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제 자.”
“네~.”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에게 아이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상호가 효은과 민정, 다혜를 데리고 방 밖으로 나가려 하는데, 등 뒤에서 나빛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녀님, 오늘 저희랑 자요~.”
“응? 나?”
“네.”
“음…….”
효은은 상호를 돌아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래. 그러자.”
“우왓! 진짜요?!”
미래가 눈을 반짝였다. 평소부터 X급 헌터에게 궁금한 게 많았던 모양이었다.
“저 뭐 물어봐도 돼요?! 몬스터랑 싸울 때 어떻게…….”
“일단 좀 눕자.”
효은이 손사래를 치며 이불에 누웠다.
편히 자기는 글렀을 것이다. 상호는 아이들의 관심이 쏠리는 대상이 새로 생긴 것에 감사하며 방문을 닫았다.
이제 거실에 남은 것은 상호, 민정, 다혜, 해련, 설미, 미진.
“저희도 이제 자죠. 내일 애들 아침 차려야 하니까……?”
그는 말하다 말고 눈을 끔뻑였다. 거실에 술상이 차려져 있어서.
거실에 있던 셋은 이미 코끝이 붉었다.
“아이고~. 우리 상호 왔네~.”
해련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옆방에서 애들이 노는 동안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니. 상호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저기……, 교장선생님?”
“으응?”
“아니 옆방에 애들이 있는데…….”
“애들만 노나? 어른도 놀아야지~.”
“지금 다혜도 있잖아요…….”
“괜찮어~. 다혜도 나이가 있는데~.”
해련은 기어코 상호를 붙잡아 술상으로 끌고 왔다.
“한잔해, 한잔해~. 민정이도 한잔 할란가~?”
“아니요, 저는 다혜 보고 있을게요.”
“므앙.”
민정과 다혜는 거실 한구석에 이불을 펴고 누웠다.
술상에는 이미 빈 소주병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눈앞이 아뜩해졌다.
“아니, 내일 어떻게 일어나려고…….”
“나는 괜찮어~.”
“교장선생님은 괜찮겠죠. 근데 둘은…….”
그 말에 미진이 눈썹을 치켰다.
“지거……지금, 나 무시헤여?”
“그게 아니라…….”
“술로 항……항 팡, 뜨까요? 누가 더 자, 작…… 먹나? 응?”
“이미 진 것 같은데요.”
“내 이름 막 부르지 마요, 니가 내 남친이새요? 팍씨…….”
“아니, 이미진이 아니라 이미 진 것 같다고…….”
저번보다 혀가 더 꼬였다. 상호는 대화를 포기하고 앉아서 술잔을 들었다.
“술병 줘요. 안 따라줄 거면.”
“내……내가 왜 따라요? 니가 따라 드새요.”
“그러니까 술병을 달라고!”
귓구멍도 꼬여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잔에 술을 부어 단숨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가져온 술을 다 마셔 버릴 작정으로.
이 여자들이 더는 마시지 못하도록.
‘몇 병이든 싹 마셔 버려야지, 염병…….’
* * *
“아니 씨X 내가 일을 못하고 싶어서 못하는 게 아니라니까.”
“그렇구나~.”
“할머니 말고요. 아니, 미진 씨. 내가 초등학교 이후로 컴퓨터를 잡아본 적이 없어서…….”
“상호야, 나 술…….”
“누나는 그만 좀 마셔요. 아니 환장하겠네. 내가 반 성적을 못 내는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그러는 거예요? 매……맨날 일 못한다 뭐라 그러고. 응? 왜 그러는 건데요?”
“그럼 나 업, 업시…… 일해보등가여. 월급 도동넘아.”
“그건…….”
상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아…… 미진 씨 싫어서 이런 말 하는 게 아니잔어요. 그죠?”
“나 남친 있다니까여?”
“아니 씨X랄…… 됐어요. 나중에 얘기해요. 대가리 안 굴러가니까…….”
“그니……까! 그렇게 멍청해가꼬 일을 모타잔아……여어.”
“선생은 일이 다가 아니라니까. 아이고…… 했던말 또하고 또하고. 됐어요, 됐어.”
“저바, 할말 업스니까능…….”
미진이 상호를 삿대질하다가 설미의 어깨에 축 늘어졌다.
시계는 어느새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슬슬 자지 않으면 내일 일정에 차질이 생길 터였다.
상호는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술상을 옆으로 밀었다.
“자죠, 이제.”
“으응…….”
설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미진을 바닥에 눕혔다.
그러고는 자기도 그 옆에 대충 누워 버렸다.
