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모두가 침묵에 빠졌다.
식당의 모든 이들이 TV에 나온 소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빨간 뿔이 달린, 굽슬굽슬한 단발머리의 소녀.
“멍.”
오직 단비만이 본의 없는 텅 빈 목소리를 낼 뿐.
그러나 그도 잠시뿐, 소녀와 관련 없는 이들은 다시금 식사에 열중하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더러는 방금 본 것 같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했지만, 기억을 해내지는 못했다.
“이런…….”
민정은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해련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이 혼란스러워하며 상호를 돌아보았다.
“선생님, 저거…….”
“태화 아니에요?”
“언니 맞죠? 대체…….”
상호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못했다. 그저 멍한 눈으로 화면을 올려다보며 상황을 이해하려 애쓸 뿐.
하지만 텅 비어버린 머리가, 도저히 굴러가질 않았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그의 손이 꿈틀했다.
그때 가느다란 손이 그의 손 위에 얹혔다.
“선생님.”
초점 잃은 눈으로 옆을 돌아보니, 세희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톰한 입술 사이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가서 찾아올…….”
“쉿.”
해련이 세희의 입을 막았다.
“조용히 있어. 내가 갔다 올게.”
괜한 이목을 끌어서 들킬 수도 있고, 재수 없으면 세희까지 헌터에게 잡힐 수도 있으니. 그 판단이 옳을 터였다.
해련은 민정과 눈빛을 교환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쌤~.”
그들의 얼굴이 굳었다.
“쌤쌤쌤~. 나 제일 비싼 걸로 시켰…….”
깨방정을 떠는 목소리.
태화는 영수증에 달린 식권을 팔랑팔랑 흔들며, 싱글벙글 웃으며 달려오다가 움찔하고 걸음을 늦췄다. 주변의 시선이 몰려드는 게 느껴져서.
“……어라.”
식당의 모두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태화는 영문도 모른 채, 상호에게 달려가지도 못하고 제자리에 멀뚱히 서 있다가, 사람들의 시선이 TV와 자신을 왕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TV를 올려다보았다.
“어……?”
틀림없는 자신의 얼굴.
“……뭐야?”
왜 자신의 얼굴이 저기 나오고 있는지. 태화는 이해를 하지 못했다.
이제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핸드폰을 꺼내거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고개와 눈동자는 마네킹처럼 한 곳만을 향한 채였다.
상호의 솜털이 쭈뼛 솟았다.
‘……안 돼.’
막아야 한다.
그가 내공을 꺼내 모두를 눌러버리려는 순간, 바로 옆에서 마나의 폭발이 일어났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조차 느껴지지 않는 폭발이.
“어……?”
“윽…….”
폭발에 휩쓸린 이들은 기절하듯이 잠에 빠져들었다. 핸드폰으로 태화를 찍으려던 이들도, 태화를 잡기 위해 다가가던 이들도, 밥을 먹는 손님들과 주방에서 일하던 직원들도.
모두 손에 쥔 것을 놓치고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쓰러지지 않은 것은 상호의 일행뿐.
딸그랑……
어디선가 물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상호는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민정을 돌아보았다. 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공에 손을 든 채였다.
둘은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이윽고 민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떡하지?”
상호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아직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다시, 천천히.
상황을 정리했다.
‘협회가…… 형이.’
그의 선을 넘었다.
‘일단은…….’
그는 고개를 돌려 다시 태화를 보았다.
태화는 식권을 든 채로 멍하니 서 있었다.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일단은.’
상호는 아이들과 선생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차에 타. 선생님들도요.”
다들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호의 정체를 아는 두 아이, 세희와 지윤은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하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였지만, 다른 모든 학생들과 설미, 미진은 당황해서 허둥대기만 했다.
그리고 사실, 세희와 지윤도 당황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쌤예, 이게 대체…….”
“일단 선생님 말대로 하자.”
세희가 아이들을 식당 입구로 밀어붙였다.
설미와 미진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민정의 마법을 맞고 단체로 잠든 사람들을.
“상호야, 이건……? 이렇게 강한 마법은…….”
“대체 저게 무슨 소리예요? 선배는 왜 이렇게 침착해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예요?”
“나도 침착한 거 아니에요.”
상호는 딱 잘라 대답하고 해련을 흘끗했다. 그 눈빛을 읽은 해련이 설미와 미진을 데리고 식당을 나갔다.
남은 것은 상호, 민정, 효은. 그리고 태화.
상호가 다가가자 태화가 눈을 내리깔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 돈까스 못 먹어?”
“나중에 사줄게.”
상호는 태화의 어깨를 잡고 곁으로 끌어당겼다.
