“쌤.”

아래를 내려다보니, 태화도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나 학교 좋아하나 봐.”

“……학교 가고 싶어?”

“응.”

“금방 돌아갈 거야.”

그는 운전석 문을 열었다.

“벨트 안 매도 되니까 누워 있어. 창밖에 안 보이게. 그리고 핸드폰은 꺼두고 켜지 마.”

“핸드폰은 왜?”

“추적당할 수도 있어.”

그 말에 태화는 군말 없이 핸드폰을 껐다. 상호도 핸드폰을 꺼서 조수석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이로써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었다.

남은 것은 세상에게서 버려진 차 한 대.

시동을 걸어 보니 제법 상태가 좋았다.

‘연비가 좋은 녀석이었으면 좋겠네.’

멀고 험한 길을 함께해야 할 테니.

상호는 주변을 뒤적거리다가 선글라스를 발견했다.

‘안대보단 눈에 덜 띄겠지.’

그래서 안대를 벗고 선글라스를 꼈다.

“태화야.”

“응?”

“출발할까?”

“응.”

태화가 뒷좌석에 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만 있으면 항상 웃거나, 짜증을 내거나, 장난을 쳤는데. 지금의 태화는 중선과 함께 있을 때보다도 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감정과 표정을 잃어버린 듯이.

그 모습을 본 상호는 가슴 한켠이 욱신거렸다.

‘잘 될 거야. 잘 될 거야…….’

그는 그렇게 되뇌며 차를 몰아 읍내를 빠져나왔다.

231. 외롭지 않은 도망

밥은 어떻게 할지.

아니, 그 전에 물부터 어떻게 구할지.

목격자들이 있으니 옷도 갈아입어야 할 텐데, 그 옷은 또 어디서 가져올지.

상호는 산더미 같은 걱정을 품은 채로 태화에게 물었다.

“배고프지?”

뒷좌석에 누운 태화가 고개를 저었다.

“으응, 별로.”

“점심 안 먹었잖아.”

“괜찮아. 쌤 먹을 때 먹을래.”

점심을 어떻게 때울까. 상호의 시선이 창밖을 바쁘게 훑었다.

차가 달리는 곳은 지방의 좁은 도로. 보이는 것은 산과 들판뿐이고, 언뜻 보이는 마을들은 전부 버려진 곳이었다.

‘아무거나 먹일 수는 없고…….’

평소 같았으면 산짐승이든 물고기든 되는 대로 잡아서 먹였겠지만, 지금은 그러면 안 되었다. 탈이 나도 병원에 갈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버려진 마을의 음식도 함부로 먹을 수 없고, 물 또한 마찬가지.

‘사람 사는 곳에 한 번 들르긴 해야겠네.’

먹을거리도, 물도, 옷도 사야 하고.

또 못 씻으면 그것도 병이 생기니, 잠은 차에서 잔다 치더라도 씻을 곳은 따로 찾아야 했다.

‘하나씩 해결해야지, 뭐.’

일단은 밥부터.

상호는 차를 몰아 남쪽으로 향했다.

* * *

나이든 사람이 운영하는 시골 구멍가게의 특징. 가게 안이든, 가게 옆에 딸린 방이든, 항상 TV를 켜놓고 있다. 대부분은 뉴스를.

들어간 곳마다 그랬고, 결국은 조금 큰 도시의 편의점까지 떠내려오게 되었다.

“어서오세요.”

문을 열자 여자 알바생이 노곤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상호는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내공으로 CCTV의 전선을 슬쩍 끊었다. 안대를 벗고 선글라스를 썼지만, 나라에 절름발이 검사가 그리 많지는 않으니.

되도록이면 다리도 절룩이지 않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최대한 느리게 걸었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뇨, 좀 보고요.”

상호는 매대 사이를 걸었다. 여기서 살 것은 물, 그리고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 먹을 식량.

작은 편의점이었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일단 물부터.’

2리터들이 생수 여섯 개.

그리고 오늘 먹을 빵, 내일 먹을 과자. 되도록이면 상하지 않는 걸로. 늦여름이라도 낮에는 기온이 높으니까.

그렇게 물건을 고르는 와중에, 편의점 도시락이 눈에 띄었다.

돈가스가 든 도시락.

‘맛이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상호는 그 도시락을 챙겼다.