“상호 잘자…….”
“이불 깔고 자요.”
“잘자…….”
“……에휴.”
상호는 결국 내공으로 설미와 미진, 해련을 들어 이불에 눕혔다.
‘자다가 토하거나 지도를 그리진 않겠지?’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도로 이불에서 내려야 하나.
하지만 그도 피곤했던 터라, 고민을 대충 치워버리고 이불 끄트머리에 누웠다. 미진의 옆자리에.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상호는 술 냄새가 나는 숨을 토해내며 눈을 감았다.
* * *
한창 자고 있는데 누군가가 곁에 달라붙었다.
품속으로 거칠게 파고드는, 어리광과 애정, 혹은 애정과 짜증의 중간쯤에 있는 몸짓.
‘효은…… 아니면 민정이 누나구만.’
끌어안아서 모양새를 확인해 보니 약간 얇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효은일 터.
상호는 마음 놓고 여인을 깊숙이 품었다가 움찔했다.
‘……뭐야.’
여인의 손끝이 그의 몸을 훑고 있었다.
‘지금 하자고?’
얘가 미쳤나. 주변에 사람들이 있는데.
하지만 손길이 집요했고, 상호도 술과 잠 때문에 판단이 흐렸다. 지금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도 모를 지경이니.
그래서 결국.
‘빨리 하고 끝내야지…….’
그는 여인의 몸을 돌려 뒤에서 끌어안았다.
* * *
짹짹짹……
계곡에 흐르는 맑은 새소리.
늦여름의 매미 따위는 뚫지도 못한 유리창과 벽을, 너무도 가볍게 무시하고 들어와 귓가를 울렸다.
상호는 그 소리에 잠을 깨어 슬며시 눈을 떴다.
“……으음.”
간밤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효은이 품에 안겼던 일.
하다가 대충 끝내고 잠들어 버려서는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얘는 참, 놀러 와서까지 그걸 해야겠나…… .’
평소에도 섭섭잖게 잘 해주고 있는데. 왜 꼭 이런 데까지 와서 해달라고 안겨드는지.
그는 한숨을 쉬며 옆을 돌아보았다.
……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어?”
연회색 머리.
연회색 눈썹.
새하얀 얼굴.
“쿠울…….”
나빛이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226. 아무도 모르게
암살 시도일까.
죽일지어다 멸하리이다 하더니, 결국은 담임을 자살시키려는가. 상호는 멍하니 나빛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새근새근 평화롭게 잠든 얼굴이, 이런 와중에도 참 예뻤다.
‘……아니, 정신 차려야지.’
이번엔 진짜 큰일 날 수도 있다. 그는 일단 슬그머니 나빛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차분히 지난밤의 일을 되새겼다.
‘……기억이 안 나!’
큰일 났다. 얼굴에 진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래도 나빛이는 아닐 텐데…….’
상호는 바보처럼 헤벌쭉 웃고 있는 나빛을 내려다보았다.
밤에 품은 게 나빛이었다면 이렇게 멀쩡할 리가 없다. 분명히.
‘확실히 아닌 것 같네.’
그렇다면 용의자들은.
눈을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아직 자고 있었다. 다행히 토를 하거나 실례를 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윗몸을 일으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쐈었나? 쓰읍…….’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백에 하나, 만에 하나. 사격을 실시했고, 그게 효은도 민정도 아니라면, 진지하게 계곡물에 코 박고 죽는 것을 고려해봐야 할 듯했다.
대체 누구인지.
‘누나는…… 제자리에서 그대로 자고 있고.’
자리를 옮긴 사람은 없다. 효은도 보이지 않는다. 늘어난 사람은 나빛뿐.
상호는 머릿속으로 사건을 재구성했다.
‘일단 절대로 나빛이는 아니야.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의 옆에 누웠고.
그는 그 누군가를 효은으로 착각해 안았고.
그 누군가는 다시 어디론가 사라진 후, 나빛이 어떠한 연유로 여기 와서 누웠다.
그럼 그 누군가는 누구인가.
고민하는 와중에 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자는 동안에도 숙취로 머리를 싸쥔 여인.
가장 가까운 곳에 누운 여인.
“끄응…….”
미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본 상호의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설마.’
어쩌면 사격의 흔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상호가 미진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순간, 해련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 그래도 가슴을 졸이고 있던 상호는 화들짝 놀란 채로 굳어 버렸다.
“아이구~, 머리야…….”
해련이 기지개를 두어 번 켜더니 상호를 향해 씩 웃었다.