“지금부터 절대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
“……응.”
태화가 고개를 푹 숙이고 그에게 몸을 기댔다. 가슴에 닿는 빨간 뿔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상호의 시선이 효은과 민정을 향했다.
“형한테 연락 온 거 없지?”
그 말에 둘 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없어.”
“나도 없어. 근데 저게 무슨 소리야?”
효은이 눈살을 찌푸리며 태화를 턱짓했다.
“얘가 그놈 봉인을 더 오래 버틴다고?”
“그건 저년 상상이지.”
상호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TV를 노려보았다. 화면에는 다시 리주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어차피 다 이론일 뿐이야. 저년이 악마 봉인에 대해 아무리 잘 안다 해도. 그놈이 평범한 악마도 아니고…….”
“도현이 오빠는 이 일 알아?”
“알고 있어.”
“그럼 얘가 네 제자인 건 알아?”
“그것도 알고 있어.”
“그럼 그걸 알면서도 얘를 봉인에 쓰는 걸 묵인했다고?”
“이젠 묵인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려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방송에서 당당히 까발리지는…….”
그때 TV에서 다시금 리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이 방송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태화 양에게 한마디 하죠.]
태화가 고개를 들었다.
[태화 양이 오지 않으면 하루에 한 명씩 사람이 죽어요.]
화면 속의 리주가 태화를 내려다보았다.
[헌터라면 그 생명의 무게를 알고 있겠죠. 부디 올바른 판단을 내리길 빌어요. 지금 당장 오면 천 명을 살리는 셈이지만, 내일 오면 한 명을 죽이는 셈이란 걸 기억…….]
콰드득 퍼엉
식당에 있는 모든 TV가 일시에 우그러지더니, 깨진 몸체에서 불꽃이 튀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상호는 내공을 거두고 태화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듣지 마. 생각하지 마. 다 개소리야. 누구도 너한테 강요할 자격 없어.”
“…….”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본 상호는 태화를 억지로 잡아끌어 식당 입구로 향했다. 일단은 이 휴게소를 벗어나야 했다. 사진을 찍진 못했더라도 목격한 이들이 있으니.
그는 허공을 향해 눈을 번득였다.
‘싸우자는 건가.’
더 이상은 오해의 소지가 없다.
이제는 전투. 그와 협회간의 전투. 죽이려는 자에게서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한 전투.
상호는 그런 전투에는 이골이 난 인간이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상황을 전투로 인식하니 머릿속이 명료해졌다. 그는 뒤를 따르는 효은과 민정의 발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미 학교에 놈들이 와 있겠지.’
도현이 리주의 편에 확실히 붙었으니, 태화가 예현여고의 학생이란 것쯤은 리주의 귀에 들어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필시 학교에 뭔가 손을 써 놓았을 터.
‘당분간 아이들 수업은 못 하겠군.’
상호는 식당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230. 도망길에 오르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미진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상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는 아무도 없는 고속도로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금이 간 아스팔트. 넝쿨이 뒤덮인 차단벽. 녹슬어 떨어지기 직전인 표지판.
오래전 버려진, 동해 부근의 고속도로.
“선생님…….”
나빛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많이 무서운 듯했지만, 지금은 신경을 써줄 수 없다. 상호는 전방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미안, 길게 말해줄 시간이 없다. 묻고 싶은 게 많겠지만…… 지금은 참아.”
“그래서 어디로 가는 거냐구요.”
“차 주우러 갑니다.”
이 버스는 학교로 가야 하고, 그는 차가 없으면 도망을 치지 못한다.
즉 차를 새로 하나 구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차를 훔쳤다가는 훨씬 쉽게 추적을 당할 테니. 버려진 도시에서 쓸만한 차를 골라 갈아탈 수밖에 없었다.
상호는 조수석에 앉은 해련을 흘끗했다.
“버스 운전하실 수 있죠? 면허는 없어도.”
“응.”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얘들아.”
“네.”
아이들이 초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거짓으로라도 웃으며 달래주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당분간 선생님이 학교에 없을 거야.”
아이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너희는 미진 선생님 말 잘 듣고, 정상적으로 학교생활 해. 금방 해결하고 돌아갈 테니까.”
상호는 백미러로 은율과 눈을 마주쳤다.
“은율이. 미진 선생님 잘 도와주고.”
“……네.”
은율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상호의 시선이 세희와 지윤에게로 옮겨갔다.
“너희도 동생들 잘 챙기고.”
“네.”
“예.”
세희와 지윤도 고개를 끄덕였다.
곧 도시 쪽으로 빠지는 길이 나타났다. 다 부서진 가드레일 너머로 황량해진 시내가 언뜻 보였다.