계산대에 물건을 올리자 알바생이 바코드를 찍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상호의 눈은 편의점 바깥을 흘끗거렸다.

그 모습이 이상했는지, 알바생이 바코드를 찍다 말고 그를 바라보았다.

“급한 일 있으세요?”

“예. 조금.”

“봉투 드릴까요?”

“예.”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알바생이 다시 바코드를 찍기 시작했다. 상호에겐 그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7만 8천 4백 원입니다.”

상호는 지갑에서 지폐를 꺼냈다.

카드는 쉽게 추적당할 테니, 오는 길에 현금을 인출해 둔 것이었다. 지폐를 내밀자 알바생이 당황하며 거스름돈을 세기 시작했다.

그 시간도 길었다.

봉투에 물건을 담는 시간마저도, 길었다.

‘다음부턴 거스름돈은 가지라고 해야겠구만.’

그는 거스름돈과 봉투를 받아들고 도시락을 가리켰다.

“이거 데워 먹는 거예요?”

“네. 그냥도 되고, 데워도 돼요.”

바빠도 밥은 따뜻하게 먹이고 싶었다. 상호는 지체 없이 전자레인지로 걸어갔다.

도시락을 데우는 시간도 길었다. 30초. 29초. 28초. 1초에 심장이 열 번은 뛰는 것 같았다.

마침내 시간이 다 되어 꺼내보니, 뜨끈한 도시락에 김이 서려 있었다.

‘냄새는 좋네.’

맛도 좋았으면 좋겠다. 상호는 도시락과 비닐봉투, 생수 묶음을 한 손에 들고 편의점을 나섰다.

그가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자 태화가 앞자리로 고개를 쏙 들이밀었다.

“어, 맛있는 냄새.”

“도시락 사 왔어.”

“도시락?”

도시락을 본 태화의 눈이 반짝였다.

“돈까스네.”

“맛있게 먹어.”

“……응.”

태화는 도시락을 받아들고 나무젓가락을 뜯었다.

뚜껑을 열자 음식 냄새가 차 안에 퍼졌다. 밥 냄새, 튀김 냄새, 김치 냄새. 별 생각이 없던 상호도 괜히 군침 돌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조수석에 놓은 생수병 묶음에서 하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켜고 다시 핸들을 잡았다.

“출발한다. 체하지 않게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

“쌤 밥은?”

“이따가 먹으면 되지. 좀 늦게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답하고 차를 빼려는데, 그의 입가에 무언가가 들이밀어졌다.

돈가스 한 조각.

“웅.”

“너 먹어, 임마. 양도 별로 없던데.”

“살 뺄 거야.”

“그게 뭔…….”

상호는 결국 돈가스를 받아먹었다.

냄새는 좋은데 맛은 생각보다 없었다.

“별로다.”

“그래? 난 맛있는데.”

“질기고 눅눅하네. 맛있을 줄 알고 사 왔는데……. 나중에 더 맛있는 거 사 줄게.”

“웅.”

태화는 다시 도시락을 먹었다. 밥이 줄어드는 속도를 보니 맛있다는 말은 빈말이 아닌 듯싶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상호는 대로를 향해 차를 몰며 생각에 잠겼다.

‘옷. 옷이 좀 있어야 하는데.’

갈아입을 옷도 옷이지만, 뿔을 가릴 게 있었으면 좋겠다. 그럴 만한 물건이 뭐가 있을까.

빵모자 정도면 가능할까. 상호는 태화의 뿔을 흘끗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좀 많이 커야겠네.’

백화점은 사람도 많고 주차장과도 거리가 머니. 도로변에 있는 가게를 찾을 수밖에 없겠다. 그는 옷가게를 찾아 차를 몰았다.

* * *

“빵모자 있어요?”

“네. 이런 베레모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뇨, 좀 더 버섯같이 생긴 건데. 챙도 있고, 위로 크고…….”

“아, 뉴스보이 캡이요. 잠시만요~.”

여자 점원이 모자를 하나 가져왔다.

챙이 달린, 빵이라기보다는 호박같이 생긴 모자. 상호는 그 모자를 받아들고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이게 제일 큰 거예요?”

“더 큰 거로 드릴까요? 근데 손님한테는 안 어울릴 수도…….”

“일단 제일 큰 걸로 줘 보세요.”

점원은 곧 더 큰 모자를 가져왔다.

