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마─하─반─야─바─라─밀─다─.”
청량하긴커녕 경박한 목소리가 계곡을 울렸다.
“심경……. 엥, 그 다음이 모지?”
“조용히 해, 임마. 몬스터들 몰려올라.”
상호는 폭포를 맞는 태화에게 혀를 찼다.
면박을 맞은 태화는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더 큰 목소리로 경을 외기 시작했다. 모르는 뒷부분은 쏙 빼놓고.
“마하반야바라밀다~ 마하반야바라밀다~.”
“부처님도 화나서 달려오겠네.”
“마하반야바라밀다~!”
합장을 하자 태화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상호는 계곡의 평화를 지키는 것을 포기하고 물가를 둘러보았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놀고 있었다. 어제보단 한가로운 모습으로.
그중에 단비와 다혜가 바위 사이를 헤집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뭐 하고 있어?”
그가 다가가서 묻자 단비가 꼬리를 촐랑대며 손을 들어 올렸다.
“가재 잡았어요.”
자세히 보니 어제 그 녀석 같았다.
재수도 드럽게 없구나. 가재들도 헌터 가재가 있다면 괴수의 손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텐데.
상호는 집게에 강기를 두르고 달려드는 가재를 상상하며 쓰게 웃었다.
“조금 보다 놔줘.”
“멍.”
단비가 꼬리를 살랑였다.
그때 무언가가 상호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응?”
그는 옆을 돌아보았다가 움찔했다.
“다……혜야?”
“아으.”
다혜가 무언가를 우적우적 씹고 있었다.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뭘 먹고 있는 거지?’
와드득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아마도 가재. 혹은 가재[email protected]
상호는 가재의 명복을 빌며 다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배고파? 아침이 부족했어?”
“므앙.”
다혜가 그의 앞에 미꾸라지와 비슷한 물고기를 내밀었다. 너도 먹으라는 듯이.
소싯적에야 생으로 씹어먹기도 했지만, 지금은 딱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너 먹어.”
“아으.”
다혜는 물고기를 입에 넣고 대가리부터 씹어버렸다.
상호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다혜야, 너 입마개는?”
“느아…….”
다혜의 검지는 펜션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확히는 펜션 평상에 앉은 민정을.
그러자 민정이 상호에게 소리쳤다.
“아리한테 보호 마법 걸었어. 내 앞에선 입마개 안 해도 돼.”
“그래? 그럼 다행이고…….”
상호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돌아섰다.
“너무 막 먹지 마. 배탈 난다. 곧 점심도 먹을 거고…….”
“아으아으.”
뒤에서 다혜의 대답이 들렸다.
다시 물가를 둘러보니 물이 깊은 쪽에서 거센 물보라가 일고 있었다.
‘뭐지?’
자세히 보니 길쭉한 바나나보트가 물을 가르며 질주하고 있었다. 탑승자는 미래와 지윤.
“아싸! 달려달려달려!”
“아따, 딥따 빠르고마잉.”
그리고 그 물보라가 지나간 자리에는, 러버덕을 닮은 황금빛 오리배가 통통통 흘러가고 있었다.
너무 느려서 떠내려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탑승자는 나빛과 이서.
“꺄아~, 이서야~. 재밌지~.”
“……응.”
이서는 뚱한 표정으로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웃음을 삼키다가, 바위에 앉아 발을 담그고 있는 효은과 눈이 마주쳤다.
효은이 손을 까딱였다.
‘뭔가 또 혼내려는 분위기인데…….’
그렇잖아도 찔리는 일이 있다. 상호는 최대한 시선을 마주치지 않도록 눈동자를 굴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곁에 앉자 효은이 물었다.
“미진이랑 무슨 얘기 했냐?”
“그냥…….”
이미 말을 맞춰 두었다.
“일 때문에. 2학기에 학사일정 이야기 좀 했어.”
“그걸 그렇게 숨어서 해?”
“놀러 왔잖아. 애들한테 들려주기 좀 그래서.”
“……흐음.”
납득을 했을까. 효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호는 미진에 대한 말이 더 나오기 전에 화두를 돌렸다.
“너는 요즘 어떻게 되고 있냐? 학교 홍보대사 그거.”
“나? 나야 자세한 건 모르지. 그냥 사진 찍으면 찍고 대본 주면 읽고……. 듣기로는 지금 찍어 놨다가 내년 연초에 홍보할 때 쓸 거라는데.”
“돈은 많이 받았어?”
“니 연봉보단 많이 받았지.”
“많이 받았네.”
그는 효은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곁으로 끌어당겼다.
“밤에 애들이 귀찮게 안 했어? 이것저것 묻고 그랬을 것 같은데.”