“강 선생? 일찍 일어났……?”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곧 연기처럼 사라졌다. 상호의 곁에 누운 나빛을 발견해서.
상호는 양 손바닥을 쫙 펼쳐 내보였다.
“아닙니다.”
“같이 잔 건 맞는 것 같은데?”
“제 의지가 아니에요.”
해련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나빛과 상호를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켜 조용히 손을 까딱였다.
“따라와 봐요.”
“아니 진짜로…….”
“어허.”
따라오라면 따라갈 수밖에. 상호는 한숨을 쉬며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리고 해련을 따라 거실 밖 정원으로 나왔다.
풀 내음을 머금고 올라오는 습한 공기. 발목에 스치는 아침 이슬. 나뭇잎 사이에 흐르는 안개와, 그 안개에 그려지는 햇살.
둘은 나란히 서서 계곡의 경치를 둘러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강 선생.”
“네.”
“학생들한테 손을 너무 대는 것 같은데.”
“그건 저도 알긴 하는데…….”
“고치기가 힘들어?”
“그렇게 말하니까 제가 완전 변태 같잖아요.”
대부분은 불가항력이다. 상호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나빛이는 제가 데려온 거 아니에요. 자기가 와서 잤나 봐요.”
“어제 하솔이도 막 만지던데.”
해련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 이야기였나. 상호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만진다고 그러면 이상하잖아요…….”
“다리도 만지고 어깨도 만지고 그러더라고.”
“에이, 같이 놀은 거죠.”
그 말에 해련이 상호에게 몸을 기울이며 웃었다. 어제 수박 속을 헤집을 때처럼.
“학생은 건드리지 마요.”
“안 건드렸다니까요…….”
“하솔……아니, 학생은 나보다……으흠, 우리보다 소중하니까. 선생의 본분을 잊지 말라고요. 알았죠?”
“……네.”
상호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그제서야 해련은 평소처럼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강 선생은 주변에 여자가 많잖아~. 아이들한테 너무 다가가지 말고. 정 외로우면 어른들을 건드리도록 해요.”
“어른들도 딱히 건드리고 싶진 않은데요…….”
“어머? 그럼 학생이 좋다고?”
“아니 애인이 버젓이 있는데…….”
상호는 그렇게 항변했지만, 해련은 그 말을 무시하고 거실로 들어가 버렸다.
“……에휴.”
홀로 남은 상호는 흐르는 계곡물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지난밤의 진실을 어떻게 파헤쳐야 하나.
아니, 그냥 파묻어 두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어떡하지…….’
어쨌든 애들 아침은 먹여야 하고.
그는 식사 준비를 위해 펜션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 * *
“으응…….”
옆 식탁에서 나빛이 눈을 비볐다.
“나 왜 거실에서 자고 있었지……?”
“니 머 몽유병 있나?”
“아닌데……. 으잉…….”
나빛은 밥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상호는 나빛에게서 시선을 떼고 효은과 미진의 눈치를 살폈다. 둘 다 특별한 기색은 없었다. 간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효은이 그의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뭐야. 왜.”
“아니, 그냥…… 너 혹시 방에서 나왔었어?”
“아니.”
효은이 눈을 끔뻑였다.
그런데 반찬을 향하던 미진의 손이 우뚝 멈췄다. 꼭 어떤 사실을 깨달은 듯이.
상호의 등에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아니야, 아닐 거야…….’
미진과 그의 시선이 맞닿았다.
상호는 그 눈동자 속에 혼란이 깃든 것을 보았다.
“……미진 씨.”
미진이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네.”
“밥 먹고 잠깐 이야기 좀 해요.”
“네.”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대답에 토를 달지 않는 것이.
상호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식사를 마쳤다. 그런 그를 향해 설미의 지긋한 눈빛이 달라붙었지만, 정신이 없던 상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설거지 하지 마요. 이따가 제가 할게요.”
그는 밥그릇과 식기를 들고 일어났다.
* * *
펜션에서 조금 떨어진 곳. 버스의 그늘.
“그래서.”
미진이 상호를 흘겨보았다.
“왜 부른 건데요.”
“그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밤사이에 혹시 그 짓을 했느냐고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상호는 고민하다가 넌지시 물었다.
“무슨 꿈 꿨어요?”
미진은 상호가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이미 아는 듯싶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지독한 한기를 품더니,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자친구인 줄 알았어요.”
“……나도요.”
둘 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동시에 입을 열었다.
“……비밀로.”
“비밀로 하죠.”
둘은 그렇게 밀약을 맺었다.