상호는 그 모자도 받아들어 대충 크기를 가늠했다. 태화의 뿔을 다 가릴 수 있을지.

약간 튀어나오는 부분은 있겠지만,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았다.

“이걸로 할게요.”

“그러면…….”

점원은 상호가 옆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옷을 돌아보았다.

“이것도…… 다 결제해 드리면 되나요?”

“예.”

전부 원피스. 그리고 벨트 하나.

상호는 가게 밖을 흘끗하고 점원에게 물었다.

“속옷은 안 팔아요?”

“네? 아, 그…… 속옷이요?”

점원이 뺨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제가 지금 입은 것밖에……. 혹시 필요하시면…….”

“아니, 딸이 입어야 해서 그래요.”

“아……. 딸이 있으시구나…….”

점원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눈을 끔뻑였다.

‘옷을 너무 많이 샀나? 많이 팔려도 좋은 게 아닌가 보구나.’

그런 멍청한 착각을 하고 있는데, 점원이 창밖을 가리켰다.

“속옷은 안 팔구요……. 저기 길 건너에 가시면 속옷 전문 매장이 있으니까……. 거기서 한번 둘러보세요.”

상호는 그쪽을 한 번 돌아보고 점원에게 지폐를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거스름돈은 가지세요.”

“네? 안 돼요, 금방 드릴…….”

“바빠서요. 성업하세요.”

“안 되는데…….”

점원이 울상을 지었지만, 상호는 가볍게 무시하고 가게를 나섰다.

* * *

“……으음.”

여자 속옷가게 앞.

건달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가 간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분명 사긴 사야 하는데.’

쪽팔렸다.

하지만 전투에서는 쪽팔린 것, 더러운 것, 무서운 것을 따질 수 없다. 따져서는 안 된다.

상호는 굳게 마음을 먹고 유리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딸그랑……

“어서오세요~. 앗.”

종소리에 문가를 돌아본 점원들이 흠칫 놀랐다.

하지만 곧 영업용 미소, 아니 그보다 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상호를 향해 다가왔다.

“어떻게 찾아오셨나요?”

“……그게.”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여자 속옷, 헐벗은 마네킹. 어딜 봐도 민망한 광경뿐.

“딸아이…… 속옷을 사야 해서요.”

“딸아이요?”

점원들이 상호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따님 나이가…….”

“고등학교 2학년이요.”

“어…….”

점원들은 또 고개를 갸웃하다가도, 이내 씩 웃으며 상호의 팔을 은근슬쩍 잡아끌었다.

“따님이 바쁘신가 보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아, 그리고 따님 컵은요?”

“…….”

상호의 눈이 끔뻑였다.

‘B……였나? A인가? C는 아닐 텐데…….’

제자의 신체 사이즈를 어떻게 외우고 다니랴. 결국 그는 헛기침을 하며 점원들을 떼어냈다.

“자……잠깐 전화 좀 해볼게요.”

“아, 네. 그러세요.”

허둥지둥 문가로 향하는 상호의 뒤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따라붙었다.

가게를 나와 차로 다가가니 빵모자를 쓴 태화가 과자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상호는 차 문을 열고 몸을 낮춰 태화에게 속삭였다.

“태화야.”

“응?”

“너…….”

그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너…… 그…….”

태화가 눈을 깜작였다.

“웅. 말해.”

“그…….”

그냥 신체의 한 부분일 뿐.

옷을 사는 데 필요한 정보일 뿐이다.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마침내 물어야 할 것을 물었다.

“너…… 가슴 몇 컵이야?”

“꽉 찬 70B.”

“꽉?”

그럼 텅 빈 것도 있냐.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대충 그런갑다 하고 넘어갔다.

“팬티는?”

“90.”

“알았어……. 금방 올게.”

“쌤, 쌤.”

“응?”

상호는 문을 닫고 돌아서려다가 태화를 내려다보았다.

“왜?”

태화는 씩 웃었다.

“예쁜 걸로 사줘.”

“……됐어. 그냥 스포츠로 사올게. 그게 편한 거지?”

“음~. 뭐, 잘 때 입을 게 필요하긴 해.”

“알았어.”

그냥 여러 개 사야겠다. 안 맞으면 버리면 되고. 상호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차 문을 닫았다.

다시 가게를 향하는 걸음이 무겁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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