상호는 그 방향으로 차를 틀었다.
* * *
“없다고요?”
“예.”
혁은 뒷짐을 진 채로 대답했다.
“단체로 놀러 갔나 봅니다.”
도현은 날카로운 눈으로 교정을 둘러보았다.
둘이 서 있는 곳은 교문 근처. 주변에는 도현이 데려온 부하들이 시립해 있었다.
“오늘?”
“아니요. 이틀 전에.”
“숨길 생각은 아니겠지요.”
“그럼요.”
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도현의 주머니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도현은 들고 있던 창을 어깨에 비스듬히 걸치고 핸드폰을 꺼냈다.
리주의 전화였다.
“뭐야.”
[찾은 것 같은데요.]
도현은 혁을 흘끔하고 몸을 돌렸다.
“어디서?”
[영동고속도로 휴게소에서요. 강원도로 갔나 봐요.]
“이틀 전에 갔다는데. 아마 돌아오는 길이겠지.”
[아, 그래요? 헛수고했네.]
핸드폰 너머에서 리주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오늘이 아니라 이틀 전에 갔으니, 이틀 전에 강원도로 간 차와 오늘 경기도로 오던 차를 찾으라고.
도현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물었다.
“공 소장.”
[네?]
“확실해?”
[백여 명이 동시에 한 곳에서 봤대요.]
“봤대요야?”
[그리고 동시에 잠들었대요. 백여 명이. 기절하듯이.]
“…….”
도현은 한 마법사를 떠올렸다.
리주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전우분 말고는 생각나는 사람이 없네요.]
“……그렇겠지.”
그냥 꾸벅꾸벅 졸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단번에,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백여 명을. 준비 없이 즉석에서.
그게 가능한 사람은 민정밖에 없었다.
“근데 차는 왜 찾는 거야?”
[네? 아아, 목격자들을 재웠다는 거는 추적을 의식했다는 뜻인데 왜 쫓느냐? 이미 도망쳤을 거다? 그 뜻이죠?]
“차를 바꾸든가 했겠지.”
[그건 저도 알죠, 물론.]
“그럼 왜?”
[학생들이랑 갔대요.]
리주의 웃음소리가 도현의 고막을 긁었다.
[학생들이랑 갔대요, 학생들이랑.]
“학생이 뭐.”
[유용하지 않겠어요?]
도현은 리주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깨달았다.
“……학생을 인질로 잡자고?”
그 말에 혁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도현은 지금 혁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핸드폰에 대고 내뱉듯이 말했다.
“안 돼.”
[왜요?]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리주가 웃었다.
[혹시 동생이 무서워요? 동생이 보복하는 게?]
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동생이 부협회장님보다 강한가요? 아니면 부협회장님의 가족을 건드릴까봐? 뭐 그런 이유라면 설득력이 있긴 하네요. 그럼 부협회장님 가족의 안전부터 확보한 후에 학생들을…….]
“아니.”
도현은 나지막이 답했다.
“더 큰 이유가 있어.”
[뭐, 학생들을 인질로 잡는 게 부도덕한 일이긴 하겠죠.]
“그런 게 아니야.”
도덕이나 양심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다.
“똑똑히 알아둬. 우리 목표는 그 여자애 하나야. 다른 사람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마.”
[그렇게 물러터져서야 어떻게 대의를 이루시렵니까아~.]
리주가 능청을 떨었다.
[뭐~. 그렇겠지요~. 영웅의 주변 사람은 특별하니까~.]
“쓸데없이 자극하지 마.”
[엑, 화났어요?]
“나 말고 상호.”
필요 이상으로 건드리면 안 된다. 아주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도현은 그 이유를, 상호의 주변인을 인질로 잡을 수 없는 이유를 리주에게 말해줄 수 없었다.
그의 입에서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어쨌든 그리 알고, 그 여자애나 찾아. 그 반 학생들한테는 신경 끄고.”
[예에, 뭐. 명령이시라면.]
“끊는다.”
도현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주변에 서 있는 부하들을 눈짓으로 물린 후, 방금 리주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곱씹었다.
‘휴게소…….’
그렇다면 상호와 태화를 제외한 인원들은 지금 학교로 오고 있을 터.
인질로 삼지는 않겠지만, 이야기는 나눠 봐야겠다. 추적에 필요한 단서를 얻을 수도 있으니.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겠군.’
그는 혁을 돌아보았다.
“류 이사장.”
“예.”
“차 한잔 합시다.”
혁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좀 오래 있을 수도 있는데.”
“상관없습니다.”
창을 든 사내와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별관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