“물었지.”
그것 때문에 잠을 설쳤다는 듯, 효은이 하품을 했다.
“너랑 언제 처음 뽀뽀했냐, 언제 처음 만났냐, 첫인상이 어땠냐…… 뭐 그런 거. 너한테 관심이 되게 많던데.”
“응?”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저승부대 같은 건 안 물어봤어?”
“그런 건 티비에서 다 말했으니까. 그리고 그 뭐지? 나……나물위키? 그거에 다 적혀 있대. 인터넷에.”
“뭐 그거야 그렇겠지.”
그나저나 첫키스에 첫인상이라. 둘 다 민망한 내용이다.
상호는 주변을 쓱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서 뭐라고 말해줬는데?”
효은이 피식 웃었다.
“만난 건 전쟁통. 첫인상은 개새끼. 첫키스는 성당.”
“다 말했네.”
“첫경험은 토끼.”
“……야!”
상호의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그걸 남들한테, 그것도 애들한테 말하다니.
정말 막 나가는 여자다.
“진짜 말했어?”
“응.”
“하…….”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효은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대체 기준이 뭐야? 몇 시간을 해줘야 토끼 다음이 되는 거야?”
“그건 몰라.”
“몰라?”
“모르지. 만족한 적이 없는데.”
“……만족한 적이 없다고?”
상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럼 그동안 혼자 착각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충격적인 진실에 평정심이 속절없이 무너져 갔다. 와르르. 우르르르.
그때 효은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니랑은 항상 더 하고 싶은데 어떡하라고.”
상호는 그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끔뻑였다.
“……좋다는 거지?”
“그걸 고민하냐?”
효은이 검지를 까딱였다.
“입술이나 가져와.”
이젠 토끼도 미더덕도 아니고 물건 취급이다. 상호는 뺨을 살짝 붉히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이 그들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애들이 보잖아.”
“뭐 어때.”
“쪽팔려…….”
“그럼 애들이 못 보게 하면 되지.”
“……응?”
상호의 눈앞에 계곡물이 닥쳐왔다. 효은이 그의 목을 끌어안고 물에 뛰어든 것이었다.
“……엥.”
첨벙
물소리가 귀를 가득 메웠다.
뽀글거리는 기포 사이로 효은이 보였다. 뻔뻔한 눈빛, 무심한 표정.
‘……진짜.’
막 나가는 여자다. 정말로.
그는 눈앞의 얼굴을 붙잡고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천천히, 그윽이.
효은은 몸을 빼지 않았다. 당연히.
그저 살며시 눈을 감을 뿐.
‘똑같네.’
그때와 똑같다. 얼굴에 케이크를 처박혔을 때.
처음과 같은 느낌으로, 상호는 입을 맞췄다.
227. 등골이 휜다
자갈밭 위에 가부좌를 튼 소녀들.
다들 하나같은 자세로 눈을 감고 있었다.
“옴~.”
한 명만 빼고.
“옴~. 옴~.”
“뭐하냐?”
“명상.”
태화가 미륵불처럼 오묘한 손모양을 만들었다.
“오옴~마니반메훔~.”
“장난치지 마. 애들 집중하고 있잖아.”
상호는 평상에 앉아 과일을 깎는 중이었다.
자갈밭에 앉은 아이들은 열한 명. 태화를 제외하면 전부 무예가. 강원도까지 온 김에 운기조식을 시키는 중이었다.
아르게스만큼 마나가 풍부하지는 않지만, 아직까지도 몬스터가 숱하게 죽어나가는 지역이니 내륙보다는 도움이 될 터였다.
“와서 과일 먹어.”
“다 먹어도 돼?”
“남겨, 임마.”
다른 아이들은 방에 들어가서 쉬거나 상호의 곁에 앉아 있었다. 옆에서 사과를 먹던 나빛이 상호를 돌아보았다.
“수녀님은 어디 가셨어요?”
“저녁 사러.”
어제 두 괴물들이 고기를 싹 먹어치워 버렸기에.
차는 펜션 관리소에서 빌렸다. 효은이 X급 헌터의 이름을 팔아서. 버스를 몰고 가기에는 여러모로 귀찮았기 때문에.
‘30인분이면 될까? 쟤들한텐 부족할지도…….’
걱정이 되었다. 어제 40인분이 날아갔는데 오늘도 그만큼 먹을지.
좀 더 사오라고 할 걸 그랬을까. 상호는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해련은 아이들의 주변을 유유자적하게 거닐고 있었고, 미진은 평상에 앉아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설미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설미 선생님?”
“응?”
“심심하세요?”
“아니.”
설미는 그냥 눈을 마주치기만 했다.
상호는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미진이 자신을 노려보는 것을 보고 움찔했다.
‘또 왜…….’
아침에 듣기로는 자기가 알아서 할 수 있다는 것 같더니. 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아니면 그냥 싫은 걸까.
그는 슬그머니 미진의 시선을 피해 나빛을 바라보았다.
“나빛아.”
“네?”
“아침에 왜 거실에서 자고 있었는지…… 기억나?”
“어어…….”
나빛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헤헤 웃으며 상호에게 사과를 내밀었다.
“선생님이 데려오신 거 아니에요?”
상호는 사과가 입에 박힌 채로 굳어 버렸다. 미진이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는 게 느껴졌다.
“……그럴 리가 없잖아.”
“없나요? 잘 모르겠어요. 헤헤…….”
나빛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대체 간밤에 어떤 일들이 있었던 걸까. 상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사과를 우물거렸다.
하늘은 알고 있을까.
아니, 천장에 막혀서 하늘도 못 봤을 것이다.
‘귀신한테라도 물어보고 싶네…….’
그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응?’
설미였다.
상호는 말없이 눈만 끔뻑였다. 설미가 입술에 검지를 붙이고 있어서.
곧 설미가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뭐 할 말이라도 있나.’
그는 평상에서 일어나 설미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아이들이 명상 중인 자갈밭을 지나 계곡물로 걸어갔다. 입은 옷은 수영복이 아니라 평상복이었다. 펑퍼짐하고, 부드러운 소재로 만든 원피스.
살짝 큰 샌들이 자갈 위를 끌리듯 지나갔다.
그렇게 모두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온 설미는, 샌들을 벗고 바위에 앉아 계곡물에 발을 담갔다.
“상호야.”
낮은 목소리.
상호는 그녀의 뒤통수를 보며 대답했다.
“네.”
“미진이랑 무슨 일 있었어?”
여자의 감일까.
아니, 사람이라면 알 수밖에 없나. 상호는 계면쩍어서 시선을 먼 산으로 향했다.
말을 해주기엔 너무 낯뜨거운 이야기였다.
“아뇨. 그냥 교육방식에 대해서 토론을 좀 하다가…….”
“싸웠어?”
“예에.”
“아닌 것 같은데.”
설미의 손이 바위 옆을 두드렸다.
“앉아 볼래?”
상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알고 있는 걸까. 밤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리가 들렸나……?’
도망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몸. 그는 설미의 옆에 앉아 계곡에 발을 담갔다.
무슨 이야기를 듣게 될지, 불안해서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
“상호야.”
“……네.”
“저번에 너랑 효은이랑 하는 거 봤다고 했잖아.”
설미의 손에 물이 솟아나더니 점차 모습을 갖췄다.
오로지 물로만 이루어진, 투명한 물고기.
“그게, 이 정령으로 본 거거든.”
“네.”
“어제도 정령들한테 보고 있으라고 시켰어.”
그 말에 상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봤어요?”
“아니, 아직 확인은 안 했어.”
설미는 몸을 살짝 굽혀 상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같이 볼까?”
상호는 한참을 망설였다.
만약 그 장면을 설미와 함께 보게 된다면, 바로 혀 깨물고 계곡물에 다이빙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물론 그랬다가는 다리에 있는 놈이 날뛰어 모두가 몰살당할 테니, 당연히 정말로 그러진 않겠지만.
마음은 어쨌든 그랬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네.”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설미는 손바닥 위에 뛰노는 물고기를 계곡물에 내려놓았다.
첨벙……
물고기는 물속으로 홀랑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발목에 느껴지는 물의 흐름으로, 물고기가 사라진 게 아니라 물 안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투명해서 보이지 않는 것뿐.
“봐.”
설미가 고개를 숙였다.
상호도 그녀를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수면에는 하늘과 구름과 둘의 그림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전 안 보이는데…….”
“이제 보일 거야.”
그 말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펜션의 거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 파문을 따라 일렁이긴 했지만 화질은 놀랍도록 선명했다.
수면 속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좀 나중으로 돌려야겠네.”
설미가 손끝으로 물을 휘저었다.
그러자 수면의 화면이 빨리감기를 하듯 빠르게 움직이더니, 곧 불이 꺼진 후의 거실을 비춰주었다.
상호의 손바닥에 진땀이 배어났다.
‘제발…… 제발…….’
꿈이었기를.
그게 무리한 바람이라면, 상대가 효은이기를. 그것도 안 된다면 차라리 이불 속이었기를. 설미가 정통으로 확인하는 일이 없게.
간절히 바랐지만, 그러면 그와 미진이 밤사이 같은 내용의 꿈을 꾼 게 되는 것이었다. 미진은 남자친구와 하는 줄 알았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될는지.
‘제발……!’
상호가 속으로 빌고 있을 때, 설미가 손을 멈췄다.
“아, 여긴가 보다.”
아까보다 화면이 확대되어 있었다.
이불에 누운 네 남녀. 순서대로 해련, 설미, 미진, 상호.
화면 속의 미진은 술탈이 난 듯 이마를 문지르다가, 데굴데굴 굴러서 상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안 돼……!’
상호는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확인은 해야 하고. 설미의 눈을 가릴 수도 없고.
두 눈 똑바로 뜨고 확인하는 것 외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끄아…….’
화면 속의 상호가 미진의 몸 위에 손을 걸쳤다.
‘아악……!’
화면 밖의 상호는 초조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과거의 자신에게 오만 쌍욕을 퍼부으며.
그런데 화면 속 상호가 팔을 거두고 몸을 뒤척였다.
‘어?’
그렇게 미진에게 등을 돌렸다.
예상과는 다른 전개에 상호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꿈인가? 꿈인가?’
미진과 그의 착각이었던 걸까.
시간이 지날수록 둘의 거리는 오히려 더 멀어졌다. 아마 앞으로도 둘이 가까워질 일은 없을 듯했다.
상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안했다! 안했어! 그럼 그렇지…….’
싱글벙글 웃는 그를 설미가 흘끗했다.
“오해가 풀렸어?”
“네. 고마워요. 누나 덕분에…….”
상호의 목소리가 점차 흐려졌다.
화면에 새로운 누군가가 잡혔다. 방의 문을 열고 비틀비틀 걸어 나온 연회색 머리카락의 소녀.
나빛.
“다 봤으면 이제 그만 볼까?”
“아뇨, 아뇨. 조금만 더…….”
상호는 손을 살짝 들어 설미를 제지했다.
화면 속 나빛은 싱크대 옆에 놓인 생수를 꼴깍꼴깍 마시더니, 다시 잠에 취한 듯 몸을 갸우뚱, 갸우뚱거리며 방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나빛의 걸음이 멈췄다.
나빛의 고개는 상호를 향하고 있었다.
‘……으음.’
상호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다. 다만 과정이 궁금한 것뿐.
나빛은 오뚜기처럼 고개를 흔들며 걸어와 상호의 곁에 몸을 누였다.
벙긋 웃는 미소를 보자 귓가에 어떤 소리가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헤헤헤……
‘아이고, 나빛아…….’
진땀을 흘리는 상호에게 설미가 말했다.
“선생님을 많이 좋아하나 보네.”
“…….”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화면 속에서는 이제 나빛이 상호에게 안겨들고 있었다. 아주 깊숙이, 품에 쏙 들어가도록.
상호는 화면 속의 자신이 나빛을 끌어안는 것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이 미친 새끼……!’
설마, 설마 그 꿈의 상대가.
하지만 다행히도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고, 소녀와 사내는 함께 잠에 빠져들었다. 둘이 꼭 붙은 채로.
더는 뒤척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상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미가 손을 흔들자 수면의 화상이 사라졌다. 발목을 간질이던 흐름도 함께.
“해결됐지?”
“네.”
“그럼 내 고민 좀 해결해줄 수 있어?”
“네?”
고개를 드니 설미의 동그란 눈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빌려줘.”
“네?”
밑도 끝도 없이 뭘 빌려달라는 걸까.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뭐를요?”
“너.”
설미가 나직이 속삭였다.
“효은이한테서, 너 빌리고 싶어.”
상호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어제 효은이 했던 말. 하고 싶으면 하루쯤은 빌려준다던.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진심이에요?”
“여자는 진심이 아니면 말 안 해.”
설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여자 말에는 항상 진심이 섞여있는 법이야. 아주 조금일지라도.”
“그럼…….”
상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은 얼마나 섞였는데요?”
“지금은…….”
설미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기웃했다.
“백 퍼센트. 이려나.”
“백…….”
퍼센트. 상호는 그 대답을 듣고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요.”
진심이라도 안 되는 게 있는 법이다.
“아무리 그래도…… 제가 그런 인간은 못 되어서.”
“그래?”
설미가 빙긋 웃었다.
“그럼 됐어. 한 번 생각해 줬으면. 그걸로 충분해.”
작은 발이 물장구를 두어 번 쳤다.
“경치 좋다. 그지?”
“네.”
“날씨도 좋구.”
“네.”
둘은 계곡에 발을 담근 